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KAEL

신성이 유달리 밝게 빛나고, 하늘에 눈부신 유성우가 내리던 어느 밤.
짙게 드리운 침묵을 깨고, 갓 태어난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드넓은 성 안팎에
울려 퍼졌다.

“마침내…!”

힘겹게 첫울음을 터트린 아기는 어머니의 품 대신 아버지의 손에 넘겨져,
화려하고 드넓은 복도를 부드러운 비단보에 감싸인 채 나아갔다.

“보라. 이 아이가 장차 가문과 영지를 이끌어 갈 나의 아들, ‘카엘’이다.”

높은 단상 위에 올라선 백작이 품 안에 안긴 아기를 치켜들자, 성안에 모여든 자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저마다 아기를 향해 축복의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어쩜 저리도 천사 같으실까.”
“고귀한 카엘 도련님, 만세!”

이제 막 태어난 아기에겐 견디기 버거운 소음일 뿐인 말들.
그러나 거대한 홀에 메아리치는 웅성거림과 쏟아지는 낯선 이들의 시선 속에서도
아기는 결코 겁을 먹지 않았다.

“이리도 의연한 갓난아이는 난생 처음 봅니다. 보통은 귀가 떨어지라고 울음을 터트릴 텐데요.”

측근의 감탄 섞인 말에, 근엄한 백작의 얼굴 위로 감출 수 없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장차 큰일을 해낼 자질을 타고난 게지.”

백작은 군중을 향해 내밀었던 아기를 다시 품에 안아 들고는, 그 작고 오밀조밀한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듣고 있느냐, 내 아들아. 네 이름을 연호하는 저들의 우레와 같은 목소리를. 바라건대 네가 타고난 자질 그대로 고귀하게 자라다오. 그리하면 이 가문과 영지, 나아가 왕국의 미래가 모두 네 것이 될 터이니.”

그 말뜻을 알기라도 하듯이, 아기는 제 아버지를 향해 화답하듯 천천히 눈을 맞추어 깜빡였다.
맑게 빛나는 두 눈에 백작이 시선을 빼앗겨 있는 사이, 창밖에 드리운 밤하늘엔 눈부신 별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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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번영을 이룬 '갈론' 왕국.
그리고 왕과 함께 선봉에 섰던 고위 귀족 ‘엘노바' 가문.

그 위세 높은 엘노바 가문의 유일한 자제인 소년은, 신성이 유달리 밝게 빛나던 어느 밤 만인의 기대와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
‘명망 높은 고위 귀족이자 위대한 전쟁 영웅의 단 하나뿐인 아들.’,
‘풍요로운 엘노바 영지를 이어받을 유일무이한 후계자.’
세상에 첫 숨을 내쉬던 그 순간부터, 소년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이러한 수식이 따라붙곤 했다. 그의 몸속에 흐르는 고귀한 피는 누구나 그를 우러러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 고귀한 신분만이 소년의 전부는 아니었다.
태생부터 주어진 뛰어난 재능이 소년에게는 아주 많이 있었다.
기품 있는 아름다움과 영민한 두뇌. 그리고 기민한 신체 능력은 소년이 성장해감에 따라 더욱더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어린 나이지만 소년의 학식과 무예는 이미 동년의 수준을 월등히 넘었으며, 특히 무예는 영지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그리고, 소년 특유의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은 그의 재능을 한층 더 빛나게 해주었다.
원한다면 자신의 재능이나 신분을 이용해 모든 것을 쉽게 얻어낼 수 있을 텐데도, 소년은 결코 자만하거나 오만하게 구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예의 바랐으며, 늘 주어진 과업에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임했다.
마치 맑은 밤하늘의 별처럼 소년은 누구보다 빛나는 존재였다.
소년 ‘카엘’은 가문의 자랑이자 왕국의 보배였다.

소년은 종종 왕궁에 들러 국왕을 직접 알현하곤 했다. 변변한 후사가 없던 왕은 친우의 아들인 소년을 마치 아들이라도 되는 듯 총애하고 아꼈다.
그리고 소년 또한, 위대한 전쟁 영웅인 국왕을 존경하며 따랐다.
왕국을 번영으로 이끈 두 전쟁 영웅, 국왕과 백작. 그들은 막강한 권력자이지만 솔선수범하여 선봉에 나서고 군사들을 이끄는 전사들이었으며, 한편으론 평화의 시대를 이끄는 왕과 덕망 높은 영주였다.
소년은 오로지 대의와 명예를 위하여 주저 없이 검을 들고, 힘없는 백성들을 지켜내는 그 둘의 모습을 마음 깊이 존경했다.
후일 그들 곁에 나란히 서서 전장을 누비고 그들처럼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것.
그것은 소년의 오랜 꿈이자 변치 않는 목표였다.

“카엘, 진정한 영웅이란 정의를 추구하고 더 크고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서는 것이다. 이 나라를 더욱 번성케 하여 가엾은 백성들이 풍요와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부와 권세가 허락된 유일한 이유이다.”
“아들아, 네가 타고난 그 재능과 힘을 원 없이 꽃피워, 더 크고 원대한 가치와 미래를 보는 데 사용하거라. 그리고 널 뒤따르는 자들을 미래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라.”

소년은 나라의 정점에 선 두 영웅의 가르침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그들 같은 ‘영웅’이 되기 위하여 가진 것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날도 카엘은 아버지와 왕궁 알현을 마치고 엘노바 성에 도착한 참이었다.
늦은 저녁 무렵, 성안은 저녁 만찬 준비에 한창이었다.
아버지와 헤어져 자신의 처소로 향하던 소년의 귀에, 문득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건방진 것...! 감히 눈에 불을 켜고 아득바득 대들어?"

뒤이어 찰싹하는 소리가 성에 울려 퍼지자, 소년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성의 부엌. 하인들이 한창 요리를 나르느라 분주하게 오가는 사이, 늙은 시종장과 소년의 또래쯤 되는 꾀죄죄한 행색의 한 갈색 머리의 소녀가 언성을 높이며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뺨을 세게 얻어맞은 듯 소녀의 한쪽 볼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러나 상대를 향한 기세는 한치도 꺾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소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시종장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전 오늘 새벽부터 하루를 꼬박 일했어요. 그런데 겨우 이게 하루 치 삯이라고요? 이건 부당해요. 한 끼 식사는커녕 아버지 약값도 못 된다고요."
"네 노동이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는 내가 판단한다, 이 주제도 모르는 녀석아. 덩치도 작고 깡마른 게 일을 하면 얼마나 했다고. 이 정도면 오히려 후하게 쳐준 거지. 더 문제 일으키지 말고 썩 꺼져!"
"싫어요. 정당한 대가를 주기 전까진 절대 안 비켜요."
"어허, 이게 정말?"

