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letty

콰앙!

……….
…….
….


"으아앙! 레티...! 레티가 또…!!!"


눈처럼 내리는 흙먼지 사이로 애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자, 창틀에 기대어 있던 한 소녀가 킥킥대며 웃었다.

"우후후, 대성공."

벅차오르는 강렬한 재미와 순수한 만족감을 주체하지 못해 제자리에서 방방 뛰던 소녀는, 이어서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어 안뜰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솜사탕 색의 연기를 향해 두 손을 쭉 뻗었다. 그리고는 마치 산 위의 맑은 공기를 마시려는 사람처럼 양팔을 앞으로 쭉 뻗어 연기를 자기 쪽으로 끌어모은 후 크게 들이마셨다.

"음, 좋은 향기."

그러나 소녀와 달리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진 동네 아이들, 그러니까 소녀와 비슷한 또래의 장난꾸러기 패거리들은 아직도 폭발의 여파를 떨쳐내지 못한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와중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한 녀석이 연기를 들이마시기에 여념이 없는 소녀를 향해 외쳤다.
까까머리에 그 나이치고는 제법 큰 키로 보아 무리 중 대장 노릇을 하는 녀석임이 틀림없었다.

"야, 웃어? 지금 너 때문에 다 죽을 뻔했어!"
"…응?"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외침에 소녀는 꿈에서 방금 깨어난 듯 흠칫 놀라더니, 토끼처럼 순진무구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태연히 답했다.

"안 죽어. 이 정도로는 아무도 안 죽어. 봐, 나도 안 죽었잖아."

천사같이 사랑스럽고 낭랑한 목소리는 꼭 저에게 실험이라도 해본 양 묘하게 자신감 있는 투였다. 그리고 곧이어 그 의미심장한 부조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닫자 애들은 등골이 서늘한 듯 몸서리를 쳤다.

"저 '별종'…. 진짜 이상해."

'별종'이라고 불린 소녀는 확실히 눈앞의 아이들과 달랐다.
범상치 않은 말과 행동, 값나가 보이는 예쁜 원피스 같은 건 차치하고서도, 장난기로 반짝이는 소녀의 예쁘고 커다란 '회갈색 눈동자'나 등을 넓게 덮는 '구름빛 머리칼'은 '검은 머리칼에 황갈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들' 무리 사이에서 확연히 눈에 띄었다.
우유처럼 허연 낯빛과 또래보다 훨씬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소녀에게선 한눈에 봐도 오랜 기간 실내 생활을 해온 티가 났다.

"왜 자꾸 우리를 괴롭히는 건데? 넌 이딴 게 재밌냐고!"

"음. 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레티의 피는 색목인의 피가 섞여서 더럽다.', '혼혈 놈들은 이상하게 생긴 데다 하나같이 색목인에 빌붙은 기회주의자다.', '여기 동방 땅에 더러운 피가 설 자린 없다.'라고. 또 나보고 '더러운 혼혈'이라고도 했던 거 같은데. 기억나, 로렌조?"

까까머리 로렌조가 움찔하자 소녀는 기쁜 듯 볼에 한 손을 가져다 대고 활짝 웃었다. 상대의 기세가 꺾이고 판세가 자신에게 유리해지는 순간. 소녀는 바로 그 순간의 스릴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 그건…! 저번에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런 말한 거, 우리 부모님이 알면 어떨 거 같아? 특히 '우리 아빠'가 알면? 아마 네 가족은 전부 직업을 잃을걸? 물론 디에고랑 산티노네 가족도 전부 다."
"……."

날 선 대화 내용과는 달리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띤 소녀는 계속해서 로렌조를 여유롭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너희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어. 난 너흴 괴롭히려는 게 아니야. 그냥 재밌게 놀고 싶은 거지. 너희도 매일 몰려다니면서 재밌게 놀잖아? 그러니 나도 내 '친구'랑 신나게 노는 것뿐이야. 여기, 내 친구 '새총이'랑."
"…너 지금 우리한테 폭약 쏘는 게 다 재밌는 놀이라는 거냐?"
"응. 맞아."

소녀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맞장구를 치자 로렌조의 얼굴은 분노로 점차 달아올랐다. 너무나 태연자약한 태도나 목소리도 약이 오르지만, 특히 소녀 특유의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 무표정일 때에도 어딘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같은 그 얄미운 입꼬리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부득부득 이를 갈던 까까머리 소년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버럭 외쳤다.

"…너 이대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아? 그동안 네가 저지른 일 전부 네 부모님한테 말할 거야. 오늘 폭탄 터트린 건 물론이고 그동안 있었던 일까지 싹! 디에고한테 새총 쏘고, 산티노 옷 불태우고, 불똥 튀겨서 내 머리카락 태워 먹은 거까지 싹 다 말할 거라고!"

그러자 빤히 관망하고 있던 소녀는, 볼에 가 있던 손을 슬며시 입가에 대고선 콜록콜록 기침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맘대로 해. 어차피 네 말은 아무도 안 믿어 줄 텐데. 너도 알잖아? 나 엄청 연약한 거."
"으으…!!! 저 자식이 진짜…!!!"

열세에 몰린 소년은 씩씩대며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로 주먹을 높게 쳐들었다.
그러나 주위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멍하니 서 있던 몇몇 애들이 번개처럼 재빨리 자신들의 대장을 가로막았다.

"너희 이거 안 놔? 젠장…!"

"그, 그러지 마, 대장. 괜히 일이 커지면 우리만 큰일 나."
"그래, 로렌조. 산티노 말이 맞아. 쟨 어차피 말이 안 통하는 애야. '별종'이잖아."

한참을 붙잡혀 몸부림치던 로렌조 녀석은, 결국 동료들의 간곡한 만류에 못 이기는 척 쳐들고 있던 주먹을 내렸다. 금세 풀이 꺾인 걸 보아하니 금방 꼬리를 내리면 제 패거리 앞에서 면이 안 서니까 일부러 시간을 끈 모양이었다. 대신 까까머리 로렌조는 과장된 몸짓으로 옷을 툭툭 털며 외쳤다.

"가자, 얘들아. 저딴 녀석은 그냥 평소처럼 무시해버리자고. 어차피 쟤는 '혼자'야. 제대로 된 친구도 하나 없어서 웬 '새총'을 친구라고 하잖아?"
"그래, 맞아. 제대로 된 친구도 없는 게."
"맞아, 결국 우리한테 장난치고 매달리는 것도 다 외톨이가 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냐?"
"새총이 친구라니, 진짜 웃긴다니까. 으헤헤, 완전 바보 같아."

면전에서 실컷 험담을 늘어놓고 다시 기세등등해진 로렌조 패거리는 여전히 오묘한 미소를 띠고 선 소녀를 향해 히죽대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뼈 아픈 한 마디를 남긴 채 활기차게 붐비는 거리를 향해 사라졌다.

"레티! 좁은 방구석에서 부모님이랑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아라. 우린 다 같이 멋있는 거 보러 간다!"

.
.
.

"아이고, 우리 공주님!!!"

잠시 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벌컥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난 건 사색이 된 소녀의 부모였다.
말쑥한 옷을 입은 풍채 좋은 사내와 소녀처럼 밝은 구름색 머리칼을 가진 색목인 여인이 허겁지겁 방 안으로 들어와 울먹이는 딸을 다독였다.

"레티야, 괜찮니? 밖에서 무시무시한 굉음을 들었다. 우리 예쁜 딸, 많이 놀랐지? 응?"
"아빠…, 애들이 내 창문에 뭘 던졌어요. 애들이 나랑 놀기 싫대요. 색목인 피가 섞여서 머리색도 눈 색도 다 이상하대요."
"그래, 그래. 이제 다 괜찮다. 다 괜찮아. 아빠가 녀석들을 혼쭐 내줬으니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다."

