heroes Story achel

남방 대륙의 거대한 왕국 갈론의 동남쪽 끝, 국경을 따라가다 보면 끝을 알 수 없는 황혼의 사막에 닿게 된다.
황혼의 사막 초입 근처, 인간이 모여 살던 땅에는 오래전 '콘나흐트'라는 도시국가가 번영했다.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용맹한 전사들이 있었기에 오랫동안 자치권을 영위했던 콘나흐트는 거대한 침략국 갈론과의 전쟁으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황혼의 사막에 등장한 마족의 군대 때문에 골머리를 썩던 갈론은 완충지대인 콘나흐트의 통치를 너무도 쉽게 포기했다.
그렇게 슬럼화 되어버린 몰락한 옛 도시국가의 모든 것이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근육을 형상화한 갑옷 로리카, 호전성을 의미하는 날렵하고 예리한 창 하스타, 그리고 하스타와 한 쌍을 이루는 단단한 원형 방패 그랜드타지는 이미 망해버린 땅에서도 콘나흐트 전사들의 상징으로 전승되고 있었다.
그 단편적 예시가 바로 슬럼의 소년들이었다.
구시가지의 잔해물 사이사이로 위험천만하게 이어진 돌계단은 슬럼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하고 있었고 아직은 앳된 소년들이 그 계단을 연신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저마다 둥근 형상의 썩어가는 나무 방패와 긴 막대가 들려져 있어, 마치 멸망 전 갈론의 대병력과 대등하게 싸웠던 콘나흐트 전사들의 용맹한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소년들은 각자의 무리를 만들어 작은 덩치를 머릿수로 보완하기 위해 뭉쳤고, 이것은 마치 군대의 축소판으로 보였다.
떼로 몰려다니며 더 힘이 약한 무리를 짓밟아 그들이 모은 돈이나 식량을 약탈하며 뺏고 빼앗기는 영원의 굴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슬럼의 거주민에게 이것은 일상이었기에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제지하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어른들 역시 배운 거라곤 뺏고 빼앗기는 약육강식의 섭리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지옥과도 같은 슬럼은 그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해 질 무렵, 태양의 광명이 외면한 슬럼의 거리에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좁고 비틀어진 길은 낡고 허름한 벽과 흩어진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잔뜩 금 간 건물들은 붕괴 직전의 모습을 보였다.
어두운 골목길에는 음침한 분위기와 불규칙한 그늘이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모든 것을 가려냈다.
거리마다 허물어진 벽돌과 끈적한 물웅덩이, 온갖 쓰레기 더미들이 쌓여 있었고, 그 중엔 버려진 무기들도 아무렇지 않게 널브러져 있었다.
마약 중독자와 범죄자들, 고아와 노숙자들이 허름한 거리를 배회하며 컴컴한 그늘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였고 음침한 웃음소리와 무거운 발걸음이 울려 퍼졌다.
벽에는 암울한 그림과 각종 낙서가 흔들리는 인공의 빛에 장단을 맞추듯 깜빡거렸다.
골목의 구석,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소년은 자신보다 큰 키의 소년 패거리에게 빙 둘러싸여 있었다.
그 숨 막힐 것 같은 대치 상황은 흡사 한 마리 사자를 둘러싼 하이애나 무리처럼 보였다.
패거리들은 혼자인 붉은 머리 소년보다 숫자도 많고, 덩치도 컷지만,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붉은 머리 소년을 노리는 것은 가장 확실한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조금 전까지 패거리의 것이 될 뻔했던 빵이 들어있었기에 허탕을 치진 않을 것이다.
긴장감이 고조되던 그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싸움이 시작됐고, 서로를 죽일 듯 방패와 막대를 휘두르며 싸웠다.
붉은 머리 소년이 휘두른 방패에 패거리 중 하나가 머리를 얻어맞아 피가 터지며 쓰러졌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패거리는 막대 끝으로 붉은 머리 소년의 빈틈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상대적으로 약한 다리 안쪽을 가격당하자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넘어진 소년을 무참히 짓밟기 시작하는 패거리는 꿈틀거리는 모습에 신이 났는지 더 거세게 짓밟았고 본래의 용무였던 빵을 빼앗아 유유히 골목으로 사라졌다.
한참 누워서 거친 숨을 고르며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던 붉은 머리 소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들이 사라진 골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에 걸리는 무언가에 시선을 돌렸다.
패거리 중 방패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녀석을 그냥 버려두고 간 것이었다.
소년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쓰러진 녀석을 분이 풀릴 때까지 걷어찼지만 미동도 없었다.
기절했거나 죽었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달라지는 건 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고는 화가 좀 누그러진 소년은 주섬주섬 자신의 막대와 방패를 챙겨 들고는 미로 같은 슬럼의 골목길을 터덜터덜 걷기 시작한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폈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식을 가진, 자신보다 약한 누군가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들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정처 없이 헤매던 소년은 슬럼가의 동쪽 끝에 위치한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건물, '쉘터'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쉘터의 안에는 정갈하게 차려진 저녁 식탁과 그 앞에 미소 짓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과 식탁에 앉아 환담을 나누는 여성 사제가 보였다.
그녀의 모습은 구릿빛 피부의 소년에겐 낯선 이목구비의 이방인이었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옥과 낙원이 극명하게 나뉘는 모습에 갑자기 상대적 박탈감이 밀려왔다.
그때, 등 뒤에서 가래 끓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낄낄, 쉘터는 함부로 건드리는 거 아니야. 알지…? 저 이방인들은 신의 사자라고! 신의 물건을 탐하면 천벌을 내리지. 암…!"

