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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대륙을 세로로 길게 양분하는 산맥의 중턱, 이런 척박한 산중에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이 작은 마을은 비록 풍요롭진 않았지만, 배곯거나 춥지 않았고 각자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마을의 앞에는 길게 뻗은 산길 옆으로 키 큰 풀들이 자라있었고, 그곳을 지나 너른 언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언덕에는 마을 아이들이 노닐고 있었다.
금색과 푸른색 머리칼이 섞인 눈에 띄는 외모를 한 소녀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활기차게 뛰노는 아이들과는 달리, 소녀는 풀밭에 앉아 석양이 물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의 집마다 솟아있는 굴뚝은 저녁 식탁의 메뉴를 뽐내고 있었고, 아이들은 하나둘씩 부모님들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사라졌다.
그중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면서 소녀는 생각했다.

'얼마나 포근할까?'

소녀에겐 부모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주 어릴 적 행방불명이 되어 기억도 채 남아있지 않았고, 홀로 소녀를 돌보던 아버지는 불과 몇 년 전, 마족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약자를 지키는 것은 힘을 가진 자의 책무란다. 난 비록 부족한 힘이지만 마을 사람 모두를 지키기로 맹세했지. 언젠가 네가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울며 가지 말라고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던 소녀를 뒤로한 채, 문을 나서던 아버지의 마지막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했던 그땐 원망도 했었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네 아버지는 정의로운 영웅이었단다.'
'이젠 그에게 우리가 은혜를 갚을 차례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렴. 우리가 널 보살필 거란다.'

마을의 어른들은 혼자 남겨진 소녀를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그것은 마을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정의로운 영웅'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다.
소녀는 그런 아버지가 세상 누구보다 자랑스러웠다.
정의란 모두에게 이렇듯 진한 감동을 남기는 중요한 가치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아버지는 정의로운 영웅이었기에 밤하늘의 별이 되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얼마 전, 새로운 별을 찾았다며 한창 들떠있던 소녀는 그 별이 아버지의 별이 아닐까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붉은 노을이 사라지고 흑청색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들이 모습을 드러낼 무렵, 소녀는 두 귀를 의심했다.

'뿌우-. 뿌우-.'

정적을 깨는 나팔 소리는 다름 아닌 마족의 침입을 알리는 경보였다.
불과 몇 년 전 들었던 이 나팔 소리를 소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전사한 날이었기에 이 나팔 소리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막을 때리는 듯한 나팔 소리가 계속되자 소녀는 어지러운 듯 휘청였다.
그에 더해 어릴 적부터 앓아온 빈혈로 인해 몸을 가누기가 더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인 만큼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붙잡으며 몸을 일으켜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도착한 마을은 이미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마을의 자경대원들은 사람의 두세 배의 몸집에 두꺼운 갑옷을 두른 고블린과 상대하며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수많은 인파가 뒤엉켜 피난을 가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거대한 고블린이 휘두른 대검에 너덧 명의 사람들이 휩쓸리며 듣기 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소녀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고는 마족이 없는 어둠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마족의 목표가 됐기에, 차라리 이편이 좋을 것이라는 생존본능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의 발길은 어느 외딴 오두막 앞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거대한 몸집의 고블린이 소녀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충혈된 눈과 마주하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두 발은 마치 땅의 보이지 않는 손이 붙잡은 거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포에 질린 몸에선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 동화 속 영웅…. 아니, 그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고블린은 흉측한 얼굴을 까딱거리며 소녀에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거칠게 내뿜는 기분 나쁜 숨결이 점점 거세지는 만큼 죽음도 가까워지는 듯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아버지의 별이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미동도 없이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고블린은 손만 뻗으면 소녀에게 닿을 거리까지 와버렸다.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어 소녀를 내려치려던 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하늘의 별이라고 생각했던 빛무리가 점점 커지며 가까워지더니, 이내 고블린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의 몸에 닿은 빛무리는 굉음과 함께 연쇄적으로 폭발했고, 곧이어 가래가 끓는듯한 절규와 함께 매캐한 연기를 내며 쓰러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늘에 아버지의 별을 올려다봤지만 미동도 없이 그대로였다.
다시 고개를 내려 앞을 보자 어느새 소녀의 앞에 어떤 중년 여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블린을 쓰러뜨린 사람이 바로 그녀였던 걸까?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여성의 짙은 푸른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녀는 마법사들이 쓸법한 커다란 챙이 달린 잿빛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고, 손 위로는 구슬 형태의 부유체가 자전하며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동화책에서 읽었던 영웅이 책을 뚫고 나온 것만 같은 착각에 소녀는 한참을 넋 놓고 바라만 봤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현실이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신비한 분위기의 영웅 덕분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온몸에 흐르는 전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정의로운 영웅과의 조우에 자신의 맥박 소리가 귀에 들릴 만큼 심장이 들썩이며 뛰고 있었다.
그런 엄청난 존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녀를 마주 보며 말을 건넸다.

"다행이로구나. 시간을 맞출 수 있었어."

무사한 자신을 보며 안도하는 정의로운 영웅은 대체 어디의 누구일까?
소녀는 영웅의 정체가 궁금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내 이름은 루치아. 마법사지. 사람들은 날 '새벽의 마녀'라고 부른단다."

새벽의 마녀라는 소개에 놀란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입을 틀어막았다.
새벽마다 모든 별을 훔친다는 괴담의 주인공, 새벽의 마녀.
특히, 별을 좋아하는 소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에게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그런 마녀의 실체가 알고 보니 이런 엄청난 영웅이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소녀에게 루치아라는 여성이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아이야?"

너무도 많은 일이 한꺼번에 뒤얽힌 탓인지 머릿속이 도통 정리되질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전쟁의 민낯을 경험했던 소녀는 눈앞에 낯선 이의 곁이 세상 그 어느 장소보다 안전할 거라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겼다.
커다란 모자에 가려 그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입가의 희미한 미소는 분명 자상하고 따스한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잡은 그녀의 손은 마치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던 엄마의 손처럼, 어느 봄날의 바람처럼 따뜻했다.

"내 이름은 체른이에요."

깊은 숲에는 루치아의 은신처가 존재했다.
작은 오두막의 내부엔 책들이 가득했고, 여러 마법 용품들이 놓인 선반 아래 벽난로에서는 따뜻한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체른은 그곳에서 루치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새로운 일상을 그려 나가고 있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루치아가 정해준 몇 가지 규칙만을 잘 지킨다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첫째, 자신의 허락 없이 숲 밖으로 나가선 안 될 것.'
'둘째, 낯선 이를 경계할 것.'
'셋째, 오두막 안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말 것.'