시종장의 위협에도 소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서서는, 마치 밤이라도 새겠다는 듯이 오히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시종장은 다시 손찌검이라도 하려는 듯 소녀를 향해 한 손을 높이 쳐들었다.

“다들 멈춰라!”

갑자기 들려온 소년의 호령에, 분주하던 일대는 일순간 침묵에 휩싸였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가.”
“카, 카엘 도련님…. 도련님께서 계신 줄 모르고 그만 망동을….”
“… 어떤 사정인지는 충분히 들었다. 여기 이 아이에게 지나치게 적은 품삯을 주었다지.”
"그것이.... 통상적으로 성에서 일하는 아이에게는 이 정도의 삯을 주곤 합니다. 절대로 부족한 게 아닙죠. 그런데 저 여자애는 저것마저도 부족하다며 떼를 써대니...."
“…….”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시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엘은, 조용히 그를 지나쳐 곁에 있는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더 이상 몸에 맞지도 않는 낡고 초라한 옷을 걸친 소녀. 소녀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여전히 매서운 눈빛으로 눈앞의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붓기가 심해져가는 소녀의 오른쪽 뺨을 보자 소년의 마음은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한없이 무거워졌다.

"미안해,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진심으로 사과할게.”
"......."
"충분한 보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네 아버지의 약값을 보태고도 남을 거야. 부디 받아 줘."
"......!"

소년은 자신의 옷에 달린 보석 브로치와 금장 단추를 뜯어 소녀의 앞에 조심스레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놓인 귀중한 보화를 보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군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천한 소녀에게는 과분한 호의라며 욕하는 소리, 아량 넓은 도련님이라며 칭송하는 소리, 보석을 보며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서로 뒤섞이며 소란스러운 웅성임을 만들어냈다.
소녀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소년의 온화한 얼굴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손을 들어 제 앞에 내민 소년의 손을 있는 힘껏 거세게 쳐냈다.

"... 어, 어째서…."
"... 이깟 거, 내가 받을 줄 알아?”

요란한 짤랑 소리를 내며 보석들이 제각기 바닥에 흩어지자,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시종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저, 저 무례한...! 여봐라, 뭣들 하느냐. 저 계집애를 당장 잡아들이지 않고!"
"부산스럽게 굴지 마.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소년은 몸을 숙여 흩어진 보석을 하나하나 주워모아, 다시 소녀에게로 향했다.

"네 마음은 이해해. 그래도 이것만은 사양 않고 받아주면 좋겠어. 다른 이가 아닌, 네 가족을 위해서라도."
"... 내 마음을, 네가 이해한다고?"

소녀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아무것도 몰라. 잘난 도련님."
“….”

차가운 한 마디를 남긴 후, 소녀는 홱 돌아서서 성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말문이 막혀버린 소년은 멀어져 가는 작고 단호한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은혜도 모르는 것은 혼쭐을 내줘야 한다며 길길이 날뛰는 자들을 애써 진정시킨 후, 소년은 저녁 만찬도 거른 채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서 소년은 조용히 커다란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차가워 보여, 자신을 바라보던 소녀의 그 날 선 눈빛을 떠오르게 했다.
그 순간 자신이 어떻게 답했으면 그 마음을 받아들여 주었을까. 자신이 내뱉은 어떤 말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소년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밤이 저물고 동이 틀 때까지 그의 고민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소년은 결국은 아무런 답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하루는 또다시 시작되고, 간밤에 겪었던 작은 해프닝 또한 밀려오는 일상에 묻혀 저편으로 밀려 나갔다.
그러나 소년의 가슴 한켠에는 여전히 소녀의 눈빛, 날 선 말들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엘노바의 카엘은 이 앞으로 나와 겸허히 무릎을 꿇으라.”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결연한 눈빛의 카엘은 대열을 맞춰선 기사들 사이로 나아갔다.
늠름한 천마가 새겨진 화려한 갑옷을 두르고 긴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단상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엔 기개와 자신감, 그리고 미래를 향한 포부가 담겨있었다.
왕의 안전에 이르자, 그는 천천히 몸을 숙여 자신의 주군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 검이 닿는 순간부터 그대는 ‘갈론 왕실 근위대’의 기사로서 짐과 왕실의 안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게 되리라. 그대는 오로지 짐을 위하여, 명예롭게 검을 휘두르고 적과 맞설 각오가 되어 있는가?”
“예, 폐하. 이 엘노바의 카엘. 왕실 근위대 기사로서 성심을 다할 것을 폐하와 폐하의 위대한 왕국 앞에 맹세합니다.”

잠시 후 화려한 보검이 그의 양쪽을 번갈아 어깨를 두드리고,
마침내 새로운 기사의 탄생을 선포하는 한 마디가 드넓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하늘이 부여한 이 권력으로, 나 갈론의 왕이 엘노바의 카엘을 '왕실 근위대’의 ‘기사'로서 임명하노라. 그대는 짐의 곁에서서 언제까지나 짐을 보필하고 짐의 뜻을 이루는 데에 힘쓰라."
“폐하와 왕실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이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치겠나이다.”

왕과 카엘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성안을 가득 메우자, 왕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띠고 직접 손을 들어 카엘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었다.

시간이 흘러, 카엘은 이제 갓 성년에 접어든 참이었다.
마치 봄을 맞은 꽃처럼, 그의 수려한 자태와 눈부신 기량은 더없이 화려하게 만개하고 있었다.
왕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오늘 그는 최연소 ‘왕실 근위대 기사’가 되었다.
본래 왕실 근위대 기사는 왕국의 무인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직위로, 오로지 왕이 직접 선발한 인원으로만 이루어진 왕의 직속 최정예 호위부대였다. 그렇기에 카엘의 이례적인 기사 서임은 그가 왕의 큰 신임을 얻고 있다는 사실과 어린 나이지만 뛰어난 실력자라는 사실을 동시에 증명하는 영예로운 일이었다.

"참으로 대견하고 대견하다. 나의 아들아. 금번의 기사 서임으로 우리 가문의 입지가 더없이 공고해졌구나.”

백작은 그가 이루어낸 성취에 더없이 기뻐하면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을 품에 와락 안았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 탓에 길어져만가는 일장 연설을 흘려들으며, 카엘은 머릿속으로 오늘 있었던 서임식을 천천히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경건한 정적을 헤쳐나가는 긴장감.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들려오는 철컥대는 경쾌한 금속음.
엄숙한 기사의 서약과, 깊은 믿음이 어린 왕의 그 미소.
사람들의 열띤 환호.

'참으로 꿈만 같던 순간이었다.'

