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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는 마법에 대한 재능이 남달랐다.
어린 시절, 마법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이비가 무심결에 작은 마법의 불빛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비에게 마법을 가르치기로 했다.

서부에서 마법은 오랜 역사를 통해 인정받는 학문이었으나, 동방의 왕국에서는 마법이란 전쟁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마법의 빠르고 강력한 힘에만 집중한 동방의 마법사들은 암살, 침투, 파괴를 주 임무로 하는 집단이었다.

이비의 재능을 발견했을 때, 아버지는 그녀를 전쟁 마법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양한 마법들을 배우며 그 안에서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영주로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서부 대륙을 오가며 직접 마법서를 사 모았고, 그녀를 가르쳐줄 마법 교사를 수소문했다.

후안 항에서 출발한 마차의 행렬이 영주의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는 저택의 앞뜰 정원까지 들어와 바퀴를 멈췄다.
서부 대륙에서나 볼 법한 정원에는 갖가지 수목이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었다.

정원 앞에는 이곳 후안령의 영주와 그의 딸, 이비가 마차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서부 대륙의 테일 코트를 갖춰 입은 아버지와 하늘색 드레스를 단아하게 차려입은 이비의 모습은 동방의 어느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서부에서 이비를 가르칠 마법 교사가 도착하는 날이었다.

후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이 지역 영주를 서부 애호가 또는 서부의 앞잡이라 불렀다.
작은 변방의 영지에 불과한 후안에서는 서부 사람과 서부 문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고, 오히려 이방인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서부인 특유의 붉은 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한 여성이 마차에서 내렸다.
보랏빛 고깔모자를 쓰고 로브를 입은 여성은 영주와 이비를 보고 서부의 예법을 갖춰 인사를 올렸다.
이비는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쑥스러운 듯 작게 고갯짓했다.

"마나의 흐름을 다른 원소로 치환하려 할 때 가장 손쉬운 것은 바로 불이랍니다."
"네. 선생님."

마법 선생님과의 인연도 십여 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비가 마법을 익히는 만큼 그녀의 방 책장에도 마법서가 늘어갔다.
기초마법부터 치유마법, 연금술, 점성술을 비롯해 현재는 사라진 고대 마법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마법서가 빼곡히 차있었다.

"주변의 마나를 순간적으로 응집하면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이비는 하루 대부분을 마법을 익히는 데 보냈다.
아침에는 원소를 다루는 마법을, 점심에는 시약을 사용한 연금술을 익혔으며, 저녁에는 고대 마법에 관한 연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식이었다.

다양한 마법을 한 번에 배우면서 단점도 드러났다.
그녀는 모든 마법을 평균 이상으로 구사할 수는 있었지만 반대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 분야라는 것이 없었다.

다양한 마법을 모두 구사할 수 있다는 자체로 이미 특별한 경지에 오른 이비였지만, 아버지는 항상 이비에게 더 높은 수준의 목표를 요구했다.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매일매일 제자리걸음을 걷는 것 같은 나날이 지속되었다.
이비는 점차 의욕을 잃어갔다.
아버지의 기대만이 이비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 아버지의 기대가 처음부터 이렇게 버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이비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비의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때문일까 아버지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항상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우울해 보일 때가 많았다.
이비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항상 아쉬웠다.

"이비야. 네 재능은 여신께서 주신 선물이란다."

이비가 처음으로 작은 마법의 불빛을 만들어 냈던 날, 아버지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전까지 아버지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이비는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가 마법을 좋아하게 된 이유였다.
자신이 더 멋진 마법사가 되면 아버지의 우울한 모습 또한 사라지리라 기대했다. - 그녀가 마법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이제는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비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아버지 본연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었다.
서재에서 멍하니 사색에 잠긴 아버지를 바라볼 때면 의식한 적 없었던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만 느껴졌다.

어느샌가 이비는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 부족할지 몰라도 그녀는 대부분의 마법과 연금술에 통달한 상태였다.
세상 여느 마법사와 견주어도 그녀는 더 뛰어난 기량으로 해낼 자신이 있었다.

