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은 아버지의 이름을 외치는 악인의 독기 어린 목소리로 시작된다.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와 수풀은 살기가 가득 찬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춘다. 사냥꾼의 검을 꽉 쥔 악인의 뒷모습에서 분노와 혐오가 느껴진다.
칼리아는 결말을 알고 있다.
이 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시계태엽을 천천히 돌리기라도 하는 걸까. 아버지는 아주 느리게 기척을 느끼고 뒤로 돌고 있다.
악인이 쥔 검은 아버지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어 심장을 관통한다. 일그러진 아버지의 표정을 통해 칼리아는 고통을 읽을 수 있다.
살인자가 아버지, 브레녹의 몸에서 검을 뽑자 굵은 핏줄기가 울컥 솟아 나온다. 살인자는 검을 수평으로 눕혀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린다. 칼리아는 그 자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더 크게 울린다. 곧 그녀의 심장은 터질 것이다.
살인자의 검이 아버지의 목을 향해 움직인다.
.....
짧은 비명과 함께 눈을 떴을 때, 사위는 아직 어두웠다. 언제나처럼 협곡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강풍은 새벽이 올 수 있도록 카스트롬의 밤을 밀어내는 중이었다.
칼리아는 거칠게 숨을 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빠르게 뛰는 심장에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아는 홀린 사람처럼 방을 나섰다. 그녀는 복도 끝, 굳게 닫힌 떡갈나무 문을 천천히 열었다. 고작 며칠이었다. 매일 같은 악몽을 꾸게 된 것도, 이 방에 사람이 드나들지 않게 된 것도.
겨우 며칠 만에 아버지의 물건 위에는 얇게 먼지가 쌓였고, 방 전체에서는 먼지 냄새와 함께 피비린내가 희미하게 풍기고 있었다.
천천히 방을 둘러보던 칼리아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창문턱에 놓여 있는 아버지의 초상화. 그 앞에 놓인 마족 사냥꾼들의 무기, 하프 클레이모어.
초상화 속의 브레녹은 카스트롬 최고 마족 사냥꾼인 ‘피어모어’의 브로치를 왼쪽 가슴에 단 채,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초상화의 먼지를 털어내자, 아버지의 짙은 금발과 푸른 눈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곧 그날의 일이 칼리아의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
검술 훈련을 끝낸 뒤, 브레녹은 칼리아에게 강을 따라 걷자고 했다. 브레녹은 칼리아가 강의 상류로는 발도 들이지 못하게 했었는데, 어쩐 일로 그가 먼저 상류를 향해 앞장섰다.
협곡 안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카스트롬 사람들은 협곡에서 매일 불어오는 이 거센 바람 소리가 울음 같다며 불길하게 여겼다.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바람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지. 바람이 네게 가져다주는 냄새를 맡아보렴. 운이 좋다면 털이나 가죽, 혹은 찢어진 방어구 따위를 얻을 수 있지.”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칼리아는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풍을 거스르면 앞선 누군가의 흔적을 알 수 있었고, 강풍과 함께하면 자신이 빨라질 수 있었으니까.
칼리아는 손을 뻗어 바람을 맞으며 제 스승이자 아버지인 브레녹의 뒤를 따라 달렸다.
“아빠! 여기서부터는 놀 진영이랑 가까우니 가지 말라면서요!”
“이제는 괜찮다. 놀이 마족과 인간 사이에서 중립이라는 걸 사람들도 알았으니까. 게다가 협상도 맺었으니 이제 카스트롬 사람들이 놀을 두려워하는 일은 없을 거야.”
“진짜 놀을 믿어도 돼요? 그저께 초소에서 만난 사람이 그랬는데요…. 놀이 그 사람의 부모님을 죽였대요. 그래서 그 사람은 놀을 모두 죽일 거래요. 그럼, 그 사람은 피어모어인 아빠 말을 거역하는 거잖아요.”
브레녹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칼리아의 손을 쥐었다.
“에샤르를 만났구나. 물론 나도 에샤르와 그의 형, 베샤르의 사정은 잘 알지. 복잡한 이야기지만, 우리와 협상한 놀은 그 형제의 부모님을 죽인 놈들과는 달라. 그 두 형제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지만….
가족을 잃고 많이 힘들테니 두 형제에게 신경을 더 쓰려고 하고 있단다. 하지만, 카스트롬 사람들의 안전이 우선이기에 당장은 어쩔 수가 없구나. 그들의 일을 해결할 방법은 차차 생각해 봐야지.”
칼리아는 자신에게 이런 것까지 진지하게 이야기해 주는 아버지가 좋았다. 아버지는 칼리아가 과거의 일을 물었을 때, 그것까지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물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숨기지 않았다.
칼리아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있던 고향 기사단에서 정치 싸움이 벌어졌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때, 아버지를 기사단에서 쫓아내고 싶어 한 사람들이 칼리아의 어머니에게 마녀라는 누명을 씌웠다.
그 이후, 벌어졌던 일은 칼리아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일어난 비극 이후, 방안에 틀어박혀 한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아버지가 며칠 만에 방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장례식을 치를 때 입었던 상복 대신, 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있었고,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살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간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 아사 직전이었던 칼리아를 본 아버지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검을 떨어트렸다. 침대까지 기어와 칼리아를 꼭 끌어안은 채 통곡했다.
아버지의 눈에서 살기는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칼리아. 앞으로는 널 절대 혼자 두지 않으마. 잠시 못난 마음을 먹은 나를 용서하렴. 내 남은 삶은 너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마.”
그날 밤, 브레녹과 칼리아는 고향을 떠났고, 들어본 적도 없는 카스트롬에 정착했다. 브레녹은 자신이 원수들의 목을 베러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칼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항상 말했다.
때문에 칼리아는 사랑은 ‘아버지의 칼리아’ 그리고 ‘칼리아의 아버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건 서로를 지켜주는 존재란 뜻이었다.
“더 상류로 올라가 보자꾸나.”
그때, 숲 안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녀는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소란스러운 고함과 쇠붙이의 마찰이 일으키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두 사람은 동시에 숲을 향해 달렸다.
“칼리아! 따라오지 말고, 돌아가!”
“싫어요!”
마족의 공격이 잦은 카스트롬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실력과 통솔력을 인정받고 피어모어의 자리를 거머쥔 브레녹이었다. 칼리아는 그 브레녹의 재능을 물려받았고, 훈련을 통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잘 알았고, 늘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회가 이제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새하얀 털이 피로 물든 거대한 놀과, 놀의 도끼를 받아치며 싸우는 젊은 마족 사냥꾼과 마주쳤다.
“이런, 에샤르…. 하필이면 놀의 족장에게…!"
“아빠! 저 사람을 도와줘야 해요!”
“칼리아.”