카엘은 작게 미소지었다.
겸손한 성정 탓에 크게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사실은 그도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 못지않게 기사가 된 것이 기뻤다.
기사가 된다는 것은 곧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오던 꿈에 한발 다가서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대의와 명예를 위해 검을 들고 힘없는 백성을 지키는 자.
정의를 추구하고 더 크고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자.
진정한 영웅을 향한 그의 이상은, 성년이 된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갈론 왕실 근위대 소속이 된 카엘은 영지를 떠나 왕궁이 위치한 수도에 머무르며 왕을 보필했다.
그는 가까이에서 왕을 호위하며, 왕궁 안의 화려한 일상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다.
왕과 고위 귀족들은 각종 정무를 처리하며 아주 사소한 것부터 중대한 사안까지 모든 결정을 내리곤 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주제는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사실, 벌써 몇 년째 왕국은 나라 밖으로 소규모 전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풍요와 번영이 이어지던 황금기가 지나고 국가가 서서히 침체하기 시작하자, 왕은 민심을 돌리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택해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크고 작은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리고 돌아오면 나라 전체는 한동안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고, 왕의 지지도는 더없이 높아졌다.

‘진정한 영웅이란 정의를 추구하고 더 크고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서는 것이다. 이 나라를 더욱 번성케 하여 가엾은 백성들이 풍요와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부와 권세가 허락된 유일한 이유이다.’

카엘은 왕의 결정이 오롯이 대의를 위한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왕이 일으키는 전쟁은 곧 정의의 실행이며, 왕이 내리는 모든 결정 또한 백성의 풍요와 평안을 누리게끔 하기 위한 것이라 믿었다.
가끔은 작고 기묘한 의구심이 드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왕실 근위대 기사의 소임은 어디까지나 왕을 지키고 그 뜻을 실행하는 것이기에, 그는 되도록이면 왕의 행위에 의구심을 품지 않으려 노력했다.

“최근 엘노바 영지에서 백성들에 의한 소요 사태가 지속하여 발생했다고 합니다. 폐하.”

어느 날, 부름을 받고 들어선 카엘은 뜻하지 않게 고향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언제나 평화롭던 자신의 영지에서 발생한 백성들에 의한 소요 사태.
비록 아주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불온한 움직임이 확산할 것을 우려한 왕과 관료들은, 기사이자 엘노바 영지의 후계자인 카엘에게 직접 조사를 명했다.
영지로 향하는 동안 그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자신의 평화로운 고향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다니. 그것도 영지의 사람들에 의해서. 자신이 없는 사이 그 덕망 높은 아버지가 영주로서 실정을 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걱정을 한가득 안고 카엘은 서둘러 말을 재촉했다.

해가 서서히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카엘은 영지에 도착했다.
보다 빠른 사태 파악을 위해, 그는 자신의 성으로 향할 틈도 없이, 곧장 방향을 틀어 영지의 외곽과 광장을 잇는 길로 향했다. 돌길을 지나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광장 인근에서 들려오는 군중들의 웅성거림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소요 사태라는 것이 슬슬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이 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엘은 말에서 내려, 갈수록 빽빽하게 운집한 사람들을 제치고 나아가 적당한 자리를 잡은 다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들으시오! 우리는 매일 부서질 듯한 몸을 이끌고 성실하게 일합니다. 그리고는 높으신 분들께, 나랏님께 그 결실을 죄다 바치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우리에게 남는 건 겨우 가족 입에 풀칠이나 할 몫뿐입니다!”
“옳소! 그렇소!!!”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이제 나랏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바치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땀과 눈물도 모자라, 이제는 우리의 피마저 전부 바치길 바랍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아니요!!!”
“부당하다!!!”

광장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여든 군중들은, 분수대 위에 올라선 한 여자의 발언을 집중하여 경청하고 있었다. 여자의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끝날 때마다 이에 동조하는 외침들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나랏님은 가엾은 우리들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합니다. 대의를 위해 높으신 분들이 고귀한 희생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습니다! 희생하는 것은 높으신 분들이 아닌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적군의 칼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만들어낸 승리. 그 승리는 한낱 피 묻은 승리일 뿐입니다!”

여자는 꽉 쥔 주먹을 높이 들고, 군중을 향해 힘차게 발언을 이어갔다.
그때, 카엘은 문득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눈에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붉은 석양빛에 물든 갈색 머리칼, 날카로운 눈매와 강한 의지가 담긴 반짝이는 두 눈.
처음 보았을 때보다 키는 좀 더 컸지만, 그녀는 분명히 어릴 적 성의 부엌에서 만난 바로 그 ‘소녀’였다.
이 예상치 못한 재회에 카엘은 적잖이 당황했다.

‘어째서 그 소녀가 이곳에…?’

그가 잠시 여자를 바라보는 사이, 갑자기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사들이 이리로 오고 있다! 어서 자리를 피해!”

외침이 끝나자마자, 광장 일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군사들을 피하고자 군중들은 제각기 흩어지기 시작했고, 밀려드는 사람으로 인해 골목엔 일대 혼잡이 벌어졌다.
혼잡한 가운데, 카엘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군사가 밀려온다면 가장 먼저 체포를 당하는 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왕명을 이행하기 위해선 주동자를 체포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왜인지 그의 마음은 그녀가 체포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어째서 그녀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녀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진심을 다해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다.
시선에 예의 찰랑이는 갈색 머리칼이 들어오자, 그는 다급히 그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한 골목이었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 파묻힌 골목 곳곳엔 때에 전 넝마가 널려 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쾌한 냄새가 섞인 탁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골목에 웅크려 떨고 있는 병자. 팔이나 다리를 잃고 망연히 주저앉아있는 사람들. 공포에 질린 눈으로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는 사람. 이끼가 낀 더러운 돌벽과 하나가 된 듯 더러운 얼굴로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
그는 이런 곳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아니, 영지에 이런 곳이 있다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매일 영지 시찰을 다니고 종종 성 밖 나들이도 즐겼던 그지만, 이런 광경은 난생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카엘은 자신도 모르게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는 우두커니 자리에 섰다.
그가 입은 화려한 갑옷과 대비되어, 안 그래도 초라한 골목은 더없이 서글프고 비참해 보였다.

