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miri

"여신의 축복이 늘 당신과 함께하길."

꾀죄죄한 차림의 소년은 얼굴이 달아올라 씩씩거리는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감히 이단자 주제에 여신을 입에 올리다니! 이단자 놈들. 이방인 놈들. 거지 부랑자 놈들. 이 마을에서 썩 꺼져라!"

날 선 고함을 뒤로 한 채, 소년은 가족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먼발치서 날아온 크고 작은 돌들이 그의 몸에 부딪혀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아버지, 저런 사람에게도 여신님의 축복이 함께 할까요?"

소년은 부어오른 팔을 문질렀다.

"물론이지. 여신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셔서, 그 어떤 인간의 과오도 끝없는 사랑으로 감싸고 용서하신단다."
"하지만 어머니, 저는 여신님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을 뿐이에요. 그런데 저 사람은 고맙다는 말은커녕 우리를 욕하는걸요."

어머니는 잔뜩 부아가 치민 아들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림덴, 여신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실 때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거나 요구하셨었니?"
"…아니요."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베푸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여신께서 우리에게 베푼 사랑과 자비의 본질이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도우려 하는 마음 자체야. 마음을 다해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한다면, 언젠가 이 세상은 고통도 슬픔도 없는 낙원 같은 곳이 될 거야.”
“하지만….”

소년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돌을 맞은 건 여전히 분한걸요.”
“후후, 너도 언젠간 깨닫게 될 거란다. 이리 오렴.”

소년의 부모는 미소 지으며 작은 몸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주었다.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든 소년은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그림덴의 가족은 전 대륙을 방랑하는 ‘방랑 수행자’들이었다.
가족의 구성원들은 나이, 출신, 피부색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애로운 여신의 뜻 아래 모여 조화롭게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진정한 가족으로 여기고 영원한 수행 길의 동반자로서 의지하며 지냈다.
비록 행색은 초라하고 가진 것도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늘 행복과 평안이 가득했다.
소년의 부모 또한 수행자였다.
그들은 늘 환한 미소를 띠며 세상의 사람들을 축복했다.
어렵게 구한 음식이 바닥에 내팽개쳐져도, 도움의 손길에 대한 감사 대신 모진 매질이 돌아와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늘 선한 사람들.
소년은 그런 가족들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신도 그 모습을 닮아, 언젠가는 그들과 같이 진정한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수행자가 되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해가 저물면 소년과 가족들은 모닥불 앞에 앉아 현명한 장로 어르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곤 했다.

"자비로운 여신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시고, 대가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두려움과 공포의 근원인 ‘마신’을 봉인하였소. 우리는 여신의 무한한 자비 속에서, 때론 울고 웃으며 소중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오.”

정좌한 자세로 알 듯 말 듯 한 이야기를 듣고 있기는 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소년은 가족이 다같이 모여 여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 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아직 이 세상엔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주 많소. 그들은 전쟁이 남긴 상처와 배고픔, 두려움과 공포로 여신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오. 우리는 여신과 같이 희생과 사랑을 베풀어,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여신의 사랑을 깨닫고 ‘낙원’의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하오. 이것이 우리들의 사명이자 신념, 그리고 끝없는 수행의 지표이외다. 이 순간에도 여신의 사랑이 함께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우리도 여신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며, 베풀고 또 베풉시다.”

긴긴 이야기를 마치고 장로가 눈을 감자, 수행자들도 함께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소년도 눈을 감고 낮에 있었던 일을 찬찬히 떠올렸다.
귓가에 남아 윙윙대는 고함은 팔의 멍자국을 더 욱신거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사실은 여전히 분한 마음도 남아있는 채였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으로서 세상이 더 평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소년은 기꺼이 돌을 던진 자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히히, 그깟 거. 어렵지 않네.”

감은 두 눈 사이로 여신의 자애로운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왠지 여신님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 같아 소년은 제법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녀석, 뭐가 어렵지 않다는 거냐?”

아차.
소년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눈을 떴다.
어느새, 둘러앉은 수행자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해있었다.
눈 앞에 어른거리던 여신의 얼굴이 어머니의 장난스런 미소라는 걸 깨닫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년은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년의 엉뚱한 행동에 조용한 명상 시간은 삽시간에 웃음바다로 변했다.
장로 할아버지도 부모님도 가족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한바탕 껄껄 웃었다.
전염이라도 된 듯 놀림거리가 된 소년도 어느 새 가족들과 함께 하하 웃고 있었다.
뜰을 가득 메운 웃음소리가 은은한 모닥불의 연기와 섞여 밤바람을 타고 은은히 퍼져나갔다.

한 편, 모닥불의 빛이 만들어낸 검은 어둠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치 먹이를 물색하는 맹수처럼 뜰에 모여 웃고 있는 무리를 조용히 응시했다.
무언가를 노리듯, 그들은 몸을 낮추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 바스락, 바스락.

거슬리는 소리에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섞여버린 듯 어두운 밤이었다.

