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BEL

"왜 혼자 떠돌고 있니? 부모님은?"

나무라 마을 보안관실.
보안관 다네브는 낯선 소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탁자 맞은 편의 소녀는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고향은 어디니?"

질문을 바꿔도 여전히 침묵 뿐이었다.
다네브는 머쓱했다.

소녀에게 잘못은 없었다. 그저 혼자서 마을 어귀를 어슬렁거렸다는 것 뿐.
이 곳 나무라 마을은 무척이나 외진 마을이었다.
외부와의 교류라곤 영주와의 연락을 위한 수신사 정도 밖에 없었다.
낯선 여자아이가 떠도는 것은 당연히 드문 일이었고 다네브도 그저 보호 차원에서 데려왔을 뿐이었다.

"말하기 곤란하니? 그럼 이름이라도 말해주겠어?"
"... 넬피요."

드디어 소녀의 말문이 트이자 다네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말 안 듣는 늦둥이 여동생이라도 대하는 듯, 다네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넬피를 어르고 달랬다.

"그래, 넬피라고 하는구나. 나는 이 마을의 보안관 다네브라고 한단다. 오빠는 널 감옥에 가두려거나 하는 게 아니야. 겁먹지 마렴."
"오빠가 아닌 것 같은데요."

나이 서른, 다네브는 넬피의 말에 숨이 막혔다.
하기야 이제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은 결혼도 하고, 슬슬 아저씨라고 자조 섞인 농담을 해도 될 법한 나이였다.
다네브도 이런 외지에 부임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오빠는 아직 결혼도 안 했어. 아저씨가 아니..."
"알겠어요. 오빠라고 부르시길 원하는 것 같으니까 오빠라고 부를게요."

넬피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심쓰듯이 말했다.
다네브는 자기도 모르게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내가 오늘 면도를 했던가?
그렇게 늙어보이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 그래, 고맙구나. 어쨌거나 오빠는 널 그저 안전하게 도와주려는 것 뿐이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도와주도록 하마."
"그럼... 저 배고파요."

때 마침 넬피의 배가 구우하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다네브는 스스로 생각이 짧았구나 생각했다.
하기야 이렇게 혼자 떠도는 아이가 제대로 된 식사를 했을 리 없었다.
이야기를 하더라도 뭔가를 좀 먹이고 나서 했어야 했는데.
마침 때는 저녁시간이 가까워, 다네브는 넬피를 보안대의 식당으로 데려갔다.

"저 꼬마도 먹이는 거예요?"

급양을 담당하는 보안대원이 물었다.

"그래. 한동안 식사를 못한 것 같으니까 잔뜩 퍼줘."
"이런 게 애들 입맛에도 맞나 모르겠네."

급양당번은 낄낄거리며 음식을 큰 그릇에 담았다.
많은 운동량을 가진 보안대원들이 먹는 것이라 맛은 거칠지만 많은 열량을 가진 음식이었다.

"마음껏 먹어라. 부족하면 더 갖다 줄테니까."

다네브가 손수 넬피의 몫을 가져다 주었다.
넬피는 고개를 꾸벅 숙여 답하곤 이내 달려들듯 식사를 시작했다.
양 손에 포크를 하나씩 쥐고 한 입은 왼손으로, 또 한 입은 오른손으로 먹었다.
양이 좀 많은 건 아닌가 싶었는데도 작은 몸으로 용케 음식을 비워나가는 모습에, 다네브는 약간의 감탄과 흐뭇함을 느꼈다.

"그래, 그래. 어린애는 많이 먹어야지."
"저, 어린애 아닌데요."

소녀는 먹던 것을 멈추고 뾰루퉁하게 말했다.

"아아, 그랬니? 나는 네 키가 하도 작아서, 또 어린앤줄 알았지."
"아, 다 먹었다!"

빈정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넬피는 식사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식탁 가운데에 있던 냅킨을 낚아채더니,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꼼꼼히 닦았다.
그러나 입을 닦기가 무섭게 잊었다는 듯 소리쳤다.

"아, 생각해보니 디저트는 없어요?"
"... 이봐, 혹시 우리 간식도 있던가?"

다네브가 주변을 향해 물었으나 급양 담당자는 물을 걸 물으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없으면 별 수 없지, 뭐."

