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kay

사내는 매일 밤 같은 꿈을 꾼다.
꿈은 언제나 아버지의 다급한 외침으로 시작된다.

"어서 도망쳐! 약속하거라. 너만은 꼭 살아야한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 …으아악!"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사내는, 끔찍한 비명을 뒤로 한 채 을씨년스러운 한겨울의 숲길을 내달린다.
귓가에 윙윙대는 바람 소리와 비명, 거칠게 내뱉는 숨 때문에 소년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하다.

끝없이 달리고 달려서 눈앞이 아득해질 때 즈음, 소년은 눈 내린 마을의 길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쯧쯧, 저 애가 그 활잡이의 아들이라지?"
"그래, 마을 유지에게 아비가 개죽음을 당했다잖아. 거 매번 내던 걸 한두 푼 더 내는 게 부당하다고 괜히 나서다가 그렇게 되었다던데."
"마족 놈들한테서 우리 마을을 지켜주느라 더 필요하다는 건데 뭐 그리 미련하게 고고한 척을 해. 제 자식을 생각했어야지."
"이제 곧 눈이 내릴 텐데 저 애도 금방 죽겠어."
"괜한 일에 휘말리지 말고 겨울을 잘 버틸 생각이나 하자고."

소년은 수군거리는 군중들 사이로 손을 뻗지만, 그들은 이내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다.
소년의 배는 가냘프게 꼬르륵거린다.

다음 순간, 소년은 굵은 눈발이 날리는 어느 거리의 술집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있다.
일주일 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소년에게 살을 베는 듯한 추위는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내장이 녹아내릴 듯 지독한 허기만이 남아있을 뿐.

소년의 귓가엔 아버지의 외침이 들려온다.

'약속하거라. 너만은 꼭 살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

아버지, 죄송해요.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아요.
소년은 점점 감겨오는 눈꺼풀에 연신 힘을 준다.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은 그나마 남아있던 소년의 의지마저 천천히 꺾어버린다.

순간, 소년은 폐를 찌르는 듯한 냄새에 눈을 번쩍 뜬다.
어딘가에서 조용히 다가온 검은 남자가 소년의 코앞에 빵 한 조각을 내민다.
소년은 다급하게 빵을 낚아채려 하지만 남자는 재빨리 빵을 허리 뒤로 숨긴다.

"너, 배가 고프구나? 너에게 이 빵을 주마. 대신 내가 시키는 일 딱 한 가지만 하면 돼. 할 수 있겠니?"

소년은 무언가 홀린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이 술집 안에 몹시 나쁜 사람이 있단다. 그 사람이 아저씨에게 아주 소중한 물건을 빼앗아갔어. 네가 그 사람을 '조금만' 다치게 해주면, 아저씨가 그사이에 그 물건을 되찾아 올 생각이란다."

남자는 소년의 손에 단검을 쥐여준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소년은 단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문득 소년의 머릿속에 문득 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아들아, 명심하거라. 남을 해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단다.'

하지만 콧 속에 가득한 빵의 냄새와 내장을 쥐어짜는 강렬한 허기는 소년의 이성을 이미 마비시킨지 오래다.

"자, 어서 가거라."

남자의 충동질에 힘입어, 소년은 천천히 술집 안으로 향한다.


"아주 잘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더구나. 단검을 던져서 맞출 줄은 상상도 못 했는걸."

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손을 내민다.

“아, 그렇지, 네 빵 여기 있다. 앞으로 종종 찾아오마. 내가 원하는 일을 계속해준다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게다.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살아있거라.”

검은 남자는 웃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소년은 황급히 빵을 입에 쑤셔 넣는다.
전류가 흐르듯 몸 속 구석구석에 달콤함이 퍼져나간다.
나는 살아남았다. 아버지, 전 이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요.
소년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의 미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동시에, 소년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빵이 이렇게 달콤한데 왜 자신은 울고 있는걸까?
앞으로 저 남자의 말만 착실히 따른다면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왜 아버지의 슬픈 눈빛이 계속 떠오르는 걸까?

'…명심하거라. 남을 해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단다.'