“잘못 들었나?”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심한 소년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여신상이 들려 있었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제법 그럴듯한 형태를 갖춘 이 조각상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자신의 역작을 완성하고자, 소년은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몰래 빠져나와 밤늦도록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거슬리는 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려왔다.
뭐라도 튀어나올 듯한 으스스한 느낌에 소년은 재빨리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거진 덤불 뒤로 밤의 어둠과 어우러진 한 ‘그림자’가 보였다.
스산한 밤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사이, 검은 형체는 일말의 미동조차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소년은 어쩐지 그림자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늘 너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거대한 맹수 앞의 생쥐라도 된 듯 섬뜩한 기분이었다.
소년은 주변의 잡동사니들을 챙긴 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어서 모두에게 돌아가야 해.’

작은 여신상을 쥔 손이 긴장으로 덜덜 떨려왔다.
지면에서 발을 떼는 그 순간,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맹렬히 덮쳐오리라는 것을 소년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어색한 자세로 서 있는 소년과 검은 그림자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지금이다!’

소년은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그림자가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별빛 하나 없는 칠흑의 하늘 아래로 생사를 가르는 맹렬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절박하게 들판을 내달리는 소년의 호흡은 거칠었고 그 심장은 터질 듯 날뛰었다.
금세 손만 뻗으면 잡힐 만큼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지만, 검은 형체는 유희라도 즐기는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한 채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소년은 자꾸만 느려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내 소년의 머릿속에 아주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만일 지금 내가 돌아간다면, 이 자는 가족 모두를 해치고 말 거야.’

그랬다.
설령 소년이 가족에게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들 중 이런 자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몰고 온 괴한에 의해, 온 가족이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죽는 건 나 하나만으로 족해.’

부모님과 가족들의 상냥한 미소가 뇌리를 스쳤다.
그는 한 손으로는 식은땀에 젖은 여신상을, 다른 한 손으로는 작지만 날카로운 조각칼을 꼭 쥐었다.

‘여신님,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소년은 달리던 발을 멈추었다.
동시에 검은 그림자도 자리에 멈춰 섰다.
둘 사이로 오래도록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일시에, 소년과 그림자는 서로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힘껏 공중으로 도약한 소년은 검은 형체의 등에 조각칼을 내리꽂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형체는 어느새 그의 뒤에 나타나, 너무도 간단하다는 듯 작은 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소년은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커다란 천 속에서 발버둥 치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소년의 의식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에 소년은 신음하며 눈을 떴다. 전신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몸을 일으키자 발치에서 묵직한 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바닥에서는 한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소년은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분명, 자신은 그 괴한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
불현듯 그의 머리에 가족이 떠올랐다.
자신만 말려든 것인지 아니면 결국 가족까지 모두 말려든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제발 그들만은 무사하기를, 소년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갇혀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등불의 어슴푸레한 빛이 닿는 곳마다 알 수 없는 표식들이 새겨져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출입구로 보이는 커다란 철문을 제외하고는 작은 창문이나 빈틈조차 없었다.
완벽히 밀폐된 방의 모습은, 마치 사회에서 격리된 흉악한 죄수나 짐승을 가두는 감옥을 연상케 했다.
소년은 족쇄에 묶인 발을 끌고 녹슨 철문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이내 사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가면을 쓴 세 사람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특이한 가면과 의복으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동일한 복식을 한 채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이들이 인간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서 파생된 분신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머리에 드리운 천 너머로 드러난 비틀린 입꼬리 만이 그들이 유령이나 그림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마주했었던 괴한의 가면과 눈앞의 가면이 같은 것임을 곧 눈치챘다.
그들 중 가운데에 있던 자가 소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두려워 말아라. 너는 선택 받았다.”

수상한 자는 소년의 주위를 돌며, 그의 신체와 수족 곳곳을 꼼꼼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흠, 오늘 들어온 '자원' 중 가장 최상급이야. 정말 보기 드물게 강건한 신체로군. 좋은 무기가 될 재목이야.”

소년은 경계심과 적대감을 담아 눈앞의 형체를 노려보았다.

“네 이름은 뭐지? 겁내지 말고 대답해 보거​라.”
“……”
“나는 너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 줄 ‘인도자’다. 내 옆에서 수족이 되어주는 이 자들은 ‘사역자’라 부른다. 자, 다시 묻겠다. 네 이름은 뭐지?”

소년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흠, 좋다.”

인도자는 흥미롭다는 듯 소년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이제 너는 비참하고 열등한 빈민의 삶을 벗어나, 아주 강하고 아름답고 충성스러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내가 인도하는 길로 잘 따라오기만 한다면 우리는 곧 '가족'처럼 지내게 되겠지."

자신을 가족에게서 떼어낸 악한의 입에서 ‘가족’이란 말이 나오자, 소년의 마음 깊은 곳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절대로 이자에게 굴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자, 그럼 또다시 묻겠다. 네 이름이 뭐지?”
“대답 안 해. 절대로.”

일순간, 인도자의 손이 소년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강한 충격에 휘청이는 소년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터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비릿한 내음을 풍기며 입안에서 천천히 퍼져나갔다.
소년은 두려웠다.
다음번에도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번엔 손이 아니라 인도자의 허리춤에 걸린 칼이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는 순간, 다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의지를 다잡은 소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눈은 분노와 저항이 뒤섞여 이글거렸다.
방 안을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가 소년을 향해 되물었다.

