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arisha

우리의 여신 모리안께서 존재하는 증거로 무녀님이 계시듯,
이단이 존재하는 증거로서 마녀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마녀를 처단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남자의 검날이 아리샤의 가슴 위로 내리꽂혔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낌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검 끝이 심장에 닿아 있었다. 고작 검에 찔린 정도로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육체의 부상이라면 치유하면 된다. 문제는 마법이었다. 가슴 안쪽으로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 남자의 검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고대의 룬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봉인의 룬이었다. 룬의 마법은 맹독이 퍼지듯 육체를 헤집고 존재를 뒤흔들며 나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걸로 끝인가. 정녕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남자를 길동무로 삼는 것이 나의 최후의 발악이 될 것이다.

아리샤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솟구쳐 나왔다.

수많은 기억이 파도가 되어 밀고 들어왔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기억의 파도가 그녀의 의식을 바다 위 부표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는 파도에 휩쓸린 채 시간이라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 최초의 기억에 다다랐다.

그리고 모든 기억이 천천히 잊혀 갔다. - 비가 오던 날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어딜 감히!”

후견인 하나 없는 고아 소녀가 길거리에서 강아지를 주워 온 모습을 보고 고아원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강아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작은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상태가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고아원장을 비롯한 지도교사들은 이를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녀를 향해 모욕적인 말들을 내뱉었다.

하지만 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강아지를 줄 우유를 달라고 뻔뻔스레 부탁하기까지 했다.

“얼른 공터에 버리고 오지 못하겠어? 아니면 너도 내쫓기고 싶어?”

참다못한 고아원장이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결국, 소리치는 원장을 뒤로 한 채 소녀는 강아지를 안아 들고 고아원을 나왔다.

평생을 고아원 생활만 했던 그녀가 찾아갈 곳이 있을 리도 없었다.
마을 안을 정처 없이 떠돌던 그녀는 마을 바깥으로 난 오솔길을 올랐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마을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에는 버려진 신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소녀는 이 신전 지붕 밑으로 비를 피해 앉았다.

한 벌뿐인 옷은 흠뻑 젖어버렸고 시간이 갈수록 차츰 한기가 느껴졌다.
그럴수록 품에 안은 강아지를 더 꼭 감싸 안았다.
서로의 체온만이 미약하게나마 따스함을 지켜주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안 그래?”

강아지를 향해 말을 걸면서 소녀는 멍하니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구름이 내뿜는 수많은 빗방울이 마을 위로 추적추적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저녁쯤에 다시 고아원에 숨어들어서 먹을 걸 가지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문득 이 모든 풍경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마치 영혼이 몸을 떠난 듯한 가벼움과 함께 의식은 또렷해지고 반대로 몸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또 이 순간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때때로 세상의 시간이 멈추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바람이 멎고 온 세상이 고요에 잠기는 순간, 풀잎도 나뭇잎 하나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순간, 광활한 하늘 가득히 무수한 물방울들이 가만히 떠 있는 순간이었다.
소녀는 이 신비로운 순간이 좋았다.

영원할 것만 같은 침묵 사이로 빗소리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방금 그거 너도 봤니?”

소녀는 호기심에 찬 얼굴로 강아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강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추위를 피해 품 안으로 더 파고들 뿐이었다.

“재미있는 아가씨네.”

소녀의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을 것만 같았던 버려진 신전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짙은 남색의 로브를 두르고 안경을 쓴 남자는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 인상과는 달리 하얗게 센 백발이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었다.

남자는 소녀에게 다가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로브를 그녀의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

“이름이 뭐니?”
“아리샤. 아저씨는?”