그때, 소년은 결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내는 매일 아침 같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 날 이후로 그는 깊이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또 그 꿈인가…

허름한 작은 창밖으로 천천히 동이 트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 소년의 미간엔 깊은 주름이 생겼다.
하지만 사내는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오히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하기는커녕 더욱 강렬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내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날 그의 육신은 살아남았지만, 영혼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는 사실을.
거울에 비친 그의 메마른 눈빛은 언제나 지독한 자기혐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망가진 사내'는 언제나처럼 적당히 채비한 후 방을 나섰다. 이것이 매일 반복되는 사내의 아침이었다.
- 쿵.
책상에 피투성이가 된 마족의 것으로 보이는 전리품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맞은 편에 앉은 노인은 감탄스럽다는 얼굴로 물건과 사내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역시 대단해. 자네는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니까. 이거 하나 구해보겠다고 얼마나 많은 자들이 불구가 됐는지 아나?"

사내는 노인이 내민 반쯤 찬 금화 주머니를 받아 품에 넣었다.

"하긴, 자네가 물건의 가치를 신경이나 썼다면 진작 이걸 들고 튀었겠지. 자네가 자극 거리를 쫓는 부류인 것이 내 입장에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니까. 이번 건도 언제나처럼 잘 부탁하이. 그리 어렵지 않을걸세."

노인은 탐욕스런 미소를 지으며 사내에게 의뢰서를 건넸다.
사내는 의뢰서를 받아 들고 말없이 어두운 방을 나섰다.

대낮에도 도시의 골목은 빛 한 줄기 제대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그 누구도 사내가 땀과 핏방울로 젖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매캐한 공기와 엷은 철분의 냄새는 들이마실 때마다 폐 속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사내는 근처 우물가에서 적당히 몸을 씻었다.

사실은 그도 자신의 수고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가 턱없이 적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돈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중간책 노인의 말처럼 그가 살육의 자극 따위를 쫓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불필요한 살육을 싫어했다.

사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남들처럼 먹고, 남들처럼 잠드는 것이었다.
평범한 행위를 반복하여 실행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사내에겐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실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을 흉내내는 것만으로, 진정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그가 추구하는 삶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건 그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검은 남자를 따라 '해결사'의 길에 발을 들인 지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기에, 이 모순조차도 이미 그에겐 일상이었다.

사내는 조용히 눈을 떴다.
복잡한 상념을 떨쳐내고자 그는 아까 노인에게 받았던 의뢰서를 펼쳤다.
'수명을 늘려주고 젊음을 되찾아준다는 비약의 재료, 마을 북서쪽 숲, 밤에만 출몰하는 피를 마시는 자들의 뼈….' 요즘들어 이런 류의 의뢰가 부쩍 늘었군.

수명과 젊음이라….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가운데에서도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탐욕은 절대 꺾일 줄을 몰랐다.
언제나 그랬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검은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은 오직 자신만을 위하는 존재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같은 그림자들이 먹고 사는 거지.'

그렇지, 그래서 내가 오늘도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거니까.
사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이리 쓸데없는 잡생각이 드는지 모르겠군.
그는 서둘러 활과 화살, 의뢰에 필요한 각종 도구를 챙긴 후, 마을 밖으로 떠났다.



어둡고 축축한 숲속, 사내는 벌써 몇 시간째 한 자리에서 목표물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달빛조차 없는 칠흑같은 밤이었다.
이윽고 빠르게 움직이는 발소리와 함께 검은 형체가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한 놈이라, 이 이상의 일행은 없는 것 같군.
사내는 수풀에 숨은 채 목표물이 적절한 위치로 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계획은 이러했다.
화살로 머리를 관통시켜 목표물이 쓰러지게 한다.
그리고 그 틈에 바로 화살 폭풍을 날려 목표물을 확실히 행동불능으로 만든다.
목표물에게 접근해 재빨리 물품을 노획한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미리 설치해 둔 와이어로 탈출한다.
단순한 계획이지만 이는 왠만하면 잘 먹혀들었고 확실했다.
언제나처럼, 오늘도 예외는 없을 것이다.

그는 조용히 긴 활을 들어 검은 형체의 머리를 향해 힘껏 시위를 당겼다.

"키야악!"

