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Danah

어느 여름의 초입.
봄 햇살이 남긴 온기가 불길처럼 뜨겁게 달아오를 무렵.
마을 어귀에 우뚝 선 거대한 수호목 아래서, 소년 '은보'는 눈꺼풀 위로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중천에 뜬 태양은 마치 땅 위의 모든 걸 태워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쨍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 오늘따라 해가 깁니다요!"

이파리 사이로 비친 하늘을 보는 척 하며 은보는 슬쩍 곁눈질을 했다.
수호목 그늘 아래 넓직한 돌 위로 가지런히 앉은 여인은 이렇게나 숨구멍이 턱턱 막히는 날씨 인데도 얼음굴 안에 있는 양 자못 태연한 기색이었다.
은보는 계속 여인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하늘님도 참 너무 하세요. 계속 이렇게 푹푹 찌다가는 간신히 역병을 피한 사람들 마저도 다 죽게 생겼다고요."

힘찬 물결처럼 굽이치는 물기어린 검푸른 머리칼, 겨울하늘에 나리는 첫눈처럼 희고 고운 얼굴.
그리고 동백처럼 붉은 입술과 근처에 곱게 찍힌 점 하나.
그 신비로운 외양에 이끌린 소년은, 줄곧 곁을 맴돌고 있는 몇 마리 나비들과 함께 한참 여인의 곁을 서성이던 참이었다.
소년의 푸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여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늘님께선 엄한 분이시지요. 허나 이 고을에 닥친 불행은 하늘님의 뜻이 아니랍니다."

사근한 음성이 귓가에 닿자 안 그래도 마구 콩콩대던 은보의 심장은 이제 콩닥콩닥 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수줍은 고동 소리가 혹여나 여인에게까지 들릴까, 소년은 황급히 울분에 찬 척 허공에 주먹을 쳐들곤 휘휘 저으며 말했다.

"칫, 알고 있다고요. 다 그놈 때문이지요. 그 '악귀' 놈 말이에요."


금일 동이 틀 무렵, 여인은 마을 초입에 홀연히 나타났다.
새벽녘 안개처럼 사뿐하게, 꽃처럼 하늘하늘한 의복을 하고, 웬 기다란 도를 들고선.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행색을 한 그녀는 도끼눈을 치켜뜨고서 주위로 모여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지금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매서운 살의 기운을 따라 여기에 왔으니, 분명 이 마을에 내가 도울 일이 있을 겁니다.'

그 통찰력 있는 말마따나, 요사이 마을은 문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으니.
바로 불현듯 들이닥친 한 '악귀'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밤의 어둠을 틈타 나타난 놈은 고막을 찢어발길 듯 새된 울음소리를 내며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습격했다.
놈의 악취를 풍기는 검은 손이 스치고 나면, 사람들의 몸에는 순식간에 징그러운 수포가 다닥다닥 돋아나고 손에 쥔 낫이나 몽둥이 따위는 금세 삭아 부스러지고 말았다.
대체 놈이 어디서 왔는지, 왜 사람들을 습격하는지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
동네에서 힘깨나 쓴다는 작자도 놈에게 대항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나가떨어지기 일쑤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불특정한 밤마다 맹렬히 이어지는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그뿐이었다.
마치 부패한 것에 슨 곰팡이를 모아 뭉쳐 놓은 듯 흉측한 형상을 한 악귀는 자신이 만들어낸 처참한 아수라장 가운데서 붉은 두 눈을 희번덕대며 울부짖었다.
평화롭던 시골 마을을 밤마다 끔찍한 살육의 현장으로 만드는 부패와 역병의 화신.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역신'이니 '악귀'니 부르며 몹시도 두려워했다.

그리고 여인은 지금 수호목 아래에 앉아, 그토록 무시무시한 악귀와 대면하기 위해 녀석이 활개 치는 밤이 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필시 한이 깊은 영혼일 테지요. 한이 사무치다 못해 제 몸과 마음을 역병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차분한 말씨로 여인은 나직이 읊조렸다.
마치 악귀가 무슨 비 맞은 강아지라도 되는 양 가여워하는 어투에 소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설마 아씨께서는 그 흉악한 녀석을 가엾게 여기시는 건가요?"

"네. 날 때부터 사악한 영혼은 그리 많지 않답니다. 거센 세파로 생긴 상처 때문에 고통받는 영혼이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은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씨께서는 우리를 돕겠다고 하셨잖아요."
"네, 분명 그리 말했지요."

여인은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밤, 악귀와 만나서 '대화'를 나눌 생각이랍니다."
"예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입을 떠억 벌리고 말았다.

"하, 하지만…, 대화라니요. 그 녀석은 무시무시한 악귀라고요!!!"
"본래 영혼들은 파괴와 불행을 원하지 않아요. 그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길 바랄 뿐. 이 마을에 들이닥친 악귀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마음을 열고 다가서면 그 매서운 분노를 잠재울 방법도 보일 거예요."
"그, 그렇지만…! 애초에 영혼이나 귀신 따위와 말이 통할 리 없잖아요! 당최 어찌 대화를 한다는 말씀이신지…."

그러나 소년의 의구심 가득한 질문 공세에도 여인은 오히려 '다 방법이 있지요.' 하며 생긋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온화하고 따스하던지, 하마터면 은보는 '아하, 다 방법이 있군요.' 하며 여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뻔했다.
대화라니. 고작 대화를 나눠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놈은 평화롭던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죽게 했어요. 그러니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고요."
"허나, 피를 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랍니다. 업은 더 큰 업을 부르는 법이니."

여인은 다정하게 어르듯 차분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도령께서도 아무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아 외롭고 쓸쓸해 본 적이 한 번 쯤은 있으시겠지요. 그럴 땐, 물에 잠긴 듯 가슴이 답답해 오고 자신이 길가의 작은 개미보다도 못한 존재가 된 느낌이 들지요. 억울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는 그 설움과 울분이 배가 되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거나 남을 해치는 이들도 생기고요. 악귀란 것들도 대개 그렇답니다. 본래는 선했던 영혼이 생전의 한을 표출하는 거지요."
"……."
"그렇게 타인을 해치는 영혼들은 점차 자아를 잃고 추한 모양새로 변하여 종래엔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잊게 된답니다. 저승에서도 미처 다 갚지 못할 만큼의 업을 쌓아 올리며 제 운명을 파멸로 이끌어갈 뿐…."

안타까움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여인은 이내 호소하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악귀로 인해 괴로운 도령의 마음은 이해하나, 부디 한편으론 그들을 가엾게 여겨주세요. 죽어서도 저승에 들지 못한 채 구천에서, 업의 굴레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영혼들. 그들이 무사히 저승길에 올라 저승에서 정당한 심판을 받고 안식에 들 수 있도록 기원해주세요. 나 또한 여기 우뚝 선 수호목처럼, 이곳에 닥친 액운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터이니."

그렇게 말하며 여인이 손으로 나무의 결을 부드럽게 쓸자,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거대한 나무에 달린 솔잎이 바람에 사그락 하고 흔들 거렸다.


소년 은보는 눈앞의 여인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어디 가문의 양갓집 규수라고 해도 손색없을 외양이라곤 하나 그녀의 곁에 놓인 기다랗고 근사한 칼은, 여인이 분명 칼을 쓰는 '무사'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칼로 귀신을 베어내기는 커녕, 외려 이를 가엾게 여기고 '대화'를 나눈다고 하니.
이건 무사보다는 '만신'이 할 법한 말 아니던가.
허나 목전의 여인은 '만신'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릴만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소년이 보아왔던 여느 만신들과 달리, 맑은 물방울처럼 투명한 빛을 간직한 여인의 두 눈에는 날카로운 귀기 대신 상대를 이해하려는 따스한 시선과 깊은 통찰이 한껏 묻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은보는 여인의 등장 이후로 들었던 여러 경고의 말들을 떠올렸다.
연이은 재액 탓인지, 모두가 여인 앞에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리를 숙였으면서 뒤로는 하나같이 멸시나 두려움 섞인 모난 말을 제각기 내뱉었었다.

'저 아리따운 외양에 마음 줄 생각 말아라. 저 여인의 분위기가 영 범상치 않은 것이 어쩌면 먹잇감을 노리고 온 또 다른 귀신이나 괴물일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낯선 것들은 모두 위험하다. 마음의 빗장을 허물고는 상처를 입혀 영혼을 빼앗아간단다.'
'괜히 말을 섞어 명줄 앞당기지 말고 여인이 자기 일을 할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가장 먼저 먹이가 되어 죽을 게다.'