규칙은 간단했으며, 지키기에 전혀 부담되지 않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체른은 루치아를 영웅이라 생각했기에 그녀로부터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마녀 루치아는 그런 소녀의 마음을 모르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말들로 대답을 회피하곤 했다.
그날도 체른은 루치아가 영웅이라는 확인하고 싶었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루치아는 뭐랄까…? 아, 하늘에서 내려온 영웅 같았어요. 엄청나게 강하고, 정의로운. "

벌써 수개월이 지난 일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소녀의 머릿속에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네가 착각하는 모양이로구나. 난 네가 생각하는 만큼 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지. 영웅은 더더욱 아니고."
"그럴 리가요? 루치아는 날 구했잖아요. 돌아가신 아버지도 마을을 구한 영웅이었어요. 사람들은 늘 아버지를 영웅이라 칭하며 존경했죠. 그러니까 루치아도 내게 영웅이에요. '정의로운 영웅'이요."

체른의 말에 루치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입을 뗐다.

"난 진리에서 먼 사람이란다. 그렇기에 네가 생각하는 영웅이 아니야."

루치아는 언제나 두루뭉술하고 은유적인 답변으로 대신하곤 했다.
체른은 슬슬 그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실체가 궁금했다.

"진리? 그건 뭔데요?"

체른의 물음에 루치아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루치아의 손가락 끝을 따라 푸른색 빛깔의 글자가 별처럼 반짝이다가 점점 희미해지면서 자취를 감췄다.

"글쎄… 표현하자면 이 '천체의 룬'과 비슷한 무언가라고나 할까?"

생소한 이야기였기에 체른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답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진리에서 멀다는 건 또 뭘까요?"

거듭된 질문에도 루치아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정의를 말하기엔 한없이 약한 존재라는 거란다. 나는 비록 널 구하긴 했지만, 너 외의 다른 사람은 구하지 못했잖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당황스러운 나머지 대답조차 잊었다.
그리고 루치아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네 말대로 '정의로운 영웅'이었다면 그 장소의 모든 이를 구원했겠지. 하지만 그러질 못했단다. 난 너를 선택하고 다른 이는 포기했어. 그 때문에 나의 구원은 '정의'로 포장할 수 없어. 그저 선택의 결과일 뿐이지."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에 눈앞의 한 사람을 구하는 데에도 온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는 간절히 구원을 기다리며 천천히 죽어간다.
힘을 가진 자가 갖는 책임은 곧바로 어려운 선택과도 직결된다.
'누구를 살릴 것인가'는 곧 '누구를 포기할 것인가'와 같은 이야기였다.
물론, 이런 속뜻을 어린아이가 이해하는 데에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이처럼 루치아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체른은 그저 루치아가 솔직하지 못 한 사람이라고, 혹은 낯부끄럽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체른에겐 루치아가 영웅일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그저 막연한 느낌이 아닌 루치아의 애정이 어린 보살핌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체른은 선천적으로 저혈압을 앓고 있었지만,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루치아는 듣도 보도 못한 약재들을 척척 구해오곤 했다.
어린아이 입장에서 이런 약재들이 반가울 리 만무했지만, 자신을 돌보는 루치아의 정성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약의 효과 때문인지 잠 못 이룬 채 한참을 뒤척이던 밤이면 항상 루치아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옛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혹시 잠이 오질 않니? 그럼 옛날이야기라도 들으며 잠을 청하는 건 어때?"

루치아가 들려주는 이야기란 기대했던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닌, 인퀴지터와 마녀사냥에 대한 오래된 괴담 등이 주를 이뤘다.
기대와 다른 주제의 이야기에 실망할 법도 했지만,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기에 체른은 날마다 그 시간을 기다렸다.
물론, 괴담인지라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괴담의 무서운 존재를 뛰어넘는 든든한 존재, 루치아가 곁에 있어 줬기 때문이었다.

그런 루치아의 정성을 다한 보살핌에서 영웅의 풍모를 느꼈다.
부모도 없는 자신을 구원해 준 것에 그치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해 보살핀다는 것에 벅찬 감동을 느꼈다.
분명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그녀도 영웅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동경하며 그녀와 같은 영웅이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해서 언제부터였을까?
체른은 루치아의 룬 마법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루치아가 사용한 문자 형상을 기억해뒀다가 땅 위에 나뭇가지로 따라 그리곤 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루치아도 어느 순간 그 과정을 창밖으로 유심히 지켜봤다.
놀랍게도 땅바닥의 문자가 짧은 순간 푸른빛을 띠며 반짝였다.
그 광경에 화들짝 놀란 루치아는 오두막을 뛰쳐나왔다.

"체른, 이건 매우 위험한 행동이란다. 다신 이런 짓을 해선 안 돼."
"이런 짓이라면…?"
"조금 전, 네가 그린 건 룬 문자란다. 문자의 형상에 마나가 깃들면 마법으로 발현되지."
"그렇다면… 내가 방금 마법을 부린 건가요?"

체른은 처음으로 선보인 마법적 소질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어쩌면 자신에게 엄청난 힘이 잠재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껏 들뜨며, 동경하는 루치아처럼 될 거란 기대감이 들었다.
그런 기대도 잠시, 루치아는 그런 체른에게 룬 마법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체른, 룬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란다. 그 말인즉슨 마녀가 된다는 거야. 인퀴지터의 표적이 되지. 절대, 흉내도 내선 안 돼. 알겠지?"

인퀴지터의 마녀사냥에 대해선 매일 밤 듣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기에 익히 알고 있었다.
루치아가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굉장히 위험한 일이란 건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른에게 있어 루치아는 영웅적인 존재였기에 마녀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루치아는 마녀가 아니에요. 날 구해줬는걸요. 루치아의 룬 마법도 분명 정의로운 힘일 거예요."

체른은 루치아와 같은 영웅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룬 마법의 힘이 필요했다.