단말마의 날카로운 비명이 숲을 가로질렀다.
명중이었다.
화살 한 발에 검은 형체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이어서 사내는 하늘 높이 화살집을 던졌다.
쓰러진 목표를 향해 빗발치는 화살 폭풍은 검은 형체의 전신을 산산조각냈다.
그는 재빨리 검은 형체에 다가가 상체를 힘껏 발로 찼다.
쓰러진 몸뚱이는 이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계획한대로군.
사내는 검은 형체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런저런 마족들을 여럿 보았던 그로서도 이렇게 온전히 뼈로만 이루어진 마족은 처음이었다.
마치 죽은 시체들에서나 느껴지는 공허하고도 불쾌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사내는 서둘러 뼈를 노획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등 뒤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아뿔싸, 그는 재빨리 신경을 집중했다.
하나, 둘, 셋, 넷… 젠장, 너무 많아.
그들은 이미 위협을 감지하고 어둠 속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놈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는 순간, 놈들은 일순간에 달려들어 그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에겐 이런 순간을 예상하고 미리 설치해 둔 와이어가 있었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손에 들린 와이어 줄을 쥐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겠군.
그는 깊이 호흡을 들이마신 후 줄을 힘주어 당겼다.

빠르게 튕겨지는 강력한 줄의 반동이 사내의 몸을 움직이려는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쓰러져 있던 마족의 손뼈가 그의 손목을 꽉 잡고 강하게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당황한 사내는 고개를 돌려 놈을 바라보았다.
화살을 맞아 흩어진 뼈들이 한자리로 모여들어 다시 온전한 형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붙잡은 손뼈를 화살로 내리찍었다.
하지만 손뼈는 더욱 단단히 손목을 옭았다.
사내의 눈에 놈의 박살 난 머리뼈가 보였다.
놈은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이 평소답지 않게 방심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쩐지 우스웠다. 어쩐지 오늘따라 쓸데없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니.
그의 입술은 터져 나온 실소로 비틀렸다.
이제 놈들은 사내의 바로 뒤까지 다가왔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아버지와의 오랜 약속을 되뇌었다.

'약속하거라. 너만은 꼭 살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
사내는 필사적으로 탈출할 방법을 떠올리려 애썼다. 살아야 한다, 살고 싶다…!

순간, 머리에 날카롭고도 둔탁한 고통이 느껴졌다.
시야가 일순간 흐려지고 모든 것이 점차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사내는 애써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소용 없었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풍경 속에서, 그는 어쩐지 눈부신 '빛'을 본 것 같았다.
- 사내는 눈을 떴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상처에서 흐른 피가 아직 굳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신을 잃은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그리고 그 밝은 빛은…
'빛'이라고?
사내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사내의 눈앞에선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달빛조차 없는 칠흑 같은 밤, 이질감이 들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는 갑옷을 입은 자가 사내를 보호하듯 등을 지고서 그를 향해 달려드는 검은 존재들을 연신 막아내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강렬한 빛을 뿜는 검이 만드는 궤적은 숨막히게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놀랍도록 위협적이었다.
빛의 검이 적들의 공격을 받아칠 때마다 놈들의 전의가 점점 꺾여가는 것을 사내는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적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모두 도망쳐버렸다.

사내는 멍하니 빛나는 갑옷을 입은 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듯, 갑옷을 입은 자도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찬란하게 뿜어지는 빛에 그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사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그곳에 빛의 갑옷은 없었다.
단지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한 검사가 있을 뿐이었다.

"…다친 곳은 괜찮나요?"

"…당신, 처음부터 다 보았죠?"

오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녀였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이미 기절해서 못 봤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대로 두었다간 당신은 죽고 말았을 거야. 그 상황을 그냥 못 본체 지나갈 순 없었어요."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연신 사내의 상처에 연고 같은 것을 발랐다.

"자, 이 정도 처치라면 상처가 더 덧나진 않을 거에요."
"…고맙소."

사내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익숙치 않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당신, 용병인가요?"
"용병보다는 더 뒤가 구린 일들을 처리하고 있소만."
"하긴, 보통 용병은 이런 생사를 건 무모한 의뢰는 받지 않죠. 당신은 해결사인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문득 사내는 자신의 의뢰를 떠올렸다. 사내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혹시, 이걸 찾고 있나요?"

그녀의 손에는 사내의 노획물이 들려있었다.
사내는 그녀의 손에서 노획물을 빼앗으려 했지만 그녀는 재빨리 이를 허리 뒤로 감췄다.

"사실… 나는 정체를 드러내선 안 되는 자에요. 하지만 당신을 구하기 위해 결국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어. 만약 당신이 오늘 일에 대해 발설하는 순간 난 끝장이에요."

별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이 사내를 바라보았다.

"…난 그리 말이 많은 편이 아니오."
"그래보이는군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이건 내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원하는 것이 뭐요?"
"당신이 당분간 내 곁에서 날 호위해줬으면 해요. 매일 함께 움직인다면 내 비밀이 새어 나가는지 나도 충분히 감시할 수 있겠죠."

