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kalok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카이만 강은 대륙에서 가장 더운 지역을 가로지르는 강이다.
연중 비가 많이 오는 이 지역에는 빽빽한 수목이 들어차 거대한 우림을 만들었고, 카이만 숲이라는 이름보다 녹색 미궁이라는 별칭이 더 잘 어울렸다.

야자, 코코넛, 마호가니 등 두꺼운 잎의 나무들이 하늘을 뒤덮을 만치 자라나 모든 햇볕을 가려버린 탓에 지면은 항상 어두컴컴했으며 지면에는 키가 작은 나무들과 함께 덩굴이 얽히고설켜 있어 조금만 주의를 소홀히 하면 길을 잃게 십상이었다.

이곳 카이만 우림에 면한 그 주변의 인간 영토에서는 신비로운 종족 자이언트에 관한 전승이 많았다.
자이언트의 전승을 노래한 '숲과 전설의 거인'에는 그들에 관한 내용이 많았는데, 그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자이언트들은 그 어떤 종족보다 먼저 이 세계에 도착했네.
그들은 덩치가 곰만큼 크고 지금의 인간보다 몇십 배에 달하는 괴력을 소유하고 있었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신의 노여움을 샀다네.
그 대부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카이만의 숲 안에 지금도 생존자들이 살아 있다네.


하지만 자이언트에 관한 전승과는 달리 자이언트들을 실제로 보았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전쟁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들 사이에서 전승도 자이언트의 존재도 점차 흐릿해져 갔다. - 쿠궁. 쿠구궁. 쿵쿵

카이만 숲속으로 묵직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울림이었다.
숲의 동물들이 북소리가 나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북소리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우림의 깊숙한 곳에서 들려왔다.
그곳은 바로 자이언트 마을이었다.

마을의 광장에 모인 수십 명의 자이언트가 바위로 만든 북을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자이언트들의 북소리가 향하는 중심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네모 반듯한 무대가 놓여있었다.
자이언트들은 이 무대를 아레나라 불렀다.

아레나 위에는 자이언트들의 힘을 상징하는 거대한 주먹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레나에 선 자이언트들은 자신의 강인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했다.
북소리가 고조되고 함성이 쏟아졌다.

"자! 이제 마지막 싸움이오!"

아레나의 진행을 알리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자이언트들이 북소리를 한 층 더 고조시켰다.
그리고 북소리와 함께 다음으로 아레나에 오를 두 자이언트의 이름을 외쳤다.

"카록! 아쿰! 카록! 아쿰! 카록!"

아레나를 마주하듯 가부좌를 틀고 앉은 두 자이언트가 있었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소음 속에 앉아서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레나의 최종 우승 후보인 카록과아쿰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집채만 한 덩치를 자랑했지만, 아쿰이 더 덩치도 크고 우람했다.
아쿰의 허리에는 일족의 힘을 상징하는 벨트가 채워져 있었다.
아쿰은 지난 아레나의 승리자였고, 카록은아쿰의 벨트를 빼앗기 위해 토너먼트를 이기고 올라온 도전자였다.

"형제들이여! 시작하시오!"

시작을 알리는 외침과 함께 카록과아쿰을 연호하던 목소리가 멈추고 북소리도 잦아들었다.
아레나에 몰려든 모두가 두 자이언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카록과아쿰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아레나 위로 올랐다.
좌측으로 카록이 우측으로는 아쿰이 자리했다. 둘은 중앙까지 나아가 서로 두 주먹을 마주 댄 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눴다.
인사 또한 아레나의 전통 의식이었다. 인사를 마친 후 두 자이언트는 서로의 주먹을 한 차례 떼었다가 쿵 하고 부딪혔다.

그것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두 자이언트가 내지른 거대한 주먹이 한순간 교차했다. - 두 자이언트의 힘과 기량은 비등했다.
아쿰에게 유리한 순간이 있었고, 카록에게 유리한 순간도 있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버틸 체력과 승리를 향한 의지에서 승패가 갈렸다.
바닥에 쓰러진 아쿰을 제압하고 마지막까지 아레나 위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카록이었다.