그러나 소년은 여인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악의나 살기 따위는 일말의 부스러기 조차 없었다.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거라곤 오로지 목초가 푸르게 자라도록 살뜰히 보살피는 초여름의 햇살 같은 따스함, 자상함.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살피는 시선뿐이었다.
꼭 '인간 너머의 존재'가, 말하자면 '천상의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선 세상을 굽어살피는 듯한 다정하고 사려 깊은 시선….
…….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야…!'

불현듯 뇌리에 떠오른 허무맹랑한 생각에 은보는 화들짝 놀랐다.
옆집 할아버지가 들었다면 '예끼, 정신 빠진 녀석.'이라며 꿀밤을 먹였을지도 모를 만큼 어이없는 발상이었다.

'어쩌면, 저 어깨 위에 날개 펼친 금빛 봉황 때문일지도 몰라. 어쩌면 비녀에 달린 화려한 꽃 때문일지도. 어쨌든 저런 걸 달고 다니는 사람을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잖아.'

귀가 새빨갛게 물든 채로 소년은 변명하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문득 소년 은보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종종 들려주셨던 어느 '옛날이야기',
머나먼 옛날에 살던 어느 '신비한 존재'에 대한 전설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딘지 이 여인은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을 떠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외양, 분위기, 품행. 어느 부분이라고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소년이 그동안 상상 속에만 그려왔던 주인공의 모습과 여인은 퍽이나 닮아있었다.

"……."

고민 끝에 은보는 쭈뼛대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아씨. 아씨께선 '단아 낭자 전설'을 들어 보셨는지요."
"'단아 낭자 전설' 이요?"
"예.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종종 해 주시던 옛날이야긴데…. 밤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아씨가 괜찮으시다면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아씨께서 원하신다면요…."

의외의 제안에 놀란 듯 여인의 두 눈이 동그래지자 소년의 양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괜한 얘기를 꺼냈나 싶어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망했구나, 날 실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겠지. 얼빠진 소리나 하는 미덥지 못한 녀석이라고….

그러나, 곧 여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령께선 참 자상하신 분이군요."

잠시 후, 여인은 옆으로 비켜앉아 옆자리를 내곤 소년을 향하여 이리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자, 어서 여기 앉으세요. 아주 재미있겠어요."
"…!"

함께 있던 내내 콩닥콩닥 뛰던 심장이 이제는 쾅쾅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도령'이라 불려본 것이 난생처음이었던 탓이다.
'제발 진정해라, 진정해.' 자신이 만들어낸 고동 소리가 들릴까 조마조마하며 소년은 여인의 옆에 슬며시 앉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어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으흠. 그러니까….
옛날 옛적에, 하늘엔 봉황이 날고 바다에 머리 두 개 달린 거북이 헤엄치던 시절…."


-


옛날 옛적에.
하늘엔 봉황이 날고 바다에 머리 두 개 달린 거북이 헤엄치던 시절.

저 높은 구름 위엔 지고하신 신들과 그 명을 받드는 하인인 '하늘사람'이 살았다.
검을 치켜든 신들의 왕께서 ‘하늘왕’, 어둠 그 자체인 신께서 ‘저승왕’이 되어 각각 산 자와 망자를 돌보시니,
이승과 저승 양쪽에서 조화로운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흔히들 '저승' 이라고 하면 메마른 골짜기와 유황불, 험상궂은 도깨비 같은 걸 떠올리고,
곳곳에 벌받는 영혼들이 고래고래 울부짖는 소리가 메아리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저승에 대한 온갖 낭설은 드넓은 저승세계의 작디 작은 일부일 뿐.

사실 저승은 여기 이승보다도 훨씬 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사시사철 진귀한 꽃이 피고 달콤한 꿀을 찾아 벌과 나비가 노닐며,
향긋한 산들바람 따라 고운 빛깔 깃털을 가진 하늘새들이 파아란 하늘 위를 떠도는 더없이 신비로운 세상이다.

우리가 죽어 저승새의 등에 오르고 나면
그들은 창공을 높이 날아, 어느 넓고 깊은 강 어귀에 선 말없는 사공 앞에 우리를 내려준다.
그를 따라 작은 조각배에 몸을 실으면 어느덧 잔잔하던 푸른 강은 파문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흐르기 시작한다.

바람을 가르고 푸른 강을 건너 건너 한참을 가다 보면 어느덧 저 멀리 크고 웅장한 문이 보이는데,
철갑을 두른 용맹한 무사들이 양 옆으로 늘어서 지키고 있는 거대한 문.
이곳이 바로 저승의 입구, '저승문' 이구나.
이 문턱을 넘고 나면, 비로소 우린 정겨운 모든 것과 영원히 작별하게 된다.

문 너머는 곧바로 기나긴 '저승길'.
전 생애를 속속들이 되돌아볼 수 있을 만큼 기나긴 길.
이 길을 제 두 발로 곧장 걸어가면 지고하신 저승왕의 '심판대' 에서 심판을 받게 되니
살아 생전 존경 받는 부호였건 길가의 거렁뱅이였건 지엄한 심판의 결과, 극락과 지옥을 피할 순 없구나.

눈물로 한 걸음. 한숨으로 두 걸음. 미련으로 세 걸음.
두려운 발걸음을 옮기는 영혼들을 달래주는 건,
오직 길 양옆에 펼쳐진 드넓은 저승의 '꽃밭' 뿐이다.

아름다운 저승의 '꽃밭' 엔 진귀한 꽃들이 아주 많았으니,
개중엔 새 살을 돋게 하는 꽃, 질병을 낫게 하는 꽃, 망자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는 꽃처럼 귀중한 꽃도 있고
곧 태어날 아기의 영혼이 깃든 꽃처럼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꽃도 있었다.

그러니 꽃밭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꽃을 노린 도적이 출몰하였다.
재물을 탐하는 데엔 종의 구분이 없으니 인간이고 마족이고 할 것 없이 구도를 보내어 일확천금을 노렸다.
난폭한 도둑이 모여 한바탕 휩쓸고 나면, 순식간에 꽃밭은 난장판이 되는데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그 피해를 복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승의 꽃밭엔 언제나 호위무사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저승의 일꾼인 하늘사람, '꽃밭지기 무사' 이다.

이 특별한 무사들은 저승왕의 명을 받아 밭에 머무르며 꽃밭과 꽃들을 수호했다.
두꺼운 갑주를 입고 저승왕에게 하사받은 신묘한 칼을 멘 이들은 저승에서도
주야장천 꽃을 돌보고 길가는 영혼을 감시하며 제 본분을 다하였다.

이야기의 주인공, 우리의 '단아' 낭자는 이 꽃밭지기 무사 중 하나로,
저승의 수많은 무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특출난 무인이었다.
낭자는 생사의 질서를 지켜내는 지엄한 명을 받들어,
높은 곳에 위풍당당히 서서 드넓은 꽃밭과 저승을 오가는 영혼을 돌보았다.
본연의 신묘한 능력과 강단 있는 성정으로 주어진 일을 능히 해내니
저승의 왕께서도 낭자를 무척이나 어여삐 여기셨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꽃밭을 순찰하던 낭자의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려 왔다.

우우-

하는 작은 들짐승의 신음 같기도, 도둑놈이 자빠져 우는 소리 같기도 한 소리.
그 수상한 소리를 따라 걸어 무성한 꽃줄기를 헤치자 무언가 수상한 게 보였다.
생채기 가득한 조막만 한 손발, 피와 흙먼지가 엉겨 붙어 산발이 된 머리칼, 그리고 부드럽고 허연 볼.
상처 입은 짐승처럼 한껏 웅크려 끙끙대는 것은 바로 인간의 아이가 아니던가.
그것도 따뜻한 피가 온몸을 도는, 아직은 숨이 붙어있는 자그마한 인간 아이.

단아 낭자는 크게 당황했다.
이승에서 온 온갖 꽃 도둑을 보아왔으나, 이 저승의 꽃밭에 '살아있는 인간 아이'가 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인간 아이란 으레 죽어서만 저승문을 넘어올 진 데, 어찌하여 이토록 험한 꼴을 하고 여기에 있단 말인가?
이 아이를 저승의 침입자로 간주해 마땅한 것인가?