귀찮은 일에 휘말렸군, 사내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순 없었다.

"…받아들이겠소."
"고마워요. 조금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녀는 안심한 듯 가벼운 미소를 띄며 사내에게 노획물을 건넸다.

"내일 오후, 이곳에서 다시 만나요. 약속, 꼭 지키세요."

그녀는 가볍게 목례 후 일어나 숲 저편의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사내는 한참 동안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많은 일이 한꺼번에 뒤얽혀 머릿속이 도통 정리되질 않았다.
여관 방 퀴퀴한 침대에 몸을 눕히고 나서야 비로소 사내는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그가 쌓아올려왔던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

사내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애써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저항할 수 없는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의 눈이 천천히 감겨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잡한 그의 마음과는 달리 그날 밤 사내는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실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사내는 그녀와 함께 행동하기 시작했다.
주로 그녀가 행동하고 사내가 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형태였다.
매우 극적이었던 그녀와의 조우만큼이나, 새로운 일상 또한 그에겐 꽤나 극적이었다.

그녀는 낮이면 주로 평범한 사람들과 섞여 수다를 떨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녀는 주로 단독으로 움직였다.
사내는 그저 그녀가 도달하는 장소 인근에서 대기하면서 주변에 위협 요소가 다가오는지 망을 보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녀는 한번도 그에게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누군가를 따라다니는 것이 썩 유쾌한 일도 아니거니와, 그 날 본 빛의 갑옷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긴 했지만 사내 또한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의뢰인과 의뢰의 내용에 의문이나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노련한 해결사답지 않았다.

다만, 사내는 며칠간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며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직업은 첩자 비슷한 무엇인 듯했다.
그녀는 하루 대부분을 주로 어떤 단서나 정보를 알아내는데 할애했다.
정보의 내용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누구와 연결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그 어떠한 위험도 무릅썼다.

그녀는 절대 불의를 참지 못했다.
누군가 곤란에 처했거나 부당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 그녀는 발 벗고 나서서 이를 도왔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보검도 망설임 없이 내어주려고 할 정도였다.
사내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가 옆길로 새려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녀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그녀는 그저 풀 한 포기에도 감탄사를 늘어놓으며 한참이나 주의 깊게 바라보곤 했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결코 마족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실은, 마족에게 아주 호의적이었다.
종종 그녀는 사내에게 열정적으로 화합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곤 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고 동등해요. 마족도 인간과 다르지 않죠. 어느 한 종족이라도 마음을 먼저 열고 다가간다면 깊은 골은 금세 메워지고 연대와 화합의 때가 올 거에요."

가끔 마족과 대면하는 일이 생길 때에도 그녀는 어김없이 마족의 언어로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이런 어설픈 행동은 대체로 험악한 결과를 불러왔지만, 드물게 평화적인 분위기 속에 이야기가 오갈 때면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는 그녀와 같은 '정의의 사도' 부류의 인간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마주해왔던 사내에게 있어 인간이란, 오직 자신만을 위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가 아는 한 결코 예외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믿고 싶은 얄팍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일 터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토록 눈에 거슬리는 걸까, 왜 이토록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까.
그는 혼란스러웠다.

때마침, 저만치에 떨어져 있던 그녀가 사내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를 본 사내는 어쩐지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귀찮군, 빚을 다 갚으면 바로 떠나는 것이 좋겠어. 그는 생각했다.
그런 사내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녀의 환한 미소는 회색 도시의 정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눈부시고 따스했다. - 약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사내는 여전히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당신, 내가 하는 일마다 그렇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왜 날 떠나지 않죠?"
"…이런 시시한 일들 따위로 목숨값이 쉽게 갚아지진 않소."

사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전히 그에겐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녀를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런 사내를 바라보며 웃었다.

늘 그래왔듯이 밤마다 사내의 꿈은 반복되었고 여전히 그는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사내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그의 눈엔 조금씩 생기가 감돌았다.
그녀는 전보다 단독으로 행동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그 때문에 사내도 홀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끔은 의뢰를 진행하러 중간책 노인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의 일 처리는 여전히 노련하고 정확했으며 노인도 언제나처럼 만족했다.
하지만 이제 사내는 이런 일로는 전처럼 '일상'을 살아간다는 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전의 생활을 반복할수록 공허함이 점점 커지는 기분이었다.

"아저씨, 그 꽃 예뻐요."