“기어이 여기까지 행차하셨군. 도련님.”
“…!”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불현듯 카엘은 정신을 차렸다.
골목에 깊게 드리운 그림자 너머에서 서서히 모습을 여자는, 꼿꼿이 서서 매서운 눈으로 충격에 빠진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너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나.”
“그래, 도련님. 아까 광장에서 한눈에 알아봤어.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변함없이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더군. 어릴 때와 똑같이.”
“… 그렇군. 여긴 어디지?”
“‘빈민굴’이야. 이 영지에서 가장 은밀한 곳에 위치해있지. 여러 이유로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이 이곳에 모여 지내고 있어. 고고하신 영주 님도 이곳만큼은 손대지 않아. 이 세상엔 낙오자들을 받아낼 곳도 필요한 법이니까.”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상황에 어울리진 않지만, 카엘은 문득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 너는 광장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옳은 일’을 하고 있었어. 사람들이 무분별한 군대 징집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지.”
“무분별한 군대 징집…?”
“그래. 벌써 몇 번째야.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쟁을 거듭하는 것. 덕분에 민중들의 삶은 점차 피폐하게 변해가고 있어. 그러니 누군가는 나서서 이 고리를 끊어야만 해.”
“… 하지만….”
“자, 따라와. 도련님.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

여자는 카엘을 향해 고갯짓한 후, 골목의 어둠 속으로 앞장섰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카엘은 천천히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미로처럼 얽힌 복잡한 길을 따라가자, 골목의 입구에서보다 더욱 허름한 골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여자가 다 쓰러져가는 한 건물의 문 앞에 멈춰 섰다.

“여긴….”
“… 아무 말 말고 지켜봐.”

여자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카엘은 그만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테레즈 누나! 왔구나!”
“테레즈 언니!”
“그래, 얘들아. 나 왔어.”

문 너머엔 어린아이들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모두 신체 부위가 조금씩 결핍되어 있었다.
사지가 없어 벽에 기대어 있는 아이,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 목발에 체중을 실어 절뚝대며 뛰어오는 아이. 전신에 상처를 입은 듯 붕대를 칭칭 휘감고 누워있는 아이.
그러나, 자신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이들은 저마다 해맑게 웃으며 여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자, 얘들아. 많이 배고팠지. 여기 먹을 거 가져왔어.”
“와, 와! 신난다!”

여자가 허리춤의 보따리를 풀어놓자, 아이들은 순서에 맞춰 저마다 빵이나 과일을 집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
배고픔만 간신히 달랠 적은 양의 음식을 놓고도 아이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고 행복해 보였다.
“천천히 먹어. 체하면 큰일이니까.”

부드럽게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여자는, 고개를 돌려 카엘을 바라보았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는 원망이나 비난 같은 건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에겐 그 눈빛이 무엇보다 사무치게 아팠다.

“… 이 아이들은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고아야. 몸이 성치 않아서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지. 오래전부터 난 이런 아이들을 거두어서 돌보고 있었어. 전쟁통에서 고아로 혼자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무도 잘 아니까.”
“난…, 난 몰랐어….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그렇다면 똑바로 봐 둬. 네가 살아가는 세상은 바로 이런 곳이야.”
“…….”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카엘은 그 자리에서 목놓아 울었다.
슬픔으로 일그러진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은 그의 얼굴을 삽시간에 뒤덮었다.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잔잔한 호수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원래라면 그랬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 그의 안에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거대한 파도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신에겐 사람들을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어떤 것도 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대의나 이상을 추구하는 동안, 누군가는 부모를 잃고 신체를 잃고 비참한 삶을 견뎌내야만 했다.
문득 그의 기억 속에 어린 소녀의 차갑고 매몰찬 목소리가 떠올랐다.

'... 내 마음을, 네가 이해한다고?'
'넌 아무것도 몰라. 잘난 도련님.'

그는 이러한 상황이 되고 나서야, 그 말에 담긴 무게를 깨닫는 자신이 싫었다.
오로지 자신의 삶 밖에 모르는 무지한 천치. 가증스럽고 위선에 가득 찬 존재.
그것이 바로 자신의 본질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바로잡을 기회가 있어.”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에게 다가가, 여자는 말했다.

“’저항군’에 합류해서, 함께 세상을 바꿔 나가자.”
“… 뭐라고…?”
“우리 저항군은 민중의 편이 되어 불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존재해. 더 이상 고아나 전쟁의 피해자들이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 뜻있는 동지들을 모아 조직했지. 아직은 작은 세력이지만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어.”
“저항군….”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이제는 진실을 깨닫고 옳은 일을 위해 나설 차례야.”

결연한 눈빛으로, 여자는 카엘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우리와 뜻을 함께하겠어?”
“…….”

흐려진 두 눈으로, 카엘은 그녀의 굳은살 배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은 귀족이자 영주의 아들. 게다가 주군 앞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으며, 불온한 세력을 타도할 어명을 띄고 온 참이었다. 그와 그녀는 절대로 한 편이 될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이 비참한 세상을 바로잡는 것'뿐이었다.

‘네가 타고난 그 재능과 힘을 원 없이 꽃피워, 더 크고 원대한 가치와 미래를 보는 데 사용하거라.’

‘그래. 지금이야말로… 나의 무지와 과오를 바로 잡을 기회야.’

마침내, 그는 그녀가 내민 손을 있는 힘껏 잡았다.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어. 부디, 나를 옳은 길로 이끌어줘.”
"… 잘 선택했어."

그녀는 손을 잡아 주저앉은 그를 일으켰다.
그리곤 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저항군의 리더, ‘테레즈’. 저항군에 합류한 걸 진심으로 환영한다. 동지.”

날이 밝자, 그는 즉시 왕궁으로가 거짓 보고를 올리고 사건을 무마시켰다.

영지에서 보고 들었던 일은 그저 단순한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어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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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로부터 카엘은 왕을 지키는 ‘근위대 기사’로서, 한편으론 ‘저항군’의 조직원으로서 이중생활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테레즈와의 논의 끝에, 그는 저항군 내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기로 했다. 엘노바의 귀공자, 영주의 아들이 불온한 세력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저항군이 위험 요소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카엘은 언제나 복면 차림으로 동지들과 어울렸다. 짓궂은 누군가가 복면을 벗기려고 하면, 얼굴에 큰 흉터가 있어서 벗지 못한다고 둘러댔다. 그래서 저항군의 동지들은 그를, 얼굴의 상처 때문에 집에서 겉도는 어느 귀족 집안의 반항아 정도로 여겼다.
저항군 ‘목소리’는 민중들이 날이 갈수록 가혹한 정치를 펼치는 왕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으로, 리더 테레즈를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점차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구성원은 카엘을 제외한 대부분이 평민과 약자들이었다.