…그래.
모든 건 저승의 법도대로 흘러가야만 한다.
저승의 법에 따르면, 산 자가 생과 사의 질서를 해치고 저승에 들거든
즉시 육신을 빼앗고 그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라 하였으니,
아무리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라도 예외는 없는 것이다.

낭자는 결심한 듯,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검을 쥐어 아이를 향해 휘두르려는 순간.

"… 어머니……."

갈라져 피맺힌 아이의 작은 입술이 오물거렸다.

… 어머니. 어머니….

구슬프고 처량하게 부르는 작은 소리에 낭자의 손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본래 저승의 무사들은 죽음을 업으로 삼는지라 성정이 냉하고 감정에 무디다.
그러니 아이의 울음 따위는 무사들에게 있어 길가의 귀뚜라미 울음소리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 허나 어째서인지, 무사가 된 이래 처음으로 낭자는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려치려 하여도 손이 도저히 움직이질 않는 것이, 마치 강한 힘이 작용하여 두 손을 뒤로 당기는 듯하였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낭자는 결국 뽑은 칼을 칼집에 돌려놓고 말았다.

내 칼은 오직 꽃을 노리는 도적을 베는 칼.
이 아이가 도적임이 명확해지고 나면, 그때 베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낭자는 아이를 처분하는 대신 두 팔에 안아 올렸다.
그리곤 무서운 지옥이 아닌 꽃밭 근처의 자신의 초소로 아이를 데려가, 깃털처럼 보드라운 침상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아이가 다시 기운을 차릴 때까지 낭자는 아이의 곁을 지켰다.
때론 마른 입술에 물을 흘려주고, 흐르는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극진히 돌봐 주었다.
가까이서 보는 아이의 몰골은 밭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욱 참담하였다.
온몸엔 상처투성이, 밤톨처럼 동그랗고 앳된 모습은 겨우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웃음만 가득하여도 모자랄 터인 얼굴 위론 생기는커녕 진득한 수심만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대체 어찌 이런 작고 어린아이가 험난한 길을 뚫고 저승까지 왔을까.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험을 했을 테지.

작은 생명이 만들어 내는 숨결에 마음이 강렬하게 이끌린 것인지, 낭자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곤 눈을 감고 꼬옥 쥔 손을 자신의 볼에 살포시 가져다 대었다.
숨이 붙어있는 아이를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 걸까.
보드라운 살갗 너머로 들려오는 두둥 두둥 강인한 생명의 노래. 숨을 내쉴 때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쌔액 쌔액 소리.
저승의 무사의 차가웠던 마음은 말랑한 손끝을 타고 오는 온기에 구들방의 온돌처럼 서서히 덥혀지기 시작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우리 아기 잘도 잔다.
낯설고도 그리운 노래를 흥얼거리며 낭자는 아이 옆에 아주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
.

"하늘 나으리, 부디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세요!"

마침내 눈을 뜬 아이는,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별안간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더니
낭자 앞에 넙죽 엎드려 외쳤다.

"나는 '밤이'에요.
올해 나이 다섯이고,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가난하지만 어머니와 손잡고 행복하게 살아왔는데,
얼마 전 어머니는 들이닥친 도적의 칼에 그만 죽고 말았어요.

홀로 빈 집에 덩그러니 남고 나니
눈 감을 때마다 두 눈 부릅뜨고 피 토하며 죽던 어머니 모습이 보이고
귀를 막아도 어머니 원통한 비명소리가 들려와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머니를 다시 찾기 위해
시체에 돌돌 말린 멍석에 숨고,
저승새의 깃털 사이에 숨고,
죽은 할배의 다 삭아서 너덜너덜해진 도포 자락에 숨어,
가끔 숨을 참고 자주 눈물을 참으며 여기까지 왔어요.

하늘 나으리.
부디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만일 어머니 손 잡고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죽어 어머니와 함께 있도록 해주세요.

저는 이제 홀로 남는 건 싫습니다.
죽기보다 싫습니다."

아. 차라리 펑펑 울며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벌건 낯으로 울며불며 떼를 썼다면 쉬이 차가운 마음 먹고 멀리 밀어냈을 터인데.
그러나 아이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마른 장작처럼 가슴 속 불씨를 댕기고 거대한 화마를 일으켜,
이제 낭자의 가슴 안은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긴 세월 동안 저승의 길목을 지키며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수만 가지 영혼들을 보아 왔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이는 없으며,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없다.
그런데 왜 이 아이의 사연만은 나의 가슴을 이토록 미어지게 만드는가? 대체 무엇이 그리도 특별하기에…?
그러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사실 낭자의 마음 깊은 곳은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
처음 아이와 마주한 그 순간, 낭자는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머나먼 태곳적 하늘사람이 되던 어느 날 저승왕의 손에 덧없이 지워진 '이승의 기억'을.
그러나 너무 깊게 뿌리 내려 미처 지워지지 못한 기억의 부스러기 안에
오랫동안 곤히 잠들어 있던 '어느 그리운 존재'를.

…그렇구나, 먼 옛날 내게도 있었을지 모른다.
중대한 하늘의 의무와 맞바꿔야만 했던,
지상에 홀로 남겨두고 온 작고 애달픈 미련. 못다 이룬 꿈.
이제는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귀하고 사랑스럽던 나의-

"…아가…."

단아 낭자는 팔을 뻗어 마치 귀중한 것을 대하듯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네 어미를 돌려주마."
"정말인가요, 하늘 나으리? 정말로 저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래. 정말이다."

내내 웃지 않던 아이의 낯 위로 그제야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동시에, 여전히 한기가 남아있던 낭자의 눈에도 비로소 따스한 빛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낭자는 해말간 볼 위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손으로 닦아주며 다짐하듯 힘주어 덧붙였다.

"더는 홀로 남아 슬프지 않도록 내가 너를 보살피겠다. 약조하마."

이루지 못한 이승의 인연.
어느새 단아 낭자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한 미련에 모든 것을 걸고 만 것이다.

.
.

그리하여 우리의 꽃밭지기 무사, 단아 낭자는 꼬마 '밤이'와 함께 길에 올랐다.
본래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나,
낭자는 등에 업힌 아이를 긴 머리칼로 덮어 감쪽같이 감춘 뒤 저승길 끝 망자의 심판대로 향하였다.
길은 멀고 넘어야 할 관문은 많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매서운 감시자들로부터 아이를 지켜야 하는 상황.
그러나 하늘사람인 낭자에겐 난관을 타개할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니
바로 '신칼'을 이용해 영혼을 다루는 힘이었다.

저승왕이 하사하신 이 신칼은 일종의 무구로서,
본래 형체가 없는 영혼을 눈에 보이게끔 만들고
영혼들이 칼을 든 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는 신묘한 힘이 깃들어 있는데,
뛰어난 무사였던 단아 낭자는 무구에 깃든 힘을 거꾸로 이용하여
자신을 영혼처럼 만들어 허공을 날거나, 칼에 영혼들을 불러 모아 거센 돌개바람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본래 꽃밭과 저승의 질서를 지키는 데만 사용한 능력.
그러나 이제 낭자의 칼날은 저승의 질서가 아닌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같은 저승의 무사들을 겨누었다.
날으는 도에 자신을 실어 걸음으론 몇 날이 걸릴 거리를 단숨에 날고,
맹렬한 돌개바람을 날려 관문지기들의 눈을 가리면서 낭자와 꼬마 밤이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더러 살아있는 인간의 기척을 눈치채는 존재들도 있었으나 걱정할 건 없었으니,
신칼로 하여금 낭자의 의지를 따르게 된 영혼들이 모여들어 밤이의 기척이 드러나지 않도록 포옥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저승의 심판장에 당도한 낭자와 밤이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극락과 지옥으로 가는 갈림길 주변으로 다가올 심판을 기다리는 영혼의 대열이 길게 늘어서 있는 가운데,
창백한 낯 사이에 숨어들어 한참을 두리번대던 아이가 마침내 떨리는 소리로 말하였다.

"저기…! 저 갈래길에 우리 어머니가…!"