칼리아는 아직 자신에게 맞지 않는 큰 하프 클레이모어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브레녹이 낮고 엄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칼리아나 사냥꾼 중 누군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나 들을 수 있는 무서운 목소리였다. 앞으로 달려 나가려던 칼리아의 두 발이 멈췄다.
“네가 가서 뭘 어떻게 할 거니.”
“…도와야…”
“누구를? 저 놀은 족장이야. 흥분한 놀 족장과 사냥꾼 사이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위험하고 방해만 될 뿐이야.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칼리아는 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아버지가 놀과 에샤르에게 달려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저 둘을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자, 칼리아는 놀과 사냥꾼 두 사람에게서 가까운 곳에 커다란 바위와 그를 가린 무성한 수풀을 보았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추고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에샤르! 당장 공격을 멈추게!”
브레녹의 고함에도 에샤르는 하얀 놀을 노려보며 하프 클레이모어를 휘두르고 있었다. 칼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그녀가 방해만 될 거라고 말했는지 이제 이해가 갔다.
아직 마족 사냥꾼이 아닌 칼리아의 눈에도 분노에 사로잡힌 에샤르가 마구 검을 휘두르는 게 보였으니까.
분명 협상했던 인간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놀은 에샤르의 검을 피하고만 있었다. 그러나 하얀 놀의 인내심은 결국 바닥을 드러냈다.
뭐라 중얼거리던 놀은 이제 적극적으로 에샤르의 검을 받아쳤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놀의 무지막지한 힘에 에샤르는 곧장 밀리기 시작했다. 브레녹은 하얀 놀의 뒤에서 그의 몸을 감싸안고 뒤로 잡아당기고 있었지만, 놀을 말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얀 놀은 이제 에샤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래. 덤벼!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봤죠? 대장? 이래도 놀이 중립이라고요?!”
칼리아는 이제 아버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당장 뛰어나가 에샤르를 붙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자신은 아버지에게 짐이 될 것이 확실했다. 칼리아는 몸만 달싹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브레녹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놀을 막을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이제 에샤르의 팔과 허리를 붙들었다. 브레녹이 에샤르를 뒤로 잡아당기자, 그가 고함을 질렀다.
“이거 놔! 놓으라고!”
“진정해! 에샤르, 놀은 처음부터 자네를 막기만 했네! 싸울 이유가 없단 말일세!”
브레녹이 에샤르를 놀의 반대 방향으로 잡아끌자 잠시 싸움이 멈췄다. 그러나 그 순간, 에샤르는 자신의 하프 클레이모어를 놀에게 집어 던졌다. 에샤르의 검이 놀의 어깨에 명중하자 놀은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에샤르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 나 여기 있어! 여기 놀 족장을 잡았어!”
브레녹을 밀쳐낸 에샤르가 놀을 등진 채, 목청껏 형을 부르던 순간이었다. 어느새 어깨에서 검을 뺀 하얀 놀은 일그러진 얼굴로 에샤르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에샤르!”
놀의 움직임을 본 브레녹은 에샤르를 밀쳐 냈으나, 놀이 더 빨랐다. 놀은 브레녹을 쳐서 넘어트린 뒤, 에샤르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에샤르! 안돼!”
마족 사냥꾼 복장을 한 남자가 협곡 반대편에서 달려와,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에샤르 앞에 멈춰 섰다. 에샤르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곧장 놀의 가슴을 걷어찼다. 발에 걷어차인 놀은 아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였다.
남자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검을 휘둘러 하얀 놀의 가슴을 베었다.
거리가 조금만 가까웠어도 하얀 놀은 즉사했을 것이었다. 남자의 검이 얕게 베고 지나간 놀의 흰 털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몸을 세운 하얀 놀이 남자의 검을 세게 받아치자 검은 멀리 날아갔다. 남자가 검을 주우려는 사이, 놀은 잽싸게 숲 바깥으로 달렸다.
숨 쉬는 것도 잊고 있던 칼리아는 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는 모습을 드러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베샤르. 이건… 에샤르의 일은 정말….”
“입 다물어. 놀과의 중립 협상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우리가 수없이 말했지만, 넌 듣지 않았지. 그 결과가 이것이다.”
남자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가 검을 어찌나 세게 쥐고 있던지, 손 위로 불거진 굵은 핏줄이 보였다.
“난 에샤르를 말렸네. 구하려고 한 거였어! 만약 에샤르가 족장을 살해했다면 카스트롬과 놀의 전면전이 펼쳐질 상황이었네. 자네들의 일 해결할 방안은 이제 찾아보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자네들의 심정은 이해….”
브레녹의 말이 끝나기도 전, 베샤르는 검을 브레녹의 가슴 가운데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칼리아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이라도 나가야 했지만, 온몸이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아버지의 표정이 수풀 사이로 똑똑히 보였다.
베샤르는 브레녹의 몸에서 천천히 검을 빼며 말했다.
“네가 에샤르를 죽이지 않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넌 나를 너무 많이 참게 했어. 내 피어모어 자리를 빼앗기고도, 놀에게 죽은 부모님의 복수를 못 하게 되어도 참았다.
…그런데 원수 같은 놀과 중립 협상까지 해? 에샤르 죽음의 대가는 네가 치르는 것이 맞다. 지옥으로 꺼져라.”
베샤르는 능숙하게 검을 수평으로 눕혀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
초상화 앞에 선 칼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카스트롬의 여러분 모두 우리 형제의 부모님이 놀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기억할 것이오. 그 때문에 우리 형제는 놀이 영악하고 간사하다는 걸 알고 있었소. 그래서 피어모어 브레녹이 놀과 중립을 맺는다고 할 때, 그를 말렸소!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우리 말을 듣지 않았고 놀과 중립 협상까지 했지. 오늘 그 이유를 알았소. 브레녹은 우리 몰래 놀과 모종의 계약을 맺었소. 그래서 놀의 족장과 함께 놀들의 뒤를 쫓는 에샤르를 살해했지.
더 어이없는 것은 자신도 놀 족장에게 배신당해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는 거요! 이것이 여러분이 믿었던 브레녹과 놀 협상의 전말이오!”
브레녹을 믿고 존경하던 사람들은 에샤르와 브레녹의 시신을 본 뒤, 베샤르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브레녹은 순식간에 배신자가 되었고, 베샤르는 온 가족을 잃었음에도 카스트롬을 구하려 애쓴 영웅이 되었다.
충격에 빠진 사냥꾼들은 다급히 베샤르를 다음 피어모어로 추대했고, 놀과의 협상은 곧 파기되었다.
칼리아는 자신이 모든 것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베샤르가 몰랐기에 제 목숨이 붙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온몸의 피가 끓는 것 같았다. 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의 뒤뜰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조촐한 무덤과 작은 비석은 그가 좋아했던 커다란 떡갈나무 옆에 있었다.