"카록! 카록! 카록!"

자이언트들이 카록의 이름을 연신 외쳤다.

"축하하오! 형제여!"

아쿰이 허리에 감겨있던 벨트를 벗어 카록에게 건넸다.
카록이 공손하게 일족의 벨트를 받아 들었다.
다시 한번 환호성이 올랐다.
벨트의 착용자는 언제든 부족에게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아쿰이카록에게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두 자이언트 사이에 주먹 악수가 오갔다.
두 자이언트 모두 오늘의 승패를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승리를 조심하라. 승리란 짧고 취하기 쉽다.'

자이언트들은 힘을 기르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겨룰 뿐, 승리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카록과아쿰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호탕하게 웃으며 아레나를 내려왔다.
호전적인 아레나의 싸움판에 비하면 그 끝은 아주 조촐했다. 승자를 위한 노래는 없었다. 패자를 위한 비아냥도 없었다. 자이언트들의 마무리는 언제나처럼 균형을 중시하는 그들의 전통 노래로 마무리되었다.

아후나토툼마.
승리란 부질 없는 결과
힘은 곧 제물
전쟁은 신들의 노름판
형제여 무기를 거두오

아후나토툼마
승리란 자만에 찬 환상
힘은 곧 균형이라네.
전쟁은 신들의 덫
형제여 주먹을 거두오

아레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아레나가 진행되는 동안 소모된 식량창고를 다시금 채우기 위해 자이언트들의 수렵 기간이 시작되었다.
자이언트 마을의 작업은 모두 공동 작업이었고 벨트의 착용자가 된 카록이라 한들 예외일 수 없었다.

카록은 자신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사냥을 떠나던 중이었다.

마을 어귀를 지나던 카록은 작은 그림자가 마을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야생동물의 그림자는 아니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졌지만, 자이언트보다는 훨씬 작은 그림자였다.

카록은 의아했다.
자이언트 마을은 오랜 옛날부터 다양한 주술로 보호되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외지인이 숲을 헤매다 운 좋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카록은 의아해하며 그림자를 피해 숲길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림자는 점점 마을을 향해 다가왔다.
놀랍게도 숲길을 헤치고 나타난 건 작은 인간 여성이었다.

카록은 난생처음 보는 인간 여성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 빤히 지켜봤다.

얼핏 보기에 여성은 부상이 심각해 보였다.
여성은 갑주도 없이 누비 갑옷만 착용하고 있었는데, 이 누비 갑옷이 혈액으로 물들어 검붉게 보였다.
또한, 여성의 왼쪽 팔은 뼈가 부러진 것인지 축 늘어져 보였으며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힘없이 흔들렸다.

여성은 그나마 성한 오른쪽 팔로 칼 몸이 다 드러난 장검을 질질 끌고 있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이 검만큼은 놓으려 하지 않았다.

여성이 자신을 지나치기 전 카록은 숲길로 나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여성은 갑자기 뛰쳐나온 카록에도 놀라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성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마치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 안에 카록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비쳤다.
여성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리고 기절하듯 풀썩 쓰러져 버렸다.

카록은 갑자기 쓰러져 버린 여성을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결국 그녀를 안아 들고 마을로 돌아왔다. - 며칠 후, 여성이 카록의 집에서 눈을 떴을 때, 집 안은 마을의 모든 자이언트가 모인 듯 북적거렸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몰려든 마을의 자이언트들이었다.
여성은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향하고 있는 거대한 얼굴들을 보며 다시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드시오? 형제여."

수많은 자이언트들 사이로 카록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여성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카록과 처음 마주쳤을 때와 같은 생기 없는 눈으로 멍하니 사람들을 둘러볼 뿐이었다.

카록은 포기하지 않고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카록이라 하오. 반갑소."

여성은 그제야 카록을 바라봤다.
카록은 입 한가득 억지 미소를 띄웠는데 여성에게는 그 모습이 꽤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갑자기 여성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에 자이언트들이 당황하면서 카록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카록이 내민 어색한 손이 다가가자 여성은 그 손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제 이름은....... 아니스....... 에요."

