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 대륙 델시어 왕국 최남단에 위치한 정글.
이 정글은 온갖 위험한 동식물들이 우글거려 사람이 살 수 없다고 알려진 땅이었다.
많은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저마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정글에 도전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보물을 찾아 모험을 떠난 사람.
희귀한 동물을 잡으려는 사람.
진귀한 약초를 채집하려는 사람.
이들 모두 정글에 진입하자 금세 방향감각을 잃어버렸고, 치열한 생존경쟁의 희생양이 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을 '죽음의 정글'이라 부르며, 찾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 땅이 되었다.
그런데 이 위험한 정글 외곽의 우뚝 솟은 나무 위에는 10살 남짓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한쪽 눈을 감은 채 뾰족한 돌맹이로 열심히 구도를 잡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소녀가 그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무 사이로 한 여인이 왼손에 발현된 마법진에서 뻗어 나오는 갈고리로 줄타기를 하듯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녀가 귀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라티야. 여기서 또 그림 그리고 있는 거야?"
"응. 루아 언니. 이거 봐. 이게 뭐게?"
"음... 지렁이 위에 올라탄 바퀴벌레?"
"...."
라티야라 불리는 소녀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그림에 관해 물었지만, 언니의 대답에 큰 충격을 받은 듯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의 표정을 본 그녀는 자주 있었던 일인지 충격받은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되물었다.
"라티야. 뭘 그린 거야?"
"저기 지평선에 보이는 마을."
"그... 그렇구나."
형체를 알 수 없이 얽혀있는 선들은 아무리 봐도 마을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동생을 위해 수긍하는 척했다.
'그림 실력이야 점점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하던 루아는 동생의 그림 실력보다는 바깥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더 걱정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은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지만, 그녀는 소녀와는 다른 표정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라티야. 바깥세상에 나가고 싶어?"
"응... 정글은 나무가 너무 많아서 답답해. 저기 저 초원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싶어.”
지금이라도 당장 초원으로 뛰어나갈 것처럼 말하는 동생을 본 루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래도 어른들이 말씀하셨잖아. 저렇게 평온해 보여도 바깥세상은 굶주린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곳이라고 말이야.
저 초원처럼 숨을 곳 하나 없는 곳에서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너무 위험하겠지?"
"... 응."
"그래. 우리 일족이 정글에서 사는 건, 신이 내린 축복이야. 나무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수많은 사냥감들로 우리를 굶주리지 않게 해주잖니."
"... 응."
"그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자. 네가 좋아하는 뱀을 잡아왔으니까. 기대해."
"응. 언니."
루아는 라티야를 품에 안고 날랜 동작으로 나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해가 저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자매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을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루아는 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며 어둠 속에서도 마을로 가는 방향을 잡았다.
어둠 속에서 동생을 잃어버릴까 동생의 조막만 한 손을 꼭 잡은 루아는 나무 사이를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리고 이 평범해 보이는 자매 뒤로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바닥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다음 날.
언니의 경고에도 정글 경계의 나무에 오른 라티야는 바깥세상을 구경하며 중얼거렸다.
"... 곧 생일이 되면, 이곳에도 못 나오겠지."
곧 있을 10번째 생일이 지나면 전사 훈련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소녀는 우울해하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제 그리던 그 마을을 다시 바라보는 그때, 마을에선 어제와는 달리 뿌연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라티야는 다시 초롱초롱해진 눈망울을 힘을 주어 가늘게 뜨곤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응? 무슨 일이지?"
크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작지만 확실하게 들려오는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에 소녀는 마을에서 축제가 있는 것으로 확신했다.
"혹시... 오늘, 축제를 하는 날인 건가?"
호기심 많은 소녀에게 찾아온 바깥세상 축제 구경의 기회는 너무나 달콤했고,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래. 아주 조금만 보고 오는 거야."
마음속으로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한 소녀는 정글의 경계를 넘어 그토록 뛰놀고 싶던 초원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처음으로 초원에 발을 디딘 소녀는 정글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자유를 만끽하며 초원을 가로질러 마을을 향해 신나게 뛰어갔다.
하지만 마을에는 라티야가 생각한 축제와는 거리가 멀다 못해 정반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축제가 벌어지는 줄 알았던 마을에는 초록색 피부에 아랫니가 송곳니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마족들에게 습격당하고 있었다.
약탈에 흥분한 마족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죽이며 집집마다 쌓인 곡식이나 재물을 빼앗았다.
라티야는 처참한 광경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벌어진 입을 틀어막고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며 절규하는 노인.
가족을 지키기 위해 농기구를 들고 싸우는 남자들.
아이라도 살리기 위해 온몸으로 마족들을 막아서는 여자들.
무서움에 떨며 울음을 멈추지 않는 아이들.
라티야는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떨리는 손이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숙이 끓어오르는 분노가 두려움을 덮어갔다.
분노로 가득 찬 라티야는 눈앞에서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마족에게 붙잡히려고 하자, 자신도 모르게 돌멩이를 던지며 외쳤다.
"그만둬!"
갑작스럽게 날아든 돌멩이에 놀란 마족들은 다잡은 소녀를 놓쳐 화가 나 돌이 날아온 곳을 노려봤다.
자신의 우발적인 행동에 놀란 라티야는 살기 어린 마족들의 눈 빛에 다시 손발이 떨려왔다.
하지만 마음속에 꺼지지 않은 분노는 그녀의 눈빛과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화가 난 마족들이 놓쳐버린 소녀 대신 자신을 잡으려 달려오자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죽을힘을 다해 정글을 향해 도망쳤다.
차오르는 숨에 헐떡이며 있는 힘을 다해 초원을 가로질렀지만, 화가 난 마족들은 그녀를 끈질기게 추격했다.
마족들이 점점 가까워지자 다급한 마음에 주위를 살피지 못한 라티야는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져 버렸다.
아무 데도 숨을 곳 없는 이 허허벌판에서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에 식은땀을 흘리는 소녀는 언니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넘어진 소녀를 보며 고소한 듯 씨익 웃는 마족이 손에 든 무기로 내려치려 하자 공포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소녀가 손바닥으로 딛고 있는 땅에서 무언가 빠르게 다가오는 울림과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마족들도 놀란 듯 두리번거렸고 지원군을 부르는 듯 급하게 뿔피리를 불어댔다.
뿌우~
예상치 못한 변화에 소녀가 감았던 눈을 뜨자 자신을 뛰어넘어 빠르게 지나치는 인영이 뿔피리를 불어대던 마족의 가슴을 꿰뚫어버렸다.
소녀를 포위하던 마족들 사이로 뛰어든 그는 하얀 날개가 장식된 빛나는 갑옷을 입고 커다란 백마를 탄 채로 마족들을 향해 포효했다.
갑자기 나타난 그의 모습을 본 라티야는 혹시 일족의 전설로 내려오는 전사 ‘슈자’가 아닐까 생각하며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의 움직임은 눈을 깜박이면 다 담을 수 없을 것처럼 신속하고 정확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더해 반짝이는 갑옷에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이 반사되어 퍼져나가 소녀에게는 마치 섬광이 지나가는 듯이 보였다.
초원에는 섬광이 한 번 내리칠 때면 속절없이 마족 하나가 쓰러져 나갔고, 이를 지켜보던 마족들도 겁에 질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본 라티야는 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손발의 떨림은 잦아들어 갔다. 하지만 그녀의 두근거리는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도망가는 마족들을 지켜보던 그는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소녀에게 다급하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꼬마야. 언제 또 다른 마족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니 어서 이리 와."
하지만 소녀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그의 말은 듣지 않고 도망쳐온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저씨. 저 마을에도 나쁜 마족들이 있어요. 마을부터 구해주세요."
"마을은 걱정하지 말고 일단 이리 오렴. 마족들이 뿔피리를 불어 지원군을 불렀으니 더 몰려올 거다."
계속해서 재촉하던 그는 멀리서 다시 태세를 갖추는 마족들을 보더니 소녀를 낚아채 말에 태워 달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저 마을에도 나쁜 마족들이 있다니까요."
"걱정하지 마라. 곧 우리 기사단이 도착할 거야."
그의 말에 바라본 마을은 곧이어 도착한 기사단이 마족들을 몰아내며 주민들이 구해지고 있었다.
마족으로부터 마을을 구하는 것을 본 소녀는 가슴이 뜨거워지며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고양감에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아이를 태우고 마을로 향하던 그는 아이의 말과 행동이 이상하다 생각해 아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저 마을에 사는 아이가 아니니?"
"네. 저는 저기 정글에 살아요."
"정글?"
"네."
그는 멀리 보이는 죽음의 정글 근처에 새로운 정착지가 생겼거니 하며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혹시 전설의 전사 ‘슈자’예요?"
"’슈자’? 아니. 나는 기사 롤랑이다."
아이의 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의아해하던 그는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혔다.
"기사? 기사가 뭐예요?"
"음... 기사는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사람이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사람?”
소녀는 약육강식의 세계인 정글에서 생활해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이 생소했지만, 그나마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아, 그럼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알려주는 별빛 같은 거네요?"
"별빛?”
“네. 별빛은 길을 잃어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잖아요.”
“음... 뭐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해석이 아리송했지만 아이의 시선에 맞춰 수긍해 주었다.
둘의 대화가 있고 얼마 후, 정글의 경계 부근에 도착하자 정착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품에 안고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집으로 가려면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니?"