카엘의 합류 이후, 저항군은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궐기를 이어가며 사람들에게 왕의 실정과 전쟁의 무용함을 알리고, 부당한 수탈이나 무분별한 징집이 이루어지면 조직적으로 나서서 저지하기도 했다.
그들은 왕의 실정과 전쟁으로 발생하는 고통과 책임이 오롯이 민중에게 전가되는 현상을 비판하고, 신분제가 낳은 수많은 불합리함과 모순에 저항했다. 가장 낮은 자의 ‘목소리’가 닿을 때까지, 그들은 불의에 저항하는 활동을 이어가고자 했다.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온 카엘에 있어, 저항군의 삶은 매 순간순간이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여러 계층의 동지들과 교류하고 함께 저항 활동을 하며, 왕궁이나 성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수많은 경험과 지식이 그의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나갔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그는 이제 그동안 느끼지 못했거나 잘 몰랐던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나가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는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아주 많았다. 풍요의 이면에는 언제나 짙은 그늘이 있었고, 그 안에는 각양각색의 어려움을 견디며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려한 왕궁이나 자신의 성을 거닐 때마다, 그는 일전에 마주했던 비참한 골목을 떠올렸다. 그가 귀족으로서 누리던 모든 것이 사실은 신분 제도의 부조리함 그 자체이며, 살아가면서 수없이 가슴에 새겼던 가르침 또한 귀족들의 오만에 불과했다.
특히 왕을 보필하며, 그는 왕과 귀족이 민중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단순하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입는 피해를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에 대해 깜짝 놀랐다. 곁에서 왕을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내면에 생겨난 회의감은 점차 커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믿어오던 것과 달리, ‘왕’과 ‘아버지’는 결코 백성을 위하는 위대한 ‘영웅’ 같은 게 아니었다.
반대로 리더 테레즈는 달랐다.
비록 빈민가 출신 하층민에 가진 것 하나 없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당당했다. 냉철한 판단력과 강인함을 가진 그녀는, 결코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며 그 어떤 벽에 부딪혀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깊은 동정심을 바탕으로 언제나 낮은 곳을 돌아볼 줄 알았다. 설령 실책을 범하더라도 대의를 방패로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녀와 함께하며, 카엘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진정한 영웅의 조건은 높은 신분, 뛰어난 재능 따위가 아니었다.
옳은 가치를 위해 올곧게 나아가며, 선택의 순간 옳은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영웅의 조건이었다.

카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저항군의 활동을 지원했다. 복면 뒤에 숨어 전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신분과 기사의 직위를 최대한 이용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지들을 감쌌다. 카엘의 저항군 합류 시기와 맞물려, 늙은 국왕은 연이은 실정을 범하기 시작했다.
민심을 돌리기 위해 무리한 전쟁 선포가 이어지고 이로 인해 민중들의 고통도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배가되었다. 처음엔 저항군을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의적’ 정도로만 생각하던 민중들은 점차 저항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같은 외침을 연호했다. 저항군의 세도 조금씩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했다. 게릴라성으로 일어나던 행동과 궐기는 어느 새 주기적인 행사가 되었고, 이 모든 저항 활동의 경위와 결과는 민중들의 입을 타고 흘러가 왕국 전역으로 천천히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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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최근 백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늘어선 각 분야의 관료들과 왕을 둘러보며, 엘노바 백작은 나지막이 운을 띄웠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예, 폐하. 왕국 곳곳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각지에서 공물을 바치길 거부하고 군대 징집에 항의하는 사태가 이어지는가 하면, 아이들은 심상치 않은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다닌다고 합니다.”
“… 뭐라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 모든 게 아무래도 곧 ‘반란’이 일어날 조짐 같습니다.”

반란이라는 말에, 국왕의 얼굴은 일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곁에 서서 왕을 호위하고 있던 카엘은 왕이 분노로 옷자락을 꽉 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반란의 배후는 어떤 자들이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반란을 꾀했을 리가 만무하니…. 지난번 그 후작 일파의 잔당이 백성들을 뒤흔들기라도 한단 말이오?”
“아닙니다. 폐하. 자신들을 ‘저항군’이라고 부르는 반란 세력이 그 배후입니다.”

백작이 답이 끝나자, 카엘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순간,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가 돌연 아버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저항군은 평민과 하층민으로 구성된 반란 세력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움직임은 모두 저항군이 주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전쟁 반대와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며 무지몽매한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초기엔 오합지졸 수준의 세력이었지만 최근엔 급격히 세가 늘어났다고 하지요.”
“감히…, 이 배은망덕한…. ‘저항군’이라고…? 내 한평생 저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걸며 희생한 것은 모르고 감히 반란을….”

진노한 왕은 말끝을 흐린 채 머리를 짚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저항군이란 녀석들은 백작의 엘노바 영지를 거점 삼아 활동하고 있다고 하지요?”

조심스레 한마디를 보탠 것은, 바로 백작의 오랜 정적이었다.

“그 뛰어난 전쟁 영웅이 영지 내의 일 처리 하나 못하는 것이 영 이상하지 않습니까. 혹시 백작께서 그들을 감싸고 묵인하고 있던 것은 아니신지?”
“…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그들을 단속하지 못한 책임은 인정하나, 내가 반란을 꾀했다고 말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소!”
“그렇다면 왜 폐하께 엘노바 영지가 저항군의 거점이라고 똑바로 고하지 않습니까! 켕기는 것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까?!”

어느새 두 사람은 왕을 중심에 두고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때, 불호령 소리가 장내에 가득 울렸다.

“경들은 그쯤하시오!”

진노한 왕의 일갈에, 언성을 높이던 자들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경들의 언쟁 덕분에 마음을 굳혔소. 사흘 후, 나는 엘노바 영지로 군사를 이끌어 그 반란군의 수괴들을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할 것이오. 그리고 그 길에, 엘노바 백작이 선봉에 함께 설 것이오.”
“폐, 폐하…!”
“왜 그러시오, 백작. 무슨 문제라도 있소?”
“…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왕이 직접 백성에게 칼을 겨눌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소탕은 제가 직접 하게 해주십시오.”
“경은 내가 직접 나서는 게 부담스러운 것이오? 아니면 정말로 ‘저항군’을 비호하려는 것이오?”
“… 폐하.”

너무도 완고한 주군의 태도에, 백작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말은 차마 꺼내보지도 못한 채로 이내 그는 왕의 결정을 수긍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카엘의 마음 또한 깊은 좌절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 아버님. 정말로 영지 사람들을 향해 칼을 겨누실 생각이십니까?”

카엘은 무거운 표정으로 왕궁을 나서던 백작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별수 있겠느냐? 폐하께선 호전적이신 분이다. 한번 뜻을 결정하시면 쉽게 무르지 않으시지.”
“…….”
“그에 더해서, 우리가 반란을 비호한다는 불명예까지 떠안을 순 없는 노릇이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폐하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나나 너, 그리고 가문의 미래에 있어서도 훨씬 좋은 선택이야.”
“하지만, 아버지. 영지에 폐하의 군대가 당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저항군이라는 집단이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상…. 피를 흘리는 것은 낮은 곳에 있는 선량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에겐 영지의 평화와 사람들을 지켜야 할 책임, 의무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닥쳐올 비극을 막기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카엘은 아버지를 향해 간곡히 호소했다.
그러나, 백작은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아들의 절박한 청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 아버님께서 폐하를 설득하지 못하신다면, 제가 직접 폐하를 설득하겠습니다.”
“그분을 자극하면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걸 그냥 둘 수는….”
“… 카엘.”