"나도 루치아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당신처럼 정의로운 영웅이 되고 싶어요! 가르쳐 줘요. 룬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

어린아이의 반짝이는 두 눈에선 간절한 열망이 전해졌고 루치아 역시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비록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과 우려의 감정이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

"안돼, 널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결국 루치아는 그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영웅이 될 길이 막혀버렸다고 느낀 체른은 낙담하여 식음을 전폐한 채 침대에서 엉엉 울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도, 어린 소녀의 고집은 꺾일 줄 몰랐다.
으레 저 또래의 아이가 배고픔과 갈증을 참아내며 고집부리기가 쉽진 않을 텐데, 도무지 고집을 꺾을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루치아는 하루 반나절을 또 고민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좋아. 내가 졌구나. 네 뜻대로 하자. 네 소질을 이대로 썩히는 것도 아쉬운 일이니까. 하지만 명심해두렴. 이 선택의 감당은 온전한 네 몫이란다."

침대에서 쭈그려 앉은 채로 듣던 체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깡충깡충 뛰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그날 이후로, 추가된 일과는 숲속 오두막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
바로 '룬 마법 수업'이었다.

"네가 예전에 했던 마력을 담아 룬 문자를 새기는 것. 그걸 '마력 각인'이라고 부른단다."
"마력 각인, 마력 각인…."

오늘도 어김없이 마법 수업의 진행이 한창이었다.
체른은 처음 듣는 개념을 암기하기 위해 두세 번씩 읊조렸다.
그리곤 어린아이답게 천진난만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미리 각인된 룬을 잔뜩 준비해야 전투에 유리하겠네요."
"글쎄…? 그렇게 하면 부피도 커지고 무게도 더 나가게 되지 않을까?"

체른은 잠시 커다란 가방에 잔뜩 룬을 담은 채 뒤뚱거리며 싸우는 모습을 상상한 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본 루치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물리적 제약을 없애기 위해서 '오르비스'가 존재하는 거란다."
"오르비스…?"

오르비스란 루치아의 곁을 둥둥 떠다니는 구슬 형태의 부유체였다.
이 부유체는 룬 문자를 각인해서 보관할 수 있는 저장매체로 소유자의 마력만 충분하다면 열 개든, 스무 개든 각인해서 보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보관한 룬은 마나만 충분하다면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장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르비스에 너의 마나를 연결하면 소유자의 마나를 매개로 구동한단다. 계속해서 마나를 공급해야 하기에 다루기 쉽지는 않을 거야."
"마나…. 연결…."

체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나의 연결을 위해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두막의 내부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정적이 흘렀다.
체른은 루치아의 조언대로 두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마나를 흘려보내며 오르비스를 탐색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매듭에 마나를 연결하자, 점점 오르비스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와! 루치아! 보고 있어요? 오르비스가 떠오르고 있어요!"
"축하한다, 체른."

루치아는 기뻐하는 체른을 향해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떠올랐던 오르비스가 점점 힘을 잃고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앗?"

기뻐하던 체른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루치아는 체른의 낙담하는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하며 다시 시도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부유체가 오르락내리락을 수십회를 반복하며, 그날의 수업은 밤이 깊어서야 종료되었다.
녹초가 된 채로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잠든 체른의 모습으로 고단했던 오늘의 수업을 짐작할 수 있었다.
루치아는 그런 소녀가 혹시라도 깰까, 조심스럽게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더위가 한풀 꺾여가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루치아는 가끔 숲 밖으로 외출하곤 했다.
숲에서의 자급자족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 근처 영지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체른도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루치아는 이곳이 더 안전할 거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결국 오두막에 혼자 남겨진 체른은 오르비스를 다뤄보기도 하고, 룬 마법을 연습해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무료함이 찾아오자, 오두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옛 마을 터의 우물가로 향했다.
이곳은 혼자서도 가끔 산책 삼아 오는 곳이었기에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날은 뭔가 평소와는 달랐다.
우물에서 자신의 흔적이 아닌 타인의 흔적이 느끼던 참이었다.

"분명 물통을 꺼내놨는데…. 어째서 안에 들어가 있지? 혹시 루치아가…?"

체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 미안. 내가 쓰고 꺼내두는 걸 깜빡했어."

여자의 목소리에 체른은 재빠르게 등을 돌리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딱 봐도 체른보다 예닐곱 살은 많아 보이는 여성이었다.

"여기서 사람은 처음 보네. 난 라일라라고 해."
"…난 체른이에요."

처음 보는 건 피차일반이었다.
형식적인 통성명을 뒤로한 채 한참 동안 말이 없는 두 사람.
정적은 깬 건 자신을 라일라라고 소개한 여자였다.

"혹시 여기 살아…?"

체른은 고개를 저었다.
항상 낯선 사람을 경계하라는 루치아의 말을 상기했다.
그런 사람에게 은신처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응, 그럴 줄 알았어. 여긴 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이거든."

폐허가 된 마을, 그곳 출신의 생존자.
체른은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여긴 어쩌다가 폐허가 된 거죠…?"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지.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을 갖고 이곳에 정착했어. 그 중엔 마녀도 있었지. 결국 마녀를 숨겨줬기에 모두 죽었어."

마녀, 설마 루치아를 말하는 걸까?
체른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체른은 뭐라고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몰랐다.

"아, 너무 오래 지난 이야기야. 지금은 괜찮아. 이젠 나도 다 컸고 이해하거든."

라일라는 지금은 멀쩡하다며 웃어 보였다.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옛집 터에는 가지런히 헌화한 꽃들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의 기일이기에 이곳을 방문한 모양이었다.

"나도… 전쟁으로 고향을 잃었어요."
"…그랬구나. 유감이야. 이런 처지인 사람이 많다는 게…."

동질감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했다.
짧은 대화가 몇 마디 오가며 묘한 유대감이 쌓여가는 걸 느꼈다.
키가 자라는 동안 또래 친구를 사귈 기회가 없었던 지라 라일라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이 느껴졌다.

"여신께선 자애로우신 분이야. 그분의 축복 아래 번영의 역사가 허락됐지."

라일라는 여신을 섬기는 일을 한다고 했다.
오갈 데 없는 고아가 생존을 위해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캐묻거나 하진 않았다.
어느덧 하늘엔 황금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난 이만 돌아가야 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괜찮아요. 멀지 않은 곳에 집이 있거든요."
"그래,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여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바라.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보자."
"잘 가요, 라일라."