“답하라. 네 이름은 뭐지?”
"......."

인도자가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옆에 늘어서 있던 사역자들이 재빨리 소년을 포박했다.
소년은 거세게 몸부림쳤지만, 그들의 완력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보통의 ‘자원’들은 이런 상황을 오래 버텨내지 못한단다. 공포가 그들의 정신을 뿌리째로 갉아내기 때문이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일찌감치 자신을 포기하고 먼저 굴종한단다. 그런 녀석들은… 너무 쉽지. 가치가 떨어져.”

그가 다시 고갯짓하자 사역자들은 소년을 강제로 짓눌렀다.
소년은 무릎을 굽히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버텼다.

“하지만 너는 다른 자원과는 확실히 다르다. 최상의 육체에 어울리는 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

무릎 꿇은 소년을 향해 인도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소년은 가면 너머로 그가 씩 웃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널 ’교육’ 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겠구나. 하지만 너도, 나도 금방 적응하게 될 것이다."

그는 소년의 얼굴을 거칠게 잡아채 무언가를 씌웠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안에 든 액체를 소년의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발버둥 치던 작은 몸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지기 시작했다.

"자, 이제 답해 보거라."

축 처진 채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소년을 향하여 한층 드높아진 목소리가 물었다..

“네 이름은 뭐지?”
“나…나는…그림덴….”

인도자는 만족한 듯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시작해보자꾸나. 그림덴."

그 날 이후, 소년은 인도자의 감시 아래 매일 강도 높은 교육과 신체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그를 오직 하달된 명령에 복종하는 강력한 ‘인간 병기’로 만드는 것에 있었다.
소년을 납치한 집단은 일종의 암살 집단으로, 빈민이나 무연고자 어린이를 납치한 후 살육에 최적화된 인간 병기로 재생산했다.
그리고 이를 필요로 하는 자들의 의뢰를 받거나 병기를 대여해주며 막대한 재물을 축적해왔다.
철을 담금질하듯 그들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소년의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약물 주입과 세뇌를 통해 정신을 해체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오래지 않아 소년은 아직 다 성숙하지 않은 신체로도 성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타고난 신체 능력에 힘입어 그의 힘은 다른 ‘자원’들보다 빠른 속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나날이 강해지는 육체와 정반대로, 그의 정신은 점점 피폐해져만 갔다.
매일 소년에게 투입되는 엄청난 양의 약물은 기억과 추억, 성격과 감정, 미래에 대한 꿈 등 그를 그답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차츰차츰 지워나갔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는 교묘하게 명령에 대한 복종과 충성, 그리고 폭력을 향한 갈증과 충동이 채워졌다.
인도자는 숙련된 장인이 도자기를 빚어내듯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려가는 소년을 정교한 폭력과 세뇌로 다듬어나갔다.
오직 최상급의 우월하고 냉혹한 인간 병기 ‘그림덴’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버티며 싸웠다.
어둠과 망각에 잠식되지 않기 위하여 인도자를 향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약물을 향해서 온 힘을 다 해 저항했다.
‘그림덴’이라는 자신으로서 남아있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결코 꺾이지 않는 소년의 의지 너머에는, 약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그가 애써 붙들고 있는 작은 기억의 파편이 있었다.

‘이 순간에도 여신의 사랑이 함께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이제는 누가 말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는 말 한마디.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 속에서도 누군가 나와 함께 한다는 따스한 한마디가, 소년에겐 너무나도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그는 절박하게 이 기억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물론 소년이 이렇게 버티면 버틸수록, 그에게 가해지는 약물과 세뇌의 강도 또한 더욱 무자비해졌다.
완벽한 복종과 충성을 위하여 인도자는 저항하는 소년을 더욱 지독하게 학대했다.

그렇게 인도자와 소년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던 어느 날, 소년은 우연히 탈출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알 수 없지만, 머릿속을 쥐어짜는 듯한 짧은 통증 이후 아주 잠시나마 세뇌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곧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푼 그는, 자신을 추격하는 자들을 피해 미로와도 같은 통로를 내달렸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도달한 탈출구 앞에서 그는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제는 더 이상 돌아가야 할 곳도 가족들의 얼굴조차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단 몇 발짝 앞에 그토록 원하던 자유가 있었지만, 돌아갈 곳을 잃은 소년의 의지는 그 자리에서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그렇게 그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결국 인도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인도자의 손에 이끌린 채, 소년은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탈출에 실패한 이후, 인도자는 소년을 굴복시키기 위해 지독하리만치 교육의 강도를 높였다.
이미 부스러져버린 소년의 마음은 더욱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 인도자가 이끄는 그림자 속으로 침잠했다.
그렇게 꼬마 수행자 소년은 어둠 속에 잠들고, 강하고 완벽한 ‘인간 병기’가 새로이 눈을 떴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숲길로 호화로운 외형의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갑자기 소집령이라니, 우리를 무시해도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소? 그자의 변덕에 맞추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군."
"쉿,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시오. 조금이라도 심기를 거슬렀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관 짝에 갇힌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걸 모르시오?”
"어차피 나의 협력이 없다면 그도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지. 걱정하지 마시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잘 준비되고 있소."