그 말을 들은 아이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고, 목에 걸려 있던 표범 문양 펜던트를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보답이에요."
"응?"
말을 마치자마자 자연스럽게 정글로 뛰어 들어가는 아이를 본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죽음의 정글이 정말 제 집인 양 자연스러워 보이는 소녀의 모습에 기사는 꿈이라도 꾸는 듯 눈을 비비고 있었다.
기사가 헛것을 본 것인지 믿기지 않아 하고 있을 때, 라티야는 마을을 향해 신나게 뛰어가고 있었다.
마을로 돌아가는 동생을 발견한 루아는 더러워진 동생의 옷을 보고 다가와 물었다.
"라티야. 옷이 왜 이래? 어디서 굴렀어?"
"별빛, 기사."
"얘가 무슨 말 하는 거야. 라티야 오늘도 네가 좋아하는 뱀 잡아 왔어."
언니의 말에 라티야는 기사가 타고 있던 말을 떠올리며 급히 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며 말했다.
"... 언니. 뱀 말고 이렇게 생긴 동물이 필요해."
하지만 동생이 그린 뱀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는 선들로 그려진 그림을 알아보지 못한 루아는 난감해하며 대답했다.
"... 그래. 뱀 잡아 왔다니까."
"...."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그림을 알아보지 못한 루아의 대답에 충격에 빠진 라티야는 마을로 뛰어가며 외쳤다.
"언니, 미워!"
"얘가 오늘따라 이상하네. 라티야. 같이 가!"
루아는 오늘따라 이상한 동생을 보며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라티야를 쫓아갔다.
며칠 후.
라티야는 그날 이후 바깥세상 구경은 가지 않더니 자신이 훈련에서 사용하게 될 무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맞게 끔 제작된 가볍고 조작하기 편한 짧은 길이의 단창을 본 라티야는 기사가 사용하던 랜스와 달라 실망했다.
기사를 동경하게 된 라티야는 그가 사용하던 랜스와 비슷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 구슬 땀을 흘리며 통나무를 깎고 있었다.
"라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무기 만들어."
"무슨 무기? 언니가 만들어준 무기는 마음에 안 들어?"
"응. 그건 너무 짧아. 좀 더 길고 이렇게 뾰족한 모양이 좋아."
"라티야. 모두 이렇게 생긴 무기로 시작했어."
"... 기사는 그렇지 않아."
"응? 기사? 얘가 또 기사 타령이네."
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라티야는 몇 날 며칠을 깎아 그 기사가 사용하던 랜스와 비슷한 창을 만들었다.
직접 만든 조잡한 랜스는 언니가 만들어준 단창에 비해 무겁고 길어 다루기 어려웠지만, 매일 같이 랜스를 들고 기사를 따라 하며 놀았다.
"하하.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정글 최고의 기사니까."
이를 바라보던 루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깥세상 구경을 가던 때보다 더 걱정하기 시작했다.
"... 얘가 정말 왜 이래."
.
.
.
얼마 후 라티야의 10번째 생일이 지나고 전사로 훈련받는 날이 찾아왔다.
"라티야. 훈련받을 준비는 됐어?"
"응."
"그런데 정말 그거 들고 훈련할 거야?"
자기 몸집만 한 랜스를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라티야는 언니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응!"
동생의 고집에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루아는 우선 일족의 역사와 '마가티'라는 의식에 관해 알려주었다.
에우시 쿠자 일족은 고대 시절부터 방랑 생활을 하며 수렵하던 부족이었다.
발 빠른 동물들을 사냥하기 어려웠던 일족은 죽어있는 동물의 사체나 다른 동물이 사냥한 사냥감을 빼앗아 간신히 목숨을 유지했다.
굶주림에 지친 일족은 오랜 방랑 기간 끝에 생명력이 넘치는 정글에 도착해 '슈자'라 불리는 전설의 전사를 만났다.
'슈자'는 일족에게 '마가티'의식을 통해 자신과 같은 '쿠자'를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며 정글에서의 삶을 가르쳤다.
일족은 '슈자'를 검은 표범의 화신이라 여기며 신처럼 받들었고, 자신들도 그 의지를 이어받은 검은 발톱, 에우시 쿠자라 일컬었다.
그 후 일족은 아이가 태어날 때, 전사가 되기 위한 '쿠자'라는 고유 마법을 전승하기 위해 '마가티'라는 의식을 행해왔다.
'마가티' 의식은 마정석을 원료로 만든 특수용액을 사용해 아이의 왼 손목에 '쿠자' 마법진을 문신했는데,
이 마법진은 문신을 새기고 나면 피부 속으로 사라지지만 마법진을 통해 여러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쿠자'는 크게 3가지 단계로 나뉘었는데 마나 축적, 무장 소환, 마력 무장의 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마나 축적은 마법진을 통해 주변의 마나를 조금씩 체내에 흡수해 축적하는 단계였다.
태어날 때부터 '마가티'의식을 받은 일족의 아이들은 마나의 밀도가 높은 정글에서 생활하며 마나를 축적했고, 10살쯤이 되면 쌓을 수 있는 대부분의 마나를 모두 축적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무장 소환은 일정한 호흡을 통해 활성화된 마나를 사용해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마법진이 새겨진 왼 손목에서 사슬이 달린 갈고리 형태의 무기를 소환하는 단계였다.
에우시 쿠자 일족은 이 무장을 전사들의 발톱이라는 뜻으로 '쿠자'라 불렀고, 이 '쿠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서면 일족의 전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일족은 이 '쿠자'를 덕분에 복잡한 정글에서도 나무와 나무 사이를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고, 사냥 시에도 사냥감과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일격에 처치해 혹독한 정글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꿈의 단계라고 불리는 마지막 세 번째 마력 무장 단계는 사용하는 무기와 '쿠자'에 마력이 맺혀 마법의 힘을 담을 수 있는 경지였다.
이 마력 무작의 단계에 오른 전사들은 '슈자'라고 불렸고, 그들은 허공에 마법진을 만들어 '쿠자'를 고정해 이동하거나 마법의 힘으로 사냥감은 물론 적들을 물리쳤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일족의 초대 전사들이나 도달했다는 이 경지는 구전으로만 내려오며 그저 전설의 일부로 생각되어 왔다.
"어때? 라티야. 너도 전설의 전사 '슈자'가 되고 싶지 않아?"
"응. 난 기사가 되고 싶어."
일족의 전설인 '슈자' 얘기만 하면 눈이 초롱초롱 해지던 동생이 일말의 망설임이 없이 기사가 되고 싶다고 대답하자 루아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아직 어려서 그러려니 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라티야. 그럼 이제 '쿠자'를 사용하는 법을 알려줄게. 잘 봐봐."
"응."
"일단 '쿠자'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사냥의 호흡'을 유지해야 해."
"사냥의 호흡?"
"그래. 사냥의 호흡은 마치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천천히 호흡을 유지하는 건데, 그렇게 하면 몸속의 마나가 활성화되는 것이 느껴질 거야.
루아는 설명하고는 손으로 호흡을 표현하며 천천히 숨쉬기 시작했다.
천천히 호흡을 진행하자 정말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가슴의 움직임이 없어지더니, 왼손에는 푸른 마법진이 발현되며 사슬이 달린 갈고리 '쿠자'가 형성되었다.
형성된 ‘쿠자’를 잠시 보던 루아는 창을 세워 라티야가 기사 흉내를 낸다며 만든 표적으로 날아가 일격을 가했다.
‘쿠자’를 사용해 표적으로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모습은 기사의 랜스 차징과 비슷해 보였다.
지금까지 훈련에 흥미가 없던 라티야의 눈은 기사와 비슷한 모습에 생기가 돌며 언니를 바라봤다.
"오...."
지루해 보이던 동생의 표정이 밝아지자 루아는 뿌듯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라티야에게 말했다.
"어때? 기사보다 멋있지?"
"음... 아니. 조금 비슷했어."
"끄응. 그래."
"그래도 언니. 나 열심히 해볼게."
멋진 일격을 선보이면 동생의 기사 타령이 조금이라도 줄겠거니 생각했지만, 동생의 꿈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보여준 일격이 기사와 비슷해 보였는지 라티야가 조금씩 의욕을 내며 따라 하기 시작했다.
언니가 알려준 데로 사냥의 호흡을 시도하자 라티야는 몸속의 마나가 활성화되는 것을 느끼며 왼 손목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진지한 표정으로 집중하는 동생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루아는 동생의 왼 손목에 마법진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사냥의 호흡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라티야가 왼손의 마법진을 활성화해 '쿠자'를 발현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우수한 전사도 사냥의 호흡으로부터 마법진을 발현시키는데 열흘 이상의 시간이 걸렸지만, 라티야는 단번에 ‘쿠자’까지 발현시켰던 것이었다.
이를 본 루아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내용을 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라티야는 발현된 ‘쿠자’를 사용해 표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라티야! 잠깐!"
원래라면 표적을 뚫으며 '콰직'같은 소리가 나야 했지만, 라티야는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깜짝 놀라 달려온 루아가 라티야를 살폈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기대만큼 잘되지 않아 충격을 받았는지 구슬프게 말했다.
"... 언니. 난 소질이 없나 봐."