그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어느새 조용히 다가온 꼬마가 사내의 손에 들린 꽃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아이에게 꽃을 건넸다.
아이는 기쁜 표정으로 꽃을 쥔 채 저편으로 쪼르르 달려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내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미소는, 분명 그녀의 것을 닮아있었다.

자, 오늘은 며칠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나는 날이다.
그는 숲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노을 지는 숲 저 너머에서 지는 햇살을 한껏 받은 그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는 사내를 향해 절름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심장이 떨어진 듯 놀란 그는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옷자락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찢겨 있었고, 가늘지만 단단한 팔은 크고 작은 생채기들로 가득했다.
사내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는 하얀 왼뺨을 가로지르는 베인 상처를 참을 수 없었다.
상처를 보고 있으면 마치 그 자신의 볼이 베여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후후, 꼴이 좀 엉망이죠? 그래도 수확이 꽤 있었어요."

무거운 침묵을 뚫고 그녀는 경쾌한 목소리로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가 어째서 저렇게 태연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는 목구멍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곧…"
"이제…"

사내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당신이 정의의 사도 노릇을 하며 다니는 꼴, 더 이상은 못 봐주겠어."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냉소가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당신도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이야. 내가 아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이기적인 존재지. 당신이 정의감이라고 착각하는 그 위선도 결국 얄팍한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아. 내 눈엔 당신이 사사건건 남의 일에 참견하고, 사지에 몸을 던지는 게 결코 정의롭거나 대의를 위한 숭고한 행동처럼 보이지 않아. 그건 그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철저히 이기적인 몸부림일 뿐이야. ...그러니 정신 차려."

이야기를 마치자, 그녀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화를 내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딘가 쓸쓸해보이는 눈빛만이 그녀의 마음을 살짝 내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둘 사이엔 한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럼, 다음에 만나요. 오늘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웠어요."

그녀는 나즈막히 작별의 말을 건넨 후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다음 날, 사내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모습을 감춘 이후, 사내는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의 퀴퀴한 여관방도, 길고 긴 밤도, 예의 꿈도,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다.

단 하나, 사내 자신만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녀의 빈자리가 이토록 클 줄,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일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사내는 눈을 감고 그녀를 생각했다.
부드러운 미소,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칼,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을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하던 따스한 시선.
그를 구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던 빛나는 검사.
사내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
자신의 욕망보다는 남을 위하고, 정의와 신념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세계.
그 세계 한가운데에 언제나 올곧게 서있던 그녀가 있었다.
자신이 먼 옛날 꿈꾸었을지도 모르는 이상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는 그녀.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날 밤부터, 어쩌면 그녀를 쭉 동경해왔는지도 모르겠군.
아니, 어쩌면 '질투'해왔는지도….

생각이 이에 미치자, 사내의 머릿속에 쓸쓸히 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를 그렇게 보내선 안됐는데.


사내는 항상 그녀와 만났던 그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언제까지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숲에 당도했다.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근처의 돌 위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보름달이 대낮처럼 환한 빛을 뿜는 밤이었다. 달빛을 받은 나무들은 은은하게 반짝였다.
숲은 그날의 혈투가 벌어진 장소와 같은 곳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사내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녀인가? 아니면 놈들인가?
사내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인기척이 나는 곳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순간, 그의 표정은 탄식으로 일그러졌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엉망이 된 모습으로 나무에 기댄 채, 피를 흘리며. 인기척을 느낀 그녀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당신…."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미소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오랜만이야..."

사내는 그녀가 좀 더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정돈했다.
얼핏 보아도 그녀의 부상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복부의 상처에서 연신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많이 놀랐죠? 이번엔 조금 더 깊숙한 곳을 파고들어 봤어요. 혼자서도 무사할 줄 알았는데…, 결과는 이 꼴이네요."
"왜 곧장 의원을 찾아가지 않은거요."
"알잖아요, 난 비밀이 많은 사람이란 거. …무엇보다도, 이곳에 오면 당신이 있을 테니까."

그는 그녀의 몸에 난 상처에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랐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뭐가 우스운 거요."
"그냥,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어요. 내가 당신을 치료해 줬었는데, 이젠 내가 치료를 받고 있네요."
"고마워할 필요는 없소. 난 그저 그때의 빚을 갚고 있는 것뿐이니까."