백작은 전에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아들을 타일렀다.
그리고 단호한 한 마디를 남기곤 홀로 마차에 올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받아들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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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와 동지들은 한데 모여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카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래서, 앞으로 사흘 뒤면 왕이 이끄는 군사가 영지를 습격한다는 말이야?”

“그래, 맞아. 어쩌면..., 저항군을 모조리 처단할 때까지 이곳에 오래 머무르게 될지도 몰라.”
“…….”

거대한 위기 상황에 당면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동지들의 낯빛은 전에 없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 언젠가 권력의 정점과 맞서야 할 때가 올 거라고는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 순간이 이런 식으로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걸.”
“젠장…. 우리도 우리지만, 이렇게 되면 저항군이 아닌 사람들도 피를 볼 게 뻔하잖아….”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술이나 마셔야겠군. 어차피 사흘 후면 다 죽은 목숨일 텐데. 안 그러냐, 세브?”
“아이고, 누가 주정뱅이 토마 아니랄까 봐.”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동지들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는 서로에게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그러나 농담 너머의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은 여전히 남아 그들의 가슴을 옥죄었다.

“… 다들 주목하도록.”

잠시 후, 특유의 힘 있고 담담한 목소리로 테레즈는 동지들을 향해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왕의 행차는 분명히 저항군에게 있어서도, 민중들에게 있어서도 커다란 위협이다. 그러나 나는, 이 위협이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한발 나아갈 좋은 기회.”
“……?!”
“다가올 이 충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충돌이 빚어낼 대규모 유혈 사태 또한 피할 수 없지. 당장 사흘 후, 내가 이 자리에서 다시 말을 할 수 있을지, 우리가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린 이대로 굴복하지 않아. 겁쟁이처럼 숨어서 내 한목숨만 무사하길 바라지 않는다고. 우리가 직접 나서서 민중들과 새로운 세상을 위한 희망을 지켜내야 해.
비록 우리들은 왕의 칼에 맞아 쓰러지더라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민중들의 가슴 속엔 불의에 항거했던 우리의 모습과 우리가 전하고자 했던 뜻이 영원히 남게 될 거야.”
“맞아.”
“그 말이 맞아!”

격려와 용기가 담긴 울림이 아지트를 메워 나가자, 점차 동지들의 눈동자에도 하나 둘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니, 동지들이여! 사흘 후 다가올 ‘최후의 저항일’을 대비하자! 검과 농기구를 들고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자! 우리의 피로 부당함을 널리 알리고 새 시대를 위한 희망을 심자!!!”
“가자!!!”
“싸우자!!!”
“최후까지 저항하자!!!”

다시금 투지에 불이 붙은 동지들은, 주먹을 하늘로 내지르고 저마다 함성을 지르며 서로를 격려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짙게 깔려 있던 죽음에 대한 공포과 두려움도 피어오르는 희망에 상쇄돼 서서히 옅어져 갔다.
단 한 사람, 카엘만이 비통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테레즈와 동지들은 ‘최후의 저항일’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뭐든 모으고, 자발적으로 행동에 나설 사람들을 모집했다. 같이 행동에 나서지 않더라도, 소중한 고향과 이웃이 짓밟히게 될 것을 안 영지의 사람들은 몹시 분노하며 기꺼이 저항군의 편에 서주었다.
덕분에 저항군은 이전보다는 조금 더 큰 규모로, 왕의 군대와 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승산이 없는 싸움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테레즈, 부탁이야. 내 얘길 들어줘.”
“도련님. 벌써 몇 번이나 했던 얘기야. 우리들은 목숨을 바쳐 끝까지 싸울 거야.”
“하지만, 왕의 군대는 수많은 승전 경험이 있는 노련한 군사들로 이루어져 있어. 저항군은 삽시간에 진압당하고 말 거라고.”
“그걸 모르는 게 아닌 거. 너도 잘 알잖아. 도련님.”

테레즈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카엘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엔 결코 마음을 돌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카엘. 넌 이중생활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고 언제나 우리와 뜻을 함께했지. 넌 나의 소중한 동지야. 우리가 다시 만났던 그 밤부터 나는 네 가슴에 품은 뜻을 한 번도 의심치 않았어.”
“…….”
“하지만,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 거야. 네가 기사인지 저항군인지. 다가올 그 날, 네 아버지 곁에 설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곁에 설 것인지.”
“… 테레즈.”
“네게 우리의 곁에 서라고 강요하진 않겠어. 네 입장에선 친아버지와 전우들을 향해 칼을 겨누는 거나 마찬가지 일 테니까. 원한다면, 저항군을 떠나도 좋아.”

괴로워하는 카엘을 보며, 테레즈는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마웠다. 동지. 함께해서 영광이었어.”

카엘은 테레즈에게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테레즈를 등진 채 빈민가의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것,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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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결전의 날을 앞둔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여느 때였으면 조용히 잠에 들었을 엘노바 성은 왕과 그의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한 채비를 위해 여전히 환하게 불이 밝혀 있었다.
밤이 깊어 갈수록 카엘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해져만 갔다. 극심한 긴장감에 그는 도저히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조용히 성을 빠져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요동치는 그의 마음과 다르게, 밤하늘은 언제나처럼 잔잔한 모습 그대로였다. 차가운 밤공기조차도 그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주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테레즈와의 작별 이후, 카엘은 더 이상 저항군을 찾지 않았다.
대신 그는 끊임없이 그의 아버지를 찾아가, 예정된 비극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어떤 일도 그가 원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은 파멸의 일직선 위를 달리고 있었다.

카엘은 줄곧 테레즈의 말을 떠올렸다.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 거야. 네가 기사인지 저항군인지.’
‘다가올 그 날, 네 아버지 곁에 설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곁에 설 것인지.’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한없이 애매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었다.
귀족이면서 민중의 편에 서고, 민중의 편이면서 여전히 타고난 신분을 버리진 못한 자신.
저항군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이중생활을 유지해왔지만, 사실은 내심 선택의 순간을 유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사실은 그 무엇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순진해 빠진 자기 자신을 향해 그는 뼈아픈 자문을 던져야만 했다.