저기 저 멀리, 꼬마를 똑 닮은 한 여인의 영혼이 영롱한 빛이 어른대는 길 위를 걷고 있었는데,
그는 막 이승의 업을 벗어 던지고 영원히 극락 세상으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금쪽같은 자식이 기어코 저승까지 따라서 온 걸 보자, 아이의 어미는 그만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이 어린 것을 두고 홀로 극락에 들 순 없습니다.
어미 없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내 자식을 두고 어떻게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쇤네는 다시 이승에 돌아가겠습니다.
또다시 죽어 지옥 불에 태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가 내 아이, '밤이'의 곁에 남겠습니다."

어머니의 영혼은 단아 낭자 앞에 무릎 꿇고 간절히 빌었다.
지치고 고된 삶 끝에 비로소 극락으로 떠날 수 있게 됐건만,
아이의 어미는 기꺼이 영원한 행복과 찰나의 행복을 맞바꾼 것이다.
…이 애끓는 마음을, 깊은 정을 낭자라고 모를까.
그 옛날, 하늘 가던 날.
그녀 자신도 바닥에 넙죽 엎드려 말했을 터다.
'이 어린 것을 여기에 두고 어찌 홀로 하늘에 들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눈물은 이승에서 마저 흘리고, 지금은 나를 따라오세요."
단아 낭자는 재빨리 여인의 영혼을 일으키곤 흐르는 눈물을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그리곤 다시 아이를 등에 업고 어머니의 영혼을 신칼에 거두어, 왔던 길을 되돌아 저승의 강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출발할 때만큼 순탄치 않았다.
이미 수상한 움직임을 보고받은 저승의 무사들이 일제히 낭자의 행보를 뒤쫓고 있는 데다
따가운 감시의 눈총에서 두 명을 한 번에 지켜야 하니, 낭자가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허나 낭자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날카로운 화살이 갑옷을 뚫고 몸에 박히고, 머리 여러 개 달린 괴수가 다리를 물어뜯어도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낭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앞을 향해 전진하였다.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이승과 이어진 강'을 향하여 피 묻은 발걸음을 힘겹게 옮겨 나갔다.

.
.

저승문 앞 강어귀엔 보랏빛 여명이 드리우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하여 적을 막아낸 단아 낭자는 고된 줄도 모르고 서둘러 작별할 준비를 하였다.
물 위로 꽃줄기를 엮어 만든 조각배를 띄운 낭자는,
저승의 꽃밭에서 따온 꽃송이를 곁에 있던 영혼의 이마에 슬쩍 문질렀다.
그러자 곧 아이의 어머니의 창백했던 낯에 혈색이 돌아오고 흐릿했던 눈에 생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여인이 감격스러운 한숨을 토해내자 낭자는 깊이 안심하며 말하였다.

"이 강을 건너면 다시 이승입니다.
죽은 영혼이 명부에 없는 새 육신에 깃들어 저승문을 나섰으니,
저승의 존재들도 그대 모자를 쉬이 찾진 못할 것입니다.
추격이 가까워지기 전에 어서 강을 건너 여길 떠나세요."
"고맙습니다, 하늘 나으리.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둘이서 주어진 명대로만 오손도손 사세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입니다."

낭자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손을 잡아주곤 이번엔 꼬마 밤이에게 다가섰다.
보드랍고 해말간 아이의 얼굴 위 수심은 어느덧 걷히고 어머니를 되찾은 기쁨만이 들어차,
실로 어린아이다운 해맑고 예쁜 웃음이 만면에 떠올라 있었다.

"아가야. 네가 곁에 와준 덕에 나는 실로 기뻤다. 이건 너에게 주는 작별 선물이니 받아주렴."

그렇게 말하며 낭자는 아이의 옷섶에 붉은 꽃 한 송이를 넣어주었다.

"이 꽃은 귀하디 귀한 하늘의 꽃. 이걸 달여 먹으면 어떤 병이든 치유할 수 있단다. 혹여 네 어미가 또다시 네 곁을 떠나갈 것 같으면 그때 이 꽃을 사용하 거라.
그럼 다시는 외로이 홀로 남지 않게 될 게다. 알겠니?"
"…나으리…."

내내 꾹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기라도 한 듯 꼬마 밤이는 눈가를 연신 문질러 대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늘 나으리. 어머니를 돌려주시고 저희를 지켜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니, 다 잊어도 좋다. 다 잊고 부디 행복하기만 하려무나."

밤톨 같은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낭자는 아이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꼬마 밤이도 꼬옥 쥔 주먹 손을 내려놓곤,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낭자를 향해 씨익 웃었다.
낭자와 아이의 짧고도 깊은 인연은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우스운 얼굴이 되어
저 멀리 떠오른 아침 해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렇게 단아 낭자와 모자는 작별을 고했다.
낭자는 모자를 태운 조각배를 잔잔한 강 물결 위로 띄우곤 멀어져가는 형체를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승 무사들의 함성이 점차 커지고 온몸에 포승줄이 칭칭 감기는 동안에도 낭자는 강에서 시선을 거둘 줄을 몰랐다.

아, 대체 이 감정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이 감정은….
무사로서 본분을 저버리고 저승왕의 명을 거역한 것에 대한 죄책감인가?
아니, 이건 죄책감이나 허무 같은 무거운 감정이 아니야.
오히려 오랜 염원을 풀어내고 깊은 갈망을 해갈한 듯 후련하고 홀가분한….
저승의 무사로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그때, 귓전에 '까르르'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느껴지자
낭자는 비로소 깨닫고야 말았다.

…그렇구나. 이건 '만족감' 이로구나.
본분이 아닌 마음에 오롯이 충실하고 보상을 받아 생겨난 깊은 만족감.

나는 그저 아이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야.
지상에 홀로 남겨두고 온 작고 애달픈 미련, 못다 이룬 꿈 대신
눈앞의 그 아이가 웃길 바랐던 거야….

눈 부신 해를 등지고, 무사들의 손에 끌려 심판대로 향하며 낭자는 벅찬 마음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이제 나에게 후회는 없다.
후회는 없어.

그날, 단아 낭자는 지고하신 저승왕 앞에 무릎 꿇었다.

저승왕께서 말씀하시길,

"미련한 꽃밭지기야. 인간은 '잠깐 피고 지는 들꽃'에 불과하거늘.
어찌 그들을 위해 생사의 규율을 거스른단 말이냐.
저승의 질서가 무너지면 세계의 질서도 무너지는 걸 네가 정녕 모르느냐."
"……"
"게다가, '죽음을 거스르는 자'는 죽음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저승의 무사인 네가 모를까?
이제 그들의 영혼은 네 망동으로 인해 영원한 지옥의 불길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 모자가 죽어 다시 저승에 오거든, 그 둘은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니."

매서운 불호령이 검은 두건을 넘어 저승왕의 거처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거기에 있는 모든 이가 두려워하며 다리를 후들거렸다.
그러나 낭자는 덤덤히 앉아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할 뿐이었다.

"생과 사를 관장하는 저승의 왕이시여. 질서의 수호자시여.
제가 그들의 벌을 모두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마음이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하였으니 소인은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이런 소인의 불충과 망동에 형벌을 더하시고, 저 가엾은 모자에겐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곡히 비나이다."

반성의 기미는커녕 총기로 가득한 두 눈을 보자 저승왕께선 진노하며 깊이 탄식하시었다.

"불경한 것. 네가 하늘사람이 된 지 한참이 지났거늘,
어찌하여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고 인간일 적 습성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가.
내 너를 어여삐 여겨 지금껏 아껴왔건만, 이제는 그 어리석음이 차마 용인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너는 응당 생사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저승의 법을 업신여긴 죄를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신 후 이어서 큰 소리로 모든 저승에 이르시길,

"들어라. 저승의 질서를 어긴 자는 천벌로 엄히 다스리는 것이 이 지하세계의 법도. 네가 그리도 벌을 받고 싶다면 그리하라.
침입자를 비호하고, 저승의 물건을 남용하며, 죽은 자를 되살려 저승의 질서를 어지럽힌 중죄.
그에 더하여 너는 인간 두 명분의 벌을 함께 받으리라.
너는 지옥의 불길에서 형기를 마친 후, 영원히 이승에 유배될지어다.
그리고 연약한 인간의 몸에 갇혀 죽지 못한 채 슬픔과 분노, 굶주림과 고통, 질병의 공포를 무한히 겪으라.
실로 죽고 싶더라도, 너는 결코 저승 문턱을 넘지 못하리니 네겐 극락과 윤회 또한 허락되지 않으리라."