그녀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사내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지난번엔 미안했소."
"신경 쓰지 말아요, 당신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
"그동안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사실 난 어떤 일의 뒤를 계속 쫓고 있어요. 그게 무엇인지 더 말해줄 수는 없지만, 이는 분명 인간과 마족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거에요. 그로부터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난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어요. 그것이… 나의 신념이니까. 하지만 그날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서 문득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죠. 어쩌면 당신의 말처럼 나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그저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결국 변하지 않을 것은 변하지 않을거라는 것을…."

한동안 가벼운 침묵이 흘렀다.
처음으로 마주한 그녀의 불안과 자조 앞에서, 그는 어떠한 말을 건네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이때, 그녀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겠어요. 나의 작은 움직임으로 인해 단 한 명의 삶이라도 바뀔 수 있다면, 설령 얄팍한 자기만족을 위한 행동일지라도 분명 의미가 있을 테니까."

사내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결연한 눈빛, 하얀 뺨의 흉터, 작지만 굳센 어깨. 그녀가 짊어진 숭고한 이상의 무게를 그는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삶이라는 진흙탕 속에서 질척대는 자신, 하지만 그녀는 나와 다르다.
고결한 신념으로 무장한 자.
빛의 갑옷이 없어도 그 자체로 빛나는 자.

나는… 그녀처럼 살아가고 싶다.
나는 그녀를 동경한다.
나는 그녀를…….

사내는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이제 와서 빛을 향해 나아가기엔 자신은 너무 멀리 왔다.
그녀에 비하면 나는 너무도….

그래도…, 마음 정도는 전해도 괜찮겠지.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밤마다 같은 꿈을 계속 꾸고 있소."

이젠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매일 밤 반복되는 소년 시절의 기억, 검은 남자와의 만남, 아버지와의 마지막 약속, 타인의 욕망을 대행하며 어긋난 조각을 억지로 맞추듯 이어온 삶.

그가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 그녀는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사내는 처음 알게되었다.

"…당신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알수 있었소. 당신과 같은 신념을 가진 자가 있기에, 이 세상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나 또한 처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지. 나는…, 당신에게 비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초라한 놈이야.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을 쫓기만 할 뿐."
"……."
"이제 와서 당신과 같은 길을 가기엔 이미 늦었어. 하지만 당신 덕분에, 이제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소."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난 말재주가 별로 없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고맙소."

갑자기, 그녀가 사내의 양손을 덥썩 잡았다.
양손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놀란 사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녀는 그의 손목을 당겨 자신의 품에 힘껏 껴안았다.
그녀에게서 은은하고 부드러운 체취가 느껴졌다.

그녀는 사내에게 속삭였다.

"이젠 괜찮아. 괜찮아…"

상냥한 목소리가 그의 마음에 닿아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고통을 홀로 견뎌내느라, 그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런 일이 일어난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눈을 감았다.
순간, 그는 마치 먼 옛날 겨울의 숲길을 내달리던 소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결국, 넌 이렇게 살아남았잖니. 약속은 이미 지켜졌으니 이젠 모두 놓아주렴. 그리고 이제부터 너만의 삶을 살아가."

다정한 한 마디에, 가슴 속 애써 얼기설기 쌓아 올린 벽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사내는 어쩐지 엉엉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메말라버린 듯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이해한다는 듯, 어느새 따스한 손길은 사내의 등을 연신 쓰다듬고 있었다.
둘은 은은히 전해지는 서로의 온기에 몸을 맡긴 채, 그렇게 한참을 포옹한 채로 있었다.

그렇게 달빛이 환하던 어느 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눈길을 내달리던 소년에게 마침내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하늘은 높고 햇볕은 따스했다.
풀 내음을 품은 바람은 사내의 몸을 휘감았다.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벽돌을 비집고 피어난 잡초조차 생기롭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눈을 돌리자 발그레해진 뺨을 한 그녀가 사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그녀도 이에 화답하듯 환하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내도 그녀도 각자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함께 있는 매 순간을 즐겼다.
하루하루가 빛으로 가득한 벅찬 나날들이었다.
이제 사내는 조금씩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은 미래를 떠올릴 수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다.

그에게도 자신의 방법대로 조금씩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녀가 말했듯이, 작고 부질없어 보이는 몸부림을 통해 단 한 명의 삶이라도 바뀔 수 있다면 이는 분명 의미 있는 삶일 것이다.
사내는 내일의 의뢰를 마지막으로, 그동안 이어왔던 골목에서의 삶을 마감하기로 마음먹었다.
살아남겠다는 약속은 이미 오래전 지켜졌으니 이제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사내의 결심을 들은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정말 축하해요,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 너무나 기뻐."