아직 자신의 재능을 알지 못하는 동생의 토로에 루아는 귀엽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라티야. 아주 잘했어!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해낸 사람은 없었어! 열심히 하면 전설의 전사 '슈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슈자'? ... 아니. 난 기사가 될 거야."
"하하. 그래그래. 우리 동생은 전설의 기사가 될 거야."
"정말?"
이 상황에서도 기사 타령만 하는 동생을 보며 루아는 아주 귀엽다는 듯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언니의 칭찬에 금방 우쭐해진 라티야는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 섰다.
이에 루아는 기사 얘기만 나오면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동생을 보며 웃음을 참고 말했다.
"라티야. 정말 잘했어. 하지만 언니 말을 끝까지 잘 들어야 해. 알았지?"
"응."
"이 '쿠자'를 사용하는 게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아주 큰 숙제가 있어."
"숙제?"
"그래. 바로 사냥의 호흡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야."
"계속 호흡을 유지해야 해?"
"'쿠자'는 사냥의 호흡으로 활성화된 마나를 사용해서 발현돼. 그러니 호흡이 끊어지면 활성화된 마나도 잦아들면서 '쿠자'가 흩어지게 되는 거지."
언니의 설명에 기사와 같이 멋진 일격을 날려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호흡이 흐트러져 '쿠자'가 사라진 것을 깨달은 라티야는 언니의 말에 귀 기울였다.
"라티야. 어떤 상황이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전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니까. 명심해."
"응.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래. 당분간은 '쿠자'를 끊김 없이 유지하는 것 목표로 해봐."
"알았어. 언니."
실제로 사냥의 호흡은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도 쉽게 유지할 수 있는 호흡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시시각각 벌어지는 변화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호흡을 계속하는 것은 마치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장 박동 수를 유지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하지만 라티야는 언니가 말한 전설의 기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믿었는지 한껏 기대에 차 훈련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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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의 훈련을 받은 지 여러 해가 지나 라티야의 앳된 얼굴은 사라지고 카리스마 넘치는 전사로 성장했다.
라티야는 기사가 되겠다는 꿈 때문인지 재능을 타고난 덕인지 누구보다 빠르게 실력을 쌓아갔다.
'쿠자'를 발현하기 위해 대부분의 전사들은 호흡을 바꿔가며 사용했지만, 라티야는 사냥의 호흡만 사용할 정도로 호흡에 익숙해져 있었다.
물론 연속해서 '쿠자'를 사용하거나 강한 공격을 한 후에는 호흡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누구보다 빠르고 유연하게 '쿠자'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쿠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라티야는 ‘검은 표범’을 형상화한 전사복이 수여되며 일족의 전사로 인정받았다.
일족의 전사가 됨은 곧 어른으로 인정받는 것과 같았고 이는 아이의 독립을 의미했는데.
독립했다 하더라도 항상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라티야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바깥세상으로 나가길 원했다.
바깥세상을 떠나는 것을 결심한 라티야는 전사복을 갖춰 입고 간단한 여행 짐과 자신이 사용하던 나무 랜스를 챙겨 떠날 준비를 했다.
가족들은 배웅하기 위해 마을 광장에 모여 떠나려는 라티야를 걱정스럽게 지켜봤고, 모두가 숙연한 상황에서 루아가 말했다.
"라티야. 항상 몸조심하고! 밥 잘 챙겨 먹고! 뱀고기가 없어도 투정 부리면 안 돼!"
"응. 언니."
"그리고... 기사가 되면 돌아올 거지?"
"응. 돌아올게."
라티야는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준 언니의 걱정에 가슴이 아팠지만 돌아온다는 약속으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잠시 가족들과 인사를 하며 이별의 시간을 가진 라티야는 어렸을 적 디뎠던 그 초원으로 나아갔다.
초원에 들어선 라티야는 잠시 후 그날의 사건이 있었던 장소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이미 그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빛나는 기사의 돌격에 스러져가는 마족들이 보였다.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공포에 조금씩 몸이 떨렸지만, 라티야는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설렘으로 마음을 채워갔다.
설레는 마음에 심장의 고동소리가 점점 커져가는 그녀는 그제서야 꿈을 이루기 위해 바깥세상에 나온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마을을 보며 그날의 처참했던 상황을 떠올린 그녀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마을에 도착한 라티야는 걱정스러웠던 마음이 무안할 만큼 잘 정비된 마을을 보며 가슴을 쓸어 담았다.
마족들에 의해 불탔던 마을은 탄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지만, 훌륭히 재건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보다 더 견고하게 지어진 것 같은 목책은 마을을 이전보다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 보였다.
마을에 살던 사람들도 과거의 상처를 잊었는지, 아픔을 드러내지 않는 건지 모두 밝은 표정으로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한시름 놓은 라티야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챙겨 온 가죽들을 처분하고, 기사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 잡화점을 찾았다.
잡화점은 작은 마을답게 사람들의 물물교환을 대행해 주거나, 외부에서 들르는 상인들과 거래할 특산품 정도만 간단히 쌓여있었다.
그리고 판매대에서 진열된 물건의 먼지를 털던 소녀가 라티야를 보고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마리의 잡화점에 어서 오세요."
하얀 피부에 주근깨가 조금 있고 붉은 머리를 양 갈래로 딴 소녀는 라티야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실례합니다."
"응?"
"음?"
"아! 혹시 예전에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소녀는 라티야를 알아본 듯 얼굴을 유심히 보며 물었다.
라티야도 이 소녀가 자신이 돌멩이를 던져 구했던 소녀라는 걸 눈치채며 반가운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응. 맞아."
"그렇지!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 무사했구나. 그 후로 볼 수 없어서 어찌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
소녀는 라티야를 많이 걱정한 듯 안타까웠던 감정을 드러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자신을 마리라고 소개한 소녀는 그 이후 마을에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마을은 다행히 국경 기사단의 도움으로 전멸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집과 식량들이 불에 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아이들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불에 탄 집을 다시 짓고, 흩뿌려진 식량을 모아 나눠 먹으며 절망을 이겨내 지금의 마을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마리는 차분히 들어주는 라티야를 보다 자기 말만 너무 길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조금 붉히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 너무 내 얘기만 했나? 그래서 이 마리의 잡화점에는 무슨 일이야?"
"음, 여행 경비를 조금 마련하고 싶어서. 혹시, 이 가죽 팔 수 있을까?"
"그럼! 한 번 볼까? 음... 이걸 다 매입하기에는 우리 가게 자금이 부족하겠는걸."
라티야가 가져온 가죽들은 정글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한 가죽들도 포함되어 있어 마리는 조금 당황했다.
"아! 혹시 돈 말고 물건도 받아줄 수 있어?"
"음? 어떤?"
마리는 라티야의 무슨 물건이냐는 표정을 보며 잡화점 안에 헝겊으로 둘러져 있는 긴 물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네가 차고 있는 그 무기랑 비슷해 보이는데. 어때 관심 있어?"
라티야는 자신이 사용하던 나무로 된 랜스가 아닌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더 견고해 보이는 랜스를 보며 흡족해했다.
"응. 좋아. 마음에 들어."
"야호! 고마워. 이 물건은 누가 찾지도 않을 것 같아서 받기 싫었는데 막무가내로 맡겨버려서 말이야."
흔쾌한 수락에 마리는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이 기뻐했다.
랜스는 꽤 사용감이 있지만 잘 관리되어 있었고, 어느 기사가 사용하다 마리의 잡화점에 팔아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촌구석 마을에는 이런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없어 오래도록 잡화점에 방치되고 있었다.
약간의 여행 경비와 질 좋은 무기를 얻은 라티야는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정보를 물었다.
"음. 그리고..."
"또 필요한 게 있어?"
"기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기사? 음... 기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뜬금없는 질문에 마리도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다 손뼉을 치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내가 잘 아는 기사가 있어. 제대로 대답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가보자."
마리는 자주 가게를 비워본 듯 입구에 '무인 운영'이라는 팻말을 꽂더니 라티야를 이끌고 마을 밖으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다리가 불편한 듯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기사가 마을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사는 방랑 생활을 하는지 근처에 묶인 말에는 간단한 봇짐들이 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해진 갑옷과 덥수룩한 수염,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하고 초연한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
마리가 말한 잘 아는 기사가 이 방랑 기사인지 멀리서부터 아저씨라 부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방랑 기사는 자신에게 소리치며 다가오는 마리를 보았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마리 옆에 있는 라티야가 메고 있는 랜스를 보고 놀란 눈빛으로 바라봤다.
"응?"
"음?"
둘 사이 잠깐의 정적이 흐르자 옆에 있던 마리가 나서 서로를 소개했다.
"여기는 방랑 기사 아저씨. 이래 보여도 기사인 건 확실하니까 걱정하지 마. 아! 그 무기도 원래는 이 아저씨 거였어."
마리의 소개에도 방랑 기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일과를 보내고 있는 마을을 쳐다봤다.
이런 반응이 마리는 익숙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기사에게 라티야를 소개했다.
"그리고 여기는 라티야. 제가 예전에도 이야기한 적 있었잖아요. 내 생명의 은인.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보자마자 알아봤지 뭐예요.”
소개를 마친 마리는 방랑 기사의 관심 없다는 반응에 친한 척을 하면서 눈짓으로는 눈치를 주며 말했다.
"아저씨. 라티야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데 뭐 알려줄 수 있는 거 없어요?"