그는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없는 고민 끝에도, 여전히 그는 누구의 옆에 서야 할 지 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양극단에 선 그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왕과 아버지의 편에 서면 동지들과 선량한 사람들이, 동지들의 편에 서면 소중한 가족이 피를 볼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온전한 누군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서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꼭 누군가가 되어야만,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귀족과 민중. 기사와 저항군.
고위 귀족의 자제. 영지의 후계자.
돌이켜보면 그의 이름 앞엔 언제나, 그 자신을 앞서서 정의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너무도 당연했기에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던 그 호칭들.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는 그 호칭이 만들어낸 틀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을 내렸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혼란스러웠던 그의 마음은 차츰차츰 맑아지기 시작했다.
귀족과 민중. 기사와 저항군.
그 중간에 있는 자신이기에 할 수 있는 옳은 일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별은 하나둘 모습을 감추고 지평선 너머엔 붉은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고민이 아니라 행동에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누구의 피도 흘리게 두진 않겠어.’

굳은 다짐 아래, 카엘은 전장에 나설 채비를 마친 후 말 등에 올라 서둘러 광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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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는 스산한 전운이 감돌았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자들은 중앙의 분수를 기점으로 하여 나란히 대치 중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적의에 찬 시선과 기묘한 적막만이 두 진영 사이를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작은 신호라도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갈 기세로, 그들은 전투태세를 갖춘 채 때를 기다렸다.

먼저 적막을 깬 것은 바로 왕의 옆에 나란히 선 백작이었다.

“반란군은 들어라! 폐하께선 자비로운 분이다. 아무리 나라를 어지럽히는 반란 세력일지라도 폐하께선 넓은 아량으로 품고자 하신다. 반란군은 지금 즉시 투항하여 그 귀중한 목숨을 보전하고 다시 평온한 일상을 맞이하라!”

저항군과 민중들을 향해 백작이 마지막 경고를 날리자, 말 위에 올라서서 이를 지켜보던 왕은 자신의 자비로움을 과시라도 하듯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매서운 시선으로 둘을 노려보던 테레즈는 마침내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우습지도 않은 말을 하는구나. 자비와 아량을 베푼다는 자가, 자기 왕국의 백성을 도륙하기 위해 이토록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온단 말인가? 우리는 반란이 아니라 저항을 하기 위해 여기 모여 있다. 지금 자행되고 있는 모든 불의에 우리들은 끝까지 저항하여 맞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불의에 순응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굳은 의지를 담아 테레즈는 거대한 적을 향해 당당히 응수했다.
그 꺾이지 않는 기세는 왕의 심기를 한껏 휘저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이 정녕 너희의 뜻이라면….”

왕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허리춤에 찬 보검의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그 모습을 본 왕의 군사들 또한 낫과 갈퀴 같은 초라한 농기구와 녹슨 망치, 조악한 검으로 무장한 남녀노소를 향해 저마다 검 끝을 겨누었다.

그때, 저편 어디선가 다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멈추시오!!! 부디 검을 거두시오!!!”

그리고 잠시 뒤,
왕의 군대와 저항군의 사이로 거대한 검창과 검은 천 조각을 든 푸른 갑옷을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아버님.”
“너, 너는…, 카엘이 아니더냐….”

카엘이라는 이름, 갑옷에 새겨진 천마와 마주한 왕의 군대는 일순간 술렁임에 휩싸였다.
그들은 왕실 근위대의 기사이자 영주의 아들이 왕의 편을 들지 않고 중립에 서서 오히려 검을 거두길 간청하는 이 상황이 몹시도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물론, 카엘의 등장에 놀란 것은 비단 왕의 군대뿐만이 아니었다.
저항군 진영은 왕의 군대보다도 오히려 한층 더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카엘은 왕과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번엔 저항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동요하는 동지들의 모습은 물론, 그 담대한 테레즈조차도 그의 등장을 전혀 예상치 못한 듯 두 눈을 한껏 치켜뜨고 있었다.

“폐하, 부디 민중을 향한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어째서 네가 무도한 반란 세력을 감싸고 돈단 말인가. 그대는 내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아니더냐. 감히 주군을 배반하려 드는 것이냐?”
“… 그렇습니다.”
“……!!!!!!”

그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손에 들린 검은 천을 높게 쳐들었다.

“보십시오. 저는 그동안, 이 복면 속에 정체를 감추고 이들과 함께 저항 활동을 해왔습니다. 저는 여기 있는 ‘저항군’과 뜻을 나누는 동지입니다. 이들이 꿈꾸는 세상이 곧 제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뭐, 뭐라고…!!!!”
“네가 ‘저항군’이라고…!!!”

카엘의 고백에 경악한 왕과 백작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앞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명예와 신의도 모르는 배신자…. 네가 그러고도 기사라고 할 수 있는가?”
“폐하. 저는 옳은 일을 하는 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든 걸 잃은 불명예스러운 배신자가 되더라도, 선량한 자들의 피를 흘리는 것만큼은 막을 것입니다.”
“… 감히 백성들의 면전에서 이 나를 모욕하다니. 과연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여봐라, 뭣들 하느냐! 어서 이 배신자를 처단하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우왕좌왕하며 카엘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병사들이 자신에게 근접하지 못하도록 날렵한 몸짓으로 검창을 넓게 휘둘렀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폐하.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충돌 만은 막고자 여기에 있습니다. 이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면 폐하를 향해 창을 겨누는 것도 불사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 뭐, 뭣이…."

시시각각 과격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면서도 조금의 동요조차 없는 카엘의 모습에, 이제 왕은 완전히 기가 질리고 말았다.

“… 어째서, 왜 그렇게까지 나를 배신하려 드는 것인가…? 내 너를 그리도 아꼈거늘….”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들이 꿈꾸는 세상을 저 또한 꿈꾸기 때문입니다.”

카엘은 강하고 힘 있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 저는 늘 세상의 화려한 면만 보고 자라왔습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하며 세상에 수많은 어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기 이 자들은 폐하나 아버님, 저 같은 자들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하는 그 어둠을 있는 그대로 포용합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들을 귀히 여기기는커녕 반란군 취급을 하며 기어이 피를 보고자 하십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헤아릴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선 이것이 정녕 정의라고 생각하십니까?”
“…….”

“오늘 이 전장에서 폐하의 승리는 너무도 자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의로 거머쥔 일시적인 승리일 뿐. 무력으로 누르려 할수록, 여기 이들과 같은 마음을 지닌 또 다른 자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항거할 것입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마음은 마른 들풀에 번져가는 불처럼 겉잡을 수 없어질 것입니다.”
“… 젊은 혈기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구나….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어….”

“어떻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부디 칼을 거두고 군사를 물리고 이만 영지를 떠나주십시오.”