덜컹.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멈춰 섰다.

"밖에 무슨 일이야? 젠장."
"내가 나가보겠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가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남자는 불안한 시선으로 밖을 조심스레 내다보았다.
그때, 창밖에 검은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육중한 것이 쓰러지는 듯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무, 무슨 일이오!"

남자는 황급히 자신의 검을 들고 마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차의 주위로 눈조차 감지 못한 시체 두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끈적한 공기 사이로 서늘하게 흐르는 살기를 감지한 그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제... 제... 젠장!! 습격인가. 누가...?"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빗줄기 가운데로, 검고 커다란 형체가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짓눌릴 듯한 위압감에 그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저 짐승 같은 놈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그대로 베이리라는 것을, 남자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손에 쥔 검을 들어 그림자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그 검 끝은 가엾어 보일 정도로 초라하게 달달 떨리고 있었다.
연신 마른 침을 삼키며 그는 다가올 최후를 기다렸다.

갑자기, ‘그림자’의 움직임이 수상했다.
놈이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더니 이내 무릎을 꿇은 것이다.
고통에 신음하며 내뱉는 거친 입김이 공포에 질린 남자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빈틈이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허술하구나! 고작 저런 놈을 가지고 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나. 허술하구나, 허술해!"

남자는 실성한 듯 웃으며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의복이 비와 진흙으로 더럽혀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남자는 몇 번이고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엉망이 된 모습의 남자는 달리고 달린 끝에 비로소 숲길을 벗어났다.
멀지 않은 곳에 도시로 진입하는 성문이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환호성을 질렀다.

“…아하하하! 억!”

하지만 어느새 후방에서 날아온 길고 예리한 칼날이 그의 배를 깊게 관통했다.
환희의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 남자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검은 그림자는 최후를 확실히 확인 해두려는 듯 쓰러진 표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였다.
목숨을 거두는 자의 정체를 눈에 각인시키려 남자는 남은 힘을 짜내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내비치는 살의 어린 눈빛.
하지만 그 눈빛은 죽어가는 자신의 것보다도 한없이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암살자여. 왜…. 어째서…. 누가...."

남자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무의미한 질문을 뱉어냈다.
그림자는 대답 없이 그저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잠시 뒤, 비 갠 하늘의 구름 사이로 햇빛이 어슴푸레 비추었다.
빛에 닿아 녹아버리기라도 한 듯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던 풀이나 바위처럼, 말라붙은 진흙과 나뭇잎의 잔해로 뒤덮인 한 남자의 몸뚱이만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풀 사이로 덧없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정말 만족스럽군. 뛰어난 무기를 가졌다고 하더니 정말 의심의 여지가 없구먼."

호화로운 차림의 의뢰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방 한구석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무기’의 존재가 그에게도 느껴졌다.

"언젠간 이 무시무시한 칼날이 나를 향할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않은가?"

의뢰인의 질문에 온몸을 로브로 둘러싼 인도자가 고개 숙여 공손한 자세로 답했다.

"저희를 그저 부에 휘둘리는 집단으로 보지 말아주십시오. 비록 피 값을 받으며 살아가는 무뢰배들이지만 명예와 충성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껄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나. 그저 자네들이 가진 최강의 무기를 칭송하고자 첨언하였을 뿐이니. 그럼, 다음에도 잘 부탁하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쪼록 또 찾아주십시오."

보수가 담긴 궤짝을 옮기도록 하인들에게 지시한 의뢰인은 곧 돌아갔다.
궤짝 속에 가득 담긴 금화를 확인한 인도자는, 고개를 떨군 채 우두커니 서 있던 검은 그림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수고가 많았다. 내가 만들어낸 가장 강하고 잔혹한 병기여. 이제 네 노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줄 시간이구나."

자신의 작품을 자랑스러운 듯 바라보며, 그는 무기의 손에 사슬을 채웠다.

"자,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자꾸나."

길고 복잡한 통로를 지나 그림덴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긴 시간 수많은 암살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해낸 인간 병기의 방은, 그저 그가 납치되어 오던 날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가 방에 들어서자 사역자들은 재빨리 그의 양발에 족쇄를 채웠다.
일말의 저항조차 없이 초점 잃은 눈빛으로 족쇄를 찬 그의 모습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을 연상시켰다.
인도자는 그림덴의 입에 천천히 약물을 흘려 넣은 뒤 나지막이 구절을 외웠다.

"아버지는 나를 네 번 버렸네. 불사의 비밀은 영원한 어둠으로.”
“붉은 꽃은 알고 있네. 죽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너는 누구냐.”
“나는 네 번 죽은 자의 사념입니다.”
“네 소임이 무엇이냐.”
“나는 그림자. 명령에 따라 베는 것이 나의 소임입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복종. 복종뿐입니다."

그림덴은 익숙한 듯 막힘 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듯, 인도자는 그의 고개를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잘했다. 곧 향을 피울 테니 이만 쉬거라."

