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fiona

대륙의 남부는 왕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 이유는 기사단이 지키는 남쪽의 국경을 넘어서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남부의 어지럽게 솟아오른 고원과 깎아지른 협곡을 보면 인간의 세계가 끝난 것만 같은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

대지는 메말라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는 황무지였고, 절벽과 다름 없을 만큼 깊은 협곡은 모험가들의 발길조차 끊어버렸다.
솟아오른 수많은 고원만이 여신의 감시탑처럼 지상의 생명체들을 굽어보았다.
길을 제대로 아는 기마병조차 보름은 달려야 황무지 땅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비록 왕국이 이 땅을 개척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도 드믄드믄 인간들의 촌락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제대로 된 기반 시설이나 생산 시설 하나 없는 촌락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왕국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었다.

거친 남부의 땅에도 위험이 존재했고, 촌락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무력 집단이 필요했다.
그 요구에 응하듯 돈이나 식량을 받고 촌락을 지켜주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한곳에 머무르는 법 없이 파편화된 촌락들 사이를 유랑하며 폭력을 저지하고 외부의 침략자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실상은 남부의 작은 자경단 집단이었으나 그들은 스스로 용병을 자처했다. - 피오나는 남부의 이 이름 없는 유랑용병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용병단의 단장이었고, 어머니는 용병단에서 가장 기량이 뛰어난 검사였다.
그 탓에 피오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용병단의 모든 이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피오나가 전장을 함께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어머니는 피오나에게 말없이 방패 하나를 쥐여주었다.

"이제 네 몸은 네가 지켜야 해."

그리고 그 날 밤부터 피오나와 단원들 간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매일 밤 용병단원 한 사람이 나무칼을 하나 들고 피오나의 숙소로 찾아왔다.
피오나는 어머니가 준 방패 하나만 가지고 단원들과 대련을 해야만 했다.

파창! 파장창!

나무를 깎아 만든 모조품에 불과했지만, 상대는 성인이었다.
용병단원이 힘껏 휘두른 나무칼은 제대로 막아낸다 한들 몸이 들썩하고 날아오를 정도였다.
게다가 실전으로 단련된 단원들은 온통 빈틈과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통에 피오나는 한 합씩 견뎌낼 때마다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루는 용병단원의 나무칼이 피오나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그녀는 방패를 들 수 없을 만큼 크게 다쳤다.

그다음 날 밤, 단원들은 부상을 당한 피오나와는 대련하고 싶지 않다고 부모에게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알았노라며 단원들을 돌려보내곤 자신이 직접 대련용 나무칼을 잡았다.

결국, 피오나는 성한 오른팔로 방패를 부여잡고 어머니를 상대로 대련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단원들이 달려와 어머니 손에서 나무칼을 빼앗았다.

그 때, 이미 피오나는 만신창이에 가까운 상태였다.

"전장에서는 상대방의 자비심에 기댈 수 없단다. 기억해두렴."

피오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한 마디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훈련에서 더는 다치지 않게 되었을 즈음 아버지는 그녀에게 작은 단검을 던져주었다.

"이제 네 밥값은 네가 해야지."

아버지는 내뱉듯이 이야기하고 피오나를 캠프 밖으로 몰아냈다.
단원들이 함께 먹을 야생동물을 사냥해 오라는 것이었다.
마른 빵조각을 몇 개 주머니에 담아주고는 사냥에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피오나는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며칠 동안 황무지를 맨몸으로 돌아다녔다.
며칠을 구르고 굴러 그녀가 겨우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꼬리가 긴 모래쥐 한 마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수확 거리를 품에 안고 터덜터덜 용병 캠프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녀가 잡아 온 모래쥐를 보고선 낄낄대며 웃어댔다.
그리고 잘했다며 그 날 저녁 단원 식구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구운 모래쥐 한 마리를 나눠 먹었다.
모두가 배고프다며 입맛만 다셨지만, 그 누구도 피오나를 탓하지 않았다.


황무지의 메마름 속에서도 피오나는 빠르게 성장했다.

단원들은 이전과는 다른 이유로 피오나와 대련하는 것을 꺼렸다.
단원들의 모든 공격은 방패에 가로막혀 그녀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오히려 피오나를 공격할 때마다 단원들이 도리어 상처를 입었다.
피오나가 공격을 막아내는 것과 동시에 가까운 거리로 다가가 방패로 가격하거나 인정사정없는 발차기를 날렸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피오나는 단장인 아버지 몰래 단원들과 함께 의뢰에 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그녀를 불러와 용병 캠프에 근신할 것을 명령했다.
피오나의 안전을 걱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의뢰는 실패해도 되는 애들 장난이 아니야. 우리의 밥줄이 달린 문제다. 아직 정식단원도 아니면서. 철부지가 말이야."