여성의 이름은 아니스로 자신을 왕국 기사단에 소속된 수습기사라고 소개했다.
울음을 터뜨린 지 한 시간여 만의 자기소개였다.

카록은 자신과 자이언트들을 소개하고 그녀에게 어쩌다 숲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건......."

아니스는 불현듯 무언가 떠올린 것처럼 자리에서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무리해서 이야기하지 마시오. 형제여."

아니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알베른으로 가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돕겠소. 지금은 걱정하지 말고 쉬시오. 형제여."

카록은 금세 회복할 거라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니스는 카록의 손길이 고통스러웠지만, 카록의 호탕한 모습에 몸의 떨림이 조금씩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 그 날 이후 카록은 그녀의 주변을 지키며 그녀를 보살폈다.
그녀가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작은 집기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해 만들고, 채집이나 사냥을 나갈 때면 항상 아니스의 몫까지 챙겼다.

다른 자이언트들도 아니스를 친절히 대했다.
회복에 필요한 약과 식량을 나누어주고 그녀가 빨리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좋아했어요."

아니스는 점차 자이언트 마을과 카록이 익숙해졌다.
카이만 숲에 어둠이 내리면 카록은 집으로 돌아와 아니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인간의 삶은 자이언트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으면서도 흥미로웠다.

"카이만 숲에 자이언트 마을이 있다고 알려주신 것도 할머니예요."

아니스가 마을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할머니 덕분이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굉장히 오래된 전승까지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니스는 주술을 피해 자이언트 마을을 찾아내는 정확한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카록은 이 방법을 인간들 모두가 아는지 물었다.

"후후. 아니요. 저 말고는 아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에요."

자이언트의 전승을 기억하는 것조차 할머니가 마지막이었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은 것은 아니스뿐이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아니스가 전승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 알베른에는........"

아니스는 또다시 슬픈 눈빛을 지었다.
카록은 그녀가 '알베른'을 언급할 때면 그런 눈동자를 짓는다는 것을 알았다.
슬픈 사연이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직접 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어 아니스가 이야기해주기를 기다렸다.

"이제 너무 늦었소. 회복하려면 어서 주무시오. 형제여."
카록은 조용히 이야기하고 한편으로 가서 아니스에게 등을 보인 채 가로누웠다.
아니스는 그런 카록을 보면서 혼자 조용히 웃었다. - 아니스의 왼팔이 회복되었을 무렵, 카록은 그녀의 검술 상대가 되어주었다.
그녀가 무인으로서 얼마나 뛰어난지 꼭 보고 싶다며 카록이 제안한 것이었다.

아니스의 장검에 맞서 카록은 팔 보호대 하나만 착용한 채 맞섰다.
아니스는 카록의 무방비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 그러다 검에 맞기라도 하면......."

잔뜩 움츠러든 그녀는 눈에 띄게 경직된 검술을 보여줬다.

"껄껄. 괜찮소. 좀 더 힘을 실어 공격하시오. 형제여."

그리고 점차 아니스는 모든 것이 괜한 걱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카록은 그 큰 덩치와는 달리 너무나도 날렵하게 그녀의 검을 팔 보호대 하나로 막아냈다.
그녀가 온 힘을 다한다 한들 카록에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니스는 자신과 함께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모두 자신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카록의 움직임을 보면 그들 중 대체 누가 카록과 실력을 겨룰 수 있을까 싶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희망의 씨앗이 조금씩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카록과 검술 대련이 끝난 후 아니스는 카록에게 마을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왼팔은 완전히 나았고 검을 휘두르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카록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었다면 떠나시오. 형제여."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카록의 눈에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아니스는 그런 카록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망설였다.

"카록......."

아니스는 고민 끝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회동이 소집되고 아레나 주위로 마을의 모든 자이언트들이 모여들었다.
회동은 자이언트들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모두의 의견을 모으기 위한 절차였다.
다만 이번 회동을 요청한 것은 자이언트 일족이 아닌 마을의 손님인 아니스였다.

"저를 도와주세요."