이 무렵 이비는 자주 창밖을 멍하니 지켜보는 습관이 생겼다.
구름 한 조각, 하구에 모인 바닷새, 파도 위를 오르내리는 선박들까지 창밖의 모든 것이 자신보다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구 너머의 해안선을 지켜보며 언젠가 먼 세계로 떠나는 자신을 꿈꿨다.


그리고 그 기회는 이비의 예상보다 아주 빨리 찾아왔다.


어느 날, 저택으로 기묘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마족 토벌을 위해 북쪽 땅으로 출정했던 왕의 기마부대가 갑작스러운 적의 기습으로 패퇴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국왕과 둘째 왕자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실제 왕위권자였던 둘째 왕자가 사망한 탓에 율법에 따라 폐위되었던 첫째 왕자가 왕위를 이어받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이 기묘한 이유는 바로 같은 내용으로 조금 다른 소문이 함께 돌았기 때문이다.
마족 토벌을 위해 북쪽 땅으로 출정했던 둘째 왕자의 기마부대가 갑작스러운 적의 기습으로 패퇴하였으며, 둘째 왕자가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전투에 국왕은 출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둘째 왕자를 죽게 만든 화살은 마족의 화살이 아닌 왕국 기마부대의 화살이었다고 한다.

이 기묘한 소식을 접한 이비의 아버지는 황급히 저택의 모든 하인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당분간 나오지 않아도 된다며 몇 달치 임금을 미리 지급하고 한 사람씩 집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손님으로 상주하고 있던 이비의 마법 선생님에게 급히 서부로 가는 배편을 잡아주고 몇 가지를 부탁했다.
선생님은 알겠노라며 그날 저녁 저택을 떠났다.

선왕의 추도 기간이 끝나고 신왕의 즉위식이 있는 날이었다.
며칠간 이어진 추도의 우울함을 벗어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후안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나팔을 불고 노래를 부르며 신왕이 즉위하는 순간을 축하하고 노래했다.
이비가 창밖으로 사람들의 행진 행렬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방으로 찾아와 이비에게 서부로 가는 티켓을 한 장 내밀었다.

"오늘 밤, 항구에서 서부로 가는 배가 출발할 거란다."

선생님과 함께 서부로 가서 앞으로는 서부에 있는 마법 학교에 다니게 될 것이라 했다.
이비는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 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없이 이비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과거에 보여준 미소보다 힘이 없어 보이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미소였다.

“서부에……. 아버지도 함께 가나요?”
“먼저 가 있으렴. 곧 따라가마.”

마법 학교에 다니는 것은 그녀가 바라던 일 중 하나였을텐데,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떨렸다.
막상 혼자 떠나게 되어 떨리는 것인지 기대가 되어서 떨리는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날 저녁, 이비는 고민 끝에 등을 떠밀리듯 항구로 향하는 마차를 타게 되었다.



바람이 한결 차가워진 가을밤이었다. 마차는 항구로 향하는 언덕길을 가파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이비는 저택을 떠나면서부터 계속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떠나면 무언가 큰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떨려서 그런 것이라고 자신을 달래보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하아."

이비는 한숨을 내쉬고 마부에게 이야기해 다시 집으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아직 아버지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 같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녀는 그동안 진정할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대기 중의 마나가 유난스럽게 요동치고 있었다.
저택으로 다가갈수록 마나의 흐름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비는 마차 안에서 아버지가 있는 저택을 바라보았다.저택 위로 어마어마한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쾅!

저택 주변으로 모여든 마나가 한순간 모두 불타오르며 저택이 화염의 폭풍 속에 휩싸였다.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으며 저택의 모든 창문이 깨져 나오고 돌가루와 먼지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아버지!”

이비는 눈이 휘둥그레진 마부를 대신해 마차를 세운 후, 자신의 마법 스태프를 꺼내 들고 저택을 향해 달렸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저택의 정문은 불길에 타오르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이비는 스태프에 마나를 집중해 정문을 향해 마법의 화살을 발사했다.
한쪽 문에 이비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뚫렸다.