넬피가 들릴 듯 말듯 투덜거렸다.
둘은 다시 다네브의 사무실로 들어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왜 떠돌고 있는지는 굳이 묻진 않으마. 하지만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해.
당분간 이 마을에 머무는 게 어떻겠니? 내가 머물 곳을 찾아봐주마. 이 마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주후에 영주님과의 수신사가 오기로 되어있으니까, 그때 다른 곳으로 옮겨도 되고."
"난 혼자서도 괜찮은데."

넬피는 자꾸 대답인지 혼잣말인지 구분하기 힘든 대답을 했다. 다네브는 그냥 못들은 체하기로 했다.
그리곤 자신의 부관 엘레노어를 불렀다.
엘레노어는 보안대에 있는 유일한 여성으로, 스물 여섯의 독신이었다.

"엘레노어. 당분간 이 아이를 맡아줄 수 있겠나?"

엘레노어는 잠깐이었지만 기분이 상했다.
다네브의 결점은 지나치게 자상한 주제에 자신의 부관에겐 배려가 없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다네브가 싫지만은 않았고, 만일 거절하면 다네브는 다른 방법을 찾는데 시간을 낭비할 터였다.
그런 모습만은 보기가 싫었다.

"제가 거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말씀하신 건 아니시겠죠?
알겠습니다. 저희 집으로 데려가지요."

엘레노어의 대답에 다네브는 안심했다.

"다행이야. 부관 덕분에 늘 한시름 던다니까."
"일을 벌리는 게 보안관님 일이고, 수습하는 게 제 일이니까요. 그럼 오늘은 먼저 퇴근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엘레노어는 넬피에게 인사했다.

"안녕? 언니는 엘레노어라고 해. 만나서 반갑구나."
"전 넬피예요! 저도 반가워요, 언니."

당차게도 넬피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엘레노어는 넬피가 내민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오늘부터는 언니 집에서 당분간 머물자. 괜찮지?"
"저야 신세를 지는 입장인데요. 언니야말로 괜찮으시죠?"

마주 잡은 넬피의 손은 의외로 힘이 있고 거칠었다.
엘레노어는 관사 한 쪽에 놓여있는 짐을 보았다.

넬피가 메고 왔다는 가방으로, 높이만도 넬피의 턱까지 올 정도로 한짐 가득이었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도 메었다가는 허리가 휠 것만 같았다.
짙은 담갈색 가방은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보이고, 긴 막대기가 흰 천에 싸인 채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 이건 뭘 들고 다니는 거니? 다 지고 다닐 수가 있나?"
"어, 어! 그건 만지지 말아요! 내 거란 말이예요!"

소녀는 황급히 의자에서 내려와 큰 짐을 가로 막아섰다.

"그래도 이걸 너 혼자 짊어질 수는 없을 거 같은데. 언니가 도와줄게."
"아녜요! 저 혼자서 잘 들어요!"

넬피는 손사래를 치며 혹여나 빼앗길까 서둘러 가방을 등에 매었다.
순간 엘레노어는 이걸 들 수가 있단 말인가? 싶었다.
넬피가 짐을 둘러맨 모습은, 가방에 소녀가 딸려있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자, 언니, 언니가 앞장 서세요! 저는 언니 집이 어딘지 모르잖아요."

황급히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아직은 주변의 친절을 버거워하는 모양이구나하고 생각한 엘레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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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고, 보안관사에 손님이 찾아왔다.
마을 민회의 수장이고 이 비좁은 마을에서도 그나마 부유하게 산다고 칭해지는, 자핫이라는 사내였다.
자핫은 다네브의 사무실로 다짜고짜 비집고 들어가 물었다.

"보안관, 전에 그 아이는 어떻게 했나?"

다네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핫을 맞았다.
보안관 입장에서도 민회의 수장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영주에 의해 파견된 보안관은 어디까지나 치안을 담당했고, 마을의 주요 사안은 민회에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라면? 넬피 말씀이십니까?"

다네브는 자핫이 누구를 두고 말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넬피라는 이름이었던가? 이름은 알 바 아니네. 어떻게 했나?"
"엘레노어의 집에 맡겨 뒀습니다만..."
"뭐라고, 자네 부관의 집에?"

자핫은 탐탁치 않다는 투였다.