칼리아는 자신이 베샤르의 검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결국 그녀의 두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한참 울다 지쳐 침대에 기대있던 칼리아의 머릿속에 문득 베샤르의 검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붉은 피가 흐르던 검.
칼리아는 구겨졌던 얼굴이 점점 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눈물은 말랐고, 끓던 피마저 차갑게 식었다. 베샤르는 아버지의 목숨을 꺼트리는 동시에 칼리아의 마음에 있던 무언가를 짓밟아 없앴다.
그는 이제 자신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칼리아는 훈련복을 입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방으로 돌아가 하프 클레이모어를 집어 들었다. 베샤르의 피가 흐르는 검을 아버지의 무덤 앞에 바칠 것이었다.
그러나 방을 나가려던 찰나, 아버지의 초상화가 보였다. 초상화 속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칼리아의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칼리아. 네가 베어야 하는 상대에게서 절대 눈을 떼면 안 된다.
마족 사냥꾼이기 전에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알아 둬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베고 찌르는 자는 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네가 가진 검에 대한 신념을 잊어서는 안 돼.
그리고, 명심하렴. 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네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란다.
칼리아는 희미하게 사라지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훈련 때마다 아버지가 강조하던 것들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자신은 마족 사냥꾼이 될 테니 사람을 죽일 일은 없을 거라며 칼리아는 늘 짜증을 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족 사냥꾼이든 기사든 무엇이든, 살인 기술을 연마하는 자라면 모두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검을 쓰는 사람은 꼭 그 검에 달린 목숨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고, 마음속에 검의 신념을 품으라고 말했다.
칼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아버지의 얼굴은 슬픔을 견디는 것 같았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안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 아버지는 자신의 영혼이 파괴되어도 상관없으니, 복수를 위해 검을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날 어린 딸을 보았고, 검의 신념과 무게를 저버리지 않았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칼리아는 먼지투성이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다시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건 지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칼리아는 좀 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아버지의 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베샤르를 죽이는 것을 과연 아버지가 원했을까? 아니야. 아버지는 반대했을 거야. 그렇다면 이건 나의 화를 풀기 위한 복수일 뿐이야.
베샤르를 죽인다면 내가 얻는 것은 뭐지?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그는 죽을 뿐이고 나는 영혼이 망가진 채 남은 인생을 사는 거잖아?'
칼리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건 명백히 손해야. 게다가 망자가 되는 순간은 짧고, 고통은 오래가지 않아. 남겨진 사람이야말로 오래도록 고통 속에 살잖아. 절망과 어둠 속에 혼자 남겨져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베샤르여야만 해.'
칼리아는 아버지의 하프 클레이모어를 다시 창틀 위에 올려놓았다.
고개를 들자 아직 앳된 소녀의 모습이 창문에 비쳤다. 칼리아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아직 어리고, 몸집도 작고, 훈련도 덜 된 건 사실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곰곰이 쳐다보던 칼리아는 어떤 계획을 떠올렸다.
시간은 걸리지만, 효과는 클 것 같은 어떤 계획. 그것은 힘들지만 간단했고, 몹시 어려울 것 같았다.
칼리아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칼리아가 웃으면 사람들은 입매가 아버지와 판박이라고 말했고, 아버지는 칼리아에게 엄마의 눈을 빼다 박았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에서 그 누구의 흔적도 찾지 못할 것이다. 창문에 비치던 앳된 소녀의 모습은 창문을 흔드는 강렬한 협곡의 바람과 함께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안돼. 돌아가. 브레녹의 딸을 받아 줄 수는 없다. 내가 어떻게 배신자의 핏줄을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베샤르를 만나자마자 무릎을 꿇었지만, 그는 칼리아와 브레녹을 조롱하며 그녀를 곧장 바깥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칼리아는 매일 베샤르를 찾았다. 매번 쫓겨나도 어떻게든 그의 눈앞에 나타났고, 마족 사냥꾼으로 받아주기를 부탁했다.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누군가 뿌린 물과 오물을 맞아도, 칼리아는 매일 베샤르의 막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베샤르가 칼리아를 막사 안으로 불러들인 날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마족 사냥꾼이 되려는 이유가 뭐지?”
“아버지는 마족인 놀이 중립이라고 믿고 그들과 협상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배신에 돌아가셨죠. 그리고…. 대장님의 동생을 죽이는 죄까지 저지르셨습니다. 마족 사냥꾼이 되어 놀들에게서 카스트롬을 지키며 아버지의 죗값을 제가 치르고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자신의 거짓말에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칼리아는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숙였다. 베샤르는 한참 팔짱을 끼고 가늘게 눈을 뜬 채, 칼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네 아비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나?”
“네. 놀과 중립 협상만 하지 않았어도, 저도 대장님도 혈육을 잃고 고통받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베샤르가 다시 칼리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칼리아의 냉정하고 무표정한 얼굴에서 뭐라도 읽어내려던 그는 곧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브레녹의 딸답지 않게 옳은 말을 하는군. 우선은 받아주마. 하지만, 이곳이 네 아비가 피어모어였을 때와 같을 거라 기대하지 말아라. 네가 얼마나 버틸지 기대되는군.”
베샤르는 칼리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초소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칼리아의 사냥꾼 생활이 시작되었다. 베샤르의 말대로 마족 사냥꾼의 삶은 쉽지 않았다. 오전의 고된 훈련이 끝나면, 다른 사냥꾼들은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다.
하지만, 매일 아무 임무도 받지 못한 칼리아는 무기 손질과 빨래, 화장실과 초소 청소 따위의 온갖 잡일을 해야 했다. 사냥꾼들은 매일 칼리아를 조롱하고 괴롭혔지만, 베샤르는 이 모든 것을 묵인했다.
칼리아는 그 모든 부당한 일과 괴롭힘을 묵묵히 견뎠고 아프거나 부상을 당해도 절대 훈련에 불참하거나 맡은 소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베샤르는 칼리아가 그 모든 일을 해내며 새벽에 홀로 훈련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잡일 외의 임무를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베샤르가 칼리아를 불렀다. 칼리아가 사냥꾼 무리에 합류한 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카스트롬 뒤의 협곡에 귀한 광석이 나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코볼트들의 침입이 잦다. 네게 임무를 맡겨보지. 놈들의 위치를 알아내고 대장으로 추측되는 놈을 사냥해 그 증거를 가져와라.”
베샤르가 주는 임무의 높은 난도에 모두 깜짝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칼리아는 예의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초소를 나섰다.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협곡은 금방 어두워질 것이었다. 그러나 하프 클레이모어를 챙긴 칼리아의 모습은 웅성거리는 사냥꾼들의 시야에서 금세 사라졌다.