아버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피오나는 근신 명령을 무시한 채 그날 밤 단검을 들고 캠프를 빠져나갔다.

캠프를 떠난 피오나는 이 촌락 저 촌락을 쏘다니며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도둑맞은 물건이 있다는 둥 타 촌락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는 둥 작은 촌락들 사이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피오나는 이런 작은 사건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때마침 한 촌락에 거대한 황무지 불곰이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고 비축해둔 식량을 모두 훼손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피오나가 기다리던 기회였다. 그녀는 단검과 방패를 집어 들고 소문이 들려온 촌락으로 향했다. - 정식으로 의뢰를 받은 용병단원들이 황무지 불곰을 토벌하기 위해 동굴 앞으로 몰려들었다.

모두가 거대한 야생동물과의 사투를 예상했지만 어째선지 동굴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단원들은 동굴 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닫고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동굴 안쪽에서 육중한 곰의 사체와 함께 상처투성이가 된 피오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곰의 사체 앞에 앉아 노숙하고 있었던 듯했다.
피오나는 단원들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후, 피오나는 정식단원으로서 촌락을 오가며 수많은 의뢰를 도맡았다.

키가 조금씩 자라면서 단검을 두고 장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편이 양팔의 무게도 안정적이어서 다루기가 쉬웠다.
매일 아침 피오나는 움직이기 쉬운 경갑을 착용하고 장검과 방패를 든 채 황무지의 모래바람을 막아줄 긴 천인 쉬마그를 둘렀다.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출정 복장이었다.

하루는 용병 캠프로 피부색도 머리카락 색도 다른 이방인 부녀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마차를 끌고 황무지를 건너가려는 동방의 귀족이라 했다.
마차를 호위해 줄 용병들은 이미 고용하긴 했지만, 황무지를 안전하게 건널 길잡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피오나에게 이 호송 임무가 맡겨졌다.
피오나는 즉시 승낙했다.
그간의 의뢰를 거치며 넓은 황무지의 구릉과 협곡이 점차 익숙해진 터였다.

부녀가 타고 갈 호송 마차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크기를 자랑했다.
바퀴는 피오나의 몸보다 컸고, 마차를 끄는 말들도 다른 말들의 두 배쯤은 우람해 보였다.
피오나와 단원들은 마차에 앞서 걸어가며 안전한 길목으로 마차를 이끌었는데 피오나는 호기심 때문에 마차를 자꾸 뒤돌아보았다.

피오나의 호기심은 커다란 마차 보다는 그 안에 타고 있는 두 부녀를 향한 것이었다.
마차가 황무지를 빠져나가는 동안 이 귀족 부녀가 쉴새 없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오나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 할 말이 그렇게 많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또 한 차례, 마차 안에서 부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피오나는 아버지와 자신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차는 큰 어려움 없이 황무지를 빠져나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동방 귀족 부녀는 고맙다며 마차에서 내려 피오나에게 사례금을 전달했다.
이제 서로 방향을 달리해 용병 캠프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소녀가 피오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주먹을 뻗어 피오나에게 내밀었다.

"고마웠어. 아빠가 이거 너 주래."

피오나가 얼떨결에 손을 내밀자 소녀는 주먹 안에 든 것을 올려놓고 다시 마차 안으로 쪼르르 도망가버렸다.
소녀가 전해준 것은 조그만 구슬 같은 모양새였다.
반들반들한 표면에서는 달콤한 향이 났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었다.

피오나는 그렇게 난생처음 보는 ‘사탕’을 오랫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초병을 나간 녀석들이 돌아오지 않는군."

새벽 무렵, 용병단 캠프의 긴급소집이었다.
남쪽 경계선으로 초병을 나갔던 단원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사고라도 난 걸까?"

한 단원의 물음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다섯 명 한 개 조로 이루어진 초병은 각각 감시하는 영역이 달랐다.
다섯 명의 단원들이 모두 함께 사고를 당했을 리는 없었다.

경계선 너머는 마족의 영역이었다.
아버지는 만일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피오나가 자신이 단원들을 찾아보겠다고 자원했다.
단원 중에서 가장 작고 민첩한 피오나를 초병으로 보내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피오나는 평소보다 가벼운 복장만 갖추어 캠프를 떠났다.
캠프의 불빛이 끊어지자 자세를 낮추고 발걸음을 숨기며 나아갔다.
새벽의 어슴푸레함 속에서도 피오나에겐 돌멩이 하나 건드리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다.