소녀는 일부러 품에 고개를 푹 묻으며 최대한 울먹거리는 소리로 다정하게 어르는 소리에 맞장구쳤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두 눈에 방울방울 맺힌 눈물은 영악한 소녀가 부모님의 기척을 느꼈을 때부터 미리 준비해둔 것이었다.

"그나저나 자꾸만 괴롭힘이 심해지니 큰일이구나. 이제는 네가 자기들에게 폭탄을 던진다느니, 새총을 쏜 다 느니 하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까지…. 이렇게 몸도 마음도 여린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누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지, 원."

"걱정 말 거라, 레티야. 아빠가 아주 힘이 센 거 잘 알지? 여리고 천사 같은 내 딸을 모함하는 놈들은 말 한마디면 전부 끝장이다. 응?"
"응, 아빠…."

딸을 안은 채 핏대 세워 한참을 열을 올리던 사내는 삽시간에 다정한 얼굴을 하더니 까딱까딱 손짓했다. 그러자 곧 하인 몇 명이 나타나 소녀에게 거대한 선물 더미를 내밀었다.

"자, 이건 우리 딸을 위한 선물이다. 전에 레티가 꼭 가지고 싶다 했었지? 그래서 아빠가 특별히 힘 좀 썼단다. 분명 네 마음에 쏙 들 거다."
"와, 정말 기뻐요…!"

물건을 한 아름 안아 든 소녀가 사랑스럽게 활짝 웃자 부모의 만면에도 커다란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우러나온 사랑의 마음을 담아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보물에 있는 힘껏 입을 맞춘 후 흡족한 듯 방을 나섰다.

"……."

비로소 홀로 남은 소녀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녀의 방은 저택에서도 가장 넓고 전망 좋은 방이었다. 고운 색으로 칠해진 장식장, 책상 따위의 가구 위에는 온갖 장난감과 인형, 각종 실험 도구가 어지럽게 놓여있고, 책장에는 문학과 과학, 지리와 예술을 넘나드는 책들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그 나이대 아이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 방 안 한가득 꽉 차 있었다.
소녀는 재빨리 설레는 표정으로 자신이 안고 있던 선물들을 바닥에 하나하나 늘어놓곤 북북 포장지를 뜯었다.
수많은 선물 중 소녀의 간택을 받은 건 다름아닌 서역의 언어가 쓰인 연금술 키트였다. 한껏 들뜬 소녀는 키트를 풀어 책상에 늘어놓곤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철과 유리로 된 다양한 형태의 도구들과 용도를 가늠할 수 없는 각종 화합물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소녀의 두 눈동자가 창 너머로 쏟아지는 지는 해에 반짝거렸다.

"이거론 어떤 색 불꽃을 만들 수 있을까? 내일은 이걸로 놀자. 새총아."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외견을 한 소녀 '레티'는, 벌써 몇 번째 크고 작은 폭발 전력이 있는 악동이었다.
아니, 사실은 폭발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동네 아이들 패거리가 증언했던 것처럼 남에게 새총을 쏘고 돌을 던지고 가끔은 작게 불을 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복수나 원한 등 악한 목적이 있거나 남을 해칠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소녀는 그저 남들처럼 '재미있는 놀이'를, '제 방식'대로 즐겼을 뿐이었다.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만드는 '아주 조금 과격한' 놀이를 말이다. 소녀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바로 폭발이었다. 말 그대로 폭발이 좋아 미칠 지경이었다. 종일 폭발을 상상하고 있으면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자꾸만 괴롭힘이 심해지니 큰일이구나. 이제는 네가 자기들에게 폭탄을 쏜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엄마의 걱정스러운 말로 보아, 로렌조 패거리는 기어이 고자질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레티는 창틀에 쌓인 작은 화약 티끌만큼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모든 패를 따져보았을 때, 어차피 우위에 있는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소녀는 남들보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잇속에 밝았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의 입지와 영향력을 판단하고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기.
자신이 가진 여러 '패', 예를 들어 '남의 약점'이나 '자신의 순해 보이는 외형이나 이미지' 따위를 활용해 관계의 우위를 점하기.
이것들은 바로 소녀 '레티'의 가장 뛰어난 특기이자, 일종의 본능이었다.

소녀는 굳이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비교적 쉽게 모든 일을 돌파해 나갈 수 있었다.
심지어 아까와 같은 장난, 예를 들어 방화와 폭발 같은 과격한 일의 뒤처리마저도 소녀에게 있어선 손뼉을 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지금처럼 자신이 가진 패를 적절히 이용해, 그러니까 천사 같은 웃음 또는 눈물을 앞세워 어른들 뒤에 숨어 곤란한 상황을 적당히 피해 가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영악한 악동 소녀는 언제나 여유만만하고 대담하게 행각을 저지르곤 했다.

물론, 소녀 레티가 날 때부터 '위험한 장난에 몰두하는 비뚤어진 악동'이었던 건 아니었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자면 악동이 탄생하게 된 저변에는 다소 어둡고, 약간은 서글픈 이유가 있었다.

먼저, 아까 보았던 소녀의 부모는 여기 동방 왕국 '리온', 도시 '발라'의 부유한 무역상이었다.
일찍이 바다 건너 서역의 여인과 혼사를 맺은 소녀의 아버지는 대륙 간 교역으로 막대한 자본을 벌어들인 사업가였는데, 오로지 수완과 돈만으로 견고하고 단단한 신분 계층의 벽을 뚫은 유력 신흥 계급의 인사이기도 했다. 졸부, 색목인에 빌붙은 기회주의자라는 시기 어린 비난이 쏟아져도 꿋꿋이 제 갈 길을 간 부부. 그들은 돈의 힘을 빌어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저를 닮은 사랑스러운 아이만은 도통 얻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다년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레티가 태어나자, 그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었다. 진주같이 곱고 예쁜 아이, 그러나 연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은 고운 딸은 부부의 제일가는 보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딱 한 번 소녀가 병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오갔다. 보통의 부모도 숨이 넘어갈 듯 말 듯한 아이를 보면 눈물을 참을 수 없는데 소녀의 부모는 오죽했겠는가?
있는 대로 돈을 퍼붓고 갖은 인맥을 동원해 간신히 아이의 목숨을 살려낸 후, 그들은 굳게 다짐했다.
'여리고 연약한 이 아이를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지켜내야만 한다. 철저히 보호해서, 상처 입지 않고 우리 곁에 오래 머무르도록 해야 한다.'라고.
그리하여, 레티는 마치 고급 새장에 갇힌 파랑새처럼 대부분을 집 안에서만 키워졌다. 인생의 거의 모든 대소사가 전부 저택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만나는 사람들도 여러 이유로 저택에 찾아오는 이들을 빼면 언제나 비슷비슷했다.
연약하고 잔병치레 많던 때가 훌쩍 지나 이제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는데도, 이제 학교에 가 수학을 하며 친분을 나누는 법을 배울 때가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는 소녀가 세상 밖에 나서는 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소녀의 핏줄에는 '동방인'과 '색목인'의 피가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깟 색목인 혼혈이 뭐가 대수냐 싶겠지만, 이곳 동방 왕국 '리온'에서 혼혈이라는 건 꽤나 복잡 미묘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 동방 왕국 '리온'은 동방의 그 어느 국가보다도 바다 건너의 문화와 종교를 빠르게 받아들인 나라였다. 그리고 레티의 고향인 도시 '발라'는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라는 특성상 다른 지역에 비해 색목인을 훨씬 자주 볼 수 있는 환경이어서, 흑발 머리와 갈색 눈을 가진 인간 무리들 사이로 다양한 색깔을 지닌 이들이 심심치 않게 활보하였다.
하지만 접촉의 빈도가 약간 늘어난다고 해서 오랜 기간 뿌리내린 이방인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도시 '발라'의 사람들에게 있어 색목인이란 대체로 '미지의 땅에서 불쑥 나타나 상류층과 하류층에 고루 침투하여 터전과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다른 외형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시선은 레티 같은 색목인 혼혈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날 때부터 편견과 동경이 뒤섞인 묘한 색안경과 잣대에 얽매인 그들은,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비뚤어진 시선에 시달렸다. 특히나 레티는 아까 로렌조 패거리가 증명했듯이, 어른보다 훨씬 순수하고 가감 없이 편견을 드러내는 제 또래 아이들의 가혹한 언어와 이유 없는 배척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래도, 어딘가 곁을 내어 줄 애가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때는 어린 레티도 이 세상 어딘 가에 있을 '친구'를 꿈꾸었다.
여러 책에서 보았던 것처럼, 기쁠 땐 함께 웃고 슬플 땐 함께 눈물 흘려줄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길 간절히 바랬다.
그래서 소녀는 또래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꺼이 물질과 마음을 내주었다. 장난감과 맛있는 간식을 내어주고, 저택에 초대해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 보기도 했다. 부탁이 있으면 갖은 방법을 동원해 돕고 요구가 있으면 무조건 응해주었다. 그렇게 하면 무리와 자신을 가로막는 거대한 편견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녀의 작은 세상 안에는 선의를 보여줄 만한 이가 별로 없었다. 소녀로부터 취할 것을 취했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혼자의 힘만으론 물과 기름을 섞을 수 없었다.