"네. 뭔가 문제라도 있을지요?"
"정체도 모를 외부인을 그냥 마을에 풀어두면 어떻게 하나?"
"외부인이라니요. 아직 어린 아이지 않습니까."
"자네, 포벨로 평원에 마족들이 진군했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나?"
"물론 들었습니다. 일전에 영주님의 수신사가 왔을 때 같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일을 그렇게 처리하나? 포벨로 평원 근처에 있던 두르카 도적 떼가 마족을 피해 남하했단 소문이야.
악질로 유명한 족속들이지. 그놈들이 남하를 했다면 어디로 했겠나? 용병단이 버티고 있는 콜헨으로?
아니면 기사단이 있는 로체스트로? 이쪽 부근으로 왔을 게 분명해. 그 아이가 끄나풀이 아니란 보장이 있나?"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아직 어린 아이인 걸요.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일이 생겼을 땐 무슨 수로?!"
"무슨 일이예요, 다네브 보안관님?"

때 마침 엘레노어가 보안관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옆에는 넬피가 엘레노어의 손을 잡고,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네브와 자핫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핫은 그 눈빛이 내심 부담스러웠던지 헛기침을 했다.
그는 잠깐 넬피와 다네브를 번갈아가며 노려보았다.

"나는 이만 가보겠네. 분명히 말했네!"

자핫은 그렇게 외치고 자리를 떠버렸다.
엘레노어는 자핫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금방 눈치챘다.
이 마을에서 그나마 부유했던 그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데 악착같았고, 무엇보다 의심도 많았다.

"저 아저씨가 뭐라고 했어요?"

이번엔 넬피가 물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란다."

다네브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흘리듯이 말했다.

"세상엔 가끔 어른의 책무란 걸 잊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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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났다.
영주로부터 수신사가 오기로 한 날이 되었으나 오지 않았다.
평화롭던 나무라 마을에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수신사의 생존자가 마을에 나타났다.
옷이 찢어지고 상처입은 그 남자는 신음하며 말했다.

"두르카 도적들이 이 마을을 노리고 있소."

그 날 곧바로 마을 광장에선 민회가 소집되었다.
민회자리에서 자핫이 소리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놈들을 막을 계획을 세워야 하오. 다네브 보안관!"

다네브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대의 경비를 강화하고, 당분간 민간 통제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주민 여러분은 가능한한 마을 밖으로의 외출을 삼가하고, 보안대의 지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자핫은 그 이야기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어떻게 할 거요?"
"누구 말씀입니까?"
"같은 말하게 할 거요? 외부에서 굴러들어온 저 아이 말이요. 넬피라던가, 뭐라고 한 아이 말이외다."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마을 밖은 위험합니다. 도적떼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혼자 내보내란 말씀입니까?"
"바로 그 아이가 도적 놈들 끄나풀일지 모르는데도? 하다 못해 가두어두기라도 해야하는 것 아니오?"

다네브와 자핫은 격렬하게 논쟁을 주고 받았다.

엘레노어는 넬피의 손을 잡고, 민회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로 서로의 언성이 높아지는 것이 들렸다.

"저 아저씨는 제가 싫은가 봐요."

넬피가 고개를 숙인 채 시무룩이 말하자, 엘레노어는 넬피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세상엔 저런 어른들만 있는 게 아니야. 오빠랑 언니가 있잖니?"

그 말에 넬피는 엘레노어를 올려다 보며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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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의 밤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에 불을 환하게 밝히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보안대는 단단히 무장을 한 채 경비를 섰다.
이틀 간 다네브는 급한 대로 목책을 강화하고 일반인들에게도 간소하나마 무장을 들려주었다.
전운이 감돌고 있는 가운데, 보안관 사무실에서 다네브는 최종 점검을 마쳤다.
곁에는 엘레노어와 넬피도 함께였다.

"무슨 일이예요?"
"나쁜 아저씨들이 올 거야."
"나쁜 아저씨요?"
"걱정할 거 없어. 나쁜 아저씨들은 저 아저씨랑 언니가 전부 혼내줄테니까."
"나는 왜 아저씨고 부관은 언니인가?"

다네브는 자신의 칼집을 허리에 결속시키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 걸 신경쓸 때인가요?"
"신경쓰이게 말했잖나."
"도적 떼가 코앞인데도."
"아, 올 테면 오라지. 여긴 내 첫 부임지야.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야지."
"흥, 보안관이 목숨을 건다든가, 그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은 더 불안할 걸요?"
"이거 실례했군."

두 사람 모두 평소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넬피는 그것이 연기라고 생각했다.