칼리아가 사냥꾼의 초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라진 지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칼리아는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는 사냥꾼들을 지나 여전히 피가 흐르는 코볼트 대장의 뿔 달린 투구를 들고 베샤르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베샤르의 앞에 투구를 내려놓았다. 특수 광물이 채굴되는 곳 근처에서 코볼트 무리를 찾아냈고, 그들이 잠든 틈을 타 모두 처치했다고 말했다.
베샤르는 다른 사냥꾼들을 그곳에 보내 칼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베샤르는 그녀의 사냥 실력에 꽤 놀랐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칼리아는 점점 더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브레녹이 살해된 이후, 관계가 악화된 놀의 영역을 정찰하는 임무가 자주 주어졌고, 때로는 고블린이나 오거들이 있는 영역까지 사냥을 나가기도 했다.
사실 칼리아가 어려운 임무를 성공시킬 때마다 그녀에 대한 베샤르의 인식은 자신도 모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베샤르는 그녀가 수행한 임무의 결과와 과정을 계속 확인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 놀의 구역으로 정찰을 나간다. 하얀 놀이 등장했다는 소문을 확인할 것이다. 나와 정예 사냥꾼들, 그리고 너도 함께 갈 것이니 바로 준비하도록.”
갑작스러운 베샤르의 호출에 칼리아는 조금 놀랐다. 이제껏 자신을 못살게 굴던 베샤르가 갑자기 함께 임무 수행할 것을 명령하다니.
"이럴수록 냉정해야 해."
작은 소리로 마음을 추스른 칼리아는 곧 초소 밖으로 나섰다.
밤하늘은 맑았다. 가느다란 초승달 근처에 불규칙하게 뿌려진 별들이 깨끗하게 보일 만큼 시야가 밝았다.
네 사람이 숲길을 달리는 동안 협곡 깊은 곳에서부터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칼리아는 손끝으로 바람의 방향을 느끼며 그것이 실어다 준 정보를 읽어냈다.
“여기, 흔적이 있습니다.”
칼리아를 뒤로 하고 진흙 길을 조사하던 한 사냥꾼이 외쳤다. 베샤르와 일행들은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다가갔다. 축축한 진흙 길에 길고 둥그런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 둥그런 자국은 발바닥의 볼록 살이 낸 것입니다. 자국 앞쪽에는 깊게 파인 흔적 세 개가 보이죠. 전체 발 크기를 예상컨대 기존 놀 보다 최소 1.5배는 큰 덩치. 이 정도면 대장, 족장급의 놀이겠군요. 발자국은 강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대장. 더 볼 게 있습니까? 어서 뒤쫓죠?”
두 정예 사냥꾼이 조바심을 냈지만, 베샤르는 칼리아를 흘끗 쳐다보았다. 시선을 알아차린 칼리아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뇨. 그쪽에는 하얀 놀이 없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지?”
발자국을 발견한 사냥꾼이 벌컥 화를 냈지만, 칼리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최근 정찰에서 알아낸바, 놀들의 족장이 또 바뀌었습니다. 에샤르를 죽인 하얀 놀은 족장에서 밀려난 지 꽤 됐죠. 이곳의 놀들은 전 족장이 죽은 뒤, 혹은 약해진 전 족장을 죽이거나 쫓아낸 뒤에 새 족장을 세웁니다.
하지만, 저도 하얀 놀이 근처에 나타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족장도 아닌 그가 여기서 뭘 하는 건지 조사했더니 놀 무리에 새하얀 놀이 둘이 있더군요. 하얀 놀은 이 무리 안에 가족이 있어서 근처에 머무는 것 같아요.”
“그럼, 강 쪽으로 가는 게 더 맞지 않나? 가족들을 만나러 부족이 있는 곳으로 간 것 아닌가? 그리고 네 말이 맞다는 근거는 어딨지?”
칼리아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질문을 한 사냥꾼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강을 건너면 놀의 부족이 있죠. 하지만, 그곳에 섣불리 갔다가 현 족장과 만나기라도 하면 싸움이 날 테니, 굳이 그리로 갈 일은 없겠죠?
이 하얀 놀은 머리가 좋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동맹을 맺었다가 배신할 만큼요. 이건 저희를 따돌리려는 흔적이에요. 강 반대편의 협곡을 조사하시죠. 이 근방에서 놈이 숨을 만한 곳은 동굴이 많은 협곡뿐이에요. 놈의 흔적은 제가 찾아내겠습니다.”
두 정예 사냥꾼은 베샤르를 바라보았다. 베샤르는 칼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아는 곧바로 주변을 훑으며 협곡으로 향했다. 다른 사냥꾼들이 흔적이 없다고 투덜거리던 사이, 칼리아는 놀의 흔적을 찾아냈다.
베샤르는 칼리아가 있는 풀숲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가락은 주변과 달리 진흙이 묻고 짓뭉개진 풀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볍게 밟으려고 애를 썼군요. 옆에 보시면 나무를 잡고 움직인 흔적도 있습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보이시나요? 그 위에는 커다란 손톱자국이 있고…. 부서진 나무 틈으로 소량의 하얀 털도 보이는군요.”
드디어 동생의 원수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베샤르의 얼굴에 기쁨과 분노가 섞인 묘한 표정이 드러났다. 칼리아는 베샤르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역풍이 불어왔다. 잠깐 멈췄던 칼리아는 앞의 두 갈래 길 중 더 좁은 길로 들어섰다. 이제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일 만큼 놀의 흔적은 짙어지고 있었다.
순간 머리 위에서 빠지직거리는 큰 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바위가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칼리아는 본능적으로 베샤르를 잡아당기며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
바위는 일행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나중에 나갈 수 있도록 자네들은 바위를 치우게. 나는 칼리아와 계속 놈의 뒤를 쫓겠다."
이제 칼리아는 바람에서 놀의 냄새를 아주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냄새를 쫓자, 마침내 새카만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발을 들이기도 전에 포효와 함께 거대한 도끼날이 튀어나왔다. 칼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상체를 뒤로 눕혀 도끼를 피했다. 얼핏 동굴 밖으로 보였던 놀의 손이 하얀 털로 뒤덮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놀을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하얀 놀을 만나자 베샤르는 지금껏 유지해 오던 냉정함을 잃은 모양이었다. 검을 양손으로 뽑아 든 그는 으르렁대며 어두운 동굴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칼리아는 한심하다는 듯 눈알을 굴리며 소리를 질렀다.
“대장! 동굴 밖으로 놀을 끌어내야 해요! 나오세요!”
그러나 대답 대신 무기가 맞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멍청하네."