그렇게 돌아서는 찰나, 라일라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매해 오늘, 난 이곳을 찾아."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매해 이곳에서의 재회를 약속한 둘은 각자의 길로 떠났다.
오두막에 도착할 무렵, 루치아가 저만치서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오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반기는 루치아의 얼굴을 보자 불현듯 오늘 라일라와 만난 사실을 들킬까 봐 지레 겁을 먹었다.
루치아와의 약속 중 하나인 '낯선 이를 경계할 것'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루치아에겐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생각한 체른은 금세 표정을 바꾸고는 루치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쑥쑥 자라난 체른의 키만큼, 룬 마법을 다루는 솜씨도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날의 수업을 마친 루치아는 여느 때처럼 외출을 준비했다.
외출이 못내 부러운 체른은 뾰로통한 채로 테이블에 앉아서 의미 없이 오르비스를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루치아가 한마디가 반쯤 멍한 상태인 체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오늘은 함께 나가자꾸나."
"정말요?"

체른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못 본 사이, 바깥세상은 얼마나 변해있을까?
가끔 라일라에게 전해 듣곤 하던 바깥세상을 직접 보러 간다는 건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다.
조심스럽게 밝고 활기찬 거리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검은 후드를 쓰고, 루치아와 함께 숲길을 걸었다.
그날따라 유독 짹짹 지저귀는 새소리도, 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루치아의 뒤를 따라 걷던 발걸음은 숲과 영지를 연결하는 지하 통로 앞에 다다랐다.
어둡고 습한 내부, 퀴퀴한 냄새에 빛 한 점 없는 이곳을 지나야 했다.
루치아는 익숙하단 듯이 허리를 숙여 비좁은 통로 내부로 들어갔다.
체른도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루치아가 말했던 염려했던 마녀의 삶을 처음으로 맞닥뜨린 셈이었다.
어두운 통로의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했다.
이끼가 가득한 천장엔 다수의 균열이 존재했고, 그 틈 사이로 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울려 퍼지는 소리가 이 어두운 공간의 크기를 짐작하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뒤따라 걷자, 조금씩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통로의 끝은 해도 잘 들지 않는 어두운 뒷골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루치아는 기다리고 있던 암상인과 거래하고 있었다.
물물교환.
루치아가 각인된 룬을 건네자, 익숙하단 듯이 암상인은 루치아가 미리 부탁해 둔 생필품이 담긴 자루를 건넸다.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룬 마법은 법황청의 철저한 관리 대상이었기에 통상적인 거래가 불가능하다는걸.
하지만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알 수 없는 회의감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골목 사이로 햇볕이 드는 찬란한 거리가 보였다.
그 틈으로 행복한 일상을 즐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미소와 뒷골목의 자신들의 처지는 극적으로 대조됐다.
골목 하나만 건너면 평범한 사람들의 틈에 낄 수 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차가운 현실이 앞으로도 지속될 거란 것에 무력감마저 들었다.

그때, 뒤에서 물체가 바닥에 넘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쓰러진 사내를 둘러싼 암상인 패거리가 보였다.
사내는 겁을 먹은 듯 보였고, 둘러싼 무리는 고압적으로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네가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감히 날 신고해?"
"으으, 아닙니다! 제가 아니에요!"
"말로 해선 안 되겠군!"

한 암상인이 쓰러진 사내를 향해 발길질을 시작해서 주위를 둘러싼 무리도 함께 발길질을 시작했다.
쓰러진 사내는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며 몸을 웅크렸다.
거센 발길질이 한참 동안 지속되자 체른은 점점 마음이 쓰였다.

'약자를 지키는 건 강자의 책무.'

아버지의 그 말이 가슴에서 요동쳤다.
체른의 시선이 루치아를 향하자 둘의 눈이 마주쳤다.
진즉부터 루치아는 체른을 응시하고 있던 것 같았다.
왜 그녀는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걸까.
보다 못한 체른이 나서려던 찰나, 루치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제지했다.

"함부로 나서지 말렴."
"하지만…!"
"모두가 마녀의 도움을 달가워하는 건 아니란다. 마녀의 도움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너도 알잖니?"

순간, 밤마다 루치아가 들려주곤 했던 마녀사냥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녀의 가족, 친지를 비롯해 도움을 받은 사람들까지 잔혹하게 죽였던 법황청의 인퀴지터.
체른은 그 끔찍한 이야기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에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한참 뒤, 암상인 무리는 저만치 사라졌다.
쓰러진 사내는 어딘가 부러진 듯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을 일으킨 채로 체른과 루치아를 번갈아 흘깃 보고는 절뚝거리며 골목길로 사라졌다.
철저히 유린당한 약자의 처량한 뒷모습이 마치 자신을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는 체른을 향해 루치아가 말했다.

"…그만 돌아갈까?"

그날 밤, 체른은 오두막에 도착해서도 잠이 들 수 없었다.
어둡고 습한 통로, 불법적인 거래, 불의를 보고도 참아야 하는 현실, 약자를 지키지 못하는 강자.
그 모든 현실의 부조리함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해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순응한 듯 방관자적 태도를 보이던 루치아의 모습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동경하는 영웅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

그날의 씁쓸한 기억을 뒤로 하고, 몇 달이 흘러 어느덧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체른은 문득 달력을 확인하고는 무척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라일라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몇 년간, 둘은 처음 만났던 그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말 그대로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린 라일라와의 만남은 늘 즐겁고 새로운 것이었다.
비슷한 처지이긴 했지만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라일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날, 라일라의 분위기가 여느 때와는 분명히 달랐다.
늘 입던 평상복 차림이 아닌, 번뜩이는 은회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와 줬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라일라, 어떻게 된 거예요? 그 갑옷은…?"

의아해하며 묻는 체른에게 라일라가 답했다.

"마침내 꿈을 이뤄냈어. 그토록 바라던 인퀴지터가 됐거든."

체른은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말하던 신에 섬기는 일이 다름 아닌 '인퀴지터'였다니….
게다가 라일라는 인퀴지터에게 부모를 잃게 된 피해자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된 거지?

"추, 축하해요, 라일라. 인퀴지터라니…. 솔직히 좀 놀랐어요. 하하…."
"응? 어째서…?"

멋쩍은 반응을 보이는 체른의 모습이 의아하단 반응을 보였다.
체른은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헌화한 꽃들에 한참 동안 시선이 꽂힌 채 서 있었다.

"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어. 어쩌다 부모님의 원수인 인퀴지터가 됐냐는 거지?"