어린 소녀, 아리샤는 남자의 질문을 짧게 받아쳤다.
아저씨라는 호칭에 남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쉔이라고 소개했다.
쉔은 아리샤에게 이런 장소에 혼자 있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곳 언덕은 언제 마족이 출몰할지 모르는 위험한 장소였다.
아리샤는 품에 안긴 강아지를 보여주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쉔은 강아지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품에서 마법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스태프 끝에 희미한 불빛이 생기더니 그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알 수 없는 궤적이 그려졌다.
궤적은 글자의 형태를 갖추더니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강아지의 계속되던 떨림이 멎었다.
지금껏 기운이 없어 보이던 녀석이 고개를 들고 아리샤를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건강해진 강아지를 바라보며 아리샤는 난생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 아리샤와 강아지는 신전 앞 공터를 한참 동안 뛰어놀았다.
비가 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밝게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쉔은 웃었다.

해가 저물어 갈 즈음, 쉔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강아지의 주인을 찾아주기로 했다.
언덕을 내려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까스로 강아지의 주인을 찾았다.

아리샤는 주인의 품에 안겨 멀어지는 강아지를 보면서 아쉬운 듯 손을 흔들었다.
어느샌가 하늘은 맑게 개어있었다.

“아리샤. 마법을 배우고 싶지 않니?”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쉔이 아리샤를 향해 물었다.
그녀는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거침없는 결정에 쉔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아리샤는 강아지를 낫게 해준 쉔의 마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기적과 같은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 영원할 것 같은 숲길이 끝나고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광활한 분지가 나타났다.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마차는 분지에 들어섰다.
이곳은 왕국의 북쪽 경계령 근처에 숨겨진 은밀한 장소로 인간과 마족 두 세력 모두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마법사들의 영역이었다.

허허벌판에 가까운 분지의 중심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선 거대한 탑 하나가 있었다.
신비로운 기운에 둘러싸인 탑의 형상은 마치 주변 공간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는 듯 보였다.
대륙 최대의 마법 학교로 유명한 이웨카의 탑이었다.
마법사를 꿈꾸는 자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곳이었다.

쉔과 아리샤를 태운 마차가 탑의 정문에 다다랐다.
탑의 신비로운 기운이 두 사람을 환영하는 것처럼 일렁였다.



고아원 출신이라는 독특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아리샤는 탑의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녀는 마나에 대한 감응 능력이 뛰어났다.
일반적으로 마법사가 마나를 다루기 위해서는 마법 스태프가 꼭 필요했다.
스태프 없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를 얼마큼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하지만 아리샤는 감각적으로 마나의 변화와 흐름을 감지하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마나를 쉽게 제어할 수 있었다.

“왜 네가 나서고 난리야!”
“너야말로 무슨 상관이야!”

교실 안이 소란스러웠다. 친구 사이의 흔한 다툼인 듯했다.
학생들이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두 사람을 에워싸듯 몰려들었다.
서로를 향해 소리치던 두 사람이 홧김에 서로에게 마법 스태프를 겨누었다.

학생들이 당황하며 두 사람을 말리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해 다투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얼마나 피해가 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 학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 사이로 마나의 흐름이 요동쳤다.

학생들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랜 정적이 지나도록 두 사람의 스태프 끝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본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 뭐야.”

두 사람의 얼굴이 빨개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때, 아리샤가 구경꾼들을 헤치고 두 사람 앞으로 나섰다.

“아리샤?”

모두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아리샤는 태연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싸울 거면 결투장에 가서 싸워.”

두 남학생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아리샤가 등 뒤로 감춘 그녀의 왼손 안에서 대량의 마나가 소용돌이를 치며 맴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스태프에 마나를 집중시키기 전에 주변의 모든 마나를 한 발 먼저 빼앗아 마나의 진공 상태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리샤가 등을 돌려 교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두 사람의 마법 스태프에서 한순간 화르르 하고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며 스태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주변 학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느덧 고아원에서 생활한 시간보다 탑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녀는 더는 고아원의 무력한 소녀가 아니었다.

"아이스 스피어!"

아리샤는 연구실 창가에 걸터앉은 채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그녀의 손안으로 마나가 모여들었지만,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날 뿐이었다.

