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lethita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노예 정도로는 쓸 수 있을 겁니다."

남자는 아버지가 내미는 아이를 건네받아 이리저리 살폈다.
팔 두 개, 다리 두 개. 대충 아이를 살펴본 남자는 아버지의 손에 금화 하나를 떨어뜨렸다.

"이게 답니까?"
"계집아이는 2개. 사내 녀석은 1개."
"... 계집아이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아이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의 나이 이제 겨우 열하나였다.
- 검투사였던 아이의 아버지는 한창때에는 꽤 유명했었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를 만난 것도 그때쯤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다리 하나를 잃게 된 사건 이후로는 아버지는 항상 술에 빠져 살았고 엄마가 도망간 후에는 도박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다.
그래도 아이는 조금만 참으면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잠시 아픈 것 뿐이라고..
아픈 게 나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아이는 아버지가 스스로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검투사의 검을 팔 때조차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아버지는 아이를 팔았다.

- 값을 치른 남자는 아이를 끌고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아이도 여럿이 있었고, 한켠에는 장물로 보이는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순간 아이의 눈에 낯익은 물건이 들어왔다. 아이는 튕기듯 뛰쳐나가 물건을 집어 들었다.

아버지의 검이었다.

남자는 그런 아이를 보고 가당찮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돌연 눈빛이 변했다. 버릇은 초장부터 잡아야 했다.

남자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주변 아이들은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아이는 살기가 느껴지자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 휘둘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미처 피하지 못한 남자의 뺨으로 붉은 피가 흘렀다.

"이 자식이!?"

남자는 아이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아이는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제길.... 그래도 검투사의 자식이라는 건가."

남자는 뺨의 피를 스윽 닦아내었다.
하지만 이내 무슨 좋은 생각이 났는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 돈 좀 되겠는데."

귀족들을 위한 유희.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투사들이 모여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곳. 검투 시합.

검투 시합을 지원하는 데 있어 나이 제한은 따로 있진 않았다.
그러나 어른들의 시합에 어린아이가 끼어봤자 이길 수 없는 노릇이니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이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돈이 필요한 부모가 아이를 파는 일이 있긴 했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검투 시합엔 그들이 거래되곤 했다.

시합의 유흥에 있어서 제물은 필요한 법이었다. - 아이와 한 조가 된 이는 호밀 색 머리카락을 가진 '카알'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그는 바다 건너 북쪽 땅에서 노예로 팔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도 아이만한 아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독 아이를 좋아했다.
아이도 그가 좋았다.

그는 틈이 날 때면 아이에게 자신의 검술을 가르쳐 주곤 했다.
하지만 두 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그의 기술은
아직 팔의 근육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아이가 사용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그래도 아이는 열심히 그의 기술을 익혔다.
기술을 배우고 있는 동안만은, 마치 집에서 아버지에게 훈련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곳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장소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제물이 제물이 되길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카알과 아이의 조는 점점 인기를 얻어갔다.
그 둘의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호흡이 척척 맞았고, 사람들은 그런 둘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탓에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는 이들이 있었다.
재미로 넣은 제물은 희생양일 뿐 그들이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재미로 넣은 뱀이 독사라면, 이빨을 뽑아야지."

은밀한 곳에서 금화가 오갔다.

흔들리는 촛불 빛에 비친 그의 얼굴엔 길게 난 칼자국의 흉터가 붉은빛으로 일렁였다.

"여기서 뭐하세요?"

아이는 밖에 홀로 나와 있던 카알을 보고 물었다.

"으응? 아, 아니다."

카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아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내일 있을 시합 때문이려니 했다.
그 탓에 검은 기둥 속에 가려진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시합이 시작되기 전.
대기실에서의 모습이 평소의 카알과 달라 보이자 아이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래도 결승전이라서 걱정되세요?"

카알은 아이의 물음에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하고 약속 하나 해주지 않겠니?"

카알은 아이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곳에 가면 내 아들이 있을 거란다. 이름은 리시타라고 하지."
"리시타요?"
"그래. 바람과 고독을 이기는 자라는 뜻이란다."

카알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시합이 끝나면 이곳에 가서 내 아들을 찾아봐 주지 않겠니? 아이를 만나서 내 말을 전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약속할게요."
"그래. 고맙다."