아니스가 아레나에 올라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요청을 전달했다.
좌중이 귀를 기울여야 할 정도로 조용한 목소리였다.
자이언트들이 회동을 이끌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수많은 자이언트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알베른에서 마족들을 몰아내 주세요."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이 알베른이었다.

알베른은 카이만 숲 근처의 작은 인간 도시였다.
아니스가 태어난 도시이고 아니스의 할머니가 자란 곳이며, 그녀가 소속된 기사단이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이 알베른은 얼마 전 마족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마족의 지배하에 놓여있었다.
함락 당시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음은 물론이고, 아직도 많은 수의 사람이 포로나 노예로 수용되어 있었다.
아니스는 자이언트들이 마족들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구해주기를 바랐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고 긴 침묵이 흘렀다.
자이언트들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아쿰이 앞으로 나서며 아니스를 향해 외쳤다.

"미안하오! 형제여!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오! "

아쿰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잔뜩 찌푸린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힘의 균형을 지켜야 하오! 함부로 그 균형을 깰 수 없소!"

아쿰의 외침을 들은 자이언트들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자이언트들이 뒤늦게 나서며 아쿰의 의견에 찬성표를 던졌다.
아니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니스......"

카록은 이 광경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카록 자신도 균형의 수호와 아니스 사이에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니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이다.
그녀가 외쳤다.

"부탁드려요! 그 사악한 마족들은 사람들을 참혹하게 살해한 괴물이에요! 여러분도 도리와 명예를 중시한다면 제발!"

아니스는 눈물로 호소했다.
알베른의 공격에 맞서 그녀와 함께 지역을 수호하던 기사단원들은 마족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살아남은 기사단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카이만 숲에 들어섰지만, 마족의 끈질긴 추적이 이어졌다.
결국 마족의 추적과 거친 우림이 한 사람씩 그녀의 동료들을 빼앗아갔다.
그녀는 동료들의 마지막을 떠올린 듯 다시금 눈물을 쏟았다.

"슬픔은 이해하오. 형제여. 우리도 신들이 시작한 어리석은 전쟁으로 많은 형제를 잃었소."

아쿰이 묵념이라도 하듯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형제여. 그래서 우리는 더욱 전쟁에 들 수 없소. 그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오."

아니스가 말을 잊은 채 아쿰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 싸움에 발을 들이게 되면 균형은 더 크게 흔들릴 것이고 그때는 우리 모두의 생존마저 위협할 것이오. 자신의 욕심을 위해 다른 형제들까지 위험에 노출해선 안되오."

아쿰의 말에 아니스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이야기해도 아쿰을 중심으로 한 자이언트들의 마음은 바꿀 수 없을 터였다.

아니스는 카록을 바라봤다.
카록이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카록은 아니스가 카록의 집을 떠나 홀로 자이언트 마을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을 입구를 나가는 도중 아니스는 카록과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카록을 보고 싱긋 웃었다.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떠나는 아니스의 눈빛에는 이전과 다른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아니스가 떠나고 자이언트들의 삶은 다시 이방인이 없던 시절로 돌아갔다.
힘과 균형 그리고 전통을 중시하는 자이언트 마을이었다.
수렵하고 식량 창고를 채우고 다음 아레나를 준비했다.
자이언트들에겐 퍽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단 한 명, 카록만이 예외였다.
그녀가 떠나간 후 카록은 홀로 방안에 앉아 생각했다.

균형이란 무엇이고 전통이란 무엇인지 끝없는 자문이 이어졌다.

카록의 눈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자신의 팔 보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 팔 보호구는 카록이 가진 유일한 무구였다.
아니스가 마을에 오기 전에는 변변히 사용할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
카록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는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이 주먹은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 회동 소집을 위한 북소리가 울렸다.
이번에 북을 울린 것은 카록이었다.

자이언트들이 모이자 카록은 아레나 위로 올라가 대번에 인간의 싸움에 간섭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번에도 아쿰이 제일 먼저 나서 그를 말렸다.

"형제여! 저 세상 밖의 모든 전쟁은 신의 덫이오! 우린 전통을 수호해야 하오! 아니면 더는 균형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아쿰은카록에게 소리치며 작은 인간의 존재가 카록을 약하게 만들었다고 탄식했다.