노인은 쉘터의 이방인들을 함부로 건드리다간 큰 화를 입을 거란 참견 몇 마디를 건네고는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졌다.
멀고 먼 타라타에서 온 이방인들은 본인을 수행 사제라고 칭했지만, 그들의 교리는 법황청의 그것과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
이단이라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타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의 교리대로 조건 없는 선행을 베푸는 그들은, 가난과 폭력에 노출된 슬럼의 주민들에겐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슬럼의 주민들은 그들의 종교와 교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을지언정 그 이방인들이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따라서 쉘터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슬럼만의 불문율도 존재할 정도였다.
그것이 신의 은총이 닿지 않는 이 땅에 호의를 내민 이방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였다.

'흥, 그딴 거 알 게 뭐야…?'

소년 역시 불문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코끝을 찌르는 빵 냄새에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리곤 자세를 낮춰 천천히 쉘터의 울타리를 넘어가 예민한 후각으로 빵 냄새가 풍기는 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바구니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얼굴에서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던 그때, 갑자기 소년은 몸이 중력을 거스른 채, 천천히 떠오르는 걸 느꼈고 당황한 나머지 발버둥을 치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뭐야? 이거 놔!"

큰 키에 닳고 닳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소년의 뒷덜미를 낚아채 들어 올린 것이었다.
슬럼가에서 잔뼈가 굵은 소년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또래들에 비해서였지, 체급이 다른 어른에겐 전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전력을 다해 빠져나가려 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갑작스러운 소란을 눈치챘는지, 쉘터의 나무 문이 열리며 좀 전에 창밖에서 봤던 사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요?"
"아, 소피아. 빵을 훔치러 들어온 도둑고양이를 잡았지 뭡니까? 하하. 보세요. 새빨간 녀석입니다."
"……"

소년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한숨을 푹 쉬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알렉스 씨, 그 소년을 풀어주세요."
"하지만…."
"쉘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어서요."
"…알겠습니다."

소피아라고 불린 여사제의 차분하고 근엄한 말에 알렉스라는 큰 키의 시내는 소년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주었다.
신경질적으로 남자의 손을 뿌리치는 소년은 금방이라도 어둠 속으로 도망갈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 소년을 향해 소피아는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쉘터의 책임자인 소피아라고 해. 이분은 치안 담당자이신 알렉스 씨지. 네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니?"
"…아켈,"
"그래, 아켈. 혹시 배가 고팠니?"

소피아의 물음에 아켈은 반항적 태도로 콧방귀를 끼며 대답을 피했고, 소피아도 채근하지 않으며 품 안의 주머니에서 빵 한 조각을 꺼내어 내밀었다.

"자, 받아."

아켈은 소피아가 내민 빵을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낚아채 품 안에 숨겼다.
그저 공짜로 빵을 얻어내 마치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다.

"다쳤구나…. 혹시 치료가 필요하니?"

소피아의 물음에 아켈은 얼굴의 상처들을 무심하게 쓱쓱 문지르며 닦아내며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쉘터는 늘 열려 있단다. 언제든 찾아오렴."

소피아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쉘터 안으로 모습을 감췄고 아켈은 한참을 멀뚱히 서 있다가 자신의 은신처로 돌아왔다.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비친 깨진 벽 한편에는 아켈이 그린 이름 모를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갈라진 바닥.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채 방구석에 앉아 조금 전 받았던 빵을 한입 베어 문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는 왜 내게 빵을 준 거지…?' '
'설마 날 불쌍하게 여긴 건가?'
'…짜증나네.'

갑작스레 밀려드는 불쾌함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게 잠들기 전까지 아켈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켈은 갈라진 천장 틈새로 쏟아진 햇빛에 얼굴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불쾌함 때문에 밤잠을 설쳤지만,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막대와 방패를 챙겨 들고는 미로 같은 슬럼가를 배회한다.
이윽고 기다림 끝에 원하던 목표를 찾아낸 아켈은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달려들었다.

"부, 붉은 들개?!"

또래의 소년은 휘날리는 아켈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아연실색이 돼선 어두컴컴한 골목을 향해 도주했다.
두 소년은 널브러진 쓰레기 더미를 건너뛰고, 미로처럼 꼬여있는 길을 빠르게 헤치며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교묘하게 추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윽고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미끄러지듯 멈춰 선 소년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뒤를 돌아 황망한 표정으로 절규하듯 외쳤다.

"안돼! 이건 절대 못 줘!"