칼리아는 한숨을 쉬며 하프 클레이모어를 손에 쥐었다. 어두운 동굴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소리의 근원지에서 최대한 떨어져 동굴 벽에 붙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거대한 놀과 사투를 벌이는 베샤르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아는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기회를 노렸다.
예상대로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칼리아의 존재조차 잊고 서두르며 놀에게 덤비던 베샤르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것이었다. 뒤로 자빠진 그는 무기를 놓치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놀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놀은 검을 잃어버린 베샤르의 목을 짓밟으려 한 발을 치켜들었다.
“젠장!”
그 순간, 칼리아는 몸을 던져 놀을 밀쳐냈다. 하지만, 놀은 잠깐 휘청이다 금방 중심을 잡고는 칼리아의 몸통을 걷어찼다. 옆으로 구르던 칼리아는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늑골이 몇 대는 부러진 것 같았다.
엄청난 통증에 몸을 일으킬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놀이 검을 찾는 베샤르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칼리아는 재빨리 둘 사이로 달려들었다. 놀이 두 손으로 도끼를 들어 올린 순간은 놈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을 절호의 기회였다. 기절할 것만 같은 통증을 참으며, 칼리아는 하프 클레이모어를 쥐고 곧장 놀을 향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검이 놀의 단단한 가죽과 둔탁한 뼈를 뚫고 심장을 향해 들어가는 느낌이 칼리아의 온몸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찰나의 순간, 에샤르의 공격에도 하얀 놀이 그를 방어하던 모습과 싸움을 말리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고통에 찬 놀의 신음과 함께 도끼가 땅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자, 칼리아는 기억을 털어버렸다. 그녀는 놀의 가슴에서 검을 뽑아냈다. 육중한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고요해진 동굴 속에서는 베샤르와 칼리아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죽었군요. 나가시죠.”
길 한쪽으로 바위를 치우고 온 정예 사냥꾼들이 하얀 놀의 시체를 동굴 밖으로 끌어냈다. 놀의 새하얀 가슴팍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베샤르는 부상으로 똑바로 서 있지 못하는 칼리아에게 다가왔다.
“…네 덕분에 에샤르의 원수를 갚았군. 수고했다.”
칼리아는 말없이 베샤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걸을 수 있겠나?"
베샤르의 말에 칼리아를 포함한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리가 잘려 나갔거나 죽은 게 아닌 이상 제 발로 돌아오라는 게 베샤르의 방침이었으니까.
"혼자 갈 수 있습니다."
그날 이후, 칼리아는 베샤르의 심복이 되었다. 이제 그녀는 베샤르와 전략을 짰고, 그와 함께 나가는 중대 임무만을 수행했다. 이제 마족 사냥꾼 중 누구도 칼리아를 예전처럼 조롱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칼리아는 거의 베샤르의 막사에서 머물며 그와 함께 전략과 전투, 그리고 놀 소탕에 관해 대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베샤르는 칼리아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같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칼리아는 그럴 때마다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카스트롬에서 오랜 기간 무두장이였던 부모를 도왔던 이야기. 전투와 싸움에 재능을 보이며 함께 사냥꾼이 되기로 약속했던 동생 에샤르의 이야기. 위험하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에샤르와 함께 협곡을 쏘다녔던 이야기.
베샤르의 과거에도 행복한 순간들은 있었다. 그러나 과거가 남긴 상처와 고통의 흔적인 짙은 주름, 깊은 어둠은 하얀 놀을 죽인 뒤에도 베샤르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칼리아는 모든 것이 베샤르가 원하는 대로 되었건만, 어째서 그의 얼굴에서 어둠이 사라지지 않는지 궁금했다.
협곡으로 잠입한 코볼트 무리를 처리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강 상류의 어딘가에 코볼트들이 드나드는 길이 있을 거라는 대화를 나누던 중, 문득 칼리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강 건너편 계곡의 놀 부족 소탕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해요. 그들만 사라진다면, 대장의 마음도 좀 편하시지 않을까요?”
차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던 말이었다. 놀 부족의 중립적 태도에 대해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것을 칼리아는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고뇌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 칼리아의 말에 늘 굳어 있던 베샤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놀 부족 소탕이라.”
“…대장. 놀은 제 아버지의 원수이기도 해요. 돕고 싶습니다.”
서서히 지는 해가 피어모어의 막사 안으로 볕을 드리우고 있었다. 협곡 지도를 펼쳐 둔 나무 탁자 앞에 서 있던 베샤르는 자신의 턱수염을 만지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브레녹이 나와 동년배였으니, 내게 딸이 있었다면 딱 너만 한 나이였겠군.”
“……”
“어린 나이지만, 넌 자신을 잘 통제하지. 쉽게 흥분하지도 않고 그 나이답지 않게 차분해. 하지만, 난 네 나이 때 그러지 못했다. 차기 피어모어로 거론될 만큼 실력이 있었지만, 혈기가 넘쳐서 가끔 도를 넘곤 했지.
…………내가 처음으로 선을 넘은 건 마을 근처에 모습을 드러낸 놀을 죽였을 때였다.”
“그때의 나는 딱 네 나이였다. 지금이야 협곡 깊은 곳에 가야 마족이 출몰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떠돌이 놀들이 마을 근처에 모습을 드러내 사람들을 위협하곤 했지.
부모님을 포함해 많은 마을 사람이 오가던 동쪽 숲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그곳에 떠돌이 검은 놀 무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그곳에 놓은 덫에 걸린 짐승의 가죽으로 일을 했다. 때문에 그곳에 가지 않을 수 없었지.
당시의 피어모어는 떠돌이 놀이니 괜히 싸우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마족 사냥꾼답지 않은 말이었지. 놀이 믿을 수 없는 종족이라는 것을 알았던 나는 밤중에 그들을 덮쳤다. 고작 다섯뿐이어서 패기롭게 싸웠다. 한밤중에 습격해 순식간에 두 놈을 해치웠지.
나머지 한 놈도 금방 쓰러트렸다. 그러자 남은 두 놈이 곧장 도망치더군. 그걸 그대로 둔 것이 화근이었어. 그 이후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괜찮다고 안심하고 지냈을 때, 놈들은 다시 숲으로 기어들어 왔다.
부모님과 점원 두 사람이 하필 그날 함께 덫 정리를 하러 숲으로 나갔지. 그렇게 네 사람이 떠돌이 검은 놀들의 희생양이 되었다.”
“…대장. 대장은 제게……… 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저 역시 가족을 잃고 살아가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요. 검은 놀은 반드시 제가 찾아낼게요.”
역겨웠지만, 꼭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칼리아의 말에 베샤르의 검은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희미하고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처음 하프 클레이모어를 잡고 훈련을 시작한 칼리아를 바라보았던 아버지처럼.
“…고맙군. 부상을 조심해라.”