철문을 잠그는 소리가 나자 그림덴은 비로소 고개를 떨구었다. 인도자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써 참아냈던 두통이 일시에 몰려왔다.
이내, 환풍구를 통해 방 안으로 역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들어왔다.

"......후."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종일 그를 괴롭히던 통증은 약물로도 향으로도 진정되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약물이 몸에 주입되면 될수록, 고통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오랜 시간 훈련을 거쳐온 그의 육체는 이미 온갖 수준의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충분히 강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늘 강도 높은 세뇌와 기억 조작에 시달리며 약물의 부작용을 감당해야 했던 그의 정신은, 육체와 달리 너덜너덜하게 망가진 지 오래였다.

어느 순간부터 종종 미약한 두통이 느껴졌던 건 그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고통을 느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칫하다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을 뻔할 아찔했던 상황. 어쩌면 오늘이 그가 처음으로 임무를 실패한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주어진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그림자에게 있어서 최악의 수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인도자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잠식당해버린 그였지만, 무의식 너머에는 여전히 가냘픈 저항의 의지가 남아있었는지도 몰랐다.

"으윽...."

점차 심해지는 통증을 견디기 위해 그림덴은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그는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해보려 애썼다.
간신히,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자신이 직접 베어낸 자들의 최후였다.
인간, 마족…. 종을 가리지 않는 수많은 생명이 그의 눈앞에서 스러져갔다.
죽어가는 자들이 남긴 의문과 원망, 그리고 저주를 그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기대어 있는 돌벽에 새겨진 음각처럼, 모든 죽음의 순간이 그의 뇌리에 강렬히 각인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거나,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그는 늘 무덤덤하게 죽은 자들의 기억을 받아들였다.
어설픈 감정은 무기에게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여전히 머리가 욱신거렸다.
어느새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이 순간에… 여신… 함께… 기억하….’

순간,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음이 뒤섞인 목소리가 때로는 또렷하게, 때로는 나지막하게 귓전에 울려 퍼졌다.

‘…여신… 함께… 기억하….’
‘여신?’

그림덴은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을 쳤다.
여신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릴 때마다 고통으로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통증을 견디려 바닥을 긁어대던 손끝에 크고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진정하려 할수록 오히려 머릿속은 더욱더 혼란해져만 갔다.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한 사역자들과 인도자가 방에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이성을 잃은 듯합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서 진정제를 가져와라. 어서!”

인도자는 제압당한 채 쓰러져 있는 그림덴의 입에 재빨리 약물을 흘려 넣었다.
약효가 돌자 그는 곧바로 정신을 잃은 채 깊은 잠에 빠졌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로 내일 임무를 이행할 수 있을까요. 다른 그림자를 사용하시는 게….”
“아니, 이 정도면 내일까지는 충분히 버틸 거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인도자는 분한 듯 내뱉었다.

“…아직도 꺾이지 않은 것인가.” - 다음 날, 검은 무리가 밝은 햇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 사이로 질주하고 있었다.
은둔하고 있는 표적들을 모조리 섬멸하는 것이 그들이 받은 명령이었다.
표적들의 은신처는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리라고 자신한 듯 방치된 그곳은 은신처라기엔 그야말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림자들은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그림덴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수신호가 떨어지자, 그는 숨소리를 낮춘 채 진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귓가에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 여신… 여신…. 기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머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이를 참아내기 위해 그는 재빨리 날붙이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렀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느껴지는 고통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눈에 닿는 빛들이 날뛰는 심장박동에 따라 제멋대로 증폭되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과장된 형태로 왜곡되어 빠르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림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는 더 이상 피아를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지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혼란에 빠진 그는 신음하며 대형을 벗어나 무작정 전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상한 소리를 듣고 낌새를 눈치챈 표적들이 이내 은신처에서 하나둘 다급히 빠져나왔다.
그림자의 무리는 이탈해버린 낙오자의 뒤를 쫓는 대신,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도망치는 표적들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림덴은 달리고 또 달렸다.
그의 이성은 이미 강렬한 환각과 이명, 그리고 지독한 통증에 의해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다.
폭주하는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누군가를 베어야 한다는 강한 충동, 그뿐이었다.

"카아악!"

문득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환청의 틈새를 비집고 들려왔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그의 눈앞에 두 형체가 보였다.
왜곡된 시각으로 인해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분명 그것은 마족이 인간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족이 내뿜는 살의가 그를 자극했다.
전신의 감각이 저놈을 베어야 한다고 종용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인도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 숨통을 끊어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족에게 다가간 그는 놈의 머리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무너져 내린 형체가 내뿜는 피를 뒤집어쓴 채 숨을 헐떡이던 그림덴은, 힘을 다해버린 듯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점차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보았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채 알아보기도 전, 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불현듯, 그림덴은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관자놀이가 지끈거렸지만 이제 환각이나 환청은 완전히 잦아든 상태였다.
그는 문득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카타마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무장 해제가 가능할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근한 이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도 생경했다.
작은 오두막의 창문에 저무는 햇살이 은은히 걸쳐 있고, 아기자기한 장식이 놓인 벽난로에는 따뜻한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소박한 풍경화 한구석에 검은 물감을 칠해놓은 듯, 그 자신의 모습만이 평온한 집의 정경에 어우러지지 못한 채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재빨리 적당한 크기의 가구 뒤로 몸을 숨겼다.
상대를 단숨에 제압하기 위하여 그는 숨죽인 채 태세를 갖추고 주방 쪽을 응시했다.