소년은 혹시라도 빼앗길 새라 방패로 자기의 가방을 가리며, 긴 막대로 금방이라도 찌를 것처럼 위협했다.
아켈이 찾는 물건, 소년의 가방에는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 알 수 없는, 아니 알 필요도 없는 빵이 들어있었다.
예민한 후각 덕분에 아켈은 가방 속 빵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아켈이 방패로 소년의 막대를 쳐내곤 목을 향해 막대 끝을 휘두르자, 소년은 무릎이 풀려 바닥에 풀썩 넘어졌다.
손쉽게 상대를 제압한 뒤, 방심한 아켈이 소년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가방으로 손을 뻗자, 악에 받친 소년은 방패로 아켈의 머리를 강타했다.
두개골과 나무판자가 부딪치는 소리가 골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켈은 일그러진 얼굴로 출혈이 생긴 머리의 상처를 무심하게 막대를 든 손등으로 쓱 훔쳐내고는 발로 소년을 걷어찼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저만치 구석으로 먼지를 뿜어내며 널브러진 소년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빵을 주고서라도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는 것을-.
결국, 소년이 애지중지하던 빵은 아켈의 차지가 되었다.
씩씩거리는 소년을 본체만체하던 아켈은 약속이라도 생각난 듯 금세 자리를 떴다.

-

아켈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쉘터의 앞, 하지만 쉘터로 바로 들어가지 않은 채로 머뭇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래도 쉘터는 약한 아이들이나 가는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못내 신경이 쓰였다.
한참 동안 인기척 없이 조용한 주변을 확인한 아켈은 천천히 쉘터의 정문을 지났다.
따스한 햇살이 쉘터를 비추는 날이었다.
삐뚤빼뚤한 잔디 위로 평행한 두 개의 빨랫줄에 한창 리넨을 널고 있던 소피아는 조용히 걸어오는 아켈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미소를 띠었다.
이 작은 낙원의 부드러운 바람이 마치 아켈을 반기는 듯 빨래들이 가볍게 흔들어 댔다.

"안녕, 아켈. 다시 와주었구나?"

아켈은 자신에게 미소로 다가오는 소피아가 영 껄끄러웠는지, 상대의 눈을 외면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아까 소년에게서 빼앗은 빵을 꺼내어 내밀었다.
어제 아켈에게 준 빵과는 모양도, 질감도 다른 완전히 다른 빵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응…? 설마, 나 주는 거야?"
"…이걸로 서로 빚은 없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아켈의 머리에서는 좀 전에 생긴 상처에서 피가 주륵하고 볼을 타고 흘렀다.

"…어제보다 상처가 늘었구나. 혹시 이 빵 때문에 싸운 거니…?"
"아, 이거…. 아침에 만났던 녀석이 반항이 심해서…."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아켈 때문에 일순간 소피아의 표정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럼 이 빵이 그 친구의 것이었니?"
"신경 쓸 것 없어. 이젠 내 거야. 내가 빼앗았거든."

슬럼의 소년, 아켈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다.
빼앗으면 소유자가 바뀐다.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건 슬럼에선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켈, 어제 네게 빵을 줬던 것은 배고픔 때문에 다른 누군가와 싸우지 않길 바라서였어."
"그래서?"
"이 빵을 난 받을 수가 없구나.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반응을 상상도 못 했던 아켈은 머릿속에서 잔뜩 화가 차올랐다.

"받기 싫으면 받지 마! 그깟 빵 한 조각 줬다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명령질이야? 당신이 뭐라도 돼?"
"……"

억하심정을 토해낸 아켈은 씩씩거리며 등을 돌려 쉘터 밖으로 달려갔다.
쉘터 앞으로 길게 뻗은 삼거리 골목을 배회하며 구석진 자리에 앉아, 좀 전에 문제가 됐던 빵을 꺼내 신경질적으로 몇 차례 베어 물어 입안에 가득 넣었다.
힘들게 얻은 빵을 돌려주라는 소피아의 말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기에 화는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그때, 한 무리의 소년들이 골목 양 끝을 에워싸며 아켈에게 다가왔다.
그중에는 아까 아켈에게 빵을 빼앗긴 소년도 포함되어 있었고 아켈도 낌새를 알아챈 듯 남은 빵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어쩌냐? 이미 다 먹어버렸는데?"

아켈이 입안의 빵을 질겅거리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하자, 분노에 찬 소년 무리는 막대를 치켜들어 아켈에게 휘둘렀다.
온 힘을 다해 휘두르는 막대에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뒤따랐고, 아켈은 방패로 얼굴을 가리며 필사적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수적으로 심하게 차이게 났다.
시작부터 승패가 결정 난 싸움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소년들은 아켈을 향해 분노를 담아 무차별 공격을 쏟아냈다.
방패로 미처 가리지 못한 부분에는 상처가 나서 피가 터져 나오고 울긋불긋 부어올랐지만, 매질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만두렴."

근엄한 여성의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이 아닌 쉘터의 여사제, 소피아였다.
소피아의 말에 막대를 휘둘러대던 소년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소년들은 화를 삭이지 못해 씩씩거렸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곁에는 커다란 체구의 사내, 알렉스가 동행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소년을 매질하는 거니?"
"이 녀석이 내 빵을 빼앗아 갔어요!"
"…자, 받으렴."

소피아는 가방에서 빵 하나를 꺼내어 소년에게 건넸다.
소년은 물끄러미 빵을 바라보고는 마음이 풀렸는지 일행과 함께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흠씬 두들겨 맞아 녹초가 되어버린 아켈은 몸을 일으키기도 못한 채로 소피아에게 따져 물었다.

"왜… 녀석들에게… 빵을 주는 거야?"
"… 힘으로 빼앗은 건 반드시 힘에 의해 빼앗기기 마련이란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야.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널 대신해 저들에게 빵을 돌려준 거야."