방랑 기사는 마리의 말에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 기사? 딴 데 가서 알아봐."
마리는 기사의 무관심한 태도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기사에게 다시 말을 붙여봤다.
"하. 하. 아저씨?"
"괜찮아. 마리.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
라티야는 방랑 기사의 태도에 무언가 정보를 얻기 힘들다고 생각하곤 마리를 말렸다.
실망한 둘은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려 할 때 방랑 기사는 다리를 매만지며 넌지시 말했다.
"이봐. 잘 생각해. 나처럼 절름발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방랑 기사의 경고에 라티야는 돌아서서 그의 다친 다리를 바라봤다.
큰 부상을 당했는지 제대로 굽혀지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다리는 일반적인 생활을 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부상을 보고도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 그래도 그 덕분에 목숨을 구한 사람도 있겠죠. 저도 그런 기사가 되고 싶어요."
방랑 기사는 자신의 경고에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하는 라티야를 보며 조금은 관심이 생긴 듯 말을 이어 나갔다.
"... 너. 그 랜스 쓸 줄은 아는 거냐?"
"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방랑 기사는 자신의 노쇠한 말을 끌고 오더니 고삐를 넘기며 말했다.
"그러면 저기 보이는 나뭇가지 끝에 달린 나뭇잎을 그 랜스로 관통시켜봐라. 만약 성공하면 기사가 될 수 있게 도와주지. 하지만 실패하면 그 랜스는 여기 두고 가라."
방랑 기사의 제안은 마치 이 시험에 떨어지면 기사가 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라는 듯 단호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말한 제안은 누가 봐도 터무니없어 보였고, 이에 마리는 화를 내며 말했다.
"아저씨! 그건 너무해요! 라티야. 그냥 가자. 내가 다른 사람을 찾아 줄게."
라티야도 기사의 제안을 포기하는 듯 말의 고삐를 다시 방랑 기사에게 넘겼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이 동물은 아직 탈 줄 몰라요."
"하. 기사가 되겠다는 녀석이 아직 그 나이까지 말을 못 타다니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방랑 기사는 말을 타지 못한다는 그녀의 말에 핀잔을 주며 말했다.
하지만 라티야는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되물었다.
"그 말이란 동물을 타지 않고 해도 괜찮나요?"
"뭐? 말을 타지 않고?"
"네."
말을 마치자마자 사냥 자세를 취한 라티야는 '쿠자'를 발현해 방랑 기사가 지목한 나무로 쏘아져 나갔다.
쏜살같이 날아간 라티야는 랜스로 나뭇잎을 관통시키고 안전하게 착지해 랜스를 다시 메며 방랑 기사에게 돌아왔다.
그 광경을 지켜본 마리는 입이 떡 하고 벌어진 채 보고 있다 돌아오는 라티야에게 물었다.
"대단해! 라티야! 그건 무슨 마법이야?"
"이건 '쿠자'라는 건대... 별거 아냐."
라티야는 쑥스러운 듯 코를 긁적이며 대답했고 마리는 마치 자신이 해낸 양 방랑 기사를 보며 말했다.
"어때요? 라티야가 성공했으니 기사가 되는 걸 도와주시는 거죠?"
방랑 기사도 라티야의 마법을 보고는 내심 놀랐는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다 입을 떼었다.
"... 약속은 약속이니 도와주지. 그런데 왜 기사가 되려 하지?"
방랑 기사의 아주 근본적인 질문에 마리도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라티야는 방랑 기사의 질문에 지금까지 계속 쫓아온 그 기사를 떠올리며 거침없이 대답했다.
"멋진, 기사가 되는 게 꿈이에요."
"응? 뭐라고? 멋진?"
"응. 멋진 기사."
"... 뭐어?"
마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차분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라티야의 모습에서 어린아이 같은 대답이 나온 것에 놀라 웃었다.
라티야는 마리에 웃음에 창피했는지 얼굴을 조금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아하하... 미안해. 라티야. 이렇게 크게 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의외였어. 좀 더 정의를 위해서! 이런 대답일 줄 알았거든."
방랑 기사도 라티야의 대답에 실소하며 자리를 일어나 절뚝이는 발로 말에 타며 말했다.
"기사가 되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내일부터 해가 뜨는 시간에 여기로 와라."
방랑 기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노쇠한 말을 타고 마을로 향했다.
마리는 라티야에게 잘 됐다며 오히려 더 신이 난 듯 행동했고 그에 비해 라티야는 비장한 모습으로 방랑 기사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다음 날.
약속 장소에는 의외의 인물이 함께 있었다.
"... 마리. 넌 왜 나왔지?"
"어제 우리 집에서 밤새 라티야와 이야기해 봤는데요.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제 생명의 은인을 좀 도와주려고요. 그리고 아저씨랑 라티야 둘만 있으면 무슨 대화가 되겠어요?”
"마리. 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 라티야. 난 네 잠재력에 투자하는 거니까.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자신 있거든. 기사가 되면 내 공로를 잊으면 안 돼!”
마리의 대답에 방랑 기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가게는 어쩌고?"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이 작은 마을에 도둑이 어딨다고, 무인 운영으로 해둬도 아줌마 아저씨들이 잘 봐주니까. 괜찮아요."
방랑 기사와 라티야는 마리의 당당한 태도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한 번씩 쳐다본 후 수긍했다.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방랑 기사는 마리에게 당부하며 준비한 말의 고삐를 라티야에게 건네며 말했다.
"올라타는 것 정도는 알아서 해라."
“네."
라티야는 고삐를 쥐고 말에 올라타려고 했지만, 말은 가만히 있지 않고 날뛰며 그녀를 태우려 하지 않았다.
마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웃으며 고삐를 가로채 말에 오르더니 라티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하. 역시 내가 필요할 줄 알았어. 자. 라티야. 내가 가르쳐줄게. 어서 타. 이래 봬도 상인을 따라 여러 번 도시에 가면서 타본 적이 있거든."
"고마워. 마리."
라티야는 승마를 가르쳐주는 마리가 루아의 어렸을 때와 혹시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리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에 올라탄 라티야는 어렵사리 기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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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기사는 다리가 불편해 승마를 가르치는 것이 난감했지만, 다행히 마리가 있어 한시름 덜 수 있었다.
마리가 승마를 가르치는 동안, 방랑 기사는 라티야에게 기사에 대한 지식과 랜스를 활용한 창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궁금해하는 기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인 '마상창시합'을 알려주었다.
마상창시합은 델시어 왕국과 갈론 왕국의 도시에서 개최되는 축제의 일종이었다.
시합에는 기사들과 추천을 받은 견습 기사들만 참가할 수 있었고, 그들의 치열한 격돌은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축제였다.
기사들도 시합에서 승리만 한다면 명예와 부를 한 번에 얻을 수 있어 많은 실력 있는 기사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시합을 통해 인정받은 견습 기사들은 기사로 서임 받을 수 있는 등용문 중 하나였다.
마상창시합에 대한 이야기에 곧 기사가 될 것만 같았던 라티야였지만, 그녀의 승마 실력이 발목을 잡았다.
"라티야! 고삐를 더 단단히 쥐어! 어! 어!! 안돼!!!"
히잉~
라티야가 타던 말은 올라탄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기를 일으키며 그녀를 낙마시켰다.
"라티야. 괜찮아?"
"으응... 괜찮아.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뭐."
라티야는 마리에게 승마에 대한 기초를 모두 배웠지만, 가장 중요한 말과의 교감이 전혀 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사냥하며 사냥꾼의 기질이 몸에 배었는지 가까이 가기만 해도 말들이 겁을 먹어 그녀를 태우려 하지 않았다.
"라티야. 좀 더 말을 사랑스럽게 대해봐."
"이렇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씨익 벌어진 라티야의 표정을 본 마리가 대답했다.
"... 아니. 오히려 무서운데."
"... 후우."
풀이 죽은 라티야를 보던 마리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방랑 기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저씨. 무슨 방법이 없어요?"
"방법은 무슨. 승마도 못해낼 거면 기사가 될 생각은 그만둬라."
방랑 기사의 핀잔에 더욱 좌절해버리는 라티야를 보던 마리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아이디어를 말했다.
"라티야. 좋은 생각이 났어. 더 핀잔... 아니 공포를 주는 거야."
"응? 공포?"
"그래. 네가 무서워서 도망가려는 거라면, 더 확실하게 겁을 줘서 도망갈 생각도 못 하게 하는 거지."
마리의 아이디어는 굉장히 억지스러웠지만, 무력감에 휩싸인 라티야는 그 말을 듣기로 했다.
"말에 오르자마자 아주 강하게 제압해 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말이야."
"응. 알았어."
라티야는 말에 오르자마자 강한 살기를 뿜으며 고삐를 아주 꽉 쥐어서 말을 제압했다.
다시금 경기를 일으키려던 말은 확실히 제압됨을 느끼자 경직된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오. 마리. 성공했어."
'히힝~'
"아앗."
승마에 성공한 라티야는 도와준 마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자, 공포감이 줄어든 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낙마시켜버렸다.
"라티야 괜찮아?"
"응. 괜찮아. 그래도 이제 길이 보이는 것 같아."
이후 라티야는 승마를 할 때는 항상 말을 눈빛으로 제압한 후 승마가 끝나면 당근과 빗질을 통해 공포감을 덜어주며 유대감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계속되는 노력으로 라티야는 말과 파트너가 아닌 사냥꾼과 사냥감이라는 강압적인 관계에서 이상한 유대감을 형성해갔다.