지옥 불, 이승으로의 유배.
거기다 죽지 못해 살도록 만드는 잔혹한 '불사의 저주'.
낭자에게 내린 무시무시한 선고는 온 저승에 일순간 싸늘한 침묵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단아 낭자는 형벌 따윈 개의치도 않으며, 불꽃처럼 타오르는 저승왕의 눈을 직시하곤 재차 물었다.

"제가 그 모자의 벌을 다 받고 나면, 분명 그들은 정당한 심판을 받고 극락에 들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래. 내 너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이니 이를 물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제야 낭자는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되었다.
나는 나 하나의 고통만으로, 모자의 행복을 온전히 지켜낸 것이다.

"…허나, 업은 더 큰 업을 낳는 법."

무사들의 손에 붙잡혀 지옥으로 떠나려는 낭자의 등 뒤로 무겁고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 형벌의 진정한 무서움은 육신의 괴로움에 있지 않으니, 그 의미를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낭자의 마음 안엔 여전히 밝게 빛나는 아이의 맑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서릿발 같은 저승왕의 말 따위는 삽시간에 사르르 녹아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시시각각 살과 뼈를 불태우는 맹렬한 화염, 들끓는 용암, 달궈진 사슬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엇도 낭자 안에 자리한 아이의 웃는 얼굴을 거둘 수는 없었다.
지상에 짧게 피고 지는 들꽃을 사랑한 무사는 그들의 행복을 간절히 염원하며
지금 겪는 이 고통이 곧 모자의 행복이리라 믿고 무서운 형벌을 견뎌내었다.

이후, 지옥에서의 긴 긴 세월이 흘러 마침내 단아 낭자는 이승 땅을 밟았다.
모든 걸 박탈당한 채 인간의 육신에 갇힌 낭자에게 남은 것은
신칼 한 자루와 망자와 소통하고 영혼을 다루는 미약한 하늘사람의 힘뿐이었다.

인간의 육신을 하였으나 불사의 저주로 인해 죽어도 저승에 들지 못하게 된 낭자.
낭자는 평범한 인간처럼 심한 상처를 입거나 병에 들어 숨을 거두어도
그 영혼이 저승의 입구에서 쫓겨나 고통 속에 되살아날 수 밖에 없는 기구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육신이 되살아나는 끔찍한 고통은 감히 지옥 불과 견줄 정도여서,
낭자의 삶은 이승에 있되 반쯤은 지옥에 걸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망자들과 어울리며 몇 번을 죽어도 죽지 않는 여인을 받아주는 인간은 없었다.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인의 존재는 인간에게 있어 공포와 질시의 대상이었고,
드물게 호의를 보이는 인간이 있어도 이내 낭자를 두려워하거나 해치고 싶어 하였다.
결국 가엾은 낭자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홀로 쓸쓸히 지상을 떠돌게 되었다.
오래전 만났던 소중한 인연, 이제는 세월이 너무 흘러 세상을 떠났을 모자를 떠올리며 외로이 살아가게 되었다.

원망이 쌓일 만도 하건만, 외려 단아 낭자는 인간의 유한한 삶에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
인간 세상엔 한 맺힌 영혼, 그리고 옛날 자신을 찾아온 아이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낭자는 자신의 신칼과 미약하게 남은 하늘사람의 능력을 활용해 '만신'이 되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돌보는 수호자가 되어
주어진 운명의 의미를 찾아 나갔다.

.
.


은보는 문득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여인을 앞에 두고 신나게 조잘대는 사이 어느덧 저물어가는 해와 떠오르는 별이 나뭇가지 끝에 걸려있었다.
마침내, 밤이 찾아온 것이다.

"벌써 날이 저물다니. 아씨 지루하신 줄 모르고 저 혼자 떠들어댄 게 부끄럽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나도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참입니다. 도령께선 실로 훌륭한 이야기꾼이군요."

머쓱해하며 뒤통수를 벅벅 문지르는 소년에게 여인이 다정히 말했다.
예상치 못한 칭찬 공세에 은보는 양 볼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헤헤, 과찬이세요…. 그저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이야기에 살을 좀 더 붙였을 뿐인데…."

수줍게 웃으며 은보는 슬쩍 여인의 기색을 살폈다.
정말로 얼굴 위 지루한 기색 하나 없는 것이, 여인은 소년의 긴 긴 이야기를 퍽 진지하게 경청한 듯하였다.
그리고,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인의 맑은 눈 너머론 어딘가 그리운 추억을 떠올린 듯한 아련함이 역력히 묻어나 있었다.

"허나 영혼과 어울리는 저승의 무사라니. 듣기엔 무서울지도 모르겠군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신칼을 빼어든 단아 낭자는 상상만 해도 용맹하고 멋지다고요!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아 낭자를 좋아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 은보는 눈을 반짝이며 허공에 칼 휘두르는 시늉을 몇 번 했다.

"몇 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았을 때,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단아 낭자 이야기를 떠올리곤 했어요. 제가 이야기 속의 꼬마 아이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러면 꼭 상상 속의 단아 낭자가 나를 지켜주고 슬픔을 위로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잠에 잘 들 수 있었어요."
"어머나, 그런가요."
"네. 단아 낭자는 언제나 자기의 온 힘을 다해 약한 자들을 지켜줘요. 천상에서 쫓겨나 형벌을 받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고요. 그래서 저는 단아 낭자 전설이 좋아요. 비록 전설이긴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를 지켜주는 마음씨 곱고 강한 이가 있다는 거니까요. 그 생각을 하면 전 언제 어디서든 용기를 낼 수 있어요."

한참 신나게 말을 이어가던 소년은 아차 싶어 저도 모르게 '아이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어지는 여인의 침묵에, 또다시 자신이 실없는 소리를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아씨. 넌 실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고 옆집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계속 바보 같은 말을 늘어놓게 되네요."
"아니요. 전혀, 전혀 바보 같은 말이 아니랍니다."

여인은 가슴에 손을 얹고 소년의 두 눈을 곧게 응시하며 말했다.

"오히려 방금 도령의 그 말들로, 나는 나의 삶 전부를 보상받았는걸요."

그때, 저 멀리서 겁에 질린 비명이 들려왔다.

"놈이다! 악귀 놈이 나타났다!!!"
"…!"
"…!"

마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여인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어둠이 드리운 저편으로 심상치 않은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가볍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옆에 기대어 놓은 검을 집어 든 여인은 은보를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가 작별할 때가 되었군요. 도령께서는 어서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피하세요."
"자, 작별이라니…. 아씨. 정말로 가실 생각인가요?"
"가야지요.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걸요."

여인은 한 손을 뻗어 말없이 선 은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도령을 만나, 나는 너무도 기뻤어요. 오랜 시간 이 세상을 떠돌았으나 도령처럼 다정한 분은 그리 많지 않았답니다."
"하, 하지만…."
"아까 도령께선 내 삶이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걸 일깨워주었지요. 이제 나는 모든 게 허망해지는 순간마다 도령의 말을 떠올릴 거예요. 평생 도령을 잊지 않겠어요."
"하지만…. 아씨 혼자서는 위험해요. 저도 함께 가게 해주세요."

그러나 여인은 미소를 머금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정하고도 단호한 작별의 신호였다.

"걱정 마세요, 은보 도령."

이제 여인은 칼의 손잡이를 쥐어 천천히 칼을 뽑았다.
칼집을 벗어나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칼날 위로 신묘한 푸른빛이 서리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칼의 중심으로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대가 잘 알다시피, 나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 그러니 걱정할 이유도 없답니다."
"…!"

그리곤 잠시 뒤, 여인은 악귀가 있는 방향으로 칼을 던져 일순간 모습을 감추었다.

"……."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은보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여인이 남겼던 예사롭지 않던 인상과 말들. 신묘한 칼과 눈부신 푸른 빛.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하고도 명쾌한 결론이 소년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쳤다.


아씨는 '단아 낭자'야.

오늘 나는, 진짜 단아 낭자와 마주한 거야.


"……."

굳은 결심을 담아 은보는 여인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일개 힘없는 소년에 불과한 자신은, 무시무시한 악귀를 피해 도망쳐 몸을 피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소년은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여인이 사라진 쪽을 향하여 발걸음을 돌리곤, 황급히 쏟아지는 인파를 헤치고 마을 어귀를 향해 빠르게 두발을 달려 나갔다.

-

짙은 어둠이 드리운 마을의 어귀.