그러나 분명히 따뜻한 미소가 있던 베샤르의 얼굴은 금세 어둡고 공허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칼리아는 고개를 숙이고는 막사 밖으로 나왔다.
'왜 마음껏 기뻐하지 않는 거지? 저 텅 빈 눈빛하며 여전히 고통스러운 얼굴은 뭐야?
칼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어깨를 꼿꼿이 폈다. 상대는 아버지를 죽이고 거짓말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모욕한 살인자다. 쓸데없는 생각 따위는 모두 묻어야만 한다. 칼리아는 지난한 복수의 끝을 낼 순간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늘은 새카만 구름으로 꽉 차 있었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협곡 사이의 강물은 강가의 수목을 모두 뽑아갈 기세로 불어나 있었다. 칼리아는 강풍의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바람을 맞으며 협곡의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칼리아!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제발 그만하고 돌아가면 안 돼요? 여기까지 살아서 온 것도 기적이라고요!”
칼리아의 뒤를 따라오던 막내 사냥꾼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 바람에 휘청이고 있었는데, 그나마 자신의 하프 클레이모어 무게 덕분에 날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저, 저. 돌아갈 거예요! 칼리아가 뭐라고 하든 갈 거예요! 이 날씨에 상류 협곡으로 가는 건 자살 행위…”
너무 앞서가 막내 사냥꾼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던 칼리아가 어느새 그의 코앞에 있었다. 칼리아는 막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빗속에서도 칼리아의 냉랭한 목소리는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애송이. 네가 여기까지 안전하게 올 수 있었던 건, 내가 앞서가며 길을 찾았기 때문이란다. 내가 돌아가는 길을 찾아주지 않는다면, 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숲속에서 방향을 잃은 채 헤맬 테지.
그러다 금세 급류에 휩쓸리거나, 길을 잃거나, 발을 헛디뎌 어딘가로 굴러떨어질 거야. 운이 좋으면 빠르게 죽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재수가 없다면 밤새 저체온증으로 시달리다가 폭풍우가 걷힌 뒤에야 겨우 숨이 끊어질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둘 중 하나가 네 운명이 될 거라는 데 내 검을 걸게. 돌아가든 따라오든 네 마음대로 하렴.”
말을 마친 칼리아는 금세 빗속으로 사라졌다. 막내 사냥꾼은 처음 보는 칼리아의 모습에 꼴깍 침을 삼키고는 칼리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폭풍우를 뚫고 험한 협곡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칼리아가 멈춰 섰다. 지척에 커다란 동굴 입구가 보였다. 빗속에서도 썩은 내와 쿰쿰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버려진 갑옷과 뼈 따위가 보였다.
“애송이.”
“네, 네?!”
“지금까지 온 길을 봐. 뭐가 보이지?”
“아, 아무것도…”
“…네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애송이지만, 그럼에도 널 여기 데려온 이유는 네가 눈이 매우 좋다고 들었기 때문인데. 아닌가?”
“아. 네, 네! 맞습니다!”
“다시 우리가 온 길을 자세히 봐. 뭐가 보이지?”
“어… 어… 어라. 저 반짝이는 건, 초록색… 구…슬?”
“아주 쓸모가 없진 않았네. 구슬을 따라가면 사냥꾼들의 초소로 곧장 이어질 거야. 베샤르 대장에게 이곳으로 오시라고 전해. 떠돌이들을 찾았다고 하면 바로 이해하실 거야.”
“떠돌이요…?”
칼리아는 말없이 막내 사냥꾼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폭풍우 속에서도 느껴지는 칼리아의 서늘한 눈빛에 막내는 좁은 협곡 길에 떨어져 있는 초록 구슬을 따라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으나, 베샤르는 금세 동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동굴 바깥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냈고, 주변의 마른나무를 그러모아 불을 붙였다.
불붙은 나무를 던져 넣으며 그는 동굴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칼리아도 검은 놀들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베샤르는 하프 클레이모어를 빼 들고 동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칼리아…?”
그 안에는 여기저기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뼈들이 뒹굴고 있었고 낡은 상자와 찢어진 천과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갑옷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지막 남은 불씨가 꺼지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베샤르는 검을 휘둘렀다.
두 검이 세게 맞부딪치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검은 놀은 무척이나 잽쌌다. 베샤르는 자신이 알고 있던 놀의 공격 패턴과 다른 움직임에 겨우 맞서고 있었다. 그는 곧 깨달았다.
‘놀이… 아니다…?’
베샤르가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불빛 앞에 그를 공격하던 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길고 날씬한 팔다리, 땋아 내린 금발과 무섭도록 새하얀 피부, 모든 걸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얼굴.
“…칼리아…? 아니, 네가 왜…?”
대답은 없었다.
칼리아의 하프 클레이모어가 그리는 묵직한 곡선이 베샤르의 코 앞을 스쳤다. 베샤르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칼리아의 공격을 받아쳤다. 검은 놀은 어디 있으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묻던 베샤르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검을 고쳐 쥐고 공격 태세를 갖췄다.
베샤르는 칼리아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빈틈을 파고드는 육중한 공격에 칼리아는 전례 없는 버거움을 느꼈다. 차기 피어모어로 거론되었다던 베샤르의 이야기는 허풍이 아니었다.
베샤르는 그저 검을 찔러 넣고 휘두르기만 할 뿐이었는데, 칼리아는 어느새 동굴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위에서 내려치는 베샤르의 강한 검을 막느라 칼리아의 몸이 잠깐 휘청이던 순간이었다. 베샤르는 순식간에 다시 검을 휘둘렀고, 칼리아는 쥐고 있던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베샤르의 차가운 검날이 칼리아의 목에 닿았다.
“대체 뭐 하는 짓이지? 지금이라도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건지 솔직하게 말해라!”
배신감과 분노로 베샤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칼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칼리아의 얼음장 같은 미소에 베샤르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의 떨리는 목소리는 그날 이후 처음 듣네.”
“…무슨…?”
“…네가 에샤르를 죽이지 않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넌 나를 너무 많이 참게 했어. 내 피어모어 자리를 빼앗기고도, 놀에게 죽은 부모님의 복수를 못 하게 되어도 참았다. 그런데 원수 같은 놀과 중립 협상까지 해? 에샤르 죽음의 대가는 네가 치르는 것이 맞다. 지옥으로 꺼져라.”
칼리아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살인자, 베샤르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베샤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검이 목에서 조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네 동생을 말리고 있었지. 하지만, 네 동생은 피어모어의 명령을 거역하고 방어만 하던 놀에게 검을 집어 던졌어. 검을 맞고 분노한 놀은 손쓸 틈도 없이 네 동생을 죽였지. 그리고 당신이 도착했어.