자신을 옥죄는 '과보호'라는 울타리와 냉대와 편견이 만들어낸 '외로움' 속에 고립된 소녀는 쓰라린 마음을 부여잡고 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마음을 단단히 고쳐 먹고, 다시 일어서 생존의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주저앉아 울고만 있기엔, 소녀는 너무 영리했을뿐더러 타고난 천성이 포기를 모르는 악바리였다.

'… 다들 나를 무시한다 이거지? 그렇다면, 나를 똑바로 쳐다보게 만들어주지.'

마음속 깊은 곳에 쌓인 울분을 동력 삼아, 저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어린 소녀는 재빨리 취해야 할 것을 가려내 취했다. 바로, '마음을 가장하는 법'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는 아빠와 엄마, 열심히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는 하인과 일꾼들, 각자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부자연스럽게 눈웃음 지은 아버지의 거래인들, 그리고 장난감을 얻기 위해 억지로 친근한 척하는 또래 아이들. 다들 하나같이 속으론 딴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겉으론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하나를 굽히고 둘, 셋을 취하기 위한 치열한 수 싸움. 끝내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웃으며 서로를 속이고 기만하는 광경. 명석한 레티는 이들을 통해서 겉과 속이 다른 이 모습이야 말로 '관계'의 본질이라는 걸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에 따라 행동했다.

또 한편, 소녀는 금세 '인간 친구'를 대체할 '진짜 친구'를 찾았다.
바로, 자신의 방에 차고 넘치는 '무생물 친구'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곁에 있어준 건 인간이 아니라 각종 장난감, 인형, 그리고 책이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감싸고 이야기를 들어줬으며 항상 자신을 웃게 만들었다. 친구란 무엇인가 떠올려보면, 이들이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소녀의 '진짜 친구'였다.

특히, 여기 이 '새총이'.
나무 새총 한 자루와 작은 돌 한 개면, 자신을 무시하는 녀석들의 이목을 너무도 쉽게 끌 수 있었다. 게다가 얄미운 녀석들에게 한방 먹여주는 재미와 쾌감, 스릴 그리고 그 끝에 얻어낸 '희열'은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 '달콤하고도 확실한 보상'이었다. '새총이'와의 더없이 즐거운 '놀이시간'이 일상으로 자리 잡자, 이제 레티는 인간 친구를 갈구할 이유가 없었다. '새총이'와 함께하면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 잔뜩 일어났다.

고독을 탈피하기 위해 시작된 일탈이 어느덧 '일상'이 되고, 같은 인간 친구를 갈구하던 마음마저 인간 친구 따윈 필요없다는 '확신'으로 변하자 소녀의 일탈은 점점 더 과격한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처음엔 새총, 그다음엔 투석. 어쩔 땐 조악한 소형 고폭탄. 가끔은 작은 방화와 폭발.
부모를 활용해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는 처지를 십분 이용하여 온갖 위험한 물건 들을 들여온 소녀는, 천사 같이 사랑스러운 미소를 띤 채 더 강렬한 스릴과 자극을 추구하기 위한 '놀이법' 연구에 몰두했다. 이제 소녀는 울지 않았다. '진짜 친구'와 뛰어노는 그녀의 얼굴에는 언제나 생기와 활기가 넘쳤다.
배합에 따라 여러 불꽃을 내는 화약처럼, 이렇게 소녀 레티는 여러 요소에 의해 '폭발을 꿈꾸는 악동'으로 거듭난 것이다.

.
.
.

책상에 앉아 한참 동안 정성스럽게 폭발의 상상도를 끄적이던 소녀의 머릿속에 문득 로렌조의 외침이 떠올랐다.

'레티! 좁은 방구석에서 부모님이랑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아라. 우린 다 같이 멋있는 거 보러 간다!'

고심하여 상대에게 반드시 상처를 줄 수 있는 단어만을 골라 내뱉은 말.
정말이지 그건, 현재의 레티에게 가장 깊은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문장의 총체적 집합이었다.

"다들 어디서 뭘 보려던 거였을까? 광장의 근사한 분수와 동상? 아니면 아주아주 크고 웅장하다는 오래된 교회…? 그것도 아니면, 관람객으로 늘 붐빈다는 격투 경기장?"

생전 가본 적도 없는 장소들을 있는 대로 나열하다 금세 상상력이 바닥나버린 소녀는, 분한 듯 침대에 뛰어들어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아무리 까까머리 로렌조 같은 못된 애를 곯려줘도, 결국은 자신은 방안에 갇혀 있는 신세. 아무리 자신이 로렌조보다 몇 배나 똑똑하고 대범하다 해도 그가 앞으로 쌓아 나갈 경험들은 평생 레티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좁은 방구석에서 부모님이랑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아라, 레티!'

조롱 섞인 외침이 귓가에 남아 메아리처럼 맴돌자, 소녀는 두 주먹에 분노를 담아 껴안고 있던 베개를 푹 내리치며 중얼거렸다.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콰쾅-!!!

그때, 어디선가 고막을 찢는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꺄앗…!"

곧이어 굉음이 만들어낸 잔잔한 여진이 저택 안까지 전해지자, 눈이 휘둥그레진 소녀는 안고 있던 베개를 내팽개친 채 서둘러 창문으로 달려가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검푸른 밤의 장막이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서서히 드리우고 있었다. 다시 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소리는 들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아빠…!!!"

서둘러 아래층 응접실에 내려가자, 잘 차려입은 부모님과 하인 몇 명이 모여서 수군수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흘러나오는 몇몇 단어로 보아 아마도 방금 들려온 굉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레티는 서둘러 순진한 눈망울을 장착하곤 부모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엄마, 아빠!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방금 그 소리는 뭐였어요?"
"저런, 우리 레티가 많이 놀랐구나. 일단 자리에 좀 앉으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레티가 응접실 탁자에 앉자, 방금까지 하인에게 뭐라 뭐라 지시하던 아버지는 레티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레티야. 방금 광장에서 '시험 발포'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시험 발포'라고요?!"

레티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말은 폭탄 같은 걸 터트렸다는 말이에요?!"
"그래, 맞다. 레티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이 바로 '에스트레야 해전' 승전 기념일이란다. 작년 이맘때, 우리 리온의 '영광의 함대'가 리온 해협을 침공한 바다 마족들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지. 그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국왕 폐하께서 오늘 하루를 승전기념일로 선포하셨단다. 저녁엔 '발라 대광장'에서 성대한 기념식도 열릴 게야."

…성대한 기념식이라고!
영리한 소녀는 단박에 아까 로렌조 패거리의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약을 올려대더니, 녀석들은 바로 저 '승전기념일 기념식'을 보러 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껏 차려입은 복장으로 보아 부모님 또한 대광장 나들이를 갈 셈이었다. 자신의 딸만 쏙 빼놓고.