잠시 후, 웬 노파가 나타났다.
손에 들린 접시 위에는 갓 구운 듯한 빵이 놓여있었다.
노파는 비어있는 침대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보였다.

"어머나, 벌써 일어났나? 어디로 갔지?"

들고 있던 접시를 탁자 위에 둔 노파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 정돈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등장에 그림덴은 내심 놀랐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던 그는, 곧 노파가 자신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조용히 노파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거기 있었군요. 내가 요즘 눈이 좀 어두워서. 거기에 있는 줄 꿈에도 몰랐어요."
"...."
“청년, 몸도 성치 않을 텐데 거기 서 있지 말고 어서 이리 와 앉아요. 내가 빵을 좀 구워봤는데 입에 맞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주름진 손이 그림덴의 팔을 덥석 잡았다.
마치 익숙한 손님을 맞이하듯이 노파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의자에 앉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상처투성이 얼굴을 보며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기억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이 나를 구했어요. 정말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마치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나타났다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안색도 너무 좋지 않고 계속 신음을 하고 있어서, 이러다 큰일이 나는 것 아닌가 싶었지요."

노파는 그림덴 가까이 접시를 옮겼다.
노릇노릇한 갓 구운 빵에서 나는 냄새가 그의 코끝을 자극했다.
사실 그는 병기가 된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된 ‘음식’이란 것을 먹어보지 못했었다.

"자, 이걸 먹으면 기운이 좀 날 거에요. 부담 가지지 말고 어서 하나 들어봐요."

그는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이 너무나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익숙했다.
수상한 존재인 자신을 이렇게 경계심 없이 받아들이는 노파가 꺼림칙하다가도, 동시에 이 따스함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자에 놓인 접시를 향해 그의 손이 조심스레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들었던 손을 거두고 말았다.

‘그림자가 속해야 할 곳은 오직 어둠뿐이다. 빛 아래의 그림자는 그저 덧없이 소멸해버릴 뿐이니.’

인도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머릿속 저편에서 들려왔다.
그림자인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어둠 속 자신의 방뿐이었다.
그는 이런 곳에 있도록 허락되지 않은 존재였다.
멍하니 앉아있던 그의 눈에, 벽난로 위에 놓인 한 작은 장식이 보였다.
강한 이끌림을 느낀 그림덴은 재빨리 벽난로로 다가가 장식을 조심스레 손 위에 올려놓았다.
날개 달린 여성의 형상을 한 조각, 그것은 나무로 만든 ‘작은 여신상’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연신 여신상을 어루만지는 그를 보며 노파가 말했다.

“그건 내가 오래전 무녀 생활을 은퇴할 때 받은 것이에요. 신전을 떠날 때, 언제든 여신께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사람들이 선물해 준 소중한 것이지요. 비록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여신상은 아직도 늘 여신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오.”

그리운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창밖의 석양을 바라보았다.

쿵.
갑자기 청년이 있던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그를 향해 다가간 노파는 눈앞의 광경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절대 부러지지 않을 날 선 칼과 같아 보이던 청년이, 여신상을 품에 안고 벽난로 앞에 주저앉은 채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어린아이 같아 노파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녀는 청년의 옆에 앉아 들썩이는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걱정 말아라, 얘야.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잘될 거란다.”

그렇게 그가 진정될 때까지, 노파는 몇 시간이고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땅거미가 진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림덴은 안정을 되찾았다.
아까의 상황 이후로, 그의 내면을 구속하던 억압의 벽에 결코 막을 수 없는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오랜 시간 어둠 속으로 침잠했던 기억들이 미약하나마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가족들의 웃음소리,
그들이 들려주던 자애로운 여신의 이야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결심했던 그 날의 각오,
여신의 사랑을 베풀고 싶었던 꿈.
비록 아주 작은 기억의 편린들 뿐이었지만, 그조차도 그에겐 너무나 충분하고 또 소중했다.
잃었던 자신을 되찾게 되었다는 사실이 메말랐던 그의 마음에 엄청난 환희와 기쁨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깨닫고 말았다.
자신의 손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의 피가 배어있었다.
비록 그가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손에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간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온몸에 피 냄새가 나는 자신은 세상의 빛 아래 살 수 없는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그림자’였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림덴은 다소 쉰 목소리로 노파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인도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고맙긴요.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답니다.”

노파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커다란 양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떨고 있는 투박한 손을 꼭 잡았다.

“비록 이젠 늙었지만 나도 한때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던 적이 있었답니다. 만일 청년이 허락한다면, 나는 청년을 위해 여신께 기도를 드리고 싶어요.”

상처 가득한 손으로 전해지는 작고 주름진 손의 따스한 온기.
그 온기가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그림덴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용기를 주었다.

짧은 침묵 끝에, 그는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저처럼 끔찍한 살인 기계도,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을까요?”