"하하. 대단해 라티야! 정말 많이 좋아진 것 같아. 그렇죠? 아저씨?"
"... 이게 정말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래도 승마를 하게 됐잖아요. 안 그래요?"
"... 그래."
마리가 방랑 기사에게 라티야의 승마 실력을 보여주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순간 라티야가 다시 낙마했다.
히이잉~
"아얏."
"라티야! 괜찮아?"
"... 안 괜찮아 보이는데."
"...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곧 더 좋아질 거예요."
시간이 지나 승마 실력이 어느 정도 올라온 라티야는 '마상창시합'을 위한 훈련도 시작할 수 있었다.
승마 실력은 부족했지만, 그동안 사냥을 통해 쌓인 라티야의 랜스 숙련도 덕분에 마상창술 훈련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계절이 한차례 바뀌자 방랑 기사는 시합에 나가도 좋다며 허락했고, 라티야와 일행은 마상창시합이 열리는 소도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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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합이 열리는 도시는 곧 개최되는 마상창시합을 보러 온 사람들과 참가하려는 기사들로 북적였다.
거리는 축제 분위기가 물씬 나도록 가로수마다 붉은 리본과 장식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고, 곳곳에 노점상들은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와~ 얼마 만에 도시야. 라티야. 도시는 처음이지?"
“응. 이곳이, 도시구나.”
마리는 예전에도 도시에 온 기억이 있는지 익숙해 보였지만, 라티야는 처음 보는 북적이는 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방랑 기사는 둘의 대화를 듣다 도시에는 별 감흥이 없는지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구경 다 했으면 가자."
방랑 기사는 일행을 이끌고 마상창시합이 열리는 회장으로 들어가 자신의 증표를 사용해 견습 기사의 자격으로 라티야를 등록하며 말했다.
"마상창시합은 실력 있는 기사들과 겨루기 좋은 곳이지. 라티야. 네가 배운 것들을 잘 활용해서 이겨봐라. 그럼 네가 원하는 기사가 될지도 모르니까."
"네. 알겠어요."
그리고 라티야의 첫 시합이 시작되었다.
마상창시합의 방식은 토너먼트 형식의 단순한 대결 방식이었다.
참가를 신청한 기사들과 견습 기사를 모아 대진을 짜고 한 경기당 16강까지는 3라운드, 8강부터는 5라운드로 치러졌다.
각 라운드마다 기사들은 서로를 향해 돌격해 랜스로 상대를 맞추면 점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랜스를 맞추는 부위에 따라 점수가 달랐는데, 머리는 3점, 어깨는 2점, 몸통은 1점이었고 상대를 낙마시키면 남은 라운드와 점수에 상관없이 승리가 가능했다.
마상시합장은 말을 탄 기사들의 격돌이 이뤄지는 만큼 길게 뻗은 타원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고, 격돌하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좌석들이 감싸듯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양측에는 기사들이 시합을 준비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라티야와 상대 기사가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양측이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진행자는 경기장 중앙으로 나와 큰 소리로 외치며 경기를 진행했다.
"기사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좌측 기사! 우승 후보이자, 상대방의 기술을 절묘하게 따라 해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카멜레온! 에바스티안!"
“와아~ 에바스티안!”
"우측 기사! 절름발이 까마귀 기사의 제자! 라티야!"
“우~ 돈만 밝히는 까마귀 기사의 제자는 꺼져라!”
상대 기사의 소개가 끝나자 경기를 관람하는 시민들은 환호와 함께 상대 기사를 응원했다. 하지만 라티야의 소개에는 야유와 함께 방랑 기사를 비난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방랑 기사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에 마리와 라티야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방랑 기사를 쳐다봤지만, 방랑 기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소개 같은 건 신경 쓰지 마라. 라티야. 그저 시민들의 흥미를 끌어내려는 수작이니까."
"네."
시합 준비와 참가자의 소개가 끝나자 대망의 1라운드가 시작됐다.
라티야는 자신의 갈고닦은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사냥의 호흡을 가다듬으며 집중했다.
상대 기사는 처음 보는 그녀의 시합에 어울리지 않는 전사복과 승마 자세를 비웃으며 단숨에 낙마시키려 했다.
반면, 라티야는 신중하게 점수를 얻기 위해 어깨를 맞추고 상대의 공격을 피할 생각이었다.
격돌하는 순간 라티야는 자신의 공격을 성공시킨 후 상대의 공격을 피해 보려고 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본능적으로 공격을 피하기 위해 '쿠자'를 사용해 공중의 구조물로 튀어 올랐고 공중제비를 돌며 멋있게 착지했다.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도 라티야의 기예와 같은 행동에 깜짝 놀라며 야유를 멈추고 바라봤다.
하지만, 진행자의 말에 시민들은 모두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견습 기사 라티야! 낙마로 패배!"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고 생각한 라티야도 사람들이 웃고 있는 이 상황을 이해하자 자신만만하게 착지한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방랑 기사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오직 마리만 다가가 위로했다.
"라티야.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돼."
하지만 라티야는 그 후로도 번번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쿠자'를 사용했고 그로 인해 낙마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계속해서 '쿠자'를 사용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강압적인 승마 방식과 오랜 사냥으로 인한 버릇이었다.
강압적인 승마 방식으로 경직된 말의 움직임은 그녀의 행동반경을 크게 줄어들게 해 회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마상에서 회피가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지자 사냥으로 익숙해진 ‘쿠자’가 튀어나왔던 것이었다.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한 라티야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마리가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라티야. 잠깐 나 좀 볼래?"
"... 응? 무슨 일이야?"
마리는 그녀를 데리고 마상창시합을 위한 갑옷을 만드는 도시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대장간에는 이미 방랑 기사도 도착해있었고, 검은 마상시합용 갑옷 하나가 멋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마리는 전시된 마상시합용 갑옷으로 그녀를 이끌며 깜짝 놀라게 하듯 말했다.
"짜잔! 어때? 라티야를 위한 마상시합용 갑옷이야!"
"마상시합용 갑옷?"
"그래. 시합에서 다른 기사들이 입고 있는 그 갑옷이야."
새로운 갑옷을 보며 어리둥절해하는 라티야를 보던 방랑 기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시합에 관해 조언했다.
"라티야.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피할 수 없을 때는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공격에 집중해 봐라.”
"충격을 최소화하라고요?"
"그래. 어차피 시합에서 사용되는 랜스는 부러지기 쉽게 속이 빈 나무로 만들어져 있으니, 이 갑옷을 믿고 네 특기인 공격에 집중해."
"... 네. 해볼게요.”
방랑 기사의 조언에 라티야는 자신감을 조금 회복한 듯 긴장되어 있던 표정이 조금씩 풀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일행이 준비해 준 마상시합용 갑옷을 보며 자신의 전사복과 비슷한 표범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응? 이 문양은...."
"흠흠. 아저씨가 널 위한 마상시합용 갑옷을 준비해달라고 돈을 주셨는데, 전에 네가 팔았던 가죽을 팔아 조금 꾸며봤어. 어때? 마음에 들어?"
"응! 너무 마음에 들어! 마리. 고마워."
라티야는 두 사람의 선물과 따듯한 마음에 감격해 마리를 포옹했고 마리도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라 당황했다.
"으응. 아저씨도 신경을 많이 써 주셨어."
"감사해요. 아저씨. 저. 이제 지지 않을 게요."
"... 그래. 열심히 해봐라."
마상시합용 갑옷을 입고 자신감을 되찾은 라티야는 흐려졌던 눈빛이 다시 돌아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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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시합용 갑옷을 입은 라티야는 상대의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정확한 공격으로 높은 점수를 획득해 나갔다.
가장 낮은 점수인 몸통을 노리는 공격들은 충격을 완화하며 공격에 집중했고, 피하기 쉬운 머리와 어깨를 노리는 공격들은 회피에 집중하며 경기를 이끌어 나갔다.
확실한 경기 운영 전략과 쌓여가는 실전 경험들로 마상창술에 익숙해지며 조금씩 경기에서 승리를 차지해갔다.
실력과 자신감이 붙은 그녀는 점점 중소도시의 시합을 석권하며 '검은 표범' 기사라는 별칭을 얻으며 유명해졌다.
오랜 시간을 남방 대륙 곳곳을 돌며 실력을 증명한 라티야에게 기사가 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라티야. 이거 봐!"
"응? 무슨 일이야? 마리."
"무려 델시어 왕국의 수도에서 열리는 마상창시합 초청장이야!"
"수도에서 열리는 초청장?"
"그래. 이번 시합은 국왕 폐하도 보러 오실 테니 잘하면 기사 서임도 받을 수 있지 않겠어? 그쵸? 아저씨."
마리는 전령이 전해준 초청장을 방랑 기사에게 들이밀며 말했고, 그도 초청장을 살펴보다 말했다.
"... 음. 그래. 우승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방랑 기사의 말에 자신의 꿈이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느낀 라티야는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자. 그러면 어서 준비해! 자칫하면 늦겠어."
라티야보다 더 신이 난 마리는 일행을 재촉해 델시어 왕국 수도로 향했다.
마리의 재촉에 일행은 무사히 대회 일정에 맞게 도착했고, 성대하게 준비되고 있는 수도를 보며 놀랐다.