"아빠, 엄마. 나만 두고 가지 마세요. 나도 갈래요. 승전 기념식을 꼭 보고 싶어요. 부디 제 청을 들어주세요."

그동안 부모님을 설득할 확률이 가장 높았던 표정과 어투를 장착한 레티는 부모를 번갈아 보며 최대한 간절하게 호소했다. 제발 먹혀라, 제발 먹혀라, 제발 먹혀라!
그러나 잠시 당황스러운 시선을 교환하던 부모님은, 딸의 간청에 마음이 약해진 것 같으면서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레티야, 너도 알잖니. 거긴 너무 위험해. 기념식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 거야. 게다가 아까 굉음 들었지? 도저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다."
"하지만 괜찮아요, 아빠. 전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요. 다른 애들도 다 간다고 했는 걸요. 다른 애들도 다 가는데 저만 못 갈 이유는 없어요."
"저런, 레티야."

아버지는 딸의 구름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넌 다른 애들과 다르잖니. 연약한 아이에게 기념식은 너무 버거워."
"……."

다정함 속의 두꺼운 벽. 이를 영리한 레티가 모를 리 없었다.
더 매달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눈치채자 소녀는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고는 일단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때론 목적을 이루려면 한 발 물러서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게 더 빨랐다.
자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부모의 잔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레티는 천사 같은 눈망울 뒤로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음 계획을 생각했다. 그동안은 부모님의 말을 거역해서 생기는 '불이익'이 나가서 얻을 '이익'보다 크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굳이 애써서 집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만은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만일 오늘을 그냥 넘기고 만다면 평생 동안 로렌조의 모욕이 머리를 맴돌 테지.

'느긋-하게 집에서 구경이나 하라고!'

그때, 레티의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좋거나 싫거나 부모님은 오늘 밤 집을 비울 테니 자연히 감시망도 느슨해질 수밖에 없을 터. 그 틈에 '이 계획'을 실행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터였다.

레티는 부모님이 의심하지 않게 계속 토라진 티를 내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새총이'를 주머니에 살포시 넣고 잠시 때를 기다린 후, 부모님을 실은 마차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
.
.

덜컹, 덜컹, 덜컹.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마차 안엔 여러 소음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가는 인파의 들뜬 말소리나 경쾌한 말발굽 소리. 그리고 소녀의 쿵쿵 뛰는 심장 소리.
부모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창문을 넘은 소녀는 재빨리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들고 집 앞의 거리로 나섰다. 그리곤 기념식을 보러 갓 도시에 도착한 듯한 행색의, 어린아이에게 가장 마음 약할 것 같은 '색목인' 노부부 행인을 찾아 가진 것보다 훨씬 적은 액수의 돈을 보여주곤 부모님을 찾는 걸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당연하게도 눈앞의 가엾은 색목인 아이가 이 도시 부호의 외동딸이라는 걸 알리 없는 노부부는 흔쾌히 아이를 자신의 마차에 태워주었고, 너무도 간단하고 쉽게 레티는 '발라 대광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동방의 도시 거리를 헤매고 있는 아이' 에게 가지는 동정심과 색목인끼리의 동질감을 활용한, 실로 어른들의 심리를 훤히 꿰뚫는 영악한 계획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차가 금세 발라 대광장 인근에 도착하자, 소녀는 어쩐지 허무한 기분에 휩싸였다. 평생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미지의 공간. 그곳은 고작 마차로 15분 남짓한 거리였던 것이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소녀는 자신을 부모에게 직접 데려다 주려는 노부부를 떨치고 잽싸게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노부부는 크게 당황하기만 할 뿐 인파를 뚫고 자신을 바짝 쫓아오진 못했다. 그들에겐 그만한 체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소녀의 예상과 딱 들어맞았다.

소녀는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인산인해인 광장 곳곳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연약한 소녀가 감당할 수 없는 곳이라는 부모님의 엄포와 다르게, 번잡한 축제 현장은 가히 환상적인 곳이었다. 이제 완전한 어둠이 드리운 거리를 캔버스 삼아 번진 수많은 색깔의 빛들, 뿌옇게 오른 연기를 헤치며 오가는 무수한 인파가 소녀의 가슴에 끝없는 생동감과 모험심을 불어넣었다.

"어라? 이건…."

킁킁. 그때, 어디선가 밀려오는 익숙하고도 낯선 향기에 소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매캐하고도 향긋한 타는 냄새. 인공물을 태워야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의 냄새. 이건, 분명히 소녀가 수도 없이 피워 올렸던 바로 그 향. '폭발'의 향기였다.
그 사랑스럽고 익숙한 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분명히 원하는 것을 만나게 되리라. 소녀는 군중을 헤치며 광장의 중심부로, 힘찬 나팔소리와 군중의 환호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흠, 꼬마 아가씨. 미안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앞으로 못 갑니다."

정신없이 인파를 헤치던 소녀의 앞을 막아선 건 웬 '제복'을 입은 남자였다.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포마드로 넘기고 멋들어지게 수염을 기른 그는 기다란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미소 지었다. 검은 바탕에 산호색으로 포인트를 준 제복은 어린 소녀의 눈에도 제법 근사해 보였다.

"어쩌다 색목인 꼬마가 여기까지 온 거지? 부모님께선 어디 계시나?"
"어…, 그러니까…."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굴리며 소녀는 말끝을 흐렸다. 뭐라도 구체적인 답을 하는 순간 자신이 감행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께선…."

뭐가 가장 나은 답이지? 뭐라고 해야 이 상황을 타개하지? 뭘 해야….
그 순간,

"부제독님! 곧 행사가 시작됩니다."

다행히 적시에 찾아온 누군가에 의하여 소녀의 고민은 단숨에 해소되었다.

"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 부관, 이 아이를 부모에게 인계해주게. 아무래도 길을 잃은 모양이야."
"네, 알겠습니다! 부제독님."

곧이어 '부관'의 손에 소녀를 넘긴 '부제독'은 한참 동안 거울을 보며 머리를 넘기다 말했다.

"흠. 기왕 여기까지 온 거, 특등석에서 행사를 관람하는 것도 괜찮겠군. 꼬마 아가씨, 어떤가? 우리 '리온 해군의 자부심'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는 거야."
"'리온 해군의 자부심'이요…?"
"그래. 어디서도 취할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 될 거다."

귀중한 경험. 그것도 로렌조 녀석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생각이 이에 미치자 소녀의 얼굴 위로 천사 같은 웃음이 절로 번졌다. 그야말로 마다할 이유가 없는 완벽한 제안이었다. 소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부대 차렷!!!"

부제독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허공을 울리자, 소란했던 광장엔 일시에 침묵했다. 광장에 들어찬 군중들은 중심부에 선 부제독과 그의 뒤로 열 맞춰 쭉 늘어선 병사들에 주목했다.

"위대한 리온 왕국의 백성들이여! 오늘은 바로 왕국의 자랑, '영광의 함대' 리온 해군이 '에스트레야 해전'에서 거둔 대승을 기념하는 승전 기념일이다!"
"와아아아!"

군중들의 환호성이 허공을 메우자 부제독은 흡족한 듯 말을 이었다.

"영명하신 우리 국왕 폐하의 명으로 오늘 우리 해군은 '에스트레야 해전'을 승리로 이끈 '최강의 병기'를 백성들 앞에 친히 선보이고자 한다."

이어서 부제독이 손짓하자, 뒤에 서있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자기 옆에 놓인 커다란 천을 일시에 걷었다. 그러자 광장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대기 중인 병사들 사이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소녀의 자그마한 입에서도 말이다.