절박함과 괴로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는 노파를 바라보았다.
뜻밖의 이야기에 그녀는 다소 놀란 모습이었다.
피로 얼룩진 자신의 본모습을 알게 된 노파가 곧 자신을 뿌리치고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리라 생각한 그림덴은 두려웠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결코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노파는 그림덴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청년, 나는 청년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청년이 끔찍한 존재인지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자인지 판단하는 것은 오직 신과 자기 자신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 인가에요. 당신이 선한 의지를 갖추고 남은 삶을 살아간다면, 늘 곁에 함께하시는 여신께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길을 인도하실 겁니다.
청년은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세요.”

부드럽고도 결연한 전언.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에 와닿아 구원을 안겨주었다.
견고한 갑옷처럼 그를 겹겹이 둘러쌌던 절망이, 마치 알의 껍데기가 깨지듯 초라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순간, 오두막 주변으로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이탈해버린 낙오자의 행적을 좇던 그림자들이 마침내 그가 있는 곳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들이 집안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신을 완벽히 제압할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카타마르가 놓인 위치를 확인했다.
적들은 자신이 무장하기 직전을 틈타 일시에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그림덴은 노파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몸을 숨기세요.”
“무슨 일….”
“저를 노리고 온 겁니다. 할머니께서 여기에 휘말리셔선 안 돼요. 어서 몸을 숨기세요…!”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고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재빨리 칼이 있는 쪽을 향해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오두막의 창문이 일제히 깨지고 검은 무리가 들이닥쳤다.
그림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그림덴은 빠르게 후방으로 도약하여 적들의 급소를 베었다.
검은 형체들이 서로 뒤엉켜 오두막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악!”

어디선가 노파의 비명이 들렸다.
다수의 거친 공세를 막아내고 있던 그림덴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한 그림자가 숨어있던 노파를 발견해 거칠게 끌어내고 있었다.
지체할 새 없이 그림덴은 노파를 향해 달려갔다.
노파를 제압하고 있던 그림자를 단숨에 벤 그는, 정신을 잃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갑자기, 팔 쪽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칼에 베여 쓰러졌던 한 그림자가, 가까스로 최후의 일격을 박아 넣은 것이다.
그는 팔에 박힌 작은 단도를 빼냈다. 단도 끝에는 마비 독이 묻어있었다.

‘젠장….’

몸이 급속도로 굳기 시작했다.
그는 노파를 보호하기 위해 애써 몸을 일으켜 자신을 둘러싼 그림자들과 대치했다.
하지만 약효를 버티지 못한 그는 그만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림자들은 그를 단단히 포박하여 둘러멘 후, 황폐하게 변한 오두막을 등진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그림덴은 사역자들에게 끌려 자신의 어두운 방으로 돌아왔다.
인도자는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방안에 들어서자 인도자는 기쁘게 반겼다.

“어서 오거라, 나의 냉혹하고 아름다운 무기여. 네가 집에 돌아온 걸 보니 참으로 기쁘구나.”

그림덴은 오랜 세월 자신을 억압하고 망가트린 장본인을 증오 서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네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연상시키는구나. 넌 그때도 굽힐 줄을 몰랐지.”

푸른 가면이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까지 난 네 정신을 굴복시키기 위해 다른 자원에 비해 몇 배의 공을 들였다. 집단의 어떤 자들은 그냥 널 처분하자고 말하기도 했지. 분명,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난 너를 포기하지 않았어. 끊임없이 저항하는 널 내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거든.”

그림덴은 이죽대는 얼굴을 향해 거칠게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렇게 긴 시간 공을 들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널 완전히 복종시킬 수 없었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네 안에는 여전히 나에게 저항하는 무언가가 남아있어. 그걸 어떻게 하면 영원히 꺾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인도자가 허공에 가볍게 손짓을 하자 곧 방 안으로 누군가가 끌려 왔다.
그림덴은 단번에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끌려온 자는 바로 자신을 도와준 노파였다.
비록 겁에 질린 듯했지만, 노파는 아무 데도 다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음 깊이 안도하며 떨고 있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시선을 마주한 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 부인께서 내내 너와 함께 있었다지? 잃어버린 나의 무기를 보관하고, 친절하게 대해준 것에 대해 감사드리오, 부인.”

인도자는 방 가운데에 내팽개쳐진 채 주저앉은 노파를 향하여 가볍게 묵례를 했다.

“부인 덕분에, 무뎌져 녹슬어버린 검이 다시 최강의 병기로 태어날 것이오."

인도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사역자들이 그림덴의 무릎을 꿇리고 목 뒤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주사하기 시작했다.
강제로 주입된 그것은 혈관을 타고 빠른 속도로 전신에 퍼져 스며들었다.
잠시 뒤, 연옥의 화염에 불타는 듯한 고통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빛으로, 들리는 모든 것이 저주 섞인 괴성으로 들려왔다.
참다못한 그림덴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비명을 질렀다.
인도자는 그런 그의 주위를 맴돌며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뱉는 말들은 강렬한 속박이 되어,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림덴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몸부림치는 그에게 오직 한 가지의 사념이 주입되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노파는 이 끔찍한 광경 전부를 옆에서 생생히 지켜보고 있었다.
괴로워하는 청년의 모습은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절하고 참혹했다.
대체 얼마나 이런 고초를 견뎌온 것인지, 그녀는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문득 청년의 쓸쓸하고도 서글픈 질문이 떠올랐다.