당신은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도 비무장이던 그를 잔인하게 살해했어.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겠지! 영원히 숨길 수 있을 줄 알았을 거야. 하지만, 당신의 바로 뒤에는 내가 있었어. 그날 보고 들은 모든 것이 매일 밤 내 꿈속에 나와서 날 완벽한 증인으로 만들지!”
베샤르의 얼굴은 혼란으로 뒤덮였다. 칼리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검 끝을 바닥으로 툭 떨어트렸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베샤르의 얼굴에서 혼란은 사라졌다. 그는 이내 분노와 고통이 가득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상상력이 뛰어나군. 칼리아. 네 아비의 명예를 그렇게라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 브레녹은 내가 아니라 하얀 놀에게 배신당해 죽었다.
미안하지만, 네 아비는 놀 따위와 협상하고, 카스트롬의 안전을 위협하며 자신의 부하를 죽게 만든 최악의 피어모어였어. 하지만, 그런 놈의 딸임에도 나는 네 능력을 인정했고 내 딸처럼… 딸처럼…”
차분하게 말하던 베샤르는 어느 순간 감정이 북받친 듯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들은 협곡 바닥을 때리는 빗소리와 세찬 강물 소리, 휘몰아치는 엄청난 강풍에 어느덧 묻혀버렸다.
칼리아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칼리아는 베샤르의 앞에서 빠져나와 그의 주변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하면 거짓이 진실이 되는 건가? 아. 혹시… 내가 당신을, 뭐, 진짜 아버지처럼 여기는 줄 알았어? 내가 당신의 진짜 가족이라도 되어서 당신의 말이면 모두 믿을 줄 알았던 거야?”
칼리아는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지간히도 외로웠나 봐. 원수의 딸을 제 딸이라고 여기고 위로받을 정도라니. 내가 당신의 거짓말을 믿고 당신 같은 살인자 밑에서 살며 당신의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하다니. 어떻게 보면… 생각보다 순진하달까?”
칼리아의 말에 베샤르의 손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꽉 깨문 채, 동굴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칼리아는 베샤르의 뒤에 서서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버지는 훌륭하고 뛰어난 실력의 대장이었어. 늘 카스트롬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고, 진정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피어모어였지.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 배신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야.
…당신 밑에 무릎을 꿇고 기어들어 간 이후, 단 한 번도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었어. 그저, 당신이 이렇게 나를 신뢰하기를 기다려 왔을 뿐이야. 에샤르, 네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잃고 완전히 혼자가 된 소감은 어때? 아, 애초에 난 잃을 수도 없었지."
베샤르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완전히 일그러진 얼굴의 베샤르는 칼리아를 향해 들고 있던 검을 내리쳤다. 칼리아는 어느새 되찾은 자신의 검으로 아슬아슬하게 베샤르의 공격을 막았다.
침착함을 잃은 베샤르는 몇 발짝 뒤로 물러난 칼리아를 향해 분노를 토하듯 검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그는 무거운 하프 클레이모어를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칼리아는 빠르고 묵직하게 호를 그리며 다가오는 베샤르의 검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버거운 것은 베샤르도 마찬가지였다.
비에 잔뜩 젖은 채, 무거운 검을 연이어 휘두르던 그에게서 힘이 빠진 순간을 칼리아는 놓치지 않았다.
베샤르의 검을 있는 힘껏 옆으로 쳐낸 칼리아는 정면에서 베샤르의 배를 발로 찼다.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뒤로 넘어졌음에도 베샤르는 검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누워 위에서 내려치는 칼리아의 공격을 연달아 막아내고는 두 발로 칼리아의 팔을 걷어찬 뒤,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두 사람은 검을 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동굴 한편의 새까만 두 눈은 배신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고, 반대편의 푸른 두 눈은 얼음장보다 더 차가웠다. 살기로 팽팽한 긴장감을 부순 것은 순간 동굴 속을 눈부시게 내려친 번개였다.
눈앞이 번쩍이자마자 심장을 터트릴 것 같은 천둥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베샤르는 두 손으로 쥔 검을 어깨까지 올린 뒤, 정면으로 칼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브레녹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베샤르의 검이 다가오는 찰나의 순간, 칼리아는 오른발을 뒤로 빼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덕분에 베샤르의 몸은 목표를 잃고 앞으로 기울었다. 잽싸게 베샤르의 뒤편으로 돌아간 칼리아는 있는 힘껏 베샤르를 걷어찼고, 그는 곧장 앞으로 넘어져 무릎을 꿇었다.
베샤르가 고통으로 신음하며 자신의 하프 클레이모어를 찾는 사이, 칼리아는 하프 클레이모어를 머리 위로 힘껏 던져 올렸다.
검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동굴 천장까지 날아올랐다. 베샤르는 칼리아를 향해 검을 겨누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의 하프 클레이모어는 빠르게 회전하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꿇어."
말이 끝나기도 전, 칼리아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녀는 순식간에 물구나무서듯 몸을 뒤집고는 떨어지는 하프 클레이모어 손잡이의 끝을 정확하게 발끝으로 걷어찼다.
베샤르의 비명이 천둥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검은 정확히 베샤르의 왼쪽 어깨에 꽂혀 있었다. 칼리아 앞에 베샤르의 무릎과 그의 검이 다시 한번 툭 떨어졌다.
베샤르의 검을 옆으로 걷어찬 칼리아는 그의 어깨에서 자신의 검을 뽑아냈다. 상처에서 나온 핏줄기가 피어모어의 브로치 위로 흘렀다.
칼리아는 베샤르의 목에 천천히 자신의 검을 가져다 댔다.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어.”
“……”
“그토록 미워한 아버지를 죽였을 때도, 하얀 놀에게 복수했을 때도, 내가 검은 놀을 수색해 처리하겠다고 했을 때도…. 당신의 얼굴에는 늘 어둠과 고통이 가득했어. 왜지?”
베샤르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내 얼굴에? 어둠과 고통이라고? 나는 에샤르, 내 부모님의 복수, 그리고 카스트롬에 독이 되는 배신자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렸다! 그리고 존경받는 피어모어가 되었지.
한 인간으로서 이런 업적을 해내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나는 언제나 내가 자랑스러웠지. 그런 내가 고통과 슬픔이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
“또. 거짓말이네. …아. 잠깐.
……그래. 이제 알겠어. 당신은 거짓말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던 거구나…? 거짓말이 있어서 그나마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견딜 수 있었던 거였구나?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는 정확히 알겠어.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중요한 것. 항상 말씀하셨지.
언제나 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함부로 검을 휘둘러서는 안 돼.
검을 쓰는 사람은 꼭 그 검에 달린 목숨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 마음속에 검의 신념을 가져야 한다.
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네 영혼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베샤르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공허함이 떠올랐다. 검은 눈동자는 이제 살기도 그 무엇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야.”