붉은 기운으로 물든 별이 비추는 하늘 아래, 작고 아담한 오두막 위론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짚을 엮어 만든 엉성한 울타리와 대문짝은 하나같이 부서져 내려있고, 그 위로는 짐승이 물어뜯은 듯 갈기갈기 찢긴 금줄이 흩어진 가운데, 불길한 검은 곰팡이 같은 무엇이 마당 군데군데에 묻어난 작은 오두막의 모습은 마치 오랜 시간 방치되어 검게 삭아가는 생명체를 연상케 했다.

잠시 넋을 잃고 이 괴이한 광경을 바라보던 은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부서지는 걸 간신히 피해낸 울타리 뒤에 서둘러 몸을 감추었다.

'저기 있다…!'

머리만 쏙 내밀어 주위를 둘러보던 소년은, 조심스럽게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였다.
거무죽죽한 오두막과 사뭇 대비되어 보이는 여인은, 마치 짐승의 배 속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는 사슴처럼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이미 초토화된 마당 안에 들어섰다.
바닥에 수묵으로 그려낸 듯 길게 이어진 검은 궤적은 오두막 안을 향해 있었다.
달칵거리는 문짝 사이와 찢어진 창호지 위로 솟아난 붉은 액체의 흔적. 틈새에서 연신 새어 나오는 거친 그르렁 소리와 알 수 없는 검은 뭉텅이.
짐작건대, 악귀는 이미 집 안까지 쳐들어가 모든 식솔의 피를 보고만 듯하였다.

한 손에 푸른 빛이 일렁이는 칼을 쥔 그녀는 수묵으로 그려낸 듯 흙바닥 위로 길게 이어진 검은 궤적을 따라 걷다, 이내 어느 작은 문짝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곤 문짝 너머를 향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대이군요. 그 악귀라는 것이."

---!

낯선 기척을 느낀 듯 불규칙하게 이어지던 거칠고 낮은 소리가 일순간 멈추었다.
그리고 찰나.
오두막에 난 모든 틈바구니로 짙은 검은 곰팡이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여인의 앞으로 뭉쳐 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나타난 것은 검고 집채만 한 몸뚱이.
마치 검댕이나 곰팡이의 군체, 우주에 난 구멍같이 생긴 괴상한 형체 위로는 섬뜩한 붉은 두 눈깔이 떠올라 목전의 존재를 향한 맹렬한 적개심과 광기로 번뜩였다.
그러나 정말로 끔찍한 것은 놈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뭉텅뭉텅 흘러내리는 검은 덩어리였다.
어디서도 맡아보지 못한 끔찍한 악취를 풍기고 있는 그것은, 방금까지 녀석이 신명 나게 흩어낸 생명의 부패한 살점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악귀란 놈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흉측하고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 우아아-.


악귀는 마치 사람이 우는 듯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여인 가까이 다가섰다. 흡사 먹잇감을 탐색하는 맹수나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허나 여인은 위협에도 꿈쩍하지 않고, 슬픔 가득한 눈으로 목전의 악귀와 담담히 눈을 마주하였다.

"어떤 원한이 이토록 깊기에 이런 일을 벌였단 말인가요. 어떤 멍에를 졌기에 이토록 서글픈 모습이 되었단 말인가요."

낮에 소년 은보도 들어보았던 동정심 가득 어린 사근한 목소리. 이어서 여인은 손에 든 칼을 거두고 눈앞의 악귀를 향해 조심스레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그러니 분노를 거두고 그대가 짊어진 서글픈 것들 전부 내게 털어놓으세요. 그대의 슬픔과 분노는 내가 전부 품을 터이니, 이젠 모든 걸 내려놓고 홀가분해 지세요."

그러나 악귀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듯 거친 울음소리를 연신 토해내며 붉은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아아-. 크아아아-.

먼저 행동을 취한 것은 악귀였다.
악귀는 손 비슷하게 보이는 부위를 휘둘러 점차 다가오는 오른팔을 휘감고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는 강한 악력으로 자신을 향해 맹렬히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아앗!"

놈의 손이 닿은 부위에 수포가 다닥다닥 돋아나기 시작하자, 여인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비명을 질렀다.

'안돼…. 이러다간 단아 아씨가 당하고 말겠어.'

계속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은 황급히 곁에 있던 적당한 크기의 돌을 집었다. 서둘러 놈의 주의를 돌려 여인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야만 했다.
허나 이어지는 악귀의 괴이한 행동에 소년은 그만 하려던 모든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놀랍게도 놈은 다른 한 손을 들어 여인의 머리칼에 꽂힌 금빛 비녀를 빼내더니 고이 쥐고선 여인을 그냥 놓아주었던 것이다.

우우우-. 우우우-.

악귀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비녀를 만지작거렸다.
흥얼흥얼 하는 찢어진 음을 내며 비녀를 얼굴에 비비적대기도 하다가 이내 뾰족한 부분으로 자기의 몸을 연신 찌르며 새된 비명을 지르기도 하였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광경이었으나, 소년은 왜인지 악귀가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저놈….'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니, 악귀의 시선은 분명히 비녀에 달린 특정한 장식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비녀에 달린 '커다란 붉은 꽃'이었다.
아무래도 여인과 대면했던 첫 순간부터 악귀가 줄곧 노렸던 것은 비녀에 달린 그 '붉은 꽃'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대…. 이 꽃을 알고 있군요."

소년과 같은 사실을 깨달은 듯, 여인이 악귀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이 꽃은 분명히 하늘세상에서만 피는 진귀한 하늘꽃일진데, 어떻게 그대가 이걸…."

그러자 아주 놀랍게도, 이번엔 악귀가 거의 알아듣기도 힘든 뭉개진 음성을 내며 여인의 물음에 답을 하였다.

…….
…어…머니…. 어머… 니….
….

"…설마…."

그리고 일순간.
소년은 여인의 동공이 활짝 커지는 것을 보았다.

"설마, 너는……."

눈가에 삽시간에 고인 눈물은 양 볼을 타고 비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침내, 우리가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여인은 눈앞의 악귀를 향해 가까이 다가서 양팔을 쭉 펼쳤다.

"이리 오렴. 우리 함께 해후를 나누자 꾸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전부 말해보렴. 아가야."

그리곤 검고 흉측한 몸을 있는 힘껏 품에 안았다.

곧이어 푸른 빛이 주위를 뒤덮고, 소년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기억이 파도처럼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
.

낭자와 헤어진 후, 꼬마 밤이는 어머니와 무사히 지상에 돌아왔다.
죽었던 이가 그 어느 때보다 생기로운 모습으로 살아서 돌아오다니.
사람들은 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하늘의 보호를 받았다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모자는 힘을 합쳐 다 쓰러져가는 집을 고치고 버려진 밭을 일구어 다시 생계를 이어갔다.
특히 낭자가 선물한 귀한 하늘꽃은 모자에게 길운을 안겨주어,
비어 있던 곳간엔 차곡차곡 쌀이 채워지고 거미줄 쳐진 궤짝엔 금전이 모여들었다.
원체 소박하고 정이 많던 아이의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이웃과 부를 나누었고,
마을의 모두가 이를 기뻐하며 하늘꽃이 불러온 기적이라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약간 흐르자, 이 '기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모자에게 찾아온 부와 행복을 질시하는 이들이 모여 수군대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해, 마을에 대 흉년이 들자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다.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이 흉년은 우리 마을에 내린 하늘의 저주야.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니 하늘이 노한 게야.'
'나는 애당초 그 모자가 싫었소. 원래 우리가 가져야 할 몫을 자기가 다 차지하고는 선심 쓰듯이 나눠주는 꼴이란.'
'맞소, 애초에 그 하늘꽃을 나누면 다 같이 부유해질 텐데. 혼자 행운을 독차지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오?"

이어지는 흉년에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이 말에 쉬이 동조하여 모자에게 멸시의 화살을 겨누었고,
모자는 순식간에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밤, 마을의 장정 여럿이 횃불과 몽둥이를 들고 아이의 집 마당에 모여들었다.
겁에 질린 아이와 어머니를 흙 바닥 위로 끌어내어 물은 건, 바로 하늘꽃의 행방이었다.