익숙하다는 듯이 시원시원하게 체른의 생각을 읽어냈다.
어쩌면 다른 사정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신의 가르침을 받으며 깨우침을 얻었어. 선량했던 부모님께 죄를 옮긴 역병 같은 존재들이야말로 진정한 악이라는걸. 다시는 나 같은 아픔을 겪는 이가 없게 할 거야."

죄를 옮긴 역병 같은 존재, 바로 마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자기 부모가 죽게 된 것은 마녀가 마을에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날의 불행은 오직 마녀로 인한 것이었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건 부모님께 헌화하기 위해서지만, 임무 때문이기도 해."
"임무라면…."

그때, 라일라는 칼을 뽑아 그 끝을 체른의 목에 겨눴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체른은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턱 끝을 든 상태로 굳어버릴 뿐이었다.

"체른…. 왜일까? 네게서 마녀의 기운이 느껴져. 매해 다시 만날 때마다 점점 짙어져. 대체 넌 누구지?"
"라, 라일라…."
"하긴, 이상하지? 이런 숲속에서 지내는 소녀가 평범하진 않잖아?"

광기가 느껴졌다.
차가운 그녀의 질문에 체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점점 짙어지는 마녀의 기운, 그것은 체른의 룬 마법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어느덧 체른에게도 루치아와 같은 기운을 풍기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라일라가 확신하는 순간, 죽음의 문턱에 도달한 셈이었다.

그때였다.
라일라의 등 뒤로 푸른 광선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녀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구르며 피해냈다.
순간, 놀란 체른은 광선이 날아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 루치아!"

갑작스레 나타난 루치아는 무서운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 위의 오르비스가 라일라를 주시하며 금방이라도 추가 공격을 할 태세였다.

"체른, 물러서거라! 저 여자는 인퀴지터야!"

기습을 피해낸 라일라는 체른과 루치아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무슨 영문인지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시 그렇군. 처음부터 날 속였구나."
"라일라, 난…."

확신에 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라일라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간 우리는 마녀가 아니라고, 죄가 없다고, 떳떳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정작 인퀴지터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라일라는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여신의 이름으로 이교도들을 즉결심판하여 이곳을 정화하겠다."

라일라가 내뿜는 살기에 압도당한 나머지 체른은 제대로 서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라일라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던 체른에게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고, 이를 눈치챈 루치아가 그 둘 사이로 끼어들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오르비스에서 푸른 빛이 여러 갈래로 뿜어져 나왔고, 라일라는 그 빛무리를 무기로 쳐내며 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진 상태였다.

"하아앗…!"

라일라가 커다란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두르던 찰나, 오르비스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채찍이 뿜어져 나가 라일라의 손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루치아가 손을 공중에서 휘감자, 마치 밧줄처럼 빛무리가 라일라의 몸을 휘감으며 단단히 포박했다.

"크윽…!"

빛무리는 점점 강하게 옥죄여 왔고, 갑옷이 구겨지고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공중에 떠올랐다.
억지로 버텨내던 라일라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승패가 결정 난 상태였지만 둘 중 하나의 목숨이 끊길 때까지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체른은 루치아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루, 루치아, 설마 그녀를 죽일 건가요?"

루치아는 침묵했고 왠지 그 침묵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루치아가 라일라를 죽일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루치아는 여전히 침묵하며 포박하고 있는 두 손을 더욱더 강하게 조였다.
체른과 루치아를 번갈아 쳐다본 라일라는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강하게 포박된 라일라 입 끝에서 한줄기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며 천천히 몸을 축 늘어뜨렸다.
루치아가 손을 내리자 주검이 된 갑옷의 주인이 거친 금속음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라일라와 대화를 나누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던 체른은 눈을 가린 채 오열했다.

"어째서… 이런 짓을…."
"인퀴지터는 마녀를 비롯해 가족 친지들을 모조리 처단한단다. 내가 그녀를 죽인 건 너를 지키기 위해서야."
"그녀는 정의로운 인퀴지터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녀는 내 친구였다고요!"

절규와도 가까운 외침.
하지만 루치아는 여전히 냉정하고 차분했다.

"정의로운 인퀴지터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은 낭만적이지 않단다. 친구였다는 그 여자는 네게 칼을 겨눴지."

그렇다, 라일라의 살의를 품은 칼끝은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웠다.
그런 라일라를 죽인 루치아의 비정함 역시 차가웠다.
그런 냉혹한 말들에 체른은 목이 얼어붙는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았다.
루치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인퀴지터, 그리고 이교도라 불리는 자들. 이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야. 넌 그녀를 죽일 수 있니?"

그녀의 질문에 차마 답할 수 없었다.
친구를 죽인다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체른은 말없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못하면 오늘처럼 네가 당하고 말아. 오늘 난 널 대신해 그녀를 죽인 거란다. 널 살리기 위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은 두 눈 사이로 루치아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양팔을 벌려 체른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체른, 널 지키는 것. 그게 나의 정의란다.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짓이든 할 거야."

체른은 루치아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조금 전, 자신은 죽을 뻔했다며 정당화시키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계속해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선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어쩌면 루치아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영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 동경하던 영웅적 존재를 스스로 부정한다는 건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어릴 적처럼 이해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편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며칠이 흘렀을까.
이해를 포기한 가슴 속의 상처는 깨끗이 아물지 못한 채로 흉터처럼 남아버렸다.
체른은 어둑어둑해진 숲속을 배회하며 사색에 잠겨있었다.

'어쩌면 루치아는 내가 생각하는…'

체른은 그 흉터를 더듬는 게 싫었기에 생각을 멈추려 노력했다.
오히려 의식할수록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그 노력은 체른을 더욱 괴롭혔다.
체른의 낙엽을 밟는 소리만이 어두운 숲속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얼마나 서성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뒤따라 걷는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루치아가 미소를 띤 채로 서 있었다.

"산책 중이니?"

체른을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발길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숲 외곽에 위치한 호수에 도착했다.
달빛이 반사되는 밤의 호수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그야말로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체른이 어색한 침묵을 깨며 말했다.

"요즘 들어 자꾸 생각이 많아져요."
"무슨 생각을…"
"복잡한 마음이에요. 자꾸만 루치아가 내게서 멀어지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네가 그만큼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거란다."

루치아는 마치 기특하다는 것처럼 체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냉정한 모습을 봐버렸기 때문일까, 묘하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체른은 루치아의 손길에서 머리를 빼내며 투덜거렸다.

"그런 게 어른이 돼가는 거라면, 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요."
"어른이 된다는 건, 많은 걸 깨달아가는 과정이란다. 이를테면 '진리'라던가…."