"넬피, 너는 여기에 있어. 여기가 제일 안전해. 언니랑 보안관 아저씨는 밖에서 널 지켜줄 거야."
"저도 뭔가 도와드리고 싶어요."

넬피의 말에 다네브는 크게 소리내서 웃었다. 그리곤 넬피의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도록 거세게 쓰다듬었다.

"하여간 기특한 소린 혼자 다 한다니까! 이번 일만 끝나면 보안관 자리는 너한테 넘겨줘야겠다."
"쓸데없는 소릴... 가시죠."

다네브와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보안관사의 문 닫히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훨씬 무겁게 들렸다.
다네브가 하늘을 보자 별이 빛나고 있었다. 마을은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잠시 후면 이 고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네브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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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피는 보안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어린 아이답지 않은 처연한 태도로, 밖의 상황에 촉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잠시 후, 멀리서 들어오는 함성으로 전투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자를 발판삼아 창 밖을 내다보자 과연 그러했다.

다네브와 휘하의 보안대는 열심히 응전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바람을 찢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많은 화살이 마을에 날아들었다.
개중에는 불화살도 끼어있어 삽시간에 불이 번졌다.
창과 난간이 부서지고, 사방에서 먼지가 일어나며 시계를 흐렸다.
싸움이 진행됨에 따라 요란하던 소리들은 점차 비명에 묻히기 시작했다.

다네브는 부하들이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더욱 격정적으로 싸웠다.
실력에 자신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두르카 도적들은 작은 마을의 저항이 거센데 내심 놀라워했다.
대부분은 약간만 겁을 줘도 제 풀에 지쳐버리고 마는데, 여기 보안관은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법일 뿐, 그들이 그린 큰 그림은 빗나가지 않고 있었다.
서너 차례의 파상 공격이 있고, 쉴 새 없이 쏟아부은 화살 세례에 마을의 방어진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이쯤이면 한 번쯤 구슬려 볼만했다.
그렇게 생각한 도적의 두목은 손을 들어 부하들을 제지하고, 앞으로 나가 소리쳤다.

"이봐, 보안관! 살아있나? 살아있으면 나와서 이야기하지."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야기할 것이 없다면 다시 사격하겠다."

협박조로 목소리가 변하자, 결국 다네브는 목책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두목은 흡족해하며 소리쳤다.

"잘 싸웠어, 잘 싸웠다. 그만큼 했으면 됐어. 우리 입장에서도 싸우기 싫어질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느꼈겠지? 더 이상 저항하면 목숨만 잃을 뿐이다. 항복하면 마을 사람 모두 살려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에 크게 동요했다.
항복이란 말이 이렇게 달콤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다들 처음에는 목숨을 버릴 각오였으나 그런 각오는 유지하기 쉽지 않은 법이었다.
그들은 원래 싸우는 것이 업도 아니었고 진짜 목숨을 걸어본 적도 없었다.
패색이 짙어지며 내면에서 밀려오는 두려움이 커지는 도중, 항복이란 말을 들으니 무언가 안심이 될 지경이었다.

다네브는 아직 더 항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안관이 되며 임무를 위해선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부하들까지 죽게하고 싶지는 않았다.
엘레노어는 아까 전의 사격에 허벅지를 부상당했다.
동맥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는 싸울 수도 없고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들을 데리고 전투를 강행하는 것은 개죽음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었다.

"항복합시다."

마을 주민 중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그 이후 침묵이 이어져 암묵적인 동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네브가 적들을 향해 외쳤다.

"... 도적패를 믿을 수가 있나?"
"우리도 여신을 섬기는 사람들인데, 그 정도는 믿어줄 수 있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고 도적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들이 생각해봐도 웃기는 이야기였다.
그 웃음은 다네브에게 내리는 일종의 비웃음이기도 했다.
다네브는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다네브는 두어번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입을 열었다.

"항..."
"잠깐만요!"

누군가 소리쳤다. 또랑또랑한 목소리.
모두의 시선은 어느 새 보안관사를 빠져나온 넬피에게 쏠려있었다.

"넬피? 나오지 마! 빨리 돌아가!"

다네브가 황급히 외쳤으나 넬피는 듣지 않고 성큼성큼 잘도 걸어나왔다.
등에는 자기가 지고 다니던 커다란 가방을 맨 상태였다.
멀리서 도적들이 보기엔 왠 가방이 걸어다니는가 싶은 모습이었다.
넬피가 다네브와 도적단 사이에까지 걸어오고 나서야 도적들은 어린 넬피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속여서 미안해요."
"속이다니? 무슨 소리야?"