그녀는 사내의 머리칼을 살포시 어루만졌다.

"사실, 나도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요. 오늘 밤 난 북쪽에 다녀올 거에요. 아주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어요. 이제 조금만 더 다가가면 윤곽이 보일 것 같아."
"……."
"난 여기서 멈추지 않아요. 지금까지 이 순간만을 위해 달려왔는걸."

그랬다, 그녀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자였지. 꿈같은 날들에 가려져 잠시 잊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게 확실해질 거에요. 이번에 다녀오면, 당신에게도 내가 뭘 찾고 있었는지 조금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확신에 찬 목소리, 흔들림 없는 눈빛.
신념을 이야기할 때의 그녀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되는군."

그녀는 풋 하고 웃었다.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에요."

어떤 날보다도 빠르게, 밤이 다가왔다.

"내일 이 시간 즈음에 돌아올 것 같아요. 기다려줄 거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왜인지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미간엔 깊은 골이 생겼다.
그녀의 손이 사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나요, 바보같이. 내일이면 다시 만날 텐데."

그녀는 가볍게 돌아섰다.

"행운을 빌어줘요." - 날이 밝자, 사내는 예의 골목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왔구먼, 자네가 통 오질 않아서 의뢰 처리 건이 부쩍 줄었다고."

노인은 투덜거리며 그를 맞이했다.
사내는 노인에게 의뢰서를 건네받자마자 바로 길을 나섰다.

"자네. 요즘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지만 얼굴이 이제 좀 사람 같아 졌어."

그는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오늘 마족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던데, 몸 사리면서 살살하는 게 좋을 게야."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의뢰는 어렵지 않았다.
활이 오늘따라 더욱 가볍게 느껴졌다.
화살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적들의 몸에 박혔다.
쓰러진 적을 보며 사내는 검은 남자를 떠올렸다.
자신을 구원하고 동시에 파괴했던 남자.
그래도, 그의 덕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으니 조금은 고맙게 생각하자.
그는 고개를 들어 서서히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지속했던 그의 일상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한결 홀가분한 걸음으로, 사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숲으로 향했다.

사내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채, 그녀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약속한 시각이 지나도 끝내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피어오르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사내는 계속 기다렸다.

어느새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는 북쪽으로 간다고 했어.
그는 일어서서 그녀가 사라졌던 방향을 향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사내는 불타버린 어느 저택의 터에 도달했다.
한때 저택이었던 건물은 이전의 형체를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붕괴되어 뼈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까만 숯덩이가 된 채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나무에서는 아직도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진화된지는 그리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제 사내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빌어먹을 직감이, 그녀가 여기 어딘가에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내의 눈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사내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고 말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빛을 내뿜는 조각.
그것은 빛의 갑옷의 파편이었다.
온몸으로 스며드는 불길한 기운에 그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발을 내디뎠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 걸음, 한 걸음, 흩어진 갑옷의 파편을 따라 그는 천천히 이동했다.
그리고, 발길이 멈춘 자리에서 사내는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까맣게 불타버린 작은 광장,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진 듯 산산이 흩어진 빛의 조각 사이로, 붉게 물든 빛의 기사가 누워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적과 격전을 벌였던 걸까, 그녀 주위는 칼자국과 부러진 창들로 빽빽했다.
그녀의 몸에 걸쳐진 빛의 갑옷은 아주 일부분만 남아 간신히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투구는 깨어져 얼굴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사내는 기어가다시피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투구를 벗겼다.

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이 눈도 채 감지 못한 얼굴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그녀의 맥을 짚었다.
하지만, 마지막 숨은 이미 끊긴 지 오래였다.
사내는 여태까지 그를 지탱해주던 무언가가 이제 완전히 끊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때, 뒤편에서 검은 형체들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이구나.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분노가 서린 눈에는 섬뜩한 안광이 비쳤다.

그는 활을 꽉 쥐었다.
그리고 등 뒤로 다가온 형체들을 발로 거세게 차 넘어트렸다.
그녀를 보호하듯 사내는 그녀를 등지고 서서, 놈들을 향해 빠르게 시위를 겨누었다.
쉴 새 없이 날아오르는 그의 화살이 바람을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한 놈, 두 놈, 세 놈.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튕겨 나가는 화살이 몸에 박힐 때마다 놈들은 낙엽처럼 쓰러졌다.