쉔의 마법 연구실이었다.
그녀는 수업이 없을 때면 이렇게 쉔의 마법 연구실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쉔은 그녀의 후견인이자 지도 교사였지만 그녀에게 쉔은 교사이기 이전에 가장 친한 친구 같은 존재였다.

“안 되는 걸 소리친다고 되겠니.”

쉔이 피식하고 비웃음 섞인 말투로 말했다.
아리샤가 쉔을 노려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고 다시 책상 위의 서류로 눈을 돌렸다.

"아이스 스피어!"

다시 한번 소리쳐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나를 직접 다루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마나를 원소로 변환하는 것은 서툴렀다.

이 때문에 아리샤는 원소 마법에 대해 적지 않은 콤플렉스가 있었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도 그 힘을 세상에 투영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네가 룬 마법을 배웠으면 했는데 말이다.”
“룬은 고리타분해.”

아리샤의 짧은 반박에 쉔이 쓴웃음을 지었다.
쉔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마법 중 하나인 룬 마법을 전공한 마법사였다.
고대 전쟁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룬 마법은 룬 문자를 사용하여 동작하는데 그 원리와 비법 대부분이 인류의 역사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탑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쉔을 비롯한 극소수의 마법사들만이 유물을 발굴하듯 역사를 연구하며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는 중인 마법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준비한 이 선물도 고리타분하겠구나.”

쉔이 연구실 안쪽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와서는 아리샤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작은 팔찌였다.
얇은 팔찌 위에는 미세한 룬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쉔이 직접 새긴 룬 문자인 듯했다.

쉔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다가와 아리샤에게 팔찌를 감겨주었다.
그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팔찌를 착용한 채 왼손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그녀의 손바닥 위로 마나의 불꽃이 피어 올랐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캐스틀릿이라고 이름 붙였단다. 변환이 어렵다면 마나를 직접 다루는 것도 방법이지."

쉔의 말대로였다.
캐스틀릿을 사용하자 아리샤의 의지에 따라 순수한 마나의 입자들이 그 형태와 구조를 바꾸었다.
그녀가 바람을 떠올리면 마나의 입자들이 회전하며 바람이 불었고 차가운 얼음을 떠올리면 단단한 마나의 수정이 손 위에 나타났다.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아리샤가 쉔에게 달려들 듯 안겼다.
쉔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품 안의 아리샤를 따뜻하게 내려다보았다.
- 모든 것이 까맣게 물든 세계였다.
이 세계에는 빛도 어둠도 없었으며 생명도 죽음도 없거니와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에는 빛이 없기에 사실상 어둠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 하나로 가득 찬 세계였다.

세계에는 생명이 없기에 따라서 죽음도 없었다.
생명을 가진 자가 초대되는 곳이 아니었으며 죽음을 맞이할 존재가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세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에 세계는 영원했다.
이 불멸의 세계는 태초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었다.

세계의 영원한 어둠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곳은 고독했다.
도와줘. 소리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시간이 목소리를 사로잡고 어둠이 나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구해줘.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영원이란 고통이 나를 짓눌렀다.

영원이란 고독이 나의 모든 가능성을 앗아갔다.
달아나야 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살려줘!”

단말마와도 같은 외침과 함께 아리샤는 눈을 떴다.
눈앞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쉔의 모습이 보였다.
또 그 악몽이었다.
정신이 돌아옴과 동시에 안심이 되면서 동시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쉔이 보는 앞에서 잠꼬대를 외쳤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괜찮니? 아리샤.”

쉔은 아무런 내색 없이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고아원 시절부터 계속된 시간이 멈추는 현상은 어느샌가 의식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어지럼증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아리샤가 불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는 이번 주에만 두 번째였다.
현상이 반복되는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불안으로 떨렸다.
쉔이 그녀의 떨리는 몸을 살며시 안아주었다.