“………”
“……아니야…”
베샤르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웃었다. 흐느끼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처절한 절망과 고통, 광기 어린 미소까지 섞여 있었다.
“큭, 큭큭큭… 정말 내 영혼이 파괴되었다고 믿나? 거짓말이 있어서 그걸 견뎠다고? 헛소리! …역시 놀이 중립이라고 망상을 지껄이던 배신자 브레녹의 핏줄다운 발상이군.
…그게 그렇게 궁금하다면, 너도 나를 죽이고 네 아비의 복수를 끝내라. 그러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을 테지.”
“저런. 내가 불운과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빠져 당신같이 어리석은 짓을 할 것 같아?
당신은 자신의 불운과 고통을 모두 남 탓으로, 심지어 어리석은 당신의 동생을 살리기 위해 애쓰던 사람의 탓으로 돌리며 그를 살해했지.
그건 그저 화풀이야. 복수를 가장한 화풀이에는 정당성도 이득도, 심지어 당신에게 남는 것도 없었지…
이제 당신은 영혼마저 부서져 버렸으니, 버티려면 합리화가 답이었지. 거짓말이 필요했을 거야. 그렇지만. 결국…. 당신에게는 절망 외에 무엇이 남았어?”
베샤르는 고개를 쳐들었다. 칼리아는 베샤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때 아버지의 가슴에 달려 있었던 피어모어의 브로치가 그의 왼쪽 가슴에 매달려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저열한 자. 자신의 모순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텅 빈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자.
하프 클레이모어를 꽉 움켜쥔 칼리아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 있지 않았다. 저 따위 인간에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가 아까웠다. 그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몸서리가 쳐지도록 보고 싶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차가운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녀가 두 손으로 검을 고쳐 쥐며 목을 칠 태세를 취하자, 베샤르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너도 결국은 나와 같은 길을 택했군. 내게 찾아왔던 어둠이 이젠 너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그 순간, 칼리아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따뜻한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아버지의 얼굴. 피어모어의 브로치를 왼쪽 가슴에 단 채, 기사단 출신답게 기품 있는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
브레녹의 목소리, 중저음의 따뜻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널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 칼리아. 내 남은 삶은 너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마.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동굴 안으로 바람이 몰아쳤다.
칼리아는 바람과 함께 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녀는 힘껏 검을 휘둘렀고, 베샤르의 몸은 힘없이 바닥 위로 쓰러졌다.
하지만, 칼리아의 검날은 깨끗했다. 칼리아는 검의 손잡이에 묻은 피를 닦으며 기절한 베샤르를 쳐다보았다. 그의 관자놀이에 남은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난 피가 한 쪽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칼리아는 피어모어 브로치를 베샤르의 가슴팍에서 낚아채듯 뜯어냈다.
“아니. 더 깊은 어둠이 당신의 죽은 영혼과 영원히 함께 할 거야.”
비바람이 천천히 멎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칼리아는 뒤뜰로 향했다. 문을 열자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 봉분과 작은 비석이 보였다.
칼리아는 아버지의 하프 클레이모어와 초상화를 가지고 내려와 봉분 앞에 섰다. 무덤 앞에 검을 꽂은 칼리아는 품속에서 피어모어의 브로치를 꺼내 검자루에 걸었다. 아버지의 초상화를 바라보던 칼리아는 그것을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버지가 지키려던 것, 내가 지켰어.
그녀는 두 번 다시 카스트롬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 이 근방에서는 보기 힘든 훌륭한 검이로군. 뭐 하시는 분이시오?”
칼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대장간 안을 어슬렁거리며 무기들에만 눈길을 주었다.
“저기. 콜헨이나 로체스트에선 본 적 없는 미인인데. 어디서 왔어요?”
사람 좋아 보이는 대장장이와 그 옆의 갈색 머리 여자는 번갈아 가며 칼리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멀리서.”
대충 여자에게 답한 뒤, 칼리아는 창밖으로 마을을 바라보았다.
밝고 따뜻한 분위기의 소박한 마을이었다. 카스트롬을 떠난 뒤, 오랜 기간 칼리아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베샤르에게 절망을 안기고 난 뒤면 사라질 줄 알았던 악몽은 여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칼리아는 딸을 지키기 위해 살겠다는 마음으로 고통을 이겨낸 아버지처럼, 자신 역시 앞으로 살아갈 방향성과 목표를 찾아내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에게 집요하게 매달려 있는 이 밤의 그림자도 언젠가는 베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륙 어느 곳을 방랑하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아도, 아직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칼리아는 대륙을 떠나보기로 결심했다. 배를 타기 위해 콜헨에 도착했고, 잠깐 무기를 점검하러 대장간에 들른 것이었다.
갈색 머리 여자가 다시 뭔가 질문을 하려던 찰나, 대장간 문이 열렸다.
“아아. 왔소? 개운해 보이는 것이 오늘 임무도 잘 수행한 모양이구려.”
오렌지 빛깔의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용병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거대한 창을 불쑥 대장장이에게 내밀었다.
“내 성창 좀 수리해줘. 휴. 오늘 임무도 잘 해냈지만…. 여전히 나의 과업은 행방불명이야!”
“행방불명? 그 과업이라는 게 자취를 감췄소?”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신께서 내게 주신 과업이 무엇인지 여전히 찾지 못했다는 뜻이야…!”
용병의 말에 갈색 머리 여자가 킥킥 웃었다. 대장장이는 용병의 창을 받아 잠깐 보더니 수리는 필요 없다며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내일은 꼭 과업을 찾길 바라오.”
“응! 오르카의 과업을 기필코 찾아내겠어.”
용병은 성창을 받아 들고 대장간을 나섰다. 칼리아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행방불명이라는 용병의 말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 검은 다 되었구려. 그나저나. 앞으로 어디로 가실 계획이오?”
하지만 칼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오렌지빛 머리카락 용병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장장이는 칼리아의 무응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서 있는 모습이나 검을 보아하니 싸움 깨나 하시는 모양인데, 저 앞 용병단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소. 별 할 일이 없다면 가보는 것도 괜찮을 거요. 아까 들어온 그 친구도 거기서 용병을 하고 있…”
“고마워.”
칼리아는 아직 말도 끝내지 못한 대장장이 앞에 대금을 내려놓은 뒤, 빠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오렌지빛 머리카락을 한 용병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용병단 사무실로 보이는 낡은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혹시, 대륙 모든 곳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해답을 이 작은 마을에서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곳은 대륙을 떠나기 전 마지막 마을이잖아? 이곳에서도 답을 찾지 못한다면 그때 떠나도 늦지 않아.
아버지의 뒤를 따라 협곡 안으로 달려갔던 날 이후,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칼리아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제 너를 위해 살아가라는 따뜻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