다네브는 순간 자핫이 이야기한 것이 기억났다.
아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다네브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내 이름은 넬피가 아니예요. 그건 가짜 이름. 사정이 있어서 이름을 여러 개 쓰고 있거든요. 내 진짜 이름은 벨이예요."

다들 아무 말 없이 넬피, 아니 벨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도적들이고 주민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벨? 그래서 이 오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니?'

다네브는 맥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다. 온 몸에 기력이 없었다.
이제 벨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듣기만 하는 것이 고작일 것 같았다.

벨은 등에 지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도적대장이 물었다.

"뭐냐, 그건? 항복한다는 의미에서 바치는 거냐?"
"아뇨, 아니예요. 너무 기대마세요."

벨은 가방을 열고 안에 있던 짐을 하나하나 헤집으며 땅바닥에 뿌렸다.
오래된 옷가지며 물병, 나무 빗, 이 상황에서 쓰잘데 없는 것들만 마구 쏟아졌다.
벨은 가방을 뒤지면서 말했다.

"다네브 오빠는 나한테 어른의 책무를 다 하셨어요."
"... 어른의 책무?"

다네브는 지금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떤 상황인가 생각하며 되물었다.

"어린 아이를 지키는 것? 정도의 의미로 이야기했던 게 맞으려나.
전에 그 아저씨가 날 내쫓으라고 했을 때, '그러지 않겠다' 하시면서 한 말인데.
뭐, 전 대충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모르는 척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아이로군.'

다네브는 생각했다.
곧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렇게 이야기 해놓고서도 결국 마을을 통째로 넘겨줄 판이니까.

"... 그렇지 않아."
"이젠 내가 어른의 책무를 다할 때예요. 아, 이제 꺼내도 되겠다."

그렇게 말하며 벨은 드디어 가방에서 삐져나온 막대기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막대기에 감겨 있던 흰 천을 잡고 확 젖히자, 그 안에서 거대한 쇳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퇴?"
"아냐, 도끼야."

도적들은 아주 큰, 너무도 큰 벨의 도끼를 보곤 저게 무슨 장난감인가 생각했다.

"너는 아이잖아."

다네브가 중얼거리는 말에, 벨은 고개를 저었다.

"난 아이가 아니예요. 아이는 오빠 쪽이 아이지요.
오빠라고 불러달래서 오빠라고 불렀지만, 내가 볼 땐 아직 한참 애기인 걸."
"무슨 소릴하는 거야! 빨리 이리 돌아와!"

다네브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나머지 화가 났다.
어린 아이의 장난치곤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도 이런 상황에!

벨은 대답하지 않고, 자세를 낮춰 도끼를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용맹한 자세를 갖춘 그 모습에서 도적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이게 뭐하는 거야?"
"어린 애를 방패로 삼다니, 이 마을 보안관 님도 정말 대단한..."

그렇게 떠들어 대고 있을 때, 벨이 도끼를 휘둘렀다.

"히얏!"

용맹한 기합과 함께 벨은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두어 걸음을 깡깡거리면서, 벨은 도끼날이 이끄는대로 끌려갔다.
도적들의 웃음소리는 더 거세졌다.

"이건 뭐 갑자기 소꿉놀이 시간인가, 아니면 무서워서 정신을 놓았나? 꼬마는 저리 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두 손 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벨의 눈빛이 변했다.

"방심하지 마, 이 멍청이들아!"

벨이 도끼를 휘두르며 도적들에게 달려들었다. 도적들의 웃음이 얼굴에서 가시기도 전이었다.
벨의 일격에 서넛의 도적들은 그야말로 목이 달아나 버렸다.

"웃다가 죽다니 이거 완전 호상이네."

벨이 비웃으면서 도끼를 고쳐잡았다.

"이... 무슨!"

도적들은 기가 막혀서 외마디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벨은 자유자재로 도끼를 휘두르며 적진을 휩쓸었다.
그 모습에 나무라 마을 사람들은 전부 다 홀리기라도 한 듯, 멍청하게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오빠는 뭐해요! 나 혼자 싸우게 둘 거예요?!"

그 말에 다네브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모두, 돌격해라! 벨을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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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엘레노어 언니는?"