"우리가 모르는 더 큰 균형이 이미 무너졌을지도 모르잖소!"

더 큰 균형이 이미 무너져있다.
그것이 카록이 내린 답이었다.
전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자이언트의 세상 안이든 그 밖이든 이미 균형은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
누군가가 눈물짓는 세상, 누군가가 고통받는 세상을 뜯어고치는 것이 균형을 지키는 의미일 터였다.

"하지만 형제여!"

아쿰이 다시 한번 카록을 설득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카록은 손을 벌려 아쿰을 제지했다.
이미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카록이 조용히 허리춤의 벨트를 떼어냈다.
그리고 벨트를 왼팔로 들어 올렸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일족의 벨트를 사용해 중대한 결정을 내리겠다는 신호였다.

"일족의 이름을 걸고 중대한 결정을 하겠소! 모든 일족은 나, 카록을 추방하시오!"

그렇게 외친 후 카록은 일족의 벨트를 아레나 위에 팽개치듯 버려두었다.
카록의 말과 행동에 자이언트 모두가 매우 놀랐다.

아쿰은 더는 카록을 말리지 못했다.
카록은 이미 전통에 맞추어 전통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셈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수호해야 하는 아쿰으로서는카록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 마을을 떠난 카록은카이만 숲을 빠져나와 가장 가까운 인간의 마을을 찾았다.
마을 내에서 아니스를 찾았으나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을 든 여기사의 모습을 설명해주어도 사람들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는 곧장 알베른으로 향한 것이 틀림없었다.

카록은 마음이 급해졌다.
사람들에게 알베른의 위치를 물었다.


카록이 알베른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난 후였다.
알베른의 도시 외벽은 마족 침공 당시 무너진 듯 사방이 통로처럼 뚫려 있었다.
폭약으로 벽을 무너뜨린 후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한 것 같았다.
카록은 그 덕분에 쉽게 알베른 내에 진입할 수 있었다.

알베른 중심부에서 거대한 횃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밝은 불빛이 일렁였다.
도시 중앙에 마족들이 모여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불길이 닫지 않는 도시의 외곽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본대는 이미 이동하고 소수의 인원만 도시에 남은 듯했다.

도시 안에 있는 집과 건물들 대부분은 모두 불에 타 무너져 내렸거나 기울어 있었다.
간간이 인간 또는 마족의 시체가 보였지만 아니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카록은 불길이 이끄는 대로 도시 중앙으로 향했다.

한때 도시의 중앙 광장이었을 공간이 이제는 마족들의 캠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광장의 분수대는 물줄기를 뿜는 대신 쓰레기를 태우는 소각장이 되어 있었다.
온갖 오물을 이곳에서 태우는 듯 불길 사이로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마족들은 이 불길을 중심으로 벌러덩 드러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몇몇 마족만 졸린 눈을 끔뻑거리며 앉아 큰 도움도 되지 않는 초병 노릇을 하고 있었다.

카록은 마족 캠프를 둘러보던 중 초병을 서고 있는 한 고블린이 낄낄거리며 장검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잡이에 기사단의 장식이 박힌 검집 없는 장검이었다.
카록이 보기에 그것은 아니스의 장검이 틀림없었다.

카록은 순간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아무런 계획 없이 광장에 뛰어들었다.
카록이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장검을 든 고블린이 아우성을 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마족어로 소리를 질러댔다.
모든 마족이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카록은 고블린을 향해 곧장 달려가 그를 걷어차고 장검을 빼앗았다.
고블린은 카록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져 바닥을 구르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록은 아니스의 장검을 확인했다.
함께 대련할 때마다 마주하던 아니스의 장검이었다. 장검을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몸을 일으킨 마족들이 카록을 경계하며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일사불란하게 카록을 에워싸고 한꺼번에 카록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록은 사방에서 다가오는 마족들을 모두 주먹 하나로 제압했다.
검도 창도 도끼도 그에겐 소용이 없었다.
날렵하게 파고들어 마족의 사지를 부러뜨리고 다른 마족에게 집어 던지거나 머리를 깨부수었다.