'저, 저런 건 처음 봐….'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는 '그것'과 마주하자 소녀는 그만 숨을 집어삼켰다.
포의 형태를 한 거대한 금속 덩이는 차가운 반사광을 뿜으며 눈앞의 군중들을, 소녀 레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게 닦인 육중한 포신 위로는 생동감 넘치는 바다의 상징물과 전설의 동물이 새겨져 있고, 사람 한 명이 족히 들어갈 만큼 깊고 커다란 포구는 금방이라도 무시무시한 포화를 뿜어낼 듯 검은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소녀는 집에서 챙겨 온 친구 '새총이’를 꺼내 눈앞의 포와 번갈아 보았다.
작은 나무 새총따위 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실로 근사한, 아니, 근사하다는 말로도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는 한 차원 너머의 아름다움이 눈앞에 있었다. 마치 세상에 그것과 자신, 단둘이 있는 것만 같은 황홀한 기분이었다. 이제 한껏 고조된 군중의 열띤 함성이나 부제독이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강인하게 무장한 리온 해군의 체력과 정신! 바로 그 상징이 지금 제군들의 눈앞에 있다. 이 '캐넌' 앞에선 어떠한 위협도 무력하다는 것을, 오늘부로 만천하가 알게 될 것이다!!! 부대 발포 준비!!!"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호령하자, 포 옆에 서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발사!!!!!!"


……
………

콰앙---------!!!!!!

귀가 찢어질 듯한 폭음과 함께, 드넓은 밤하늘 위로 아름다운 불꽃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면을 순차적으로 울리는 강렬한 진동과 코를 찌르는 매캐한 포화.
별 하나 없이 맑은 남색 빛 하늘 위에 번지는 각양각색의 불꽃과 흩날리는 불씨의 황홀한 춤사위.
눈앞의 폭발은 자신이 '새총이'와 노닥거리며 일으킨 폭발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투콰앙-!!!
피융-, 콰콰앙---!!!

연이어 하늘에 쏘아 올려지는 강렬한 빛. 소녀는 온몸에 흐르는 전율에 자신을 내맡겼다.
강렬한 진동이 지면을 타고 올라와 거침없이 혈관을 누비도록, 화산 중앙에서 용 솟는 용암처럼 가슴 속 뜨겁게 벅차오르는 강렬한 감정이 자신을 이끌도록 내버려 뒀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막강한 감정. 뇌의 전극이 증폭되고, 불꽃을 위장 속에 품은 듯 온몸이 뜨겁게 요동치는 아득하리만치 강렬한 자극은 분명, '희열'이었다.

자리에 멍하니 서 하늘과 포를 번갈아 보던 소녀의 뇌리에 문득 어느 동화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바로,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개와 미술관에 숨어든 소년이 거대한 명화 앞에서 눈물 흘리던 장면이었다. 분명 그 소년도 지금 자신의 마음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을 만큼 아득하고 짜릿한 감정에 휩싸였으리라.

'…그래! 난 저런 불꽃을 쏘고 싶어. 장난 수준의 불꽃이 아니라 저렇게 크고 화려한, 제대로 된 불꽃을 만들고 싶어…!'

불현듯, 소녀는 자기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저 '제복 입은 자'들이 되는 것이었다.
장난의 영역을 넘어선 제대로 된 폭발과 친구 '새총이'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력한 '캐넌'. 그리고 자기가 저지르던 여느 장난들과 달리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모두의 허가 아래 정당하게 이뤄지는 '보다 합법적인 폭발'이 저 '리온 해군'이라는 곳에 있었다.

생전 바다를 본 적도 없는 데다 오늘 처음으로 집을 벗어나 본 소녀는, 오직 폭발만을 쫓아 '해군'의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거대한 불꽃 아래서 소녀는 신나게 춤추었다.

행사가 모두 끝나 매캐한 연기가 걷히고, 곧 이어 귀빈석에 앉아 있던 부모가 비명을 지르며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동안에도, 하인들이 자신을 붙들어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집어넣을 때까지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기쁨의 춤을 추었다.


집에 돌아온 소녀는 더욱 엄격하게 출입을 금지당했다.
활짝 열려 있던 창문엔 철창이, 방문에는 견고한 잠금장치가 생겼다.
그러나 소녀의 눈에는 전에 없던 생기가 감돌았다. 그날의 불꽃, 새로운 목적을 가슴에 품은 이상 이전처럼 무의미한 나날을 보낼 생각 따윈 없었다.
대신 소녀는 어떻게 '제복 입은 자'가 될 수 있는지 열심히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딸의 가면을 쓴 채, 운동으로 캐넌을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체력을 기르고 장난을 치느라 쭉 미뤄두었던 공부를 따라잡으며 적절한 때와 기회가 오길 기다렸다.
물론 크고 작은 '폭발'로, 변화에 따른 갇혀 사는 스트레스를 푸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시간이 더 흘러,

"내 딸 레티야. 이제 너는 어엿한 숙녀야.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제발 장난은 이쯤 하려무나."

소녀에게서 의젓한 숙녀티가 나고 이제는 그녀의 부모님도 딸의 기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무렵. 벽지 여기저기에 난 불에 그슬린 자국을 보며 레티의 아버지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너도 언젠간 집을 떠나 새로운 가정을 꾸려야 하는데. 계속 이렇게 말괄량이처럼 굴면, 누가 널 받아주겠니?"

근심걱정 가득한 얼굴 앞에, 레티는 기다렸다는 듯 종이를 내밀었다.
바로 '입학지원서'였다.

"우후후, 마침 절 받아줄 만한 '학교'가 하나 있는데."
"이, 이건…."
"'리온 해군사관학교'예요. 아시죠? 얼마 전에 폐하께서 갓 창립하신 학교 말이에요."
"해, 해군사관학교라고…? 그 말은…, 네가 '생도'가 되겠다는 뜻이니…?"
"네, 그래요. 엄마."

입이 떡 벌어진 부모를 보며 레티는 사랑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예쁜 회갈빛 눈동자에 어린 은은하지만 기이한 안광에 등골이 서늘해진 부모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수년만에 그들은 처음으로 딸의 '진짜 내면'과 마주하고 있었다.

"하, 하지만…. 넌 연약하고… 바깥에 나가면…."

"저런, 그런 말씀 마세요. 이쯤 됐으면 제가 '별종'이라는 거 아빠도 인정하실 때가 됐잖아요. 혹시 알아요? 군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 좀 나아질지도."

그리고 종이를 아버지 앞에 디민 다음, 화려한 반지를 가득 낀 오른손에 친절히 깃펜을 쥐여주며 말했다.

"자, 아빠. 어서 입학 동의란에 서명하세요. 여기 '추천서'에도요. 추천서 내용은 제가 적당히 적었어요. '내 딸 레티는 체력과 정신이 모두 건강하며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이다. 군에 더없이 적합한 자질을 지닌 아이다.' 라고요. 왜 주저하세요, 아빠. 아빠는 힘이 아주 세다고 했잖아요. 그 정도 입김이면, 반드시 먹힐 거예요. 그렇죠?"

-

"부대 차렷!!!"

교내 연병장에 울려 퍼진 구령 소리에 가로등에 앉아 있던 갈매기 몇 마리가 깜짝 놀라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았다.

"다음으로, 에스트레야 해전의 영웅이자 해군사관학교의 교장이신 '블랑코 제독'님의 환영 연설이 있겠다. 생도들은 예를 갖추도록."

수식 가득한 멋들어진 소개 멘트와 함께, 단상 위로 긴 망토를 휘날리며 교장이 등장하자 경직된 자세로 반듯이 선 생도들은 일제히 단상을 향해 경례했다.