루치아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진리에 대해서 아직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게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도대체 그 진리라는 게 뭐죠?"
"진리란 이상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열쇠란다. 우리가 이상으로부터 자꾸 멀어지는 건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야."

또다시 모호하고 추상적인 답변이 나오자,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진리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애매한 대답 말고요. 그러니까 그 진리가 뭔데요? 지식인가요? 아니면 물건인가요? 예전에 당신은 진리가 '천체의 룬'과 비슷한 무언가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진리는 어떤 지식이나 물건 따위로 특정할 수 없단다. 사람마다 이상이 다르듯이 진리도 각자 다를 수 있지.
진리는 진정으로 이상을 갈구하는 이만이 찾을 수 있단다. 내겐 그것이 '천체의 룬'과 비슷한 무언가일 수도 있고."

천체의 룬, 새벽의 마녀 루치아가 체른에게 전수한 이 특별한 룬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힘이었다.
체른은 그 천체의 룬을 가진 루치아나 자신이 진리에 다가섰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비슷한 것을 갖고 있으니 진리에 가까운 사람인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 내가 가진 천체의 룬은 진리라고 부르기엔 많이 부족하단다."

돌고 돌아 제자리, 더 이상 진리에 대해 묻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상을 실현하는 열쇠라면 이상을 묻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루치아의 이상은 뭔가요? 무엇 때문에 진리를 갈망하는지 궁금해요."

루치아는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뜸을 들이고는 말을 꺼냈다.

"이상이라…. 잊고 산 지 오래돼서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게도 한때는 너와 같은 이상을 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거란다."

루치아의 대답에 체른은 점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같은 이상을 품었다는 그 말에 지금껏 쌓였던 불쾌한 의구심들은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그때였다.
인적이 드문 한밤의 숲속에서 불규칙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분명 날이 예리한 병장기와 두꺼운 갑옷들이 서로 뒤엉키며 내는 '전투'의 소리였다.


"이 소리는…? 설마…!"

체른은 황급한 심정으로 덤불을 젖히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숲길을 내달리자 거친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쨍한 금속음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체른이 발길이 멈춘 덤불을 사이로 소리의 근원지인 작은 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직자와 그를 지키는 병사들이 수적 열세에도 진형을 유지하며 버텨내고 있었고, 그들을 둘러싼 구부정한 자세에 의복조차 제대로 걸치지 않은 근육질의 마족들, 트롤 무리가 보였다.
병사들이 다수의 트롤과 뒤엉켜 싸우고 있었고, 살찐 성직자는 무언가 명령하듯 손가락질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싸우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자세를 낮춘 체른이 뒤따라온 루치아에게 말했다.
"트롤들이 사람을 습격한 모양이네요. 당장 사람들을 구해야…."
"…아니, 우리는 오두막으로 가야 해."

루치아의 표정은 단호했다.
체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체른, 넌 저 중에 누굴 구할 거니? 저기 창을 들고 있는 병사? 그게 아니라면 성직자?"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애초에 누구를 구할지, 구하지 않을지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과거 루치아가 말했던 '선택'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말해보렴. 네 선택이 무엇인지."
"당연히 모두를 구해야죠. 이럴 시간이 없어요. 어서…!"

그때, 트롤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은 병사 하나가 쓰러졌다.
쓰러진 병사의 투구 사이에서 새어 나온 피가 바닥을 빨갛게 적셨다.
체른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루치아는 여전히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전투의 무너진 균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고, 수적인 열세를 극복할 만큼 월등한 영웅도 존재하지 않았다. 종내 학살로 끝나버린 전투, 체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좌절했다.
루치아는 그런 체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싼 뒤 일어났다.

"돌아가자."

체른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루치아를 따라 걸었다.
돌아가는 길, 둘 사이에는 말 한마디도 없이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도무지 머릿속이 정리되질 않았다.
오두막에 도착하자마자 체른은 결국 참았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루치아, 왜 내게 그런 질문을 한 거죠?"
"말 그대로란다. 누굴 구할 건지, 네 선택을 물은 거야."

루치아는 여전히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그런 태연한 모습이 오히려 체른을 자극했다.

"난 모두를 지키려고 했어요. 당신이 막지 않았다면…!"
"우린 진리에서 먼 존재들이야. 모두를 지킬 수는 없어."

진리로부터 먼 존재라는 그 말을 어릴 적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정의를 실천하기에 한없이 약한 존재라는 뜻임을.
다만,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을 함부로 예단하는 루치아가 미울 따름이었다.

"그건 해봐야 아는 거죠. 사람의 목숨을 루치아가 정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돌이켜 생각해 보렴. 네가 망설이는 사이 한 명이 죽었어. 그리고 차례대로 하나씩 죽어갔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모두를 구할 수 있을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두를 구하기엔 너무도 삽시간 안에 당해버렸다.
그래도 구원에 나섰다면 적어도 한 명의 목숨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일말의 가능성마저 잔인하게 꺼뜨린 루치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약자를 지키는 건 강자의 책무에요! 당신은 강하잖아요! 대체 왜 약자를 돕지 않는 거죠?"

언제나 방관하는 루치아의 태도가 싫었다.
특히 이번에는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었음에도 루치아는 여전히 그들을 외면했다.
오래도록 영웅이라 믿었던 루치아에게선 그 어떤 인류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을 구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

지켜야 할 사람이란 곧 체른을 의미했다.
체른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가로저었다.
기대했던 모든 것이 산산이 조각나는 참담함이 그녀를 괴롭혔다.
체른은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루치아에게 외쳤다.

"정말 모르겠어요. 난 나와 같은 이상을 품었다는 당신의 말을 믿었어요. 당신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거라 믿었어요. 그러니까 날 구했을 거라고요."

루치아는 냉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말 그대로였다.
대체 무엇이 진짜 모습인지 헷갈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젠 그 진실을 마주하고 싶었다.

"루치아, 말해봐요. 왜 나는 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철저히 외면하는 거죠? 대체 이유가 뭐예요?"

체른의 물음에 루치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오두막 안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루치아를 책망하는 체른의 눈빛에 루치아는 온화한 미소로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긴 침묵을 깬 루치아가 답했다.

"…그건 체른, 네가 내 딸이기 때문이란다."

체른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져버렸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체른은 그대로 목석처럼 굳어버렸다.
불규칙하게 파르르하고 떠는 눈가의 피부만이 그녀의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루치아가, 나의 어머니라고?'