'그 꽃은 저희 어머니를 살리는 꽃이어요! 하늘 나으리와 약속했어요. 이 꽃은 반드시 어머니를 위해서 쓰겠다고요! 그러니 제발 꽃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

아이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자, 이내 장정들은 '잔혹한 회유책'을 쓰기로 했다.
둔탁한 타격이 마당에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자,
짓밟힌 끝에 고통을 이기지 못한 아이는 결국 하늘꽃을 무뢰배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야, 이 놈이 드디어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이리 피떡이 다되어서 내어줄 거면 진즉 제 어미 사지가 멀쩡할 때나 줄 것이지. 미련한 놈.'

탐욕스러운 손들이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와 제각기 꽃잎과 줄기를 뜯어내자,
하늘꽃은 몇 초 뒤엔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작은 부스러기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자, 이제 어쩌면 좋지? 의원이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내버려 둬. 어차피 한 번 죽었다 산 몸인데 뭐. 먹이 찾으러 온 들짐승들이 알아서 해결할 게야.'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잠깐. 이 녀석을 흉년을 물리칠 제물로 쓰면 어떤가?'
'그거 좋은 생각이다. 어차피 죽을 몸이라면 쓰임새라도 있어야지.'

잠시 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아이는 검은 항아리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곤 작은 밥 덩이를 항아리 입구 위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둔 채 제각기 갈 길을 가버리고 말았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으로 윙윙대는 뜨겁고 깊은 항아리 속에서,
아이는 다 쉬어버린 밥 덩이에 애타게 손을 뻗다가 혼절하기를 반복하였다.
때론 항아리를 깨보기 위해 작은 주먹으로 유리를 두드리기도 하고, 빽빽 울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봐 주는 이는 없었다.
이미 숨을 거둔 어머니도 아이를 도울 순 없었다.

이렇게 차가운 무관심 속에서, 아이의 생명은 소리 없이 꺼져갔다.
점점 붉게 물드는 두 눈, 가죽만 남아 검게 변해가는 몸으로 맞이하는 생애 마지막 순간.

너무 짧고 너무 다난했던 인생의 끝에서, 아이가 떠올린 것은 오직 하나.

분노.
매서운 분노뿐이었다.

갓 태어난 악귀를 잡아 가두기 위해 항아리 뚜껑을 열었을 때, 항아리 안에서 솟아난 검은 어둠은
차례로 주위 사람들, 곁에 있던 어머니의 시신, 종래엔 마을을 통째로 집어삼켰다고 한다.
마른 들에 화마가 번져나가듯 분노는 그칠 줄 모르고.

결국, 분노에 눈이 먼 아이는 이제 자신이 왜 분노하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된 채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

.
.


'… 업은 더 큰 업을 낳는 법.
이 형벌의 진정한 무서움은 육신의 괴로움에 있지 않으니, 그 의미를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먼 옛날 저승왕의 냉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여인은 비로소 그 말에 숨겨진 무서운 속뜻을 깨우쳤다.

"저승왕께선 이미 알고 계셨던 거야. 네가 타고난 비참한 삶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그리고 생사의 질서를 거스르려는 나의 행동이 얼마나 작고 부질없는 것인지 전부 다…."

자신이 가진 걸 다 바쳐 막아내려 했으나, 막을 수 없는 강력한 굴레.
이로 인해 처참하게 짓밟힌, 마음에 고이 품었던 소중한 들꽃.
이 모든 결과를 목격하는 것이, 여인에게 내린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던 것이다.

꽉 메인 목을 추스르며 여인은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난 너 하나만을 떠올리며 그 모든 고통을 견뎌왔는데, 정작 너는 의지할 것 하나 없이 이리도 아프기만 했구나. 이리 가혹한 일을 겪고 긴 세월 동안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니. 미안하구나…."

눈물로 젖은 여인의 뺨과 몸 군데군데가 화상을 입은 듯 벌겋게 올라와 있었다.
악귀의 몸에 직접 닿은 탓에 몸이 점차 삭아가는 탓이었다.
그래도 여인은 팔에 힘을 주어 검은 형체를 꼬옥 안고는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래도, 더는 죄 없는 이들을 해치면 안 돼. 아가. 업을 쌓으면 쌓을수록 너는 더욱더 괴로워질 뿐이란다."

잠잠했던 악귀는 다시금 거세게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이제는 마구 울부짖으며 손톱 같은 것을 세워 자신을 힘주어 안고 있는 몸의 어깻죽지를 마구 할퀴기고 살점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허공에 붉은 방울이 튀어 올라 별처럼 반짝이자 여인의 흰 옷자락은 하늘의 붉은 꽃처럼 차츰차츰 물들어갔다.

"그래, 그렇게 한을 내게 전부 풀어놓으려무나. 마음껏 응석 부리고 울고 화내거라. 불같은 속이 뻥 뚫려 후련해질 때까지 모조리 다 풀어내거라."

그리 말하며, 여인은 입술을 잘근 물고 비명을 삼키며 잠자코 악귀의 공격을 받아들였다.


연이은 잔혹한 공격에 인간의 육신은 덧없이 부서져 나갔다.
길길이 날뛰는 악귀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는 여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치명상을 입어도 여인은 악귀를 안은 팔을 놓지 않고 굳건히 감내하였다.
차가운 바닥에 고꾸라지고 눈동자 너머에서 생명의 기색이 꺼져가는 때에도 검은 형체를 붙잡은 손만은 놓지 않았다.
이제서야 비로소 이어진 연을 다시는 절대 놓지 않겠다 선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헐떡이는 숨으로 자장가를 연신 흥얼대며 검은 몸을 쉬지 않고 쓸어내리며 토닥였다.

이어지는 고통에 끝이 있으면 좋으련만.
야속하게도 여인에게 내린 불사의 저주는 저승으로 떠나려는 여인의 영혼을 다시 찢겨진 육신으로 되돌려 보내, 갈라진 여인의 몸을 다시 눈뜨게 했다.
이후로도 여인은 그 자리에서 몇 번을 더 죽었으나, 그래도 여인은 끝까지 악귀를 안고 놓지 않았다.

놀랍게도, 여인이 죽어 쓰러지는 만큼 악귀의 크기도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사그라드는 분노와 함께 몸을 둘러싸고 있던 짙은 덩어리가 바스러지더니 하늘 저편으로 조금씩 날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의 붉은 달빛이 걷히고 보랏빛 여명이 다가올 무렵 즈음 되자, 어느덧 너덜너덜해진 품에는 거대하고 흉측한 형체 대신 비쩍 마른 어린아이를 감싼 고치처럼 보이는 것이 안겨 있었다.

"마침내, 살이 걷혔구나."

여인은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땅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힘겹게 손을 들어 칼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다.

"소중한 아가. 넌 내게 마음을 돌려주었지. 네가 그러했듯, 나도 너에게 마음을 돌려주려 한다."

기다란 칼끝이 검은 형체를 겨누었다.

"나의 검술은 망자를 위한 제의. 내 칼은 살을 베어내는 칼. 나는 이 칼로 네 운명에 뻗친 매서운 업의 굴레를 베어낼 것이다."

곧이어 칼날이 파랗게 물들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푸른 빛덩이들이 여인과 원혼의 주위를 감싸 거센 돌개바람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바람은 악귀의 몸과 마음, 그리고 일대에 덕지덕지 남아있던 검은 덩어리와 먼지를 모조리 품었다.

"아가야. 부디 극락왕생하거라."

잠시 후, 이어지는 거센 기합과 함께 검게 드리웠던 살은 쪽빛 바람에 실려 하늘 저편으로 멀리멀리 휘날려갔다.
그리곤 드넓게 펼쳐진, 먼 옛날 언젠가 함께 보았던 광경과 무척 닮은 보랏빛 여명을 날아
지평선 너머 모습을 드러낸 태양 빛 줄기에 닿아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소년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자신은 조막만 한 검은 형체와 붉은 두 눈을 가진 무언가였는데,
가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목놓아 엉엉 울고 있었다.
해묵은 분노를 쏟아내고 푸른 돌개바람이 고통을 하늘로 흩어 보내어 마음속 응어리가 한결 풀렸건만.
그럼에도 붉게 물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당최 그칠 줄을 몰랐다.

그때, 물기 어린 시야에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나먼 옛날, 저승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인 여인은
날카로운 것에 갈기갈기 찢긴 피 묻은 옷을 걸치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얼굴을 하고선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하며 환히 웃고 있었다.
하얀 손이 슬며시 다가와 자신의 추악한 몸체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실로 오랜만에 자신을 보듬는 손길이 그립고 슬퍼서 그는 아기처럼 엉엉 목놓아 울고 말았다.