‘…… 저처럼 끔찍한 살인 기계도,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을까요?’

이제서야, 그녀는 청년이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꺼냈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가 짊어진 짐의 크기를 알지도 못한 채로, 주제넘게 어설픈 위로를 건넨 것이 노파는 못내 미안했다.
지금 당장 이 가엾은 영혼을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희생이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그녀 자신은 이 자리에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노파는 다급히 일어나 쓰러져있는 청년과 그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악랄한 자의 사이를 양손으로 막아섰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자, 그는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되려 청년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자, 그림덴이여. 이 여자를 네 손으로 직접 죽여라!"

일순간, 비명이 그치고 방안에 섬뜩한 침묵이 흘렀다.
바닥에 엎드려있던 검은 윤곽이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곁에 놓인 칼을 쥐었다.
그림자의 두 눈이 고통과 광기로 희번덕거렸다.
인도자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그림덴이여, 어서 네 마지막 결함을 베어라. 네 알량한 의지의 잔해를 베어라. 네 진정한 적을 섬멸해라!"

아무런 저항 없이, 그림자는 비틀대며 노파 앞에 우뚝 선 채 칼날을 높이 쳐들었다.
노파는 거친 숨을 내쉬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눈물과 피가 뒤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애 마지막 순간, 그녀는 가엾은 청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싶었다.
두 손을 모으고 노파는 고개를 숙였다.

"...!"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방안에 울렸다.
그리고 뒤이어 무언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파는 기도를 멈추고 눈을 떴다.
쓰러진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림덴은 기괴한 자세로 널브러진 인도자와 사역자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그를 지배했던 주인과 수하들은, 한 마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자신이 키우던 개의 손에 명줄을 다했다.
그들의 최후는 그저 허무하고 또 허무했다.

노파는 그림덴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고통의 잔상이 남아 있는 듯 그는 여전히 괴로워 보였다.
노파는 그의 손을 잡았다.

“자, 돌아가자꾸나.”

잠시 후, 노파를 등에 업은 채 그림덴은 그가 수백 번도 더 다녔던 길고 긴 통로를 달렸다.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림자들을 그는 무서운 속도로 베고 또 베었다.
그림자들을 섬멸하며 그는 철문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열었다.
과거의 자신처럼 어딘가에서 납치되어온 아이들이 방에서 쪼르르 뛰쳐나와 밖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아이들 모두가 안전하게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주변에 놓여 있던 화톳불을 쓰러트렸다.
불은 기둥을 타고 올라가 삽시간에 공간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검고 매캐한 연기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
그를 추격하던 그림자들이 연기 속에서 우왕좌왕하다 화마에 휩쓸리는 사이, 그림덴은 노파와 함께 탈출구로 향했다.

탈출구는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따스한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겪었던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의 그 날처럼, 그는 여전히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망설이는 손을 잡고 빛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이 곁에 함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떼 문턱을 넘어섰다.

마침내 그는 자신을 속박하던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

- 그림덴은 노파와 함께 그녀의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는 노파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그녀의 곁에 머무르며 오두막을 고치는 것을 도왔다.
갈 곳 없는 그에게 노파는 기꺼이 보금자리를 내어주었고, 곧 노파와 그림덴은 서로를 어머니와 아들처럼 여기며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망가져 버린 정신을 점차 회복해나갔다.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세뇌된 만큼, 그가 보통의 사람만큼 회복되어 자신을 찾아가는 데에는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노파는 곁에서 늘 함께하며 그가 회복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잃어버린 그의 세월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행복한 추억이 점점 늘어났다.
새로운 경험이 쌓일수록 소실되었던 과거의 기억도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 언젠가 잃어버린 가족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싹텄다.

시간이 더 흘러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림덴은, 마침내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마주할 용기를 냈다.
노파의 오랜 설득 끝에 그는 속죄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사람들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오랜 시간 찾지 않았던 자신의 장비와 무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모두 한때는 그의 몸과도 같았던 것들이었다.
흰 천 사이로 비추는 서늘한 금속은 여전히 피로 벼려져 살기를 띤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칼날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 칼로 베었던 수많은 생명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며, 저지른 죄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은 어린 날의 꿈처럼 여신의 사랑을 베푸는 고결한 자가 영원히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칼에 선한 의지를 담아 소중한 것을 구하고 지켜낼 수 있다면, 그렇게 자신의 죄가 조금이나마 속죄될 수 있다면 그는 그걸로 족했다.

마침 그림덴은 근처의 마을 용병단에서 용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공고를 보았다.
그곳은 과거는 묻지 않으며 그저 능력 있는 자들이면 가리지 않고 받아 준다고 했다.
그는 용병단에 입단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만한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그림덴은 노파의 배웅을 받으며 정든 오두막을 떠났다.
카타마르를 허리에 단단히 둘러매고 그는 콜헨 마을로 향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모르지만, 그는 무엇이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글 : 시트롬 / 그림 :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