아켈은 소피아의 대답을 이해할 만큼 도덕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분노가 치밀어 맘에 없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지랖 떨기는… 퉤! 뭘 계속 쳐다보는 거야? 볼일 다 봤으면 그만 가!"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는 반항적인 아켈의 말에 소피아는 뒤에 서 있는 커다란 키의 사내, 알렉스를 향해 눈짓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자 알렉스는 웃는 얼굴로 반쯤 시체가 된 아켈을 어깨에 둘러메고 걸어온 길로 되돌아갔다.

"이거 놔!"

아켈은 격하게 발버둥을 쳤지만 매질 당한 성치 않은 몸이 여기저기 비명을 질러댔고 결국 정신을 잃고는 잠잠해졌다.
그렇게 세 사람은 슬럼가의 골목에서 천천히 모습을 감췄다.

길고 긴 꿈속에서 아켈은 낙원에 도착했다.
평화로운 풍경, 기분 좋은 바람, 흔들리는 풀꽃, 슬픔도 배고픔도 없는 곳.
지옥과도 같은 슬럼과는 차원이 다른 비현실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건 꿈이라고 자각할 무렵, 아켈은 가느다랗게 눈을 떠서 천정을 올려다봤다.
늘 바라보던 갈라진 천장이 없는 것에 화들짝 한 번 놀라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딱딱한 돌바닥이 아닌 침대라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일어났니? 붕대를 바꿔줄까?"

다른 침대에서 이불을 정리하던 소피아가 아켈 쪽을 바라보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묻자, 아켈은 불쾌했는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자는 척을 해봤다.
그때, 알렉스가 아켈이 뒤집어쓴 이불을 낚아채며 말했다.

"이제 다 나은 모양인데? 그럼, 일을 하러 가보자고, 친구!"

아켈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신기하게도 아주 오랜만에 숙면을 한 몸에서 상상하지 못한 개운함을 느꼈다.
매질을 당했던 작은 몸에는 이미 처치가 끝난 듯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앞장서는 알렉스를 따라 소피아가 방을 나서자, 아켈도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도착한 장소는 쉘터의 널찍한 목장, 거대한 물통에 물이 반절 이상 담겨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해보거라!"
"대체 이게 뭔데?"
"뭐긴 뭐야, 빨래지!"

알렉스는 힘찬 외침과 함께 오물이 묻어있는 이불 더미를 물통에 담갔다.
난생처음 보는 빨래라는 행위에 아켈은 적잖게 당황했지만, 소피아의 가르침에 따라 얼룩이 사라질 때까지 힘차게 문질렀다.

"짜증나게… 내가 왜 이따위 일을…."

궁시렁 거리는 입과는 다르게 어느덧 요령을 터득한 아켈은 처음보다 능숙하게 빨래를 척척 해냈다.
아켈은 난생처음으로 정체 모를 얼룩으로 뒤덮인 천들이 제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묘한 희열감을 경험했다.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를 역순으로 하는 것 같았다.
모두 채워진 도화지를 다시 하얗게 만드는 일, 그렇게 생각하며 집중하다 보니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모든 빨래를 마칠 수 있었다.

"훌륭하구나, 아켈. 이 많은 걸 벌써 해내다니… 어쩌면 넌 소질이 있는지도 몰라."

소피아는 웃으면서 아켈을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자, 그런 칭찬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이 영 어색했는지 대답은 정반대로 튀어 나갔다.

"뭐…이제 끝이지? 그럼 난 간다…?"

소피아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는 소년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손힘이 강해서라기보다는 분위기에 압도당했기에, 아켈은 감히 뿌리칠 수 없었다.
소피아는 곧장 아켈과 함께 목장으로 가서 양젖을 짜는 법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이따위 쉬운 일쯤이야, 하며 호기롭게 시작했던 아켈이었지만 반복해서 허리를 굽히다 보니 어느덧 땀이 등 줄기를 타고 줄줄 흘렀다.
반면 소피아는 능숙하게 일들을 척척 해치우고, 웃자란 양털까지 다듬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모은 양젖은 이곳 사람들이 마시거나 이웃 마을에 팔아. 양털도 마찬가지지. 그 돈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구한단다."

그것이 아켈이 난생처음으로 배운, 싸우지 않고도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방법이었다.
아켈은 홀린 듯 소피아의 가르침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목장의 일이 끝나자, 녹슨 농기구를 연마했고 쉘터 청소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대망의 저녁 준비.
결국,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모든 일과가 마무리됐다.
그리고 아켈은 어쩌다 보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과거, 창밖에서 바라보던 낙원 같은 장소인 저녁 식탁에 함께 앉아 있었다.
아켈은 오늘 겪었던 일들 때문인지 그저 낙원처럼 보였던 쉘터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깨끗해 보였던 이불, 거미줄 하나 없는 방, 식탁 위의 양젖과 빵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람의 손, 소피아가 이뤄낸 것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쉘터에서 지켜지는 보이지 않는 질서나 규율 등 모든 것은 그녀가 창조하고 보존하는 가치였다.
그렇게 넋 놓고 저녁 식탁을 바라보고 있던 아켈에게 소피아는 빵을 내밀었다.