과거에는 미처 알 수 없었던, 루치아의 행동이 납득이 갔다.
지나칠 정도로 체른에게 맹목적이던 그녀의 보살핌은 하나의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딸이기에 그녀를 지켰고, 딸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딸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외면했다.
'영웅'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루치아는 한낱 '보호자'에 불과했고 그녀의 정의는 오직 딸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는 애초에 체른이 바라던 정의와는 결이 달랐다.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었을 뿐이란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루치아를 향한 동경하는 마음은 배신감으로 변해버렸다.

"…난 더 이상 당신을 믿지 않아요."

체른은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멸을 담아 루치아를 쏘아보고는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루치아의 시선을 외면한 채, 오두막의 문을 밀었다.
닳고 닳은 나무 문의 낡은 경첩은 힘겹게 삐그덕 소리를 내며 마치 체른을 가지 말라며 붙잡기라도 하듯 매우 천천히 열렸다.
화를 힘겹게 억누르는 손이 부르르 떨었다.
등 뒤의 루치아에게선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루치아의 표정은 어땠을까,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났기에 알 수 없었다.
어느 늦가을, 어두컴컴한 새벽의 일이었다.

그날 이후, 체른은 그렇게 길고 긴 방황을 시작했다.
오직 루치아의 모든 말을 부정하기 위해 그녀는 발걸음을 끝없는 전장이 있는 북쪽으로 향했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곳에 닿아있는 이들 모두를 구원하고 싶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체른이 찾던 절망의 장소, 전장에 도달했다.
모두를 구하겠다는 각오로 싸웠지만, 전장은 상상 이상으로 냉혹한 곳이었다.
결코 구원을 허락하며 기다려주는 법이 없었다.
그런 각오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전장의 차가운 바람은 차례차례 생명의 불꽃을 꺼뜨렸다.
그녀의 외로운 사투는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해 해가 저물도록 이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지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멍한 표정으로 불타고 부서져 폐허가 되어버린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해온 모든 룬을 사용했고, 전력을 다해 싸웠음에도 그곳엔 마족도 인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생명이 꺼진 이 장소에는 오직 고요한 적막이 흐를 뿐이었다.
체른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고, 선택받지 못한 모든 이는 죽었다.

'내가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단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차라리 선택이란 걸 했다면….'

체른은 냉혹한 현실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었고 뒤늦은 후회였다.
주변은 적막한 가운데 무수한 시체의 냄새를 맡고 날아든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체른은 참담한 현실 앞에 무릎 꿇은 채 오열했다.
분명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정의는 이런 처참한 모습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몇 차례 흐른 그날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체른은 여전히 전장을 배회하고 있었고, 지금의 장소 역시 그녀가 거친 수많은 전장 중 하나였다.
불과 몇 시간 전, 인간과 마족은 이곳에서 격돌했었고 그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남겨진 폐허에서 혹시라도 있을 생존자를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로 뻗어 나온 망자의 손을 보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게 더 큰 힘이 있었더라면….'

늘 그녀의 발목을 잡는 건 힘의 부재였다.
힘없는 정의는 공허한 외침일 뿐, 아무런 기능도 해내지 못했다.
전장에서의 오랜 방황으로 변해버린 모습은 사람을 구하겠다는 희망으로 가득 찼던 과거와 사뭇 대조됐다.
그녀의 뜨거운 열망을 표현하던 눈빛, 말투, 표정은 차갑게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체른의 얼굴에선 그 어떤 열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새벽의 마녀.'

근방의 사람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토록 부정하던 루치아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에게 체른은 전장마다 나타나 사람들을 구원하는 기이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처음엔 호기심을 갖던 이들도 그녀의 마법이 이교도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냉랭하게 돌변했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깨끗하고 고결하게 죽겠다는 심정이랄까?
설령 마녀의 구원을 받더라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마녀로부터의 구원은 곧 이단심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재앙을 몰고 다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제법 상처였지만, 지금은 굳은살처럼 자리 잡아버린 지 오래였다.
사람들의 냉대, 배신도 제법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그녀 역시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믿는 만큼 다친다는 걸 너무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직 정식 수배 명단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인퀴지터들이 자신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기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체른은 갑자기 밀려드는 현기증에 이마를 짚은 채로 비틀거렸다.

"아…."

루치아의 보살핌이 있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빈혈이 또 말썽을 부리는 듯했다.
낮은 자세로 잠시 기다리자 온몸을 지배하던 어지러움은 서서히 사라졌다.
문득 어릴 때 항상 자신을 붙잡아주던 자상했던 루치아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애써 잊으려 했던 얼굴이 다시금 떠오르니, 왠지 모를 그리움과 동시에 희석된 증오가 교차했다.
돌이켜보니 미워하던 그녀의 모습을 닮아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 한심한 자신은 언제부턴가 과거 루치아의 말과 행동들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해는 매우 불쾌한 감정을 동반했다.
혹여나 '난 그래도 당신과 달라요.'라는 한 점 남은 자존감마저 무너뜨릴까 두려웠다.
그렇기에 체른은 여전히 전장을 떠돌며 단 한 사람이라도 구해내기 위해 힘겹고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던 것이었다.
한 점 남은 정의마저 포기한다면 그토록 미워하던 루치아와 똑같아질 것만 같았다.
오직 구원만이 지금의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차가운 껍데기만이 남아 계속해서 전장이라는 우주를 별처럼 공전하는 존재, 새벽의 마녀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모두를 구원할 거라며 뜨거운 열망을 표출하던 과거의 자신은 이제 부끄러운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땐 헛된 이상이라도 품었지만, 지금의 난 꿈조차 꾸지 않아.'

자조 섞인 말로 자신을 책망할 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마음엔 그 어떤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상, 그리고 꿈, 아득한 기억 속의 단어들이 무척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그곳에는 우주를 잘라 붙인 것 같은 광활한 천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불현듯 루치아가 했던 말들이 뇌리에 강하게 꽂혔다.
'진리란 커다란 이상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열쇠란다.'
'우리가 이상으로부터 자꾸 멀어지는 건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야.'
'진리는 진정으로 이상을 갈구하는 이만이 찾을 수 있단다.'