"환영한다, 제군들. '리온 해군사관학교'의 자랑스러운 '사관생도'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긴 망토를 휘날리며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중년의 제독은 눈앞의 어린 생도들을 향해 위엄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리온 왕립 해군'은 곧 리온 왕국의 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세계 최강의 범선과 화포로 무장한 세계 최강의 '영광의 함대'이자, 왕국에 봉사하고 백성을 수호하는 참된 일꾼이다. 특히 이곳 '리온 해군사관학교'는 영명하신 폐하의 용단에 의해 설립된 정식 군사 양성소로, 그 누구보다 우수한 엘리트 군인을 양성해 더욱 부강한 국가를 만들어 나가야 할 신성한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제군들은 바로 이 해군사관학교의 첫 기수 생도. 제군들 각각의 등에 영광의 역사를 개척하고 전 세계를 넘어 후대에 리온 왕국의 이름을 길이 빛나게 할 무거운 사명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오직 가슴 속에 자부심이나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한 목적으로 정교하게 나열한 언어들. 하지만 연설이 길어질수록 외려 생도들의 인내심은 더욱더 빠르게 바닥났다.
생도 중에서도 가장 키가 작은 탓에 하필 맨 앞 열 정중앙에 서있던 레티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잘난 척하는 아저씨…. 어딘가 익숙한데.'

그녀는 이미 바닥난 인내심을 열심히 끌어 모아서, '나는 당신의 연설을 최선을 다해 경청하고 있습니다'라는 티를 내기 위해 최대한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부터 제독의 시선이 전열 가운데에 있는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의식한 탓이었다.
비슷비슷한 외형, 즉 '검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가 대부분인 생도들 사이에서 밝은 구름 빛을 띤 그녀는 석탄 더미 위의 흰 쥐처럼 불필요할 정도로 눈에 잘 띄었다.

"제군들은 왕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정예 중의 최정예, 여러 관문을 통과해 자신을 증명한 엘리트들이다. 최선, 그리고 최고의 성과를 보여줄 것이라 믿네."

더욱 극적인 연출을 위해 잠시 말을 멈추고 생도들을 좌우로 굽어보던 제독은, 일순간 절도 있게 손을 올려 경례했다.

그러자 이에 화답하듯 생도들도 힘차게 경례하며 외쳤다.

"위대한 리온에 무궁한 영광을!!!"

.
.
.

리온 해군사관학교.
다른 나라가 한창 백병전이나 마법전을 벌이는 동안 일찌감치 배 위에 오른 '리온 왕국'은 그 어느 곳보다 우수한 '해군'을 보유한 나라였다. 선진화된 화포와 범선 주조 기술을 바탕으로 적국과 마족에게 연전연승을 거둔 리온 해군은 일명 '영광의 함대'로 불리며 각국에 명성을 떨쳤으며, 덕분에 왕국은 인근 해역의 무역로를 장악해 막대한 자본을 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국가에 큰 이익을 가져다준 해군을 어여삐 여긴 리온의 국왕은 본격적으로 엘리트 군사를 양성해 해군의 군사력을 보다 증대하기로 마음먹었고, 이에 왕명으로 가장 서쪽 해안선에 위치한 '후안 영지'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갓 개교한 기관인지라 역사는 지극히 짧으나, 사람들은 학교가 배출할 '영광의 함대'의 최정예부대를 기대하며 많은 성원을 보내고 있다.

'…라고 했었지.'

마차 안에서 몇 번이고 돌려본 유인물 내용을 떠올리며, 레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드넓은 교정을 유유히 가로질렀다.
군사 목적의 건물답게 고풍스럽지만, 어딘가 절제된 양식으로 짜인 학교. 여기가 바로 그녀가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칠 장소였다.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터라 거의 새 건물이나 다름없는데도, 교내에는 코를 찌르는 바다내음이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탓인 모양이었다.
긴 여정 끝에 도착한 '후안령'에서, 가장 먼저 레티를 맞이한 건 바로 이 코를 찌르는 '바다내음'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맡아보는 이 어딘가 비릿하고 묘하게 습한 미지의 냄새는 도시의 소녀에겐 한없이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 속에서 태양과 바람, 소금과 바다생물,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물을 느끼자, 레티는 그 자연의 오묘한 향을 매캐한 포화만큼이나 좋아하게 되었다. 바다내음이란 실로 '자유'에 걸맞은 향이었다.
물론 사관학교는 교정 여기저기에 진동하는 '자유의 향'과는 완벽히 정반대 되는 곳이긴 했다. 병사가 추구해야할 가치는 '자유'가 아닌 '극기' 위에 쌓아 올려지는 것이었으니.

"자원해서 온 거긴 하지만…. 벌써 이렇게 빡빡한데, 앞으론 어쩌면 좋을지 막막하다."
"그래도 제복 하난 근사하잖아. 민간인들은 이 제복을 보기만 하면 껌뻑 죽는다고. 난 그거면 됐어."

교정 곳곳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생도들이 너덧 명씩 짝을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같은 제복을 입어 하나같이 비슷비슷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한 긴장과 설렘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그나저나, 아까 맨 앞 열에 서 있던 녀석 봤어? 색목인 혼혈까지 군에 받아주는 줄은 몰랐는데."
"보나 마나 줄을 대서 들어왔겠지. 쟤를 봐, 체격도 우리 중에 제일 작잖아.”
“…그만 좀 해.”
"만일 서역과 전쟁이 벌어지면 쟨 누구 편에 서려나?"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기회주의자들이니 유리한 곳에 붙겠지. 박쥐같이 말이야."
"이제 그만 좀 하라니까. 말이 너무 지나쳐."

저들끼리 모여 키득대는 불쾌한 대화가 귓가에 닿자 레티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쪽 건물 기둥 쪽에서 생도들 중에서도 덩치가 좀 있는 녀석들끼리 모여 한참을 무어라 쑥덕대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무리 중 가장 덩치가 큰 녀석 하나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하곤 '미안해.'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뭐야, 저건.'

갑작스러운 ‘의문의 사과’에 레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랑스러운 미소로 응수해 주었다.
한적한 시골이나 다름없는 '후안령'까지 왔다 해도, 왕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인재들이 다 모였어도, 여긴 어디까지나 '리온'이다. 이방인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풍토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란 의미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난 드디어 지긋지긋한 방구석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어차피 혼혈 어쩌구 하며 요상한 눈초리를 보내거나 험담을 지껄이는 건 저기 하늘의 갈매기가 깩깩대며 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말그대로 인생에 티끌만큼의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거다.

게다가 주위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게' 많은데! 다른 하찮은 것들에 신경 쓸 이유가 있을까?
마차에서 내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보았던 숨도 못 쉴 만큼 거대한 우아한 '갤리온' 몇 척부터 시작해, 교내 곳곳엔 해군의 기술력을 과시하듯 온갖 무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된 구형 캐넌부터 레티가 어릴 적 그날 보았던 것과 똑같은 캐넌은 물론이고, 이후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개량된 신형 캐넌까지.
바로 이걸 위해서, 그녀는 여기 해군사관학교까지 온 것이다. 오로지 '새총이'보다 '근사한 친구들'을 만나고 제지받지 않는 '보다 합법적인 폭발'과 맞닿기 위한 목적으로.
그러니 검은 바탕에 산호색으로 포인트를 준 이 멋들어진 제복이나 엘리트 병사로서의 드높은 명예, 멍청한 뒷담화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생도 레티."

한참 캐넌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레티는 자신을 불러 세우는 근엄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리온에 영광을!"
"블랑코 제독님의 호출이다. 즉시 교장실로 가도록."
"…제독님, 말씀입니까?"
"그래.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널 찾으시더군.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다."
"네, 알겠습니다."

제독의 호출…? 보통 제독씩이나 되는 상관이 갓 입학한 햇병아리 생도를 찾을 일이 있나? 아까 입교식 연설에서 몇 번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트집 잡힐 짓을 하진 않았는데.
그러나 레티는 이런 일로 전전긍긍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레 겁먹는 법 없이, 늘 대담하고 대범했다.

'그래, 뭐. 혼혈 기회주의자는 기회주의자답게 기회를 잡으러 가볼까.'

불필요한 의구심을 툭툭 털어내고 레티는 교장실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돌렸다.
물론 또다시 자신의 등에 대고 수군대는 생도들의 신경을 ‘사랑스러운 눈웃음’으로 박박 긁어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것 봐. 분명히 줄을 댄 거라니까…."

.
.
.

"생도 레티. 위대한 리온에 무궁한 영광을!"
"기다리고 있었네."