"이건 온전한 네 것이란다. 네가 거룩한 노동을 통해 받은 합당한 보수야,"

싸우지 않고, 연민에 호소하지 않고, 오직 노력으로 받아 낸 최초의 빵.
어린 아켈은 그 빵이 먹음직스럽다 못해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켈의 옆에는 천진난만하게 음식을 먹는 어린애들이 있었고, 소피아는 그 모습을 미소로 바라봤다.
아켈은 그 자연스럽고 평온한 광경 속에서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왜 당신은 먹지 않는 거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난 별로 생각이 없거든."

아켈은 식탁 위의 음식들이 인원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눈치챘다.
그저 창밖에서 부럽게 바라보던 이곳 쉘터의 풍요는 순간의 착각이었던 셈이었다.
첫날, 자신에게 건넸던 빵이라던가, 그다음 날 소년 무리에게 변제한 빵 역시도 남는 걸 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배고프면 빼앗고, 운 나쁘면 다시 빼앗기고….
그런 일상을 살아오던 아켈에게 이런 경험들은 무척이나 낯선 것들이었다.
누군가의 끝 모를 호의, 그 뒤에 감춰진 숭고한 희생.
만약에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눈앞의 소피아와 같은 모습일 거란 경외심마저 들었다.
아켈은 빵을 반으로 찢어 절반은 소피아에게 건넸다.

"자. 받아."
"난 정말 괜찮아. 그건 네가 전부 먹었으면 좋겠어."

소피아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자 아켈은 도끼눈을 뜬 채로 말했다.

"… 난 싫어. 왜 당신이 굶어야 하는데? 가장 많이 노력했잖아."
"아켈…."

소피아는 잠시 아켈의 눈을 바라보고는 빵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소피아가 미소를 지으며 빵을 받아 들자, 안심된 아켈은 그제서야 빵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칠 무렵, 아켈은 마음속에 남아있던 의문을 털어놨다.

"왜… 나를 도운 거야? 모른 척할 수도 있었잖아."
"그게 신의 뜻이기 때문이야."

소피아의 아리송한 대답에 아켈은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나도 모른다는 뜻이야. 인간에겐 가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생기고는 하지. 우리의 마음속에 신께서 머물기 때문은 아닐까?"
"…그럼 당신의 신은 어째서 다른 녀석들에겐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 거지?"

슬럼에는 아켈 말고도 곤궁에 처한 소년들투성이였다.
그중 자신만이 소피아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건 아켈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건 다른 이가 아닌, 네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란다. 네 영혼이 피를 흘리고, 상처를 치유해 줄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알려주고 싶었어. 네가 겪어온 지옥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세상이 아닌, 더불어 사는 신의 세계를…."

소피아의 대답에 아켈은 문득 빵을 훔치기 위해 쉘터에 몰래 들어온 그날을 떠올렸다.
요사이 벌어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실 내 안의 신께서는 슬럼의 모든 이들을 돌보고 싶어 해. 하지만 마음이 그렇다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지금 쉘터의 형편에는 살짝 무리랄까…."

소피아의 고민 섞인 대답에 아켈은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아의 노력으로 겨우 유지 중인 쉘터라는 작은 낙원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소피아가 빵을 먹지 않았던 희생을 떠 올린 아켈은 그 상황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기에 어렵사리 속마음을 털어놨다.

"…내가 도울게."
"응…?"
"아까 보니까 할 일이 너무 많더라고…. 더 많이 일하면 당신의 바람대로 쉘터가 커지지 않을까?"

어린 소년의 짧은 생각이었지만 소피아는 대견하단 듯 아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아켈.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야. 다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이곳의 규칙을 따라야 해. 할 수 있겠니?"
"……"

아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켈의 쉘터 생활이 시작되었다.

-

그날 이후로 몇 년간 아켈은 쉘터에 머물며 온갖 잡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양을 돌보고, 양젖을 짜거나 털을 깎아 이웃 마을에 내다 파는 일, 물과 식료품을 공급하는 일, 쉘터를 보수하는 일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켈과 소피아의 노력 덕분에 쉘터는 점차 풍요로워지고,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게 되었다.
소피아는 쉘터가 나아진 만큼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지극히 보살폈다.
여느 날처럼 아켈은 이웃 마을에서 구한 식료품을 실은 수레를 끌고 그늘진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소년들이 우르르 골목에서 뛰어나와 대오를 맞춰 수레 앞을 가로막았다.
아켈은 그들을 노려보며 수레를 멈추자,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소년이 천천히 다가왔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붉은 들개? 또 혼자야?"
"…비켜,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수레에 든 건 뭐냐?"

무리의 대장이 막대로 수레에 덮힌 천을 걷어내려 하자, 아켈은 막대를 손으로 잡아 제지하며 말했다.
두 소년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쉘터의 물건이야. 함부로 건들지 마."
"쳇, 우리 눈에 띄지 마라. 겁쟁이 녀석."

소년은 아켈을 노려보고는 무리와 함께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확실히 예전 같았으면 말을 섞기도 전에 싸웠겠지만 아켈은 소피아의 규칙을 성실히 지켜내는 중이었다.
아켈은 소년 무리가 사라진 골목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생각을 떨치고 다시 수레를 끌어 쉘터로 향했다.
하지만 쉘터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늘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던 쉘터의 아이들이 오늘은 무슨 일인지 그림자도 비치질 않았다.
아켈은 수레를 목장 근처에 세워두고 쉘터 내부로 발을 디뎠을 때, 무언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사내들의 고함,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조심스레 내부를 살피자,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쉘터의 복도와 방을 바삐 오가고 있었다.