마족들은 카록이 자신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알고 광장의 더 안쪽에서 잠자고 있던 덩치 큰 마족을 잠에서 깨웠다.
잠에서 깬 거대한 몸집이 구시렁거림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흉측하게 생긴 머리가 둘이나 달린 오거였다.
오거가 몸을 일으키자 주위로 먼지들이 안개처럼 흩날렸다.

"뭐야. 또 린간이냐?"
"뭐야. 또 사냥감이냐?"

두 머리가 서로 다른 말을 내뱉으며 거대한 해머를 집어 들었다.
해머의 머리만 해도 카록의 몸집보다 컸다.

카록과 오거가 서로를 발견하고 마주 보았다.
다른 마족들은 기세에 눌려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카록은 그녀를 발견했다.

오거의 발치에는 쇠사슬과 말뚝의 뭉치가 많았다.
여기저기에 박힌 말뚝에서 이어지는 쇠사슬 끝으로 사로잡힌 인간들의 모습이 있었다.
건장한 사내부터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쇠사슬에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카록이 찾던 한 사람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는 아니스였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카록은 오거를 향해 뛰어들었다.
오거는 카록이 다가오는 것을 겨누어 해머를 들어 내리쳤다.

"내가 왔소! 형제여!"

카록은 해머를 피하지 않고 해머의 머리를 양팔로 받아냈다.
카록이 전신의 힘으로 오거의 힘을 받아들이자 카록의 발치를 중심으로 광장의 바닥에 균열이 갈 지경이었다.
한 번 해머를 붙잡히자 오거가 아무리 기를 써도 해머 자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록은 괴성과 함께 해머를 잡은 두 팔을 힘껏 꺾었다.
해머의 자루가 우지끈하고 끊어지며 카록의 손안에 해머의 머리가 들어왔다.
자루가 끊어진 해머의 머리는 자신의 키보다 큰 거대한 기둥과 같았다.

카록은 해머를 빼앗긴 오거의 다리를 기둥을 휘둘러 공격했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오거의 뼈가 부러졌다.
오거가 비명을 지르며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 개의 머리가 카록 앞에 놓였다.
카록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오거의 잔인한 죽음을 목격한 마족은 카록의 위협에 벌벌 떨며 빠르게 퇴각을 결정했다.

카록은 마침내 붙잡힌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스를 만날 수 있었다.
아니스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가까스로 숨을 쉬는 듯 가슴이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몸을 끊임없이 떨면서 복부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의 손 밑으로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한 큰 상처가 보였다.
출혈이 심한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된 듯했다.

카록은 그녀에게 다가가 주변의 천으로 몸을 덮어줬다.
카록의 손길을 느꼈는지 아니스가 힘겹게 눈을 떴다.

"카......록......."

그를 바라본 아니스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카록에게 웃어주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몸이 더는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카록은 아니스의 손을 붙잡으며 괜찮다고 곧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니스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이제...... 괜, 찮아......"

아니스의 작은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카록은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너는....... 나......의."

아니스는 다음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움직였다.
카록은 아니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 말은 더는 들을 수 없었다.
- 사건이 있은 후 카록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홀로 마족을 몰아내고 도시를 구해낸 거구의 남자에 대한 소문이었다.
인간들은 카록을 어디까지나 덩치가 큰 인간으로 이해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카록이 가는 곳마다 용병들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거나 입단을 제의했다.
하지만 카록은 아직 잘 모르겠다며 이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인간의 세계에 오자마자 끝없는 전투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이것이 아쿰이 이야기하던 신들의 덫에 빠진 것일까.
아니스를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로 한 자신의 결심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카록은 다시금 고민했다.

카록의 손에는 아니스가 남기고 간 장검이 들려 있었다.
카록은 그녀가 웃으며 마을을 떠나던 모습을 기억했다.
혼자서라도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떠나는 전사의 얼굴이었다.

카록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인간들의 눈으로 본 세상의 균형이란 무엇인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카록의 숙소로 새로운 용병단의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
이번 대답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글 : 칼미슈 / 그림 : king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