긴 복도 끝에 위치한 가장 큰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벨벳 천으로 빛나는 훈장이 든 액자를 말끔히 닦고 있던 블랑코 제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레티를 반갑게 맞이했다. 뭐라 해야할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일부러 준비한 듯한 참으로 인위적인 장면이었다.
제독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어린 생도의 얼굴을 한참동안 뜯어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제군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나는 아까 입교식에서 제군을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차렸네만."
"…무슨 말씀이신지…."
"그날, 도시 '발라'에서 있던 '승전기념식' 말일세."

아…!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그제야 레티는 여태껏 기억 저편으로 완전히 밀어 두었던 '머리에 포마드를 덕지덕지 바르곤 망토를 휘날리던' 제복 입은 남자, 어린 소녀였던 자신에게 특등석에서 캐넌과 불꽃을 볼 기회를 주었던 '부제독'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때 그분께서 바로 제독님이셨군요. 진작 알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 너무 괘념치 말게. 자넨 그때 길 잃은 어린 꼬마였으니 말일세. 그나저나, 기념식에서 보았던 꼬마가 우수한 인재로 자라 눈앞에 나타나다니. 그간 무슨 일이 있던 겐가? '어떤 계기'가 있었나?"

찰나, 레티는 제독의 질문에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답이 될지 궁리했다. 본능적으로 제독의 질문에서 어떤 '숨겨진 뜻'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지금 닥친 바로 몇 초가 앞으로의 일상에 있어 어떤 분기점이 될 거라는 걸 레티는 직감했다. 그리고, 제독이 원하는 답을 하면, 분명 앞으로 자신에게 이득으로 돌아올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독대한 지 불과 수 분 정도 지났을 뿐이지만, 이 블랑코 제독이란 작자는 확실하게 잘난 척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방에 들어서는 사람이 반드시 늘어선 훈장을 쳐다보게끔 상황을 꾸미는 번거로운 짓을 할리가 없으니.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그날, 제독님이 베푸셨던 호의가 어렸던 저에게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그 밤, 병사들 사이에서 본 기념식은 제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줄곧 해군이 될 날을 꿈꾸어 왔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멋진 제복을 입고서 캐넌에 점화하는 상상을 해왔습니다. 지금도 솔직히 이곳에, 제독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모든 게 꿈만 같습니다."
"오호…. 그랬었군. 내 작은 호의가 어린 자네의 꿈이 되었다니, 이거 영광일세."

채 숨기지 못한 뿌듯한 미소가 남아있는 걸로 보아 레티의 노림수는 완벽히 적중한 모양이었다.

"제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제독님. 정말 감사합니다."

'좋아,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비위를 맞춰주면 되겠군.'
그녀는 특유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독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역시나 욕망이 단순한 자들은 다루기도 무척 쉬웠다.

"그나저나, 자네는 '캐넌'에 관심이 많은가 보군. 방금 자네의 발언도 그렇고, 부친의 추천 서신에도 캐넌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지. 체구는 작지만 캐넌을 감당하기 위해 수없이 강도 높은 체력 단련을 해왔다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제독님."
"그렇다면 자네는 뛰어난 '포병'을 목표로 하겠군."
"네, 제독님. 오직 그것만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열정이 실로 대단하군. 나는 충성심뿐만 아니라 뜨거운 열정을 갖춘 젊은이를 무엇보다 높게 산 다네.”

'캐넌' 얘기에 일순간 생도의 눈이 반짝이자 제독의 만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더 높은 곳을 노린다면 열정이나 충성심만으론 부족해. 군인의 가슴에 진정 필요한 건 야망일세. 야망을 품은 자는 거침없고 물러서지 않지. 단순히 전장에서 승리하는 것, 그 이상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다는 말일세."
"그 이상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거시적인 성취 말이네. 예를 들자면…."

갑자기 제독은 말끝을 흐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잘 다듬은 수염이 자란 턱을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내가 또다시 자네에게 ‘새로운 목표'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리고는 멋지게 망토를 휘날리며 그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레티를 제치더니 선뜻 교장실의 문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뭐하고 있나, 따라오게. 생도 레티."

제독을 뒤따라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교내 중심부 지하에 있는 어느 '무기고'였다.
통로 양쪽에 나 있는 여러 개의 문, 그 내부에는 여러 군수품이나 병기들이 보관되어 있는 듯했다. 이곳까지 오는 길 내내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주야간 순찰을 도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드나드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앞서 통로를 따라 걷던 제독은 마침내 어느 나무 문 앞에 멈춰 섰다.

"생도, 직접 문을 열어보게."
"네, 알겠습니다."

'또다시 극적인 상황 연출을 하고 싶어 하는군. 이번엔 또 어떤 트릭을 쓰려는 거지?'

미심쩍은 눈빛을 감추며 레티는 순순히 제독의 명에 따라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그리고 연이어, 무언가에 쾅 하고 얻어맞은 듯한 엄청난 충격이 그녀를 엄습했다.

"제, 제독님…! 이, 이건……!!!"
"'헤비캐넌'일세. 나의 역작이지."

무기고 한 켠에 가지런히 진열된 몇 대의 캐넌은, 주변에 놓인 다른 일반 캐넌들과 재질부터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근사하고 우아한 황동빛 포신에는 무운을 기원하듯 각종 해군과 바다의 상징이 아름답게 퍼져 있고, 완벽한 원형을 이룬 포구 위로는 해군의 상징 '날개를 펼친 그리핀'이 하늘을 향하여 우렁차게 포효하고 있었다.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자, 특이하게도 포신의 보강부 쪽에 사람이 잡을 수 있도록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게 보였는데, 그 구조로 보아 즉석에서 포탄 장전이 가능한 듯했다.

"아까 말했었지, 군인의 가슴에 진정 필요한 건 야망이라고. 내 야망은 바로 이 '헤비캐넌'이었네. 기존의 포보다 훨씬 가벼우면서도 화력은 그대로 보전한, 포차에 의존하지 않아도 병사가 직접 들어서 조작할 수 있는 막강한 ‘휴대용 대인 병기’ 말일세. 모두가 하나같이 안 된다고 입을 모았네. 이런 고도 기술은 절대 개발 불가능할 거라 했지. 그러나 나는 이 기술의 개발만 성공하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네. 그래서 다년간의 연구를 진두지휘한 끝에, 실전에 투입 가능할 만큼 완성도 있는 시제품을 몇 대 완성해냈지. 그 중 한 대가 바로, 지금 자네 앞에 있는 이 녀석일세."

제독은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헤비캐넌은 그야말로 현세의 화포 기술의 집약체일세. 강하게 단련된 병사가 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경량화 과정을 거친 데다 내부에 다량의 포탄을 보관할 수 있어 장전 과정 또한 혁신적으로 단축되었지. 유일한 단점이라면 아직 상용화하기엔 이르다는 것 하나뿐이네. 느려 터지고 무능한

‘연금술사’들이 오랜 기간과 턱없는 비용을 들여 연금술로 포의 재료가 될 ‘특수한 경량금속’을 제련해야만 하거든. 그러나 나의 탁월한 지휘라면 머지않아 활로를 찾아낼걸세. 암, 그렇고 말고.”
“…괴, 굉장하십니다….”

레티는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제독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아까의 충격 때문에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듯했다.
눈앞에 놓인 우아하고 아름다운 최신형 포는, 어릴 적 '새총이'나 지금껏 보아온 '캐넌'과는 비교조차 안 될 ‘거대하고 강인하고 아름다운 친구'이자 그야말로 상상의 범주를 넘어선 '꿈의 현신’이었다.
이 친구가 뿜어내는 불꽃은 과연 어떨까? 폭발 후 잔연의 향기는? 그날 밤 보았던 찬란한 불꽃들보다 더욱더 뜨겁고 훨씬 더 아름다울까…?
…궁금해. 더 알고 싶어.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 생도 레티. 앞으로 자네가 눈부신 성과를 보여준다면, 이 '헤비캐넌'을 직접 다뤄 볼 기회를 쟁취할 수도 있을 테지. 어떤가? 자신의 힘으로 기회를 얻어낼 텐가?"