"괜찮을 거란다."

쉔의 목소리가 그녀를 달랬다.
아리샤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쉔의 검날이 아리샤의 가슴 위로 내리꽂혔다.
검에는 이계의 신을 봉인하기 위한 고대의 룬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검이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관통하고 심장에 가 닿았다.
마법이 발동하고 아리샤의 몸이 발작을 일으키듯 꿈틀댔다.
그녀의 몸을 매개로 현세에 강림하려던 이계의 신이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쉔은 마나를 좀 더 주입해서 봉인의 완성을 서둘렀다.
한순간이라도 그가 손에서 검을 놓치게 되면 봉인은 실패하고 아리샤의 인격은 영원히 이계의 차원에 갇히게 될 것이었다.

그 순간, 아리샤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솟구쳐 나왔다.
이계의 신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마나는 주변 공간을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순식간에 작은 돌풍을 만들었다.

돌풍은 그 안에 들어온 모든 존재를 가장 작은 단위부터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로브의 옷자락을 시작으로 쉔의 손등과 팔, 다리 등 모든 피부와 근육들의 세포가 조금씩 돌풍에 의해 부서져 내렸다.
극심한 고통으로 쉔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손에 쥔 검만큼은 놓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아리샤의 몸부림치는 모습이 들어왔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지막 각오를 다지며 봉인에 가능한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다.

봉인이 완성되고 한순간 돌풍이 존재를 감췄다.
그는 소멸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검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아리샤가 눈을 뜬 것은 기억에 없는 한 마법 연구실이었다.

그녀는 쓰러져 있던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머리가 둔하고 찌르는 듯한 두통이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곳에 쓰러져 있던 것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두고 간 듯한 안경과 검 한 자루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아리샤는 안경을 주워들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함께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록 아리샤는 그 날의 의문을 거둘 수가 없었다.
사라진 기억의 조각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의 심장에는 알 수 없는 마법의 흔적이 각인되어 있었고, 그녀의 팔목에는 마법 도구로 보이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두 가지 모두 룬 마법의 흔적이었다.

연구실에서 발견한 안경과 검을 바라보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리샤는 진실을 밝혀내고 싶은 충동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탑을 떠나 단서를 쫓기로 했다.
룬 마법이 유일한 단서였다.


룬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는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리샤는 수소문 끝에 마법사 협회의 마법사들과 왕궁의 마법사를 만났지만, 그녀의 몸에 각인된 마법에 관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와중 대륙 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 한 때 왕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마법사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리샤는 이 마을로 향하기로 했다. - 마을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힐더 숲을 지나던 때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묵직한 발소리에 아리샤는 잠에서 깨어났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다가오는 존재에 대비해 허리춤의 검과 캐스틀릿을 확인했다.

숲의 어둠을 뚫고 나온 것은 붉은색 갑주를 착용한 리자드맨이었다.
밤하늘을 밝히는 라데카의 달빛이 갑주에 닿아 회백색으로 번들거렸다.
습윤한 곳을 좋아하는 종족이 어째서 이런 숲길을 서성거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적의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리자드맨의 눈빛이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흔들렸다.
한순간, 파충류의 차가운 눈빛이 아리샤를 향했다.
리자드맨은 양손에 든 대검과 방패를 치켜들고 돌격 자세를 취했다.

“별로 상대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리샤는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검날이 아래로 향하도록 거꾸로 쥐었다.
리자드맨이 기다렸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오래 끌 필요가 없는 싸움이었다.
달이 빛나는 밤의 숲은 평소보다 짙은 농도의 마나가 충만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터였다.

아리샤는 왼손을 펼쳐 캐스틀릿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그녀의 몸에 각인된 룬을 통해서 고대 마법의 술식이 발현되었다.
마나들이 고대 마법의 술식에 따라 서로 공명을 일으키며 주변 세계를 차츰 뒤덮었다.
왼손을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시간의 흐름이 정지하기 시작했다.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멈추고 정적이 찾아왔다.
리자드맨의 광기에 사로잡힌 눈빛과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아오던 검날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한순간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아리샤가 리자드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모든 것이 정지한 이 세상에서 오직 아리샤만이 자유로웠다.