"우와.... 수도는 나도 처음이야. 라티야. 어때? 멋있지?"
"...."
"라티야 그러다 침 흘리겠어."
델시어 왕국의 수도는 기사의 나라답게 수많은 인력과 자금을 사용해 성대하게 대회를 준비되고 있었다.
대회장도 지금까지 참가한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왕족과 귀족들이 관람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왕국 최대의 축제 중 하나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만큼 대회에는 실력을 인정받은 기사들만 초청되어 대회가 치러졌다.
그 중에는 라티야와 같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견습 기사들도 초청되곤 했는데, 예상치 못한 활약을 하는 신성들은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축제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견습 기사들도 대도시의 시합은 어려운 도전이었지만 우승만 한다면 왕에게 직접 기사의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아무도 이 초청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라티야와 일행들도 천금 같은 기회라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시합을 준비했다.
그리고 며칠 뒤.
시합장에는 라티야와 상대 기사가 경기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둘 다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진행자는 경기장 중앙으로 나와 두 기사를 소개했다.
“좌측 기사! 이번 대회는 내가 잡겠다! 영원한 우승 후보! 카멜레온! 에바스티안!"
“와~ 카멜레온!”
운명의 장난인지 상대 기사는 처음으로 나선 경기에서 만났던 바로 그 기사였다.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첫 시합을 잊지 못하던 라티야가 상대의 소개에 조금 긴장한 듯 보이자 옆에 있던 마리가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라티야, 신경 쓰지 마. 이제 그때의 네가 아니야.”
“응. 마리. 걱정 마. 조금 긴장했을 뿐이야.”
둘이 잠시 말을 나누는 사이 진행자가 라티야를 소개했다.
“우측 기사! 상대의 약점은 놓치지 않는다! 강렬한 일격으로 상대를 제압해버리는 검은 표범! 라티야!”
양측 기사가 소개를 마치자 시민들은 베테랑 기사 에바스티안의 승리를 예측하며 라티야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소개가 끝나고 좌중이 고요해지는 순간 진행자는 붉은 기를 내리며 출발의 신호를 알렸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라티야와 에바스티안은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며 상대를 살폈다.
에바스티안는 라티야의 명성과 범상치 않았던 움직임을 기억했는지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특기를 선보였다.
그는 상대방의 자세를 따라 해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전략을 취했다.
라티야는 자신과 비슷한 자세를 취해 어디를 공격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 둘은 가까워지자 서로에게 일격을 날렸고 시합용 랜스가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 조각이 났다.
그리고 '철푸덕'하는 소리와 함께 베테랑 기사 에바스티안은 낙마하고 말았다.
고작 일격에 베테랑 기사를 낙마시켜버린 라티야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지금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에바스티안이 라티야와 비슷한 자세를 취해 공격을 알 수 없게 했지만 그녀의 쏜살같은 일격에 에바스티안은 랜스를 뻗어보지도 못하고 낙마해 버렸다.
시민들은 축제를 뜨겁게 만들 새로운 신성이 나타남을 느끼고 연신 라티야의 이름을 외쳤다.
“와아~! 라티야!”
마리와 방랑 기사도 일격에 경기가 끝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라티야! 이길 줄 알았어! 낙마시킬 줄은 몰랐지만… 아무렴 어때!”
그리고 라티야의 승리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 시합도.
“좋았어! 라티야! 아저씨도 칭찬 좀 해주세요!”
“… 잘했다.”
그다음 시합도.
“검은 표범! 라티야! 역시 일격이면 충분하지!”
그리고 결국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듯 결승전까지 진출해 마지막 5라운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라티야. 이제 마지막 라운드야. 이번만 이기면 정말 기사가 될지도 몰라! 침착해! 아니 조금은 긴장하는 게 좋을까?"
"걱정 마. 마리. 꼭 이길게."
마리의 응원에 라티야는 조금 긴장을 풀며 마지막 라운드를 준비했다. 하지만 현재 점수는 라티야가 7점 상대가 8점으로 그녀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번 라운드에서 똑같은 점수를 획득하면 라티야의 패배였고, 관중들도 예상치 못한 그녀의 선전에 응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녀의 패배를 예감했다.
모두의 기대가 쏟아지는 가운데 마지막 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적색기가 올라가자 라티야와 상대는 전력을 다해 내달리며 서로를 노려봤다.
라티야는 상대가 어깨를 노릴 것이라 예상하며 상대의 공격을 피해 역전할 생각이었지만, 상대도 결승까지 올라온 강자 중의 강자기에 아무도 승부를 예측하지 못했다.
경기장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라티야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집중 상태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이 느껴짐과 동시에 사냥의 호흡으로 활성화된 체내의 마나가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요동치던 마나는 빠르게 손을 타고 랜스에 전달되어 마력으로 무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인지한 라티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속이 텅 빈 나무로 만들어진 시합용이라고 해도 마력으로 무장된 랜스는 상대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급속만 피하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내 꿈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 충돌했다.
결국 라티야는 고민 끝에 자신의 무기가 더 이상 시합용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랜스를 하늘로 치켜세워 경기를 포기했다.
관심 있게 지켜보던 관중들은 그녀의 포기를 이해할 수 없었고, 기대가 높았던 만큼 실망감은 커져갔다. 그리고 경기장은 승리자를 위한 환호보다 패배자를 향한 야유가 더 거세게 터져 나왔다.
야유를 받으며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돌아오는 그녀를 본 마리는 허무한 결과에 울음을 참지 못했다.
오직 방랑 기사만이 그녀가 보여줬던 ‘쿠자’를 연상하며 이 상황을 짐작한 듯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 괜찮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야.”
"... 네."
라티야는 자신의 결정이 잘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손에 닿을 듯했던 꿈이 허무하게 흩어져 크게 상심했다.
상실감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 그녀는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올까라는 생각에 조금씩 조급해져갔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런 마음에는 관심이 없는지 경기가 끝났음에도 그녀를 향한 비난과 조롱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라티야와 일행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성난 시민들로부터 쫓겨나듯 도시를 떠나야 했다.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음 시합이 열리는 갈론 왕국으로 길을 잡았다.
평소 같으면 벌써 기운을 차렸을 마리조차 우울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라티야도 고민이 깊어 보였다.
라티야는 일족의 전사라면 누구라도 목표하는 경지에 도달했지만, 중요한 순간에 발현된 것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왜 이렇게 된 건지 곰곰이 생각했다.
왜 지금까지는 아무렇지 않다가 갑자기 마력 무장이 된 걸까 생각하던 그녀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사냥의 호흡'을 유지한 상태에서 '쿠자'를 사용하지 않고 수많은 결전을 치러내는 것이었다.
시합을 나가며 '쿠자'를 오래도록 봉인한 채 ‘사냥의 호흡’만 유지해온 라티야는 몸속의 마나가 계속 활성화된 상태로 분출되지 못했다.
결국 체내를 계속 순환하던 마나는 계속되는 결전에 자극을 받아 손을 통해 마력이 분출되어 랜스에 맺히게 된 것이었다.
라티야는 기사가 되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오히려 전설의 전사 '슈자'의 경지에 도달한 것에 전설의 전사 이야기를 해주던 루아를 떠올리며 실소했다.
"으 라티야! 너 지금 웃음이 나와! 정말! 한 발짝만 더 갔으면 되는 거였는데."
"미안, 마리. 하지만 다음에는 이런 일 없을 거야."
"... 알았어. 근데 왜 포기한 거야?"
"그건...."
라티야의 설명에 마리도 이해한 듯 표정을 풀며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둘은 예전처럼 이야기하며 지난 경기는 잊은 듯 계속 길을 나아갔다.
이를 지켜보는 방랑 기사도 내심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안도하는 표정으로 그녀들을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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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합이 열리는 도시로 나아가던 일행은 델시어 왕국과 갈론 왕국의 국경 부근에 도착했다.
여느 때와 같이 국경이 가까워질수록 예민해지는 방랑 기사는 일행을 재촉하며 이동을 서둘렀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따라와."
하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기 좋아하는 두 소녀는 항상 느긋하게 움직이며 그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국경 근처는 치안이 안 좋아서 위험하다고 몇 번을 말해. 어서 따라와."
그의 말처럼 어느 국가든 국경 근처는 국가의 힘이 닿지 않는 곳들이 존재했다.
과거의 마리의 마을도 국경 근처에 위치해 기사단의 도착이 늦어졌고 결국 큰 피해를 남기고 말았다.
"이런 허허벌판에서 누가 우리를 공격한다고 그러세요."
"... 마리."
"알았어요. 아저씨."
마리의 철없는 말에 방랑 기사가 정색하며 부르자 그녀는 꼬리를 내리고 바짝 쫓아갔다.
일행은 방랑 기사의 이끄는 대로 안전하게 국경에 다가가고 있을 때, 경유하기로 한 국경 마을이 마족들의 군세에 습격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쳇...."
이를 본 방랑 기사는 화가 난 듯 손을 불끈 쥐면서도 나서지 않고 냉정하게 돌아가는 길을 살폈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본 라티야는 분노와 기사가 되지 못한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 우리가 도와줘야 해요."
"라티야. 기사단이 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 하지만."
"라티야. 냉정하게 생각해라. 우리에게는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마리도 함께 있어."