"뭐야… 당신들?"

아켈이 돌아온 걸 눈치챈 소피아는 서둘러 아켈을 자신의 등 뒤로 끌었다.

"갈론의 병사들이야."
"…왜 온 거야? 그보다 왜 쉘터를 부수는 걸 보고만 있는 거냐고! 알렉스는?"

알렉스는 저만치에서 일부 병사들에게 항의하고 있었지만 잘 먹혀들지 않는 모양인지 답답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켈도 화가 난 상태에서 한 말이었지만 아무리 알렉스라도 저 많은 병사를 상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쉘터에서 콘나흐트의 잔당에게 돈과 무기를 대고 있다는 익명의 투서를 받았다고…. 그 증거를 찾겠다며 수색 중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피아는 담담하게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했고, 아켈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수색을 빙자한 파괴행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병사들은 가구를 이리저리 밀치며 혹시 모를 비밀통로를 찾겠다며 온 공간을 헤집는 중이었다.

"그만…!"

아켈이 주먹을 꽉 쥔 채 눈앞의 병사를 향해 달려들 기세로 튀어나가자 소피아가 제지했다.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소피아의 기세에 아켈은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내가 할게.'

그녀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구의 명령이죠?"

소피아의 단호한 어조에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로웰 남작께서 직접 내린 명령이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케일라스 백작 부인께서 이 쉘터를 후원하고 계신 건 아시나요?"

아켈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귀족들을 열거하는 두 사람을 지켜봤다.
이런 말뿐인 논쟁으로 뭘 할 수 있겠냐며 자조적으로 지켜보던 그때, 기사 대장이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뭐…?"
"오늘의 일이 그분의 귀에 들어간다면 아무리 로웰 남작이라도 그냥 넘어가진 않겠죠?"
"크흠……"
"이쯤 해두시죠. 아무리 뒤져도, 쉘터를 불태워도, 나올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건 모두가 불행해지는 길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거물급 인사가 언급되자,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이어진 소피아의 경고에 연신 헛기침하며 잠시 고민하던 기사 대장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만, 철수한다!"

기사 대장의 외침에 병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우르르 쉘터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득 소피아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들을 쉘터 밖으로 몰아냈다는 걸 깨달은 아켈은 폭력으로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하려 했던 치기 어린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봤다.
만약 힘으로 기사 대장을 제압했더라면 능히 저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에 아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편, 쉘터를 쑥대밭으로 만든 병사들이 떠난 뒤, 소피아는 겁에 질린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신께서는 늘 우리의 마음속에 계신다는 걸 잊지 말렴. 마음만 굳건하다면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어."

울먹거리던 아이들은 소피아의 말에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켈은 그 모습을 흘깃 보다가 복잡해진 마음을 달래려, 조용히 쉘터 밖으로 나와 노을 진 언덕 위를 걷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황금빛 노을 아래로 황색으로 물든 슬럼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아켈은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는 나뭇가지로 마른 땅바닥 위에 여러 개의 선을 그으며, 순식간에 밑그림을 그려냈다.
점점 모습을 갖추는 노을이 지는 콘나흐트의 모습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딘지 모르게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부서지고 깨진 곳 없는, 아켈이 상상하는 낙원의 모습이었다.

"아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니?"

한참을 열중하던 아켈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자 뒤를 돌아보았다.

"옆에 앉아도 될까?"

소피아는 동의를 구하고 아켈의 옆에 앉았다.

"멋지구나, 콘나흐트를 그린 거니?"
"……"

아켈은 부끄러운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낙원 같구나. 그렇지?"
"…당신은 낙원을 본 적이 있어?"
"글쎄, 낙원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어. 어쩌면 신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이 땅이 낙원일지도 모르지."
"……"

아주 소피아다운 대답에 아켈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노을이 지는 슬럼가를 바라보자, 소피아도 아켈의 시선이 꽂힌 곳을 바라봤다.
한참 멍하니 슬럼의 어딘가를 바라보던 아켈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게…. 아까는….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 뻔했어."

아켈이 또다시 주먹이 나갈뻔한 일에 대해 자책하며 고개를 떨구자, 소피아는 아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난 알고 있어. 네가 모두를 지키려고 했다는 걸."
"하지만…."
"아켈, 내가 널 막은 건 그저 네가 다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란다."
"……"
"나 역시 싸운 거야. 널 지키고, 모두를 지키기 위해."
"…어렵네."

아켈은 소피아의 말이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노을이 지는 슬럼 골목 어귀에서 큰 소란이 들리자, 둘은 그곳에 시선이 꽂혔다.
패거리로 뭉친 두 무리의 충돌, 너무 멀어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경험으로 짐작건대 유혈이 낭자한 큰 싸움이란 것은 분명했다.
아켈은 침묵을 깨고 소피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생각해 본 적 있어? 저들은 왜 싸울까 하고?"
"…."

소피아는 슬픈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볼 뿐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굶게 되니까… 저긴 지옥이야."
"아켈…."
"…저들은 알까? 정작 저곳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본인들이란 걸 말이야."
"……"

아켈은 저주와 경멸을 담아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골목 어귀를 바라봤다.