그녀는 마나의 도움을 받아 리자드맨의 머리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녀의 검이 투구 사이로 드러난 리자드맨의 눈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 리자드맨의 거대한 몸집이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아리샤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숲의 그림자 안에 자신을 쫓아온 존재들이 여전히 숨어 있었다.
아마 리자드맨도 이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훌륭하군.”

그림자 속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냥개를 앞세워 검은 망토를 한 자들이 나타났다.
신원을 알 수 없도록 검정 두건에 검정 마스크까지 착용한 검은 망토들이 천천히 달빛 아래로 걸어 나오며 아리샤를 둘러쌌다.

아리샤는 다시금 캐스틀릿에 마나를 모으며 전투를 준비하려고 했다.

“우리는 너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검은 망토의 무리 사이에서 음침한 목소리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아리샤를 제지했다.
무리의 인원들과는 달리 남자는 두건만 뒤집어썼을 뿐 마스크를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밤의 어둠이 짙게 깔린 숲속에서는 두건 만으로도 남자의 인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이단의 힘을 봉인하는데 성공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단의 힘이라니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보아하니 룬 마법은 성공한 것 같군. 예상한 것과는 조금 형태가 다르지만 이 또한 그 분께서 원하신 결과일 터. 오늘은 순순히 물러가도록 하지.”

남자의 손 신호와 함께 검은 망토들이 일제히 숲속의 그림자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아리샤는 다급한 마음에 외쳤다.
남자는 룬 마법에 대해 언급했다.
혹시 그녀의 몸에 남겨진 흔적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있을지 몰랐다.
남자가 한순간 멈칫했다.

“그러고보니 그 분께서 이 말을 전하라고 하시더군. 네가 찾는 사람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의 마녀여.”

남자는 그 말만 남기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리샤는 남자를 뒤쫓아 가려던 찰나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기억 속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녀를 붙잡았다.
쉔.
갑작스레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에 아리샤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가 찾는 사람.
그녀는 탑에서 가지고 나온 안경을 꺼내 바라보았다.
쉔의 안경.
떠오를 듯 말 듯한 기억이 혼돈으로 깜빡였다.

그것도 잠시, 다시금 망각의 어둠이 그녀를 덮쳤다.
그림자는 어느샌가 달아나버렸다. - 마법사가 되기 전,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했다.
여자는 날씨를 예측하고 식물을 싹트게 하는 기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그녀가 가진 멋진 능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녀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이계의 신은 점차 여자의 인격을 몰아내었고,
여자는 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이했다.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마녀가 되는 것을 막지 못한 죄책감과 함께 살아남았다.
죄책감이 젊은 날의 그의 머리를 하얗게 물들였다.
남자는 도망치듯 북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법을 익혔다.
도망치듯 살아온 인생, 고리타분하고 고요한 무채색의 인생이었다.
어느 날, 남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렇게 떠난 마지막 여행이었다.
버려진 신전을 바라보며 남자는 죽음을 각오했다.

그리고 남자는 운명처럼 죽음 대신 소녀와 만났다.
훗날 신의 매개가 될 소녀, 마녀가 될 산 재물.
남자는 죽음을 포기하고 다시금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각오와 함께 이 소녀만큼은 지키겠노라 다짐했다.

남자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세계에서 잊혀졌다. - 아리샤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답을 찾기로 했다.
이단의 힘이란 무엇인지 봉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답을 찾기 전까지는 탑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첫 시작을 어디서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숲을 통과해 눈에 들어온 첫 마을을 발견했다.

마을의 이름은 콜헨이었다.

글 : 칼미슈 / 그림 : king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