진정으로 이상을 갈구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째서 찾을 수 없는 걸까?
끝이 없는 우주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온갖 생각의 파편들이 공전하며 머릿속을 휘감고 있었다.
모든 이를 구하지 못한 것은 무엇으로 비롯됐는가?
그건 두말할 나위 없이 '부족한 힘'이었다.
언제나 체른을 괴롭힌 궁극의 결핍이었던 것.
더 큰 힘이 있다면, 영웅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면, 아니 신과 같은 권능이 있었다면…. 안타깝게 꺼져간 생명들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루치아 한때 체른과 같은 이상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한때'라는 후회가 섞인 이야기, 과거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의 체른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련과 좌절을 겪으며 깎여나간 자신은 분명 루치아를 닮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루치아가 찾던 진리가 자신이 찾는 진리와 같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과거에 루치아는 진리를 '천체의 룬'과 비슷한 무언가라고 표현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찾아야 하는 진리, 그토록 갈망하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구름 낀 밤하늘처럼 혼탁했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개었다.
이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확인할 존재는 세상에 오직 루치아, 단 한 명이었다.
그녀를 만나 직접 묻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방황은 길고, 깨달음은 찰나라고 했던가.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답이 지금 이곳에는 없었기에, 폐허가 된 전장에서 발길을 돌렸다.

체른은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지금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밤하늘 별을 의지해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며칠을 걸었을까, 점점 발길은 익숙한 땅 위를 걷고 있었다.
어둡고 습하며 좁은 길, 루치아를 따라 걷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자신을 안내하듯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분명 낯이 익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위치, 풀 내음 가득한 숲의 바람, 가을을 노래하는 귀뚜라미 소리까지, 분명 변하고도 남을 시간 임에도 왠지 모르게 그날에 멈춰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저 큰 밤나무 뒤로 열 걸음, 바위에선 오른쪽 길로….
모든 것이 점점 오랜 기억 속 루치아의 오두막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대변해 줬다.
그리고 멈춰선 그 자리에는 오래전 떠났던 루치아의 오두막이 예전 모습 그대로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루치아…."

체른은 조심스레 오두막의 나무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오래된 나무 문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내며 오두막 내부로 인도했다.

'아직도 고치질 않았네….'

체른은 고장 난 문이 익숙하단 듯이 쓱 쳐다보고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의 내부는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고, 곰팡내와 오래된 책 냄새들로 가득했다.
체른은 테이블 위의 양초에 불을 붙여 오두막 내부를 비췄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벽난로와 테이블, 책과 집기는 떠나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오직 하나, 루치아만 없었다.
체른의 시선은 테이블 위의 편지로 향했다.
'나의 딸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는 쓰다가 만 것인지, 그 밑은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편지의 오른편에는 깃펜이 놓여있었다.
체른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촛불을 후 불어 껐다.
그리고는 오르비스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자, 마법진과 함께 조명 역할을 하며 편지를 비췄다.
예상했던 대로 빛을 쏘이자 감춰진 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체른은 편지를 조심스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편지를 읽는다는 건 네가 돌아왔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난 이미 진리를 찾아 떠나고 없을 거란다.

너의 이상을 실현해 만족하고 있니?
그게 아니라면, 좌절하고 슬퍼하고 있나?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만큼, 나도 네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단다.
이 세상은 수수께끼투성이니까.

언젠가 너에게 말했지.
너의 이상과 나의 이상이 서로 닿아있음을.
하지만 난 그 이상을 관철할 수 없었단다.
선택을 포기하고, 깊은 어둠 속에 숨었지.
내게 힘이 있었더라면…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 텐데…..
좌절하며 그렇게 나는 숱한 풍파에 깎여 나갔어.

하지만 힘을 얻게 된다면 어떨까?
모두를 구할 수 있을까?
그 힘을 난 '진리'라고 말한단다.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만큼 강한 힘.
그 힘은 이 세상 끝, 어딘가에 묻혀있는 '미지의 룬'이라면 믿을 수 있겠니?
난 아주 오래전부터 미지의 룬을 연구했단다.
그 노력의 결과로 미지의 룬 중 일부인 천체의 룬을 찾았지.
만약 나머지 미지의 룬을 찾아낸다면 그 힘은 분명 이상을 실현하는 데 모자람이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

사랑하는 내 딸, 체른.
네가 떠나고 나서야 지킬 게 없어진 나는 잠시 방황했어.
하지만 다시 용기를 내서 젊을 적 찾아 헤매던 미지의 룬을 찾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얼마 전, 콜헨의 용병단에서 미지의 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정보를 알게 됐지.
난 당분간 그 단서를 따라가며 추적할 계획이란다.

체른, 네가 무엇 때문에 날 찾아왔는지 지금의 난 짐작조차 할 수 없구나.
다만 네가 꿈꾸는 이상을 이루고 싶어 진리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날 찾아온 거라면, 세상 어딘가에 숨겨진 미지의 룬을 찾으렴.
그 진리의 힘이 널 이상으로 이끌 거라 믿는다.

너의 어머니, 루치아로부터.'

체른은 떨리는 손으로 다 읽은 편지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콜헨, 용병단, 그리고… 미지의 룬."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혼잣말로 핵심 단어들을 읊조렸다.
비록 루치아를 만나진 못했지만, 원하던 답은 편지 안에 모두 있었다.
'당신은 내가 올 거란 걸 미리 알고 있었군요.'라고 루치아의 혜안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누구보다 미워했던 존재가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했다.
루치아를 미워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그녀를 떠나 방황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떠나던 그날의 모습 그대로인 오두막은 어렸던 자신이 떠오르게 했고, 이내 부끄러운 감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마음껏 자신을 미워할 수도 없었다.
루치아와 너무도 닮아버린 나머지, 자신을 미워하면 그녀를 미워하는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사랑했고, 미워했던, 그렇게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실타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루치아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그렇게 추억이 가득한 오두막을 한참을 서성이고는 오두막의 문 앞에 섰다.

"다녀올게요, 어머니."

떠날 때는 미처 부르지 못한 호칭으로 추억 속 루치아를 불러 보았다.
오두막의 문을 열자, 따사로운 햇살이 오두막 안으로 쏟아졌다.
오랜만에 맞이한 광명의 빛에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지만, 따뜻했던 루치아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체른은 못내 아쉬운 듯 고개를 돌려 지난 추억들을 회상했다.
그렇게 루치아와 함께 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한 채, 쏟아지는 햇살로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그녀의 발걸음은 루치아가 남긴 편지의 단서, 콜헨의 이름 모를 용병단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