올곧게 뻗어 절대로 꺾이지 않는 강력한 의지.
그리고 그 강력한 의지 너머에 서서 자신을 향해 분노하고 있는 수많은 시선.
아까까지만 해도 하찮게 여겼던 그 모든 게 일시에 의식 속으로 스며들자,
왕은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 돌아가자.”
“폐하…!”

갑작스러운 주군의 반응에, 백작은 깜짝 놀라 탄성을 내뱉었다.

“… 군사를 돌리게. 오늘 나는 이들과 싸울 생각이 없네.”
“… 폐하….”
"…….”

왕은 긴 침묵 끝에 말을 돌려 광장을 벗어났다. 그러자 왕의 군사들 또한 서둘러 그 뒤를 따라 하나 둘 자리를 떠나갔다.
카엘과 민중들은 광장 한쪽에 빽빽이 들어찼던 인파가 사라져가는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귀청이 떨어질 만큼 강렬한 환호성이 승리를 축하하듯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만세!!!”
“해냈다!!! 해냈어!!!”
“이야!!! 살았다, 살았어!!!”

사람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저마다 안도와 기쁨을 나누었다.
저항군의 동지들 또한 쾌재를 부르며 민중들이 얻어낸 작고도 커다란 승리를 만끽했다.
우레와 같은 소리에 정신이 든 카엘은, 자신이 왕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긴장이 해소되지 못한 그의 심장은 아직까지도 가파르게 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걸 바쳐 지켜냈던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 이걸로 됐어.”

환희에 찬 열띤 환호 소리를 들으며,
그는 기뻐하는 이들을 등지고 조용히 돌아서서 광장의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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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대로 아무 피도 흘리지 않은 채 마무리된 '최후의 저항일'.
그날 이후, 저항군과 민중들은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왕에게 반기를 든 카엘만은 상황이 달랐다.
왕실 근위대 기사의 의무를 저버리고 반란 세력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그는 사형을 당할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나 아버지인 백작이 끊임없이 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한 결과, 남은 삶 동안 영원히 엘노바 성 내의 옥사에서 근신하는 것으로 카엘은 그 죄를 대신하게 되었다.

차가운 돌벽 안에 갇혀, 카엘은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걱정했다.
그날 자신이 거머쥐었던 승리는 거대한 화염을 두고 코앞의 불씨를 덮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를 알 수 없을 뿐, 왕의 분노는 더 크고 더 무자비한 형태로 언제든 민중들을 덮쳐올 수 있었다.
한 치 앞 만을 내다본 자신의 섣부른 행동 때문에 더 큰 난국이 찾아올 것을 염려하며,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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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철컥.

귓가에 거슬리는 소리에 카엘은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종종 생쥐가 돌바닥을 뛰어다니곤 했기에, 이번에도 그는 쥐가 낸 소리일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수 분 동안 이어진 그 소리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쥐가 아니라 너무도 그리웠던 그의 ‘동지’였다.

“테레즈…. 네가 어떻게 여길….”
“이곳에서 널 구출하기 위해 왔어. 도련님.”

먼 옛날 언젠가처럼, 결연한 눈빛으로 여자는 카엘을 향해 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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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테레즈는 엘노바 성 인근의 구석진 곳으로 피신해 잠시 한숨을 돌렸다.

“그런 곳에 갇혀 있어도, 여전히 곱상할 수 있구나.”

테레즈는 카엘의 멀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농담을 던졌다.
그 서투른 말솜씨에, 카엘의 얼굴엔 실로 오랜만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동안, 저항군에 별다른 일은 없었어?”
“그래. 네가 승리를 안겨준 날 후로, 우리를 탄압하거나 저지하려는 별도의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어.”
“… 정말 다행이다.”
“그나저나, 너는 괜찮아?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했지만…, 그 대가로 모든 자유를 잃었잖아.”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는걸. 난 괜찮아. 그보다….”

카엘은 그동안 자신 안에 쌓아두었던 고민을 그녀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정리하자면, 네 행동이 더 큰 화를 불러올까 염려된다는 이야기군.”
“… 그래, 맞아.”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마, 도련님. 네가 갇혀있던 그 짧은 사이, 이 왕국은 아주 크게 변했으니까.”
“변했다고…?”
“이 영지에서 있던 일이 세상에 알려지고, 왕국 전역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거센 저항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어. 자신들이 같은 방법으로 언제든 짓밟힐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지. 아무리 왕이라도 이렇게 많은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면 그들을 어찌할 수 없어. 민중을 모조리 몰살하지 않는 이상 말이야.”

테레즈의 말을 듣자 비로소 그의 마음에 강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의 가슴은 자부심으로 벅차올랐다.

“그날 네가 보여준 용기가 많은 이들의 가슴에 꺼지지 않을 불씨를 심었어. 우리 저항군은 네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빚을 졌지. 넌 진정한 영웅이야.”
“… 난 ‘영웅’이 아니야. 너희처럼 그저 내가 선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

카엘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화답하듯 테레즈도 카엘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도련님. 앞으로의 계획은 뭐지?”

그녀의 물음에, 카엘은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도망자 신세가 되었기에 더는 이전 같은 삶을 누릴 순 없었지만 그의 앞에는 더욱 크고 무수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신중히 고민을 거듭한 끝에, 카엘은 그녀에게 자신의 결심을 전했다.

“나는 왕국을 벗어나,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여정을 떠나겠어.”
“너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여정이라고?”
“그래. 이제와서 돌아보니 내 인생의 대부분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 같아. 신분이니 명예니 하는 허상에 얽매이고 타인의 뜻을 마치 나의 뜻 인양 받들며 살아왔지. 이제는 오롯이 나 자신에 충실한 삶을 살며, 내 안에 남은 해결되지 못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자 해.”
“좋은 생각이네. 도련님. 그럼, 더 지체할 것도 없겠어.”
“응.”

대화를 마치고, 그는 홀로 성으로 향해 자신의 정든 방에 당도했다.
주인의 오랜 부재에도 방안은 여느 때처럼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밀려오는 감상을 떨치며 카엘은 재빨리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문밖을 나서기 전, 그는 문득 자신의 마음에 작은 망설임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가족에게 작별 인사가 담긴 간단한 편지를 남겼다.

침구 위에 가지런히 편지를 올려놓은 그는, 마침내 익숙함에 작별을 고하고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신성이 눈부시게 빛나는 밤.
그는 동지의 배웅을 받으며 새로운 여정에 나섰다.
이제 그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신분, 명예는 물론 목적지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는 홀가분한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풋풋한 흙길을 밟으며, 카엘은 자신의 앞에 놓인 길을 따라나섰다.
머리 위로 넓게 드리운 밤하늘에는,
그가 태어나던 날 밤처럼 눈부신 별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글: 시트롬 / 그림: kingseo,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