"…뭐, 당신은 이런 지옥 같은 이야기가 별로 와닿지 않겠지?""

그 말에 소피아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나 역시 지옥에 살았단다. 타라타 법황청으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는 교단의 일원이었거든. 우리들의 교리는 법황청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했지. '전쟁과 멸절'이 아닌 '화합과 상생'만이 낙원의 문을 열 거라고 믿었거든. 법황청은 끊임없이 우리를 핍박하고 유린했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모진 고문으로 개종을 강요당해야만 했지. 결국, 우리는 타라타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어. 그들의 바람대로 와해됐지. 하지만 우리의 교리, 정신마저 와해된 것은 아니야. 분명 어딘가에서 우리의 종교가 전파되고 있을 거고, 새로운 신자가 생겨날 거라고 믿고 있어. 그래서 고향에서 이역만리의 먼 땅, 콘나흐트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단다. 난 알아. 비록 지옥 불 위를 걷고 있다 해도 나보다 더 아프고 슬픈 사람들을 구원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아켈은 소피아의 담담한 회고 속에서 잠시나마 지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분명 이국의 머나먼 곳에 정착하기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며 결코 순탄치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런 작은 낙원을 일궈냈다는 것에 깊은 존경심이 들었다.

"그런 지옥과도 같은 곳이라면 고향이 그립진 않겠네…"
"아니, 고통 속에서도 추억은 꽃피는 법이니까. 특히, 떠나기 전에 눈에 담았던 이그나흐 강의 노을은 정말 아름다웠어."

소피아는 머릿속에 강을 떠올렸는지 우수에 젖은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황혼의 사막과 맞닿아있는 콘나흐트에서 나고 자란 아켈은 소피아가 말한 강의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꿈에서 본 듯한 낙원을 상상할 뿐이었다.
소피아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돌아간다면 또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그건 정말 곤란할 것 같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같이 가서 혼쭐을 내줄게. 아까 소피아가 말했잖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건 괜찮다고."

애써 자연스러운 척 덤덤하게 말하는 아켈의 모습에 소피아는 기특하단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크흠, 난 그저 보고 싶을 뿐이야. 소피아가 말했던 그 강을…."

소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낙원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소피아와 언제나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 본심을 감추고 싶어서 이리저리 둘러대는 어설픈 아켈의 모습에 소피아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래, 아켈은 강하니까 날 지켜줘. 함께 타라타를 여행하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이그나흐 강'을 소개해 줄게."
"…."

그때, 소피아의 표정은 밝게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아켈은 그날의 약속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게 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날도 바쁜 하루의 일과가 돌아가고 있었다.
모두의 노력으로 쉘터의 규모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할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 된다.
아켈이 돌보는 양들은 곱절은 많아졌고, 증축한 쉘터의 공간만큼 더 많은 청소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아이들도 늘어난 만큼 소피아는 밤낮으로 정신없이 바빴기에 끼니를 거르는 것은 부지기수고 잠도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자신에 대한 무한한 혹사가 신의 가르침일까, 아켈은 묻고 싶었지만 이젠 소피아와 오붓하게 대화할 시간마저 아쉬울 정도로 서로가 바빠져 버렸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라는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침묵처럼 굳어버린 시간 속에 여느 날과 같이 흘러가던 그날, 소피아가 쓰러졌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소피아를 안아 들자 아켈은 흠칫 놀랐다.

'너무도 뜨겁고, 한없이 가볍다.'

아켈은 이윽고 큰 사달이 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웅성거리며 보고만 있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멀뚱멀뚱 보고만 있지 말고! 의사! 의사를 불러와!"

아켈의 공허한 외침, 이 지옥 같은 콘나흐트의 슬럼에 의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제대로 된 이웃 마을의 의사가 쉘터에 발걸음을 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병상 위의 소피아를 관찰하던 의사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풍토병이다. 상태를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앓아왔던 것 같구나. 너무 늦었어…. 손쓸 방도가 없다."

아켈은 그의 절망적인 말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살려내! 당신, 그러고도 의사야?"

의사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아켈 때문에 의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일자, 쉰 목소리의 소피아가 아켈을 향해 말했다.

"아켈, 그만두렴."
"…."

아켈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어지자, 의사는 재빨리 장비를 챙겨 방을 나섰다.

"폭력은 안 돼…. 우리의 규칙 잊은 건 아니지?"
"다 죽어가면서 규칙은 무슨….!"
"미안, 하지만 규칙은 규칙이니까…."

멋쩍게 미소 지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소피아의 모습에 아켈은 마음껏 화도 낼 수 없었다.

"큭, 제길…."

화를 못 이긴 아켈은 탁자를 내리쳤다.

"너무 슬퍼하지 마.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아니겠니?"
"…왜 이렇게까지 무리를 한 거야? 바보같이…."
"……"

평소 감정을 표현하지 않던 아켈의 울먹이는 채근에 소피아도 목이 멨는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호흡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이그나흐 강을 소개해 주기로 했는데…."
"……"

아켈은 굳은 표정으로 이를 꽉 물었다.
억지로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다.