피오나는 초병들이 순찰을 하는 루트를 벗어나 구릉 길을 따라 이동했다.
절벽 위에서 초병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혹시 모를 적의 기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새벽의 어둠이 지평선 너머부터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초병을 발견한 곳은 구릉에서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협곡 중앙이었다.
투구와 경갑을 착용한 초병이 등을 보인 채 가만히 누워있었다.

의심스러운 위치였다.
피오나는 주변을 살피며 초병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전진했다.
피오나가 앞으로 나갈수록 점차 초병의 실루엣은 사람이 아닌 사람처럼 만든 거뭇거뭇한 덩어리가 되어갔다.

누군가가 초병의 투구와 경갑에 검은 덩어리를 채워 넣어 사람인 것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자세히 보면 덩어리에서 이어지는 밧줄들이 곳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초병으로 위장한 폭탄 덫이었다.

피오나는 덫이 내려다보이는 구역을 지나 한층 더 높은 구릉을 올랐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자랑하는 구릉이었다.
이곳에 오르면 경계선 너머 마족의 영역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구릉에 도착한 피오나가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새벽이 걷히고 아침 태양이 환하게 비추는 땅에는 마족의 무리가 무기를 든 채 잔뜩 모여있었다.
일일이 세어볼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숫자였다.
보이는 것만으로 족히 백은 되어 보였다.

아버지의 걱정은 사실이었다.
피오나는 재빨리 구릉을 내려가 용병 캠프를 향해 달렸다. - "우리를 꿰어낼 생각이었나 보군."

피오나의 보고를 받은 아버지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마족은 소수에 불과한 용병단의 전력을 알고 있는 듯했다.
초병으로 나갔던 단원들을 제외하고 이제 용병단은 고작 서른 명에 불과했다.
피오나가 확인한 숫자만 해도 마족이 세 배 이상 많았다.

"이 땅에서 인간을 모두 몰아내겠다는 심산인가?"

어머니가 가소롭다는 듯 이야기했다.

"이대로 밥줄이 끊어지게 둘 순 없지."

아버지는 단원들 몇 명을 보내 각 촌락에 상황을 알리고 사람들을 모두 피난시킨 후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하. 설마 대금도 안 받고 전쟁을 대신 해줄 줄이야."

아버지의 한숨 섞인 한 마디에 단원들이 모두 껄껄거리며 웃었다.
어머니가 피오나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피오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니가 빙긋 웃었다.

아무도 의뢰하지 않은 일이었다.

도망쳤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희망이나 명예를 위해 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여신을 위한 싸움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검과 방패를 들었다.
평소처럼 갑옷을 착용하고 협곡으로 향했다.
결사의 임무 앞에서도 껄껄 웃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촌락으로 떠났던 단원들도 촌락민들을 모두 피난시키고 약속했던 협곡에 모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피오나는 자신의 가족이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웠다.

용병단은 정확히 서른 명이 나란히 설 수 있는 협곡에서 적을 맞이했다.
등 뒤로는 협곡이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전사자가 생길 때마다 조금씩 물러설 수 있도록 선정한 위치였다.

"이 협곡만 지키면 녀석들이 우회로를 탄다 해도 따라 잡히지 않아! 사람들이 다 피난할 때까지 막는다! 한 놈도 통과 못 하도록 꽉 틀어막아!"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 전투가 시작되고 협곡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십의 검과 도끼가 맞붙어 서로의 갑옷을 깨부수기 위해 날아들었다.
몇 배는 많은 마족을 상대로 용병단은 굳건히 버텼다.

돌진해 오는 마족들을 용병단은 침착하게 상대하고 전사자가 생길 때마다 한 걸음 물러나 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용병단과 마족 사이에는 자연스레 시체가 쌓여 벽이 되어주었고 시체로 길목이 좁아지면서 마족들은 수적 우위를 잃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닌데? 하하."

단원들 사이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을 때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체의 벽이 한순간 부서지며 하늘로 나부꼈다.
그 뒤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거대한 철퇴를 손에 든 오거였다.
키가 열 척쯤은 되는 오거가 철퇴를 휘둘러 벽을 날려버린 것이다.

다시금 긴장이 감돌았다. 오거가 괴성을 토해내며 용병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거가 휘두른 철퇴가 아버지를 향했다. 아버지가 검으로 철퇴에 맞서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부딪히는 순간 검과 갑주가 부서지며 아버지는 바닥을 굴렀다.

"단장님!"