사내가 뱉어내는 거친 기합은 마치 절벽 아래에 추락한 자가 울부짖는 소리처럼 음울하고 처절했다.
남은 한 놈을 향해 사내는 높이 뛰어올라, 놈의 목 뒤를 향해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검은 형체는 그대로 땅에 꽂혔다.

사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비릿한 피 냄새와 적막뿐이었다.

사내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깊고 어두운 절망 또한 무서운 속도로 그의 마음을 잠식했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가 공허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고있는 두 눈을 살며시 감겨주었다.
왜 그녀가 이렇게 죽어야 했을까.
신념을 위해 헌신한 자의 대가가, 고작 결국 마족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란 말인가?
머릿속에 풀리지 않는 수많은 의문들이 들끓었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때, 그의 손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녀에 등에 부러진 화살이 깊게 박혀 있었다.
화살은 제법 거리가 먼 곳에서 강한 힘으로 쏘아진 듯 보였다.
이것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치명상을 입혔을 것이다.

……'화살'이라고?
방금 처치한 마족들은 활과 같은 도구를 쓰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화살이 그녀의 몸에 박혀 있단 말인가?
사내는 등에 박힌 화살을 힘주어 뽑아낸 후, 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날렵하고 특징있는 형태의 화살촉, 정갈하게 다듬어진 꽁지깃.
이 화살은 결코 마족이나 일개 사냥꾼 따위가 쓰는 조악한 싸구려 화살이 아니었다.
장인이 공을 들여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고가의 것이었다.
사내는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이번에 다녀오면, 당신에게도 내가 뭘 찾고 있었는지 조금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직감적으로, 그는 이 화살이 그녀가 이제껏 쫓던 일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정황이 화살은 그녀를 반드시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쏘아진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자는 아마 모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이곳에 함께 불을 질렀으리라.

사내는 굳은 표정으로 화살을 챙긴 후, 그녀를 양손에 안아 들었다.
이제 이곳에 더는 볼일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가 편히 잠들 수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매캐한 연기와 피비린내를 등지고, 사내는 둘만의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동이 트고 있었다.
사내는 추억이 담긴 숲속에 그녀를 직접 묻어 주었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된 걸, 그녀도 기뻐해 줄 것 같았다.
흙무더기로 덮인 조촐한 무덤에 그는 작은 꽃을 꺾어 올려놓았다.
무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참을 수 없는 비통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눈물은 없었다.
다만 미처 다 참아내지 못한 신음이 입 밖으로 조금씩 새어 나올 뿐이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나요, 바보같이. 내일이면 다시 만날 텐데.'

아득히, 그녀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의 짧은 봄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다시, 전보다도 더욱 춥고 더욱 긴 겨울이 찾아왔다.
그녀가 쫓던 것이 무엇인지, 그녀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
그는 부러진 화살을 꺼내 손에 꼭 쥐었다.
이것의 출처를 쫓다 보면 언젠간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이제부터, 그녀를 죽인 자를 찾는다.
몇 달이 걸려도 몇 년이 걸려도 상관없다.
반드시 찾아내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묻고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

문득, 그녀가 복수를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어쩌면 그녀는 그 자체로 만족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신이 말했었지. 이젠 나를 위한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그래, 당신의 복수. 이게 바로 나를 위한 삶의 첫걸음이야. 지켜봐 줘."

사내는 돌아섰다.

"…잘 있어요.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꼭 돌아오겠소."

못 다 전한 말을 삼킨 채로, 시시한 작별의 말만을 던진 후 사내는 추억이 담긴 숲을 떠났다.
무덤 위의 꽃만이 그를 배웅하기라도 하듯,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 어느 마을 주점.

사내는 주점 한 귀퉁이에 앉아, 칼브람 용병단 소속의 게렌이라는 자가 수다스럽게 떠벌리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용병단 내 이인자가 자신이라느니, 자신이 지난 임무에서 뛰어난 활약으로 공을 쌓았느니 따위의 허세 섞인 대화를 그는 참을성 있게 경청했다.
"이 몸의 활약이 어찌나 대단한지, 요즘은 '로체스트 기사단'이 직접 우리 용병단으로 찾아올 정도라니까?"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이야기가 남자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로체스트. 사내는 손에 들려 있던 부러진 화살을 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 이름은 '카이',
칼브람 용병단에 입단하기를 원한다. 안내를 부탁하지."

글 : 시트롬 / 그림 :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