품에 안겨 얼마나 울었을까.
여인이 손을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키자, 저 너머로 하늘을 향해 푸르고 길게 이어진 길이 보였다.
그 길은 분명히 언젠가 자신이 건넌 적 있는 길이었다.
한 번은 저승새의 등에 올라, 또 한번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지났던 머나먼 안식의 세계로 떠나는 길.

그러나 어쩐지 거기에 오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자, 여인이 놀라며 물었다.

"떠나는 게 싫으니? 저승에서 갚아야 할 업은 내가 일전에 전부 받았으니 두려워할 것 없단다. 게다가 저승에 가면 네 어머니와 재회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거부하듯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어떠한 말로 회유하더라도 다시는 저 길 위로는 오르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혼자서 외롭게 눈물 흘리며 저승길에 오르는 것만은 절대로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구나, 예쁜 아가. 이대로 저승에 오르기는 싫은 모양이구나."

마음을 들여다보는 따스한 시선이, 울먹이는 붉은 두 눈에 한참을 머물렀다.

"알았다. 네 마음이 정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만큼 이 세상에 머무르려무나. 내가 너를 거두어 '태주'가 될 터이니.
네 마음속 남은 응어리가 전부 사라질 때까지, 여기 이승에서 기쁘고 보람된 기억을 더 많이 만들어 나가보자꾸나.
그리하여 네 허망한 삶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나의 삶. 그 의미를 우리 둘이서 함께 만들어나가자 꾸나."

그리고는 사근한 음성으로 다정히 이름을 불러주었다.

"나의 소중한 '밤이'야."

곧, 철컥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찬란한 푸른 빛이 검은 몸을 휘감고
그는 여인과 신비한 칼 사이를 이어주는 푸른빛이 되어 칼과 여인 사이에 녹아들었다.

이제 내내 슬펐던 영혼은 여인의 칼에 얹혀 새 꿈을 꾸려 한다.
고통만이 가득하던 기억 위로 형형색색의 웃음이 그려질 그 날까지,
따스한 여인의 곁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기나긴 길을 걸어 나가려 한다….


-


'나는 이제 길을 떠납니다. 꼭 행복하세요. 은보 도령. 언제 어디서든 그대의 복을 빌겠습니다.'

귓전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소리에 은보는 퍼뜩 눈을 떴다.
사라락 사라락. 푸른 솔잎이 산들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리자 청량한 내음이 소년의 코끝을 살살 간지럽혔다.

"으음…."

반쯤 감긴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소년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환하게 빛나는 아침햇살과 후덥지근한 여름 아침의 공기, 푸르게 머리 위로 흐드러진 거대한 나무로 보아 그는 지금껏 수호목 아래에서 쿨쿨 잠들어 있던 모양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지…?'

헐레벌떡 몸을 일으키자 몸을 덮고 있던 얇은 천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아무래도 누군가 소년을 이리로 옮겨 놓곤 춥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준 듯했다.

소년은 간밤의 아수라장을 떠올렸다. 마을 어귀 다 부서진 집 가운데서 악귀가 울부짖는 가운데 악귀의 공격을 오롯이 받아내며 피와 살을 내준 여인. 그녀는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죽었고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하며 검을 들었었다.
그다음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푸른 빛이 솟아나서는 모든 게 아스라한 꿈같이…….

'참, 아씨는 어떻게 된 거지? 설마….'

그러나 일대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여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도 그 오두막에 머물러 있는 걸까? 혹시 어디선가 다친 몸을 뉘고 있는 건 아닐까?

은보는 재빨리 걸음을 틀어 어제의 현장으로 내달렸다.
허나 참담하게 부서진 폐허 속에서도, 오밤중의 난리에도 불구하고 이 일대엔 스산함은커녕 한없는 평화가 감돌고 있었다.
마치 처음 마을에 나타났을 때처럼, 여인은 악귀와 함께 새벽녘 안개와 함께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소년은 터벅터벅 수호목 아래로 되돌아왔다.
수호목 아래 돌 위로 걸터앉아 은보는 여인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을 떠올렸다.

'죽어서도 저승에 들지 못한 채 구천에서, 업의 굴레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영혼들. 그들이 무사히 저승길에 올라 저승에서 정당한 심판을 받고 안식에 들 수 있도록 기원해주세요.'

'나는 죽을 수 없는 몸. 그러니 걱정할 필요도 없답니다.'

'네 허망한 삶과 나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 그 의미를 우리 둘이서 함께 만들어나가자 꾸나. 나의 소중한 '밤이'야.'

신묘한 칼을 든 저승에서 온 무사. 죽지 못하는 여인. 자상하고 강인한 '단아 낭자'.
그녀는 이끌리듯 여기에 왔다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존재와 재회하고,
이제는 그와 함께 다시 새로운 길에 나섰다.
그리고, 실로 우연히 소년 은보는 이 모든 일의 목격자가 된 것이다.

'도령께선 내 삶이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걸 일깨워주었지요. 이제 나는 모든 게 허망해지는 순간마다 도령의 말을 떠올릴 거예요. 평생 도령을 잊지 않겠어요.'

"……."

그때, 멍하니 서 있던 소년 앞에 옆집 할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예끼 이 녀석! 아침 댓바람부터 정신을 빼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할아버지. 아무래도 제가 전설 속의 '단아 낭자'를 만난 것 같아요."
"뭐라고? 단아 낭자?"
"네. 어제 나타났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단아 낭자였어요!"

뜬금없는 은보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할아버지는 들고 있던 곰방대로 은보의 이마를 가볍게 콩 쳤다.

"예끼, 이 녀석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네놈이 아녀자에게 단단히 빠졌기로서니 무슨 황당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느냐."
"아니, 정말이라니까요. 제가 직접 보았다고요. 단아 낭자가 악귀와 맞서는 걸 보았다니까요."
"아서라, 아서. 여인의 모습에 귀신을 잡으러 다니면 다 '단아 낭자'더냐? 그럼 이 세상 귀신잡이들이 다 '단아 낭자'게?"

열변을 토하는 소년을 보며 노인은 못마땅한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쯧쯧쯧. 넋이 나갔구만, 넋이 나갔어."

그러나 은보는 노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할아버지, 그러지 말고 들어보세요. 단아 낭자 전설에서 낭자가 구해줬던 아이 아시죠? 그게 바로 어제까지 날뛰던 그 악귀였는데…."

이후로도 소년 은보는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았던 여인의 이야기를 전했다.
때로는 과장을 살짝 섞기도 하고, 직접 연기를 하기도 하며 보다 많은 이들에게 단아 낭자 전설을 전파했다.
소년의 이웃과 친구들, 장성하여 만난 평생의 동반자와 자녀, 그리고 그 손자와 손녀에게까지도.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가던 이야기는 어느덧 저 멀리 바다를 건너 다른 땅으로 퍼져 나갔는데,
그즈음 동방의 복식을 한 여인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바다 건너 드넓은 대륙 곳곳에서도 들려 오기 시작했다.
위험에 처한 이들 앞에 홀연히 나타나 도움을 주고 사라지는, 신비한 칼을 든 죽지 않는 여인과 그녀 곁을 맴도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바다를 건넌 동방의 전설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목격담은 해류가 섞이듯 서로 한데 어우러지고 여러 형태로 변주되어, 마침내 '만인의 전설'로 거듭났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죽지 않는 여인은 대륙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고 한다.
푸른 빛을 머금은 자신의 칼과 함께 홀연히 나타나선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고,
나타났을 때와 같이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

마족의 급습으로 열세에 몰린 용병들 앞에, 동방의 복식을 입은 한 여인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족의 침입이다…!!! 마족 놈들이 나타났다!!!"
"당황하지 말고 전열을 가다듬어라! 이대로 물러서면 마을이 위험해진다!"
"자, 잠깐. 저건 대체…."
"물러서시오! 민간인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오!"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기다란 검을 뽑아 사자 같은 두상을 한 거대한 마족과 마주 서서 넘어진 이들을 감쌌다.
그리고 차분한 한 마디를 남긴 뒤, 푸르게 빛나는 검을 던져 적진을 향해 모습을 감추었다.

"매서운 살의 기운을 따라 여기에 왔으니, 분명 이곳에 내가 도울 일이 있을 겁니다."




글: 시트롬 / 그림: jin, king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