단원들이 소리치는 사이, 어머니가 그들을 제지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전열을 가다듬을 것을 명령했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오거를 앞세워 작은 덩치의 마족들이 다시금 단원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거가 다음으로 노리는 것은 아버지 옆에 있던 피오나였다.
피오나는 물러서서 진열을 맞추는 대신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오거가 휘두른 철퇴의 궤적에 다른 단원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피오나는 장검으로 방패를 때려 오거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냈다.
작은 소녀가 자신의 힘을 우습게 여기는 모습을 본 오거가 흥분하며 피오나를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피오나는 철퇴 공격을 방패로 막는 대신 오거의 품속으로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오거의 철퇴가 허공을 갈랐다.
허공을 가른 철퇴 추를 제어하기 위해 오거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 사이 피오나는 장검으로 오거의 두꺼운 발목을 꿰뚫었다.
댐이 터지듯 상처에서 오거의 피가 솟았다.

오거가 발을 쿵쿵거리며 괴성을 질렀다.
피오나는 그 틈에 오거의 다리를 통해 등을 타고 올랐다.

오거가 철퇴를 내동댕이치고 등 뒤의 그녀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피오나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오거의 어깨 위까지 오른 피오나는 오거의 목에 장검을 비스듬히 내리꽂았다.

오거의 거대한 몸뚱이가 쿵 하고 쓰러졌다.


황무지의 태양 아래로 말 한 마리가 발자국을 남기며 걷고 있었다.
말 위에는 머리를 쉬마그로 몽땅 감싼 남자가 타고 있었다.

남자는 황무지를 지나 왕국 국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얼마 전 출발한 마을에서 지금은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남자는 남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말이 언덕을 하나 넘어서면서 새로운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시큰둥하던 남자의 눈에 모래 언덕이 아닌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그것은 협곡을 반으로 나누듯 켜켜이 쌓인 마족의 시체로 된 산이었다.

남자는 기수를 돌려야 할지 고민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자칫 살아있는 마족이라도 있으면 큰일이다 싶었다.

얼른 기수를 돌리려던 찰나 남자는 시체 더미 가운데에 작은 사람 그림자를 하나 발견했다.

그 모습에 남자는 조금 안심했다.
사람이 있다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는 뜻일 터였다.
남자는 말을 달려 그림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그림자의 정체는 아직 애 띈 얼굴을 간직한 여자아이였다.

가벼운 경장만 입은 아이는 양손에 각각 장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아이는 협곡의 한쪽 절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말발굽 소리를 듣고 남자를 흘끗 바라보더니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무얼......."

남자는 아이에게 말을 건네려다 얼어붙었다.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건 서른 개의 무덤이었다.
각각의 무덤 위에는 검과 방패 또는 갑옷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건 누구의 무덤이죠?"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내 가족……."

여자아이가 무덤을 다시금 천천히 바라보며 대답해주었다.
그녀의 눈은 무심한 듯 깊었다.

무덤 위에 놓인 무구들을 바라보며 머나먼 추억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슬픔이 가득한 눈이었지만 어째선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마치 눈물 흘리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처럼 협곡에는 황무지의 메마른 바람만 불고 있었다.

로체스트의 주점은 언제나처럼 용병과 기사들로 왁자지껄했다.
녹이 슬어 몽둥이나 다름없는 검으로 마족의 머리통을 깨부순 무용담부터 마을 처녀에게 딱지를 맞은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경험담으로 한참을 목을 축이던 주점 사람들이 하나둘 요즘 가장 무성한 소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대륙 곳곳에서 의뢰를 맡기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이 보장되는 것으로 유명한 여검사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녀는 어느 지역, 어느 집단에도 오래 몸담지 않고 세상을 떠돌며 큰 사건을 해결하고 다녔는데, 그녀의 이동 경로를 생각하면 다음은 로체스트가 틀림없다는 이야기였다.
누군가 손사래를 치며 그런 건 다 소문에 불과하다며 웃어넘기자 사람들은 그 말에 동조하며 또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주점 안으로 또 한 손님이 들어왔다.
갑옷에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여검사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와 바텐더 앞에 섰다.

"여기 근처에 용병단이 있다던데?"

여검사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용병단이 없소. 기사단이라면 있지만."

바텐더는 용병단을 찾는 거라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마을이 있다며 위치를 일러줬다.
여검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주점 밖으로 나섰다.
주점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 입에 올리던 여검사가 자신들 등 뒤로 지나간 것도 모르고 밤이 새도록 목을 축였다.

글 : 칼미슈 / 그림 :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