이비는 저택 안으로 향했다. 저택의 중앙 홀은 이미 검은 연기로 가득했다.
매운 연기가 눈에 들어가자 금세 눈물이 앞을 가렸다.
주변 불길이 한 번씩 이글거릴 때마다 무서운 기세로 연기를 뿜어냈다.
우선 아버지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버지! 어디에요?”

이비의 외침은 연기 속으로 파묻히듯 사라져 버렸다.
연기가 자욱해진 저택은 더는 그녀에게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비는 바닥의 융단과 벽의 장식으로 위치를 가늠하며 저택 안쪽으로 향했다.

“……율법을 거스르고 신왕을 폐위하기 위해 날조하…….”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이비는 서둘러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들어선 곳은 아버지의 서재였다.
서재의 중앙에 아버지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아버지!"
“이……. 비야…….”

아버지가 안타까움과 원망 섞인 눈빛으로 이비를 바라봤다.
그녀가 저택으로 돌아온 것을 책망하는 듯했다.

“죄인의 딸인가. 그 또한 죄인임에 진배없지.”

나직이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에 이비는 흠칫하고 놀랐다.
그녀의 등 뒤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던 존재가 나타났다.
검정 장화와 검정 망토를 입고 얼굴에는 검정 두건까지 두른 검은 복장의 남자였다.
남자의 손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난 듯한 흉측한 형태의 마법 스태프가 들려있었다.

남자의 스태프 위로 마나가 모여들었다.
이비는 마음의 각오를 하고 손에 쥔 스태프를 남자를 향해 겨눴다.

"마법 스태프. 지금 보니 그 여자를 똑 닮았군."

남자의 마법이 매서운 속도로 구현화되어 나타났다.
마나를 다루는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인 듯했다.
검은 바늘 수백 개가 공중에서 나타나 이비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비는 이 공격을 막기 위해 마나를 응집시켜 주변 공간을 보호하는 벽을 만들었다.
마법의 바늘 정도는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남자가 스태프를 살짝 꺾었다.
그러자 검은 바늘들이 마나의 벽의 한쪽 면으로만 집중적으로 휘몰아쳤다.
마나의 벽은 작은 균열이 생김과 동시에 한순간에 무너져 사라졌다.
이비는 가까스로 정면공격은 피했지만, 바늘이 스치고 지나간 온몸에 작은 찰과상이 남았다.

정신을 차리자 남자는 어느새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비는 남자의 집중력을 깨뜨리기 위해 마나를 집중해 남자의 얼굴 앞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게 했다.
가장 손쉬운 마나의 활용법 중 하나였다.

화르륵 하고 눈앞에서 불꽃이 튀자 남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 사이 이비는 빠르게 화염구를 만들어 남자를 향해 날렸다.

한순간 남자의 스태프를 중심으로 마나가 빠르게 퍼져나가며 주변 공기를 모두 바깥으로 밀어냈다.
순식간에 주변 불길이 잦아들면서 이비의 화염구도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공기가 사라지자 이비와 이비의 아버지 모두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다.
괴로웠다.
남자의 다음 마법에 대비하려 했지만, 당혹과 괴로움에 이비의 집중력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사악한 눈웃음이 번졌다.
스태프 주위에 다시금 검은 바늘을 소환하기 위한 마나가 모여들었다.

“너도 네 어미와 같은 방법으로 죽겠구나.”

검은 바늘의 무리가 이비를 향해 날아왔다.
끝이었다.
이비는 더는 마나의 벽을 생성할 만큼 집중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비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살려줘.'
마음속으로 외쳤다.

쿵 하는 둔탁한 금속음이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아니!"

남자의 당황한 듯한 외침에 이비는 살며시 눈을 떴다.

남자와 이비 사이를 서재의 잡동사니들이 한 데 뭉쳐 검은 바늘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 잡동사니들 주변으로 실체 없는 에너지의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골렘이었다.
주변 사물들로 자신의 형체를 구성하는 골렘이 서재의 물건들을 매개로 현실 세계에 나타난 것이다.