“그래. 라티야. 이번에는 피하는 게 좋겠어.”
마을을 습격당했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마리도 라티야를 말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라티야는 마을을 구해야겠다는 생각과 기사가 되지 못한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망이 합쳐져 무언가에 홀린 듯 말하며 말을 몰았다.
"... 가야 해요."
"라티야!"
마리와 방랑 기사는 마을로 향하는 라티야를 불렀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로 돌진했다.
잠시 후 라티야가 도착한 마을은 예전 마리의 마을처럼 마족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족들의 습격에 피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 했지만 수많은 마족들에 둘러싸여 도망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 광경을 본 라티야는 지체하지 않고 마족들에게 돌격해 주민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
라티야는 파괴적인 일격을 선보이며 마족들을 쓰러뜨려갔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 홀로 적진 한가운데 있던 그녀는 마족들에게 고립되어 갔다.
조금씩 좁혀오는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몰았지만, 그녀의 부족한 승마 실력으로는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뿔피리를 불며 계속 몰려오는 마족들은 끈질기게 그녀를 공격했고, 결국 마족들의 긴 창에 말이 고꾸라져 낙마해버렸다.
낙마의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라티야는 자신을 둘러싼 마족들을 보며 예전의 공포에 몸이 굳어져갔다.
어렸을 적 마족들에게 쫓겨 넘어진 그때처럼 아직도 무력한 자신에게 절망한 순간 무릎이 닿은 바닥에서부터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본 라티야는 해진 갑옷을 입고 노쇠한 말을 탄 방랑 기사가 돌격하는 것을 발견했다.
방랑 기사는 돈이나 밝히는 패배자라는 소문과는 다르게 마족들의 살기에도 흔들림 없이 마족들에게 돌격했다.
파괴적인 힘은 담겨있지 않았지만, 방랑 기사의 일격 하나하나는 빠르고 정교하게 마족들의 급소를 꿰뚫었다.
마족들은 방랑 기사를 라티야처럼 포위하려고 진을 쳤지만, 그의 능숙한 승마 솜씨로 포위를 뚫어가며 마족들을 제압했다.
하지만 이대로 모든 마족들을 처치할 것 같던 방랑 기사도 조금씩 지친 기색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방랑 기사는 부상당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지 몸을 제대로 지탱하지 못했다.
그의 공격은 조금씩 무뎌지고 적들의 공격도 제대로 피하지 못했지만, 그는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라티야를 구하기 위해 계속 공격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벗어나 이 상황을 알아차린 라티야는 방랑 기사의 등장보다 그의 움직임에 더 놀라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다리 때문에 조금 어색해 보였지만, 어렸을 적 자신을 구해준 기사 롤랑과 똑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온전히 몸으로 받아내 갑옷은 처참히 구겨지고 파괴되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위험에 처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미 목숨은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방랑 기사의 돌격에 라티야는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아저씨! 전 괜찮아요! 도망가세요!"
계속해서 도망가라 외쳐도 그는 자살과도 같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고, 그의 빛이 모두 꺼져갈 때쯤 라티야에게 도달했다.
방랑 기사는 부상당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와 간신히 검을 의지한 채 라티야를 바라봤다.
그의 몸은 무모한 돌격으로 생긴 상처로 가득했고 라티야는 이를 보며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찌할 줄 모르고 계속 울고 있는 라티야를 본 방랑 기사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말을 잘 안 듣는구나. 라티야."
“아저씨.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치료해드릴게요.”
“난 괜찮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방랑 기사는 라티야의 손길을 제지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라티야. 아직도 기사가 되고 싶으냐?”
“네. 아저씨처럼 … 멋진 기사가 되고 싶어요.”
그녀의 진심 어린 대답에 방랑 기사는 걱정과 애정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 기사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기사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넌 충분히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
말을 마칠 때쯤 마을 입구에는 멀리서 뛰어온 마리가 다친 아저씨를 보며 놀라 외쳤다.
"아저씨!!"
방랑 기사도 마리의 외침이 들렸던 건지 희미해지는 그의 숨소리와 함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라티야. 이제 고개를 들어라. 그리고 마리를 지켜주렴. 이건… 내 보답이다.”
방랑 기사는 마지막 말과 함께 라티야에게 자신의 기사 증표를 건네고 마지막 숨을 거뒀다.
그리고 그의 목에는 예전에 선물한 표범 문양 펜던트가 망가진 갑옷 사이에서 흘러나와 매달려 있었다.
오랫동안 소중하게 지니고 있었는지 펜던트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멀쩡해보였다.
그걸 본 라티야는 자신의 행동으로 너무나 큰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아저씨를 붙잡고 오열했다.
방랑 기사의 저돌적인 공격에 당황한 마족들도 그의 죽음을 보자 다시 사기를 회복해 라티야와 마리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호흡이 돌아온 라티야는 그동안 봉인해온 ‘쿠자’를 사용해 마족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마력 무장된 랜스의 쏜살같은 일격에 마족들은 일렬로 몸이 꿰뚫리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절명해갔다.
어렵사리 공격을 해봐도 마력 무장의 단계까지 오른 라티야는 ‘쿠자’로 공중에 마법진을 만들어 쉽사리 피해버렸다.
압도적인 공격 중에도 사냥의 호흡이 끊기지 않게 숨을 고르며 공격하는 그녀는 마치 작은 사냥감에도 최선을 다하는 맹수 같았다.
‘쿠자’를 사용해 공격하는 그녀는 지금까지 보여준 직선적인 움직임이 아닌 ‘검은 표범’처럼 변칙적이면서도 신속한 형태로 변형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그녀의 움직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마족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져 결국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는 마족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마지막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사냥을 계속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 모든 마족들이 쓰러지자 라티야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방랑 기사에게 다가갔다.
검에 기댄 채 죽음을 맞이한 방랑 기사는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않고 올곧은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울음을 참으며 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마리가 있었다.
"아저씨... 일어나 봐요. 장난치는 거죠?"
마리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차갑게 식은 그의 손을 잡으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아저씨. 거짓말이죠? 지금 장난치는 맞죠?”
하지만 방랑 기사의 대답은 들을 수 없었고 마리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계속해서 그를 불렀다.
마족들을 처리하고 돌아온 라티야도 침통한 표정으로 마리 뒤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무모함이 빚어낸 이 상황을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워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방랑 기사를 보며 오열하던 마리는 뒤에 말없이 서있는 라티야를 보더니 분노를 참지 못하고 때리며 말했다.
"다 너 때문이야! 라티야! 아저씨가 죽은 건 다 너 때문이야! 저리 가! 꼴도 보기 싫어!"
마리는 방랑 기사의 죽음을 라티야의 탓이라 질책했다.
그녀의 질책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라티야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되뇌었다.
아저씨의 말을 듣고 마을을 우회했더라면, 냉정하게 기사 흉내를 낼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쿠자'를 사용했더라면, 아니 자신이 기사가 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저씨는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가슴을 내리치던 마리가 조금씩 손에 힘이 빠지며 눈물만 흘리자 라티야는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
"미안해. 마리. 내 잘못이야."
라티야는 마리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자신 때문에 죽은 방랑 기사를 애도하고 있을 때, 마을에는 국경 기사단이 도착해 상황을 파악했다.
기사단은 라티야 덕분에 무사히 도망친 시민들을 보호하고 마을을 정리했다.
그리고 한 기사는 격전지 중앙에 있던 라티야와 마리에게 다가와 상황을 알아챈 듯 위로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늦었군요. 이분의 시신은 저희가 수습하겠습니다.”
위로의 말을 건넨 기사는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방랑 기사를 살피다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이분은?”
기사의 반응에 롤랑의 곁을 지키던 마리는 시신을 수습해 주던 기사에게 물었다.
“아저씨를 아시나요?”
“네? 네. 이분은… 저희 기사단 소속이셨던 롤랑 님이십니다.”
그 기사는 방랑 기사를 알아보는 건지 그에 대해서 말해줬다.
“롤랑 님은 제가 막 태양 기사단에 합류했을 때, 이미 기사단 내에서도 섬광 기사라는 이명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전장의 선봉에서 신속하고 정확한 돌격으로 적들을 섬멸해버리는 말 그대로 섬광과도 같으신 분이셨습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절대 모른 채 하지 않고, 어떤 상황이든 기사도를 실천하시려는 롤랑 님은 기사단의 우상이셨지만, 한편으로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존재셨습니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기사단의 체계조차 따르지 않고, 홀로 돌격하는 일이 잦으셨던 롤랑 님은 전장에서 항상 제일 위험한 곳까지 돌격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날도 국경 근처의 마을을 습격하는 마족들을 처치하기 위해 마을로 향하던 때였습니다. 롤랑 님은 마족에 쫓기는 아이를 발견해 기사단의 진형을 벗어나 홀로 아이를 구하러 가셨습니다. 롤랑 님의 돌발 행동에 기사단은 미처 대처하지 못했고, 무사히 아이를 구하신 듯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함정에 빠져 버리시고 말았죠.
분노에 가득 찬 마족들은 롤랑 님을 끈질기게 놔주지 않았고, 결국 다리 크게 다치신 상태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하지만, 다리에 입은 부상으로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 롤랑 님은 빛을 잃어버리셨습니다.