여전히 붕 떠있는 듯 아득한 감정 속에서 레티는 상관의 질문을 곱씹었다.
있는 대로 멋을 부리며 생도 앞에서 잘난 체를 하는 제독의 행태는 정말이지 두 눈뜨고 봐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저 꼴불견인 작자는 그녀에게 있어 '헤비캐넌'과 함께 할 기회를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게다가, 생각해보자. 이제 막 입교해 제독과 독대할 수 있는 생도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운좋게 주어진 '과거의 인연'을 유리한 패로 잘 이용하면 엘리트 병사의 명예를 보다 수월하게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유리한 패라면 당연히 손에 쥘 수 밖에.’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블랑코 제독님.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렁차게 외치며 생도 레티는 블랑코 제독을 향해 힘차게 경례했다.

그것은, 짧고도 긴 생도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구호였다.


-


'리온 해군'. 자랑스러운 그 이름.
사자의 발톱이 파도를 가르고 독수리의 날개가 폭풍을 감싸네.
뜨거운 불꽃의 포효 바다에 울려 퍼지면,
잠들었던 바다의 신 깨어나 우리를 축복하리.

매일 아침,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새벽해와 함께 생도들의 우렁찬 군가가 울려 퍼지고 나면, 이어서 고된 훈련과 지루한 강의, 끔은 고난도의 시험이 차례로 찾아왔다. 그리고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맑은 하늘에 달과 별이 걸리면, 때로는 휴식 대신 순번대로 돌아오는 각종 야간 훈련과 근무에 나가서 차가운 밤공기를 마셔야 했다.
‘평범하게 살아온 평범한 인간’의 체력과 정신을 무장시키기 위한 갖가지 활동과 규율의 굴레. 그 속에서 생도들의 해맑던 낯빛은 점차 검게 찌들어갔으나, 레티만은 언제나 나른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참고, 인내하고, 차곡차곡 수를 두며 때를 기다렸다.
반드시 이루어야 만 하는 목적.
제독의 눈에 들어 헤비캐넌을 얻고 전장에서 '합법적인 폭발'을 즐기는 것.'
레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공부면 공부, 훈련이면 훈련. 영악하고 비상한 머리를 굴려 온갖 처세술을 발휘한 레티는 재빨리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우등생'의 이미지를 선점했다. 그리고 작은 체격과 혼혈의 특성으로 인해 자신이 누구보다 눈에 먼저 들어온다는 점과 특유의 사랑스러워 보이는 겉모습을 무기 삼아서, 동기 생도들에겐 '늘 솔선수범하며 어려운 일을 도맡는 작고 사랑스러운 동기', 선생들에겐 '눈빛이 맑고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총명한 학생'이란 각인을 심었다.
발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교내의 사람들은 ‘이 생도’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 섞이지 않을 것만 같던 ‘동방인’이라는 물과 ‘혼혈’이라는 기름도 ‘전우애’라는 거센 파도 속에서 서서히 경계가 흐려지고, 결국 모두들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레티에게 녹아들었다.
이렇듯 짧은 시간, 철저한 계획하에 레티는 ‘리온 해군사관학교’라는 집단에서 도시 '발라'의 '영악한 레티', '과격한 폭발을 꿈꾸는 기행 소녀'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자신을 가장하는 것엔 능숙하더라도, 한편으론 과보호 아래 곱게 자라난 그녀였다. 강압 아래 흘러가는 일상, 엄격한 엘리트 교육 따위가 몸에 맞을 리가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시커먼 마음속엔 하루에도 몇 번씩 학교를 폭파시켜 버리고픈 충동이 들끓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다 불태워버리고 싶네요.’하는 식의 말이 무의식 중에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레티가 분출구로 택한 건 바로 '매일 밤마다 무기고에 숨어들기'였다.
별다른 일이 없는 밤이면 레티는 어김없이 블랑코 제독이 알려준 ‘그 무기고'로 향했다. 사랑스러운 '진짜 친구'가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곳으로.
작은 촛대를 들고 어둠이 깔린 긴 복도를 지나면 곧 인적이 드문 구간. 조심스레 나무 문을 열면 군수품 위로 뽀얗게 쌓인 오래된 먼지 냄새가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 가슴 설레게 만드는 냄새를 따라 킁킁거리며 어둡고 건조한 방안을 사뿐사뿐 거닐다 보면, 어느덧 무기고 중에서도 가장 쾌적하고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곳에 '친구'가 보였다. 크고 멋지고 우아한 '캐넌'이.

레티는 작은 불씨에 의지해 ‘그’의 옆에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캐넌이 마치 커다란 곰 인형이라도 되는 양 두 팔을 벌려 품에 꼬옥 안고 볼을 가져다 대었다.
아, 무생물 만이 가질 수 있는 시리도록 차가운 온도에 레티는 편안하게 두 눈을 꼬옥 감고, 포신에 얹어 둔 손을 움직여 부드러운 러그를 만지는 양 천천히 거대한 금속을 훑었다.

어둠 속이기 때문에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는 디테일, 그러니까 포신에 난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나 불꽃에 녹아 살짝 우그러진 자국, 잘 청소되었지만 여전히 포구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화약의 매캐한 잔향 등이 느껴질 때마다 그녀는 깊은 애정으로 인해 가슴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벅차올랐다.
더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기분이 차오를 즈음이 되면 레티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캐넌'의 포구에 대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속삭였다. 하루 일과, 지금 기분, 종일 머릿속에 떠올렸던 폭발의 상상도 따위. 그리고,

"매일 여기서 갇혀 있으니까 지겹지? 나도 그래. 착하고 싹싹한 척하는 데엔 에너지가 많이 들거든. 그래도, 곧 그날이 올 거야. 우리가 함께할 바로 그날이 말이야. 약속해. 우리 함께, 전장에서 가장 큰 불꽃을 만들자."

하는 '약속'을 자신이 점 찍어 둔 이 묵묵하고 듬직한 친구에게 전부 쏟아부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앉아있다가 몰래 침대로 돌아오고 나면, 어느새 하루의 피로 따윈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에 실려 멀리멀리 사라지고 마음속엔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이 충전되었다.
‘레티’라는 인간의 속성은 군 조직과 완전한 상극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캐넌과의 '랑데부'를 힘의 원천 삼아 숨막히는 압제 속에서 이를 악물고 목적을 향하여 버텨 나갔다.

비밀스러운 일상은 태양 아래 바다처럼 유유히 흐르고, 모든 계획은 순풍을 탄 갤리온 전함처럼 순조로웠다.

그날. 예측이 엇나간 그 순간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랬을 터였다.

"아…. 저…, 그러니까…. 그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자리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요상한 자세로 선 '녀석'은 눈앞의 돌발상황에 어쩔 줄 모르며 삐걱대고 있었다.

"……."
"……."

무기고가 터져나갈 듯한 정적 속, 레티보다 족히 머리 두 개 이상 더 커 보이는 녀석은 어안이 벙벙한 듯 두 눈을 꿈뻑꿈뻑 대고 있었다. 몇 초, 아니 몇 분째 작은 미동조차 없는 걸 보면 아마도 눈앞에 벌어진 진풍경을 이해하느라 필사적으로 분투 중인 듯했다.
하긴, 무리도 아니겠지. 이 야심한 시각에 난데없이 무기고에서 캐넌과 볼을 부비는 사람을 마주친다면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
한참이나 이어진 이상한 침묵. 그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바로 그 녀석이었다.

"저…, 너 ‘레티’ 맞지? 그렇지?"

등불에 비친 꽤 낯익은 얼굴은 분명히 자신의 동기 생도였다. 뭐였더라, 이름이.
그래, '크라디'라는 이름이었지.

"응, 맞아. '크라디'."

불안한 눈빛을 한 가엾은 동기를 안심시키기 위