"아켈, 아직 낙원을 찾고 있니…?"
"…모르겠어."
"너라면 찾을 수 있을 거야. 넌 따뜻한 존재니까…. "
"……"
"네 안의 신을 목소리를 따라가렴. 그게 널 낙원으로 인도할 거야. 비록 험난한 길이겠지만, 네 힘이라면 분명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낙원…"

소피아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쉬고 싶다고 말했다.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며 눈을 감은 채 미소 짓는 소피아의 표정에선 그 어떤 원망도, 미련도 없이 고요했다.
아직 소년에 불과했던 아켈은 신과 같던 존재의 소멸을 눈앞에서 경험하고 있었다.
그가 방을 나서서 들꽃을 따서 꽃다발을 만들어 왔을 때, 소피아는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신의 곁으로 떠난 뒤였다.

소피아의 장례는 콘나흐트 전통 방식에 따라 화장했다.
황망히 떠나보낸 그녀의 죽음 이후, 쉘터는 급속도로 무너졌다.
그녀의 보살핌 없이 살 수 없던 아이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쉘터를 떠나갔다.
마치 신이 떠난 뒤, 인간 세상에 빛이 사라졌다는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너무도 순식간의 일들이었다.
소피아의 거룩한 뜻을 이을 새로운 누군가도 없었으며, 어렵사리 지켜지던 쉘터의 규칙들은 깨져버렸다.
다시 폭력과 약탈이 쉘터에도 뿌리를 내려갔고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반복되는 이별 덕분에 이곳에는 그 누구도 남지 않을 거란 걸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알렉스가 아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켈, 이거 받아라. 작별 선물이다."
"이건…?"
"과거에 네 조상들의 입던 갑옷이라더군. 나한텐 너무 작아서 말이야. 넌 좀만 더 크면 입을 수 있을 거다."

알렉스는 어디서 났을지 모르는 과거 콘나흐트의 전사들이 입던 갑옷을 아켈에게 전했다.
새빨간 녹이 슬어있었지만, 본래의 빛깔이 남아있는 부분은 예사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 비록 녹슬었지만 잘 수선하면 원래의 빛깔로 돌아올 거야. 할 줄 알지?"

눈을 찡긋거리며 애써 어른의 여유를 표현하는 알렉스의 모습에 아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녹슨 농기구 수선이라면 전에도 몇 번 해봤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래, 씩씩하게 지내, 인연이 닿는다면 또 보자."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마지막 식구 알렉스도 떠났다.
아켈은 쓸쓸히 텅 빈 쉘터를 돌아봤다.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던, 쉘터에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오래전, 아켈은 혼자가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알아버렸다.
소중한 사람들의 곁에 있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라는 것을.
혼자일 때의 괴로움을 알아버렸다.
그러나 이제 그 괴로움을 함께 해줄 신은 곁에 없었다.
홀로 남겨진 아켈은 얼마 동안 쉘터에 남아 추억을 정리한 뒤,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떠났다.
그 후, 슬럼가에서 붉은 들개라고 불리던 사내를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

그로부터 몇 년 뒤, 늦여름 저녁.
석양은 황금빛으로 이그나흐 강 위를 물들이며 느린 속도로 서서히 진행했다.
강물은 석양의 반사로 반짝거렸고, 흡사 금빛 다이아몬드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석양은 이그나흐 강의 물결 위에 선명한 주황색과 빨간색 물감을 끊임없이 뿌려댔고, 강 주변의 나무와 풀은 그림자가 자욱해졌다.
강 건너편의 산들은 보랏빛 향연으로 어둠에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강 위를 스치며 향기로운 햇살을 실어 날랐고, 잔잔한 물소리와 함께 평화로운 분위기를 전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석양이 지는 강은 아름다움과 우아함으로 가득한 풍경을 만들었다.
장성한 청년, 아켈은 빈 배에 올라 한참 동안 노을이 물든 이그나흐강을 바라보다가 품속에서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작은 유리병을 꺼내었다.
나무 뚜껑을 뽑아 유리병에 들어있는 고운 뼛가루가 바람에 흩날리며 금빛으로 물든 강물에 빨려 들어갔다.

"이그나흐 강이라…. 약속은 지켰어, 소피아. 뭐… 다 지키진 못했지만… 너무 뭐라고 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이쪽 사정도 그렇게 좋진 못했거든."

아켈은 오랫동안 간직해 온 소피아와의 약속을 마침내 이뤄냈다는 여운에 젖은 채 넋두리를 늘어놨다.
돌이켜보면 오랜 여정 속에서 퇴색해 버린 것들이 존재했다.
또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아켈은 소중한 것을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인간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위선을 겪은 뒤로는 극도로 경계하게 됐고,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들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것이 선의였든 악의였든,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싸움은 필연처럼 따라붙었다.
만약 소피아가 곁에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흐르는 강물의 표면에 소피아의 얼굴을 그리던 아켈은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었다.

"…당신 말대로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오래전, 그녀의 말처럼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강을 뒤로한 채 돌아서려던 찰나에 등 뒤에서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배를 타시려고?"
"……"

사공의 말에 아켈은 한참 석양을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이방인이로군. 갈 곳은 정했소?"
"……"

아켈은 사공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모양이군! 마침 잘 됐소. 실력만 좋으면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는 곳이 있거든. 어떻소?"
"…갑시다."

낮게 깔리는 아켈의 목소리에 사공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노를 젓기 시작한다.
이그나흐 강의 황금빛 물살을 가로지르며 배는 천천히 콜헨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