그 이후 매일 술을 마시며, 작은 일에도 화를 내시고, 불만과 불평만 늘어놓는 패배주의자가 되셨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단을 떠나셨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소식조차 들리지 않고 다들 길거리에서 객사한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을 때, 마상창시합에서 롤랑 님을 봤다는 소식을 들려왔습니다. 전장에서 돌아와 상금만 노리는 까마귀 기사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사람들을 지키다 돌아가셨더니… 저희가 롤랑 님을 오해하고 있었나 봅니다.”
기사는 롤랑의 이야기를 해주고는 정성스럽게 시신을 수습해 주었다.
마리와 라티야는 롤랑의 죽음으로 더 이상 여정을 진행하지 못하고, 마리의 마을로 돌아와 그가 항상 앉아있던 마을 어귀에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한참을 둘이 롤랑의 무덤 앞에서 우두커니 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마리는 그동안 말해주지 않았던 롤랑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아저씨를 처음 만난 건 네가 날 구해준 날로부터 한참 후였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마을을 재건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이 자리에서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며 우리를 보고 있었어.
나는 매일같이 술만 마시고 구경만 하는 아저씨가 얄미워서 매일 같이 찾아와서 잔소리를 퍼부었지. 술 마실 힘이 있으면 와서 우리 좀 도와 달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자기는 이미 도와줬다며 지금은 자기를 도와 달라는 거야. 글쎄. 그때는 그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매일 같이 아저씨를 괴롭혔어.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저씨가 나를 비롯해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봐 주기 시작했어. 항상 이곳에서 마을을 지켜보다, 어느 날 훌쩍 떠났다가 돌아온 날에는 말 그대로 잔치를 벌이는 날이었지.
무뚝뚝한 아저씨였지만 어디선가 벌어온 돈으로 먹기 힘든 고기이며, 선물까지 잔뜩 사다 주셨거든. 그런데 이제 알게 되었어. 아저씨는 그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마상창시합에 나가 우리들을 위해 돈을 벌어 오셨던 거야. 아무 인연도 없는 우리를 위해서 말이야.
라티야. 내가 그때 아저씨한테 잔소리하지 않았다면, 아저씨는 아직도 여기서 편하게 술을 드시고 계실까?”
"...."
"라티야. 이만 떠나 줘. 널 보면 자꾸 그날의 아저씨가 떠올라."
"... 알았어. 마리."
마리의 말에 바깥세상에서 유일하게 있을 곳을 잃은 라티야는 허망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정글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정글로 돌아가기 걸어가던 라티야는 자신이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나와 롤랑을 만났던 그 초원에 들어섰다.
초원은 석양이 비치며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따듯한 마지막 햇살에 얼어붙은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이려는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초원에 눈을 감고 가만히 서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지금의 자신을 돌아봤다.
처음 바깥세상에 나와 자유를 느끼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롤랑을 만나 기대하고, 기사가 되겠다는 설렘을 느낀 모든 것의 시작이던 이 자리에 다시 선 지금은 죄책감과 좌절감만 남아 있었다.
왜 자신이 기사가 되려 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 라티야는 조금씩 차가워지는 주위 공기를 마시며 눈을 떴다.
완전히 해가 진 초원은 차가운 공기와 어둠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라티야는 자연스레 방향을 헤아리기 위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에는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빛이 비추고 있었고, 그녀는 별빛을 보자 자신을 구해준 기사 롤랑과의 옛 대화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기사? 기사가 뭐예요?"
"음... 기사는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사람이지."
"아, 그럼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알려주는 별빛 같은 거네요?"
"별빛?”
“네. 별빛은 길을 잃어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잖아요.”
“음... 뭐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라티야는 길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세상을 떠난 롤랑이 별빛으로 방향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도와주라고.
누군가 길을 잃으면 곁에 있어주라고.
별을 보며 자신이 왜 롤랑을 동경했는지 깨달은 라티야는 눈물을 흘리며 별빛을 보고 중얼거렸다.
“… 멋진 기사가 될 필요는 없는 거였어. 위험에 처한 사람들 구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별빛이 되면 되는 거야.”
그리곤 저 멀리 어스름이 보이는 정글을 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언니. 난 아직 정글에 돌아갈 때가 아닌 것 같아. 사람들에게 별빛이 되어줄 수 있는 그때, 그땐 돌아올게."
다시 마음을 다잡은 라티야는 정글을 등지고 굳은 표정으로 세상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
.
.
몇 달 후.
뜨거운 여름, 남방 대륙 북부 어느 도시.
도시의 중앙 광장에는 아름다운 조각상을 중심으로 분수가 화려하게 뿜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가로수의 그늘에서 땀을 식히며 아름다운 분수를 보곤 감탄할만했지만, 실상 들려오는 것은 탄식과 두려움이었다.
"어머, 이걸 어떡해요."
"이봐요. 저 강도 좀 말려보세요."
"아잇,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주변 시민들은 광장 중앙에서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는 한 강도를 보며 애가 닳았지만, 아이의 목숨이 달려있어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강도는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서 소매치기하다 병사에게 발각됐는지 어린아이를 인질로 붙잡고는 병사들을 협박했다.
"가까이 오지 마.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면 이 아이의 목숨은 없어!"
강도의 협박과 어린아이의 겁에 질린 표정을 본 병사들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로브를 두른 여전사가 인질극이 벌어지는 현장으로 다가오며 두르고 있던 로브를 벗어던졌다.
거대한 랜스를 등에 메고 표범 형상의 갑옷을 착용한 여전사는 구릿빛 피부의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이국적인 모습의 여전사의 모습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인질극이 아닌 여전사에게 시선이 쏠렸다.
여전사는 시선을 충분히 끌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더 가까이 가면 아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아이와 10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에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여전사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인질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모두가 이 여전사를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중년의 남자가 여전사를 알아보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저, 저 사람은 혹시! 마창전사 라티야?”
남자의 외침에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듯 수군거렸다.
“아니, 라티야라면 그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용병 아니에요?”
“어허, 도와주기만 하면 다행이지요. 도와는 주는데 주변에 물건들이… 아휴. 입에 담기도 무섭네요.”
사람들이 수군거림이 잦아드는 순간, 강도의 뒤편에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익~!
호각 소리에 깜짝 놀란 강도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쳐다보았고, 그 짧은 순간 여전사는 왼손에 마법진을 형성하더니 마법 갈고리를 발현해 강도에게 쏘아져 나갔다.
쨍그랑!
강도가 잠시 뒤를 쳐다보고 다시 정면을 볼 때는 이미 아이를 위협하던 무기가 여전사의 랜스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여전사는 곧장 아이를 강도에게서 낚아채 거대한 조각상에
‘쿠자’를 쏘아 아이를 구해냈다.
아이를 구한 여전사를 본 시민들은 ‘라티야’의 이름을 외치며 박수와 환호 소리가 광장에 메워갈 때, 도시의 명소 중의 명소로 꼽히는 조각상에 금이 가며 쓰러져 버렸다.
조각상이 넘어져 부서지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의 환호 소리는 사그라들었고, 대신 경악스러운 표정과 탄식에 가까운 비명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여전사는 아이를 살피며 말했다.
"얘 괜찮니?"
"네."
갑작스러운 전개로 아이가 조금 놀란 듯했지만, 방긋 웃으며 여전사에게 말했다.
"언니는 누구세요?"
"나? 나는 '라티야'야."
“… 라티야.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건 제 보답이에요.”
"... 고마워. 잘 먹을게."
아이가 라티야에게 사탕을 건네주며 감사 인사를 하는 동안, 시민들은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지 환호를 해줘야 하는 상황인지 혼란스러워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휴. 아까 말해줬잖아요. 그 도와는 주는데 주변의 물건들이 다 박살이 난다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조각상이 부서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수군대고 있었다.
라티야도 이제서야 이 상황을 알아채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지키고 있던 병사를 찾았다.
그녀는 병사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사죄의 의미로 자신이 차고 있던 돈주머니를 건네며 말했다.
"조각상은, 미안해요. 이게 제 전 재산이에요. 그럼 이만."
“아. 아네.”
돈주머니를 받은 병사는 아직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라티야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쿠자'를 사용해 빠르게 광장을 빠져나왔다.
시민들은 아이를 구한 영웅이자 도시의 조각상을 부숴 버린 파괴자를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해하며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만 넋을 잃고 바라봤다.
광장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라티야는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다시 로브를 둘러 전사복을 가린 후 중얼거렸다.
“… 조각상. 많이 비싼 거였으려나. 그래도, 가진 돈은 다 드렸으니, 너무 화내시진 않겠지.”
또다시 사고를 쳤다는 충격에 좌절감이 들었지만, 손에 들린 사탕을 보고 방긋 웃던 아이를 떠올렸다.
“그래도 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좌절감에 빠져 있던 라티야는 아이의 미소를 떠올리며 기운을 되찾고 다음 마을로 가기 위해 성문을 나섰다.
성문을 지나 길가에 꽂혀 있는 이정표를 잠시 보던 라티야는 다음은 어디로 향할지 고민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어딜까 고민하던 그녀는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에는 그녀가 찾던 별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잠시 손으로 태양을 가리고 하늘을 바라보던 라티야는 태양이 떠있는 쪽을 등지고 걸어갔다.
그리고 길을 걸으며 아이가 준 사탕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입에 넣고 중얼거렸다.
“... 너무, 달아.”
글: 히안스 / 그림: kingseo, jin, 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