카알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 보였다.
아이는 그런 웃음이 좋아 자신도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시합은 2인 2조로 구성된 대결 형태였다.
상대편은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격렬한 기세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미 여러 번의 실전을 통해 움직임이 많이 빨라진 아이였지만
아직 어른을, 그것도 결승 상대를 두고는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옆구리로 들어오는 칼날을 간신히 쳐내며 카알에게 눈길을 돌렸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아이의 등 뒤에서 강한 공격을 펼치며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었을 카알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카알은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양손에 쥔 검날은 힘없이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적의 칼날이 하얀 선을 그었다.

"아저씨!!!"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노예로 팔렸을 때 헤어졌다던 아들의 주소를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어떻게 내가 죽지 않고, 노예로 팔려가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어야만 했다.

아이는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아이에겐 할 일이 있었다.

로체스트에 가야 한다.
그리고 아저씨의 검을... 아저씨의 말을 전해 주어야 한다.

아이는 쥐고 있던 두 개의 검을 품 안에 꼬옥 안았다.
차가운 금속이 아이의 피부에 닿아 하얗게 피어올랐다. - "... 넌 누구야?"

성문을 열고 나온 소년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비록 시종의 옷이긴 했지만, 비단으로 만든 옷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뺨의 소년은
카알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호밀 색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말없이 두 개의 검을 건넸다. 피에 절어 여기저기 녹슨 두 개의 검이었다.
검을 보자 소년은 식겁하며 물러섰다.

"이게 뭐야?"
"네 아버지의 검이야."

아버지의 검을 아들에게 물려준다는 건, 이미 아버지는 세상에 없다는 걸 소년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받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으니까 돌아가."
"...이 검, 받지 않을 거야?"
"그깟 거 버리던지, 알게 뭐야?"
"하지만 이건 네 아버지의 명예야."
"명예는 무슨! 아버지는 영주의 자리를 넘보다 폐위당한 기사야. 반란군이라고!"
"하지만..."
"그딴 거 다 집어치워. 아버지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네까짓게 알기나 해?
남의 발길에 차이며 구걸하고, 쓰레기를 뒤져 음식을 구했어. 옆의 아이가 얼어 죽으면 그 옷을 훔쳐 입어 겨울을 지냈어.
그런 와중에 명예? 자존심? 그따위 것이 뭔데?"

"하지만 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
"듣고 싶지 않아!"

소년의 말에 아이는 잠시 말을 잃었다.

"듣고 싶지도... 궁금하지 않아. 그런 거. 그리고 알 필요도 없어.
이미... 그런 늙은이 따윈 잊었으니까."
"그게 무슨...."

"그레타, 무슨 일이니?"

밖이 소란스러웠는지 안에서 한 부인이 나와 물었다.
어여쁜 금발에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있는,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아, 아닙니다. 추운데 들어가 계세요. 곧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어머, 이 거지 같은 애는 누구야?"
"구걸하러 온 동냥아치일 뿐입니다.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흐음... 그래. 알았어. 얼른 들어와야 해?"

여인은 힐긋 아이를 바라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소년에게 물었다.

"...그레타?"
"..."
"네 이름을... 버린 거야?"
"...그래. 이름도. 집안도. 그리고 기억도.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 줘."

그레타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고 했다.

그러면 카알 아저씨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
그분의 마지막 유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아들아,
리시타란 이름은 대대로 장남에게만 주어지는, 우리 가문을 상징하는 이름이란다.
그러니 아들아,
비록 가문은 이미 몰락하였고 난 이곳에서 노예로 살다 가게 되었지만
너는 기사가 되어 우리 가문의 이름을 그리고 명예를 다시 되살려다오.
그것이 나의, 그리고 우리 가문의 마지막 긍지란다."

아이는 다시금 두 개의 검을 품에 안았다.

아들에게 버림받은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이라...


아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엔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기사가 되겠다.
이제부터 내 이름은 리시타다.

툭!

"저기 아가씨, 이거 떨어뜨렸어요"

리시타는 앞에 가던 여인이 떨어뜨린 귀걸이를 주워들며 소리쳤다.

"어머나, 고마워요"

뒤돌아선 여인은 리시타에게 눈웃음을 보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도톰한 입술이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이런 미인분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만."
"후후"
“그런데 이거.. 귀걸이인가? 무슨 피라도 담겨 있는 거 마냥.. 좀 특이한데?”
"... 글쎄?"

귀걸이를 받아 든 여자는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흘리곤 다시 발길을 옮겼다.
리시타는 아쉬운 듯 잠시 서서 여인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자신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글 : 멜진느 / 그림 : cel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