다음 날 새벽, 마을 입구에서 다네브는 벨을 배웅하고 있었다.
다른 마을 주민들은 전투로 인한 피로감에 모두들 쓰러져있었다.

"조금 전에 잠들었어. 괜찮아, 심한 부상은 아니었으니까. 독화살도 아니었고."
"그렇구나~. 다행이야. 내가 나선 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벨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 미소를 보자 다네브는 어젯밤 일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어린 아이와 어젯밤의 전사가 도무지 겹쳐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벨. 넌 우리 마을의 은인이야. 조금 더 머물다 가지 그러니."

다네브가 붙잡았지만 벨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니예요. 나중에 다시 한 번쯤 들릴 지도 모르지만, 완전히 머무는 건 좋지 않아요.
다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저만 봐도 비명을 지를 걸요? 괴물이다, 악마다, 라고.
무서워할 게 뻔하다구요. 특히 그 자핫이라는 아저씨는 후환이 두려워서 제 얼굴이나 보겠어요?"

벨은 겁에 질린 자핫의 얼굴을 상상하며 키득거렸다. 다네브가 생각해도 벨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으니까.
다네브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넌 마을을 구했어."
"오빠도 절 도와줬으니까, 서로 빚진 거야 없어요. 어흠, '어른의 책무'라...
조금 듣기엔 낯간지러웠지만, 나름 멋있었다구요. 저도 어른의 책무를 다했을 뿐이죠."
"넌 아직 애잖아."

다네브의 말에 벨은 고개를 저었다.

"전 말이죠~. 오빠보다 한참 손윗 누나라구요. 보통 애가 이렇게 큰 도끼를 휘두르겠어요?"

벨은 등에 지고 있는 가방을 툭치면서 너스래를 떨었다.

"어떻게 그런 힘이 났지?"

벨은 그 질문에 미간을 모으고 잠시 끙끙거렸다. 그러다간 결심했다는 듯 툭 말했다.

"뭐, 오빠니까 이야기할게요. 굳이 말하자면, 저주 때문이죠."
"저주?"
"... 아주 옛날이예요. 아빠 말을 안 듣고 엘프들을 찾으러 다닌 적이 있었어요.
... 세상의 운명을 걸고, 영웅의 길을 담담하게 걸어나갔다던 엘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러다간 어느 날 금지된 숲에 들어갔던 거예요.
우연히, 정말 우연이지만 거기서 엘프의 여왕님을 만났어요. 
... 사실 진짜 여왕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르지만.
그 분이 '시간이 멈춘 곳에 오면 안 된다'라고 입을 떼었을 땐 갑자기 무서워져서 곧장 도망쳐 나와버렸거든요.
그 이후로 제 시간은 멎어버린 거예요. 더 이상 크지도 늙지도 않아요.
혼자 살아남으려면 별 수 있나요? 뭐라도 익혀야지. 그래서 아버지가 남긴 도끼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제 아버진 나무꾼이었거든요."

술술 쏟아지는 이야기에 다네브는 생각했다.
이건 거짓말일까?
알 수가 없었다.
넬피, 아니 벨 이 아이의 말은 어디서부터 진짜고 어디서부터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런 다네브를 남기고, 벨은 마을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잘 있어요, 오빠! 나중에 언니가 나으면 다시 만나요!"

다네브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래...! 고맙다. 다시 돌아오는 거야!"
"언니랑 결혼해요! 그리고 아저씨가 되세요!"

벨은 그렇게 소리치고 아무 말도 듣지 않은 채 달아나듯 뛰어갔다.
다네브는 무언가 허전한 마음과 함께 벨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자, 이젠 어디로 갈까?"

벨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혼자서 다닌 시간이 길어 혼잣말은 익숙했다.
특히나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헤어지고 나면 한동안은 혼잣말을 더 많이 하곤 했다.

"... 그 아저씨가 뭐라고 그랬었는데. 용병단이 있는 마을이... 콜헨이랬던가?"

벨은 가까운 마을에 있다던 용병단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나무라 마을에서의 일은 벨에게도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가던 그녀는 자신의 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자신에게도 무엇인가 책무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아. 오빠한테 콜헨 가는 길을 좀 물어보고 올 걸."

벨은 후회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서 길을 묻는 것은 왠지 부끄러웠다.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되었든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였다.

"괜찮아, 뭐.... 나한테야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즐기면서 가자구."

그렇게 벨은 콜헨을 찾아떠났다.

글 : 아크툴 / 그림 :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