남자가 난생처음 보는 마법에 당황하여 정신이 팔린 사이, 골렘은 주변 기물들을 한 번 더 흡수하듯 끌어당겨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검은 복장의 남자는 그제야 도망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골렘은 소환자의 목숨을 위협한 존재를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골렘은 남자를 향해 거대한 테이블로 만들어진 주먹을 휘둘렀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복장의 남자는 벽면으로 날아간 후 퉁겨져 나왔다.
남자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한순간 숨이 끊어졌다.


골렘이 저택 밖으로 향하는 길을 터준 덕분에 이비와 아버지는 가까스로 저택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비는 가장 먼저 아버지의 상태를 살폈다.
아버지는 서재에 있을 때보다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가슴의 셔츠로 번진 혈액은 모두 검붉게 굳어가고 있었고, 아버지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이비는 지금껏 익힌 마법을 총동원해서 아버지를 회복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비가 아무리 노력해도 점점 죽음이 자신을 따라잡는 것을 느꼈다.
무력한 자신이 너무나 분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이비를 보며 아버지는 괜찮다며 연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기하면 안 돼요. 아빠."
"네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비는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네가 바라는 사람이 되렴."

아버지는 마지막 미소를 남기고 이비의 곁을 떠났다. -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신전이었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 잊혀져 있던 시간만큼 두껍게 쌓인 먼지가 흩날렸다.

한쪽 날개가 부서진 여신의 석상이 두 팔을 벌려 오랜만에 그녀를 찾아온 방문자를 맞이했다.
여신은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는 소녀를 보았다. 그 앞에 가로놓인 한 구의 시신도 보았다.
여신은 두 존재를 내려다보며 냉엄함과 자애로움이 섞인 미소를 보여주었다.

무릎을 꿇은 소녀는 기도했다.
부디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마르지 않는 눈물을 쏟아내면서 몇 번이고 기도했다.
날개를 잃은 여신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여신은 안타까움을 담아 다시금 소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소녀의 기도는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소녀가 어떤 각오를 하든 무엇을 맹세하든 날개를 잃은 여신은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신전 안으로 이비를 찾으러 온 것은 항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선생님이었다.
저택에 불이 난 것을 알고 그녀의 흔적을 쫓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선생님은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도 무척이나 담담했다.
조용히 다가와 아버지를 향해 애도를 표했다.

"널 탑으로 데려가기로 네 아버지와 약속을 했단다."

선생님은 조용히 이야기하며,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이비에게 덮어주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동풍이었다.
이비는 이 바람을 따라 지금 떠나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비는 얼굴을 들어 선생님을 바라봤다.
눈물 어린 눈빛 아래로 앙다문 입술이 파르르 흔들렸다.
아버지처럼 미소 짓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갈게요. 가고 싶어요."

그리고 이비는 아버지를 여신의 가호 아래 맡겨둔 채 신전을 나섰다. - 이웨카의 탑은 서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 양성 학교이자 연구기관이었다.
단순히 마법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닌 기존의 마법 원리를 분석하고 고대의 마법을 복원하며 새로운 마법을 창조하는 곳이었다.
거의 모든 마법의 뿌리는 탑에서 시작되었고, 역사 속 수많은 유명 마법사들은 대부분 탑이 배출한 마법사들이었다.

탑의 모든 과정을 수료한다는 것은 마법사에게 있어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출세를 위한 등용문과도 같았다.
탑의 수료증 하나만으로 기사단이나 마법사 협회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기회만 닿는다면 귀족 또는 나아가 왕족의 자문관이 되어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릴 수도 있었다.

"탑을 떠나 용병이 되고자 합니다."

모든 과정을 이례적인 성적으로 수료한 이비가 용병이 되겠다고 했을 때, 탑의 모든 인원이 놀람을 금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비를 아는 모두가 그녀를 찾아가 그녀의 결심을 말렸다.
그녀라면 더 대단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텐데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라는 조언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확고했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비는 탑을 떠나 로체스트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더는 세상 그 무엇도 자신보다 자유롭지 않았다.
떠나는 마차 안에서 이비는 마음속 깊이 해맑게 웃었다.

글 : 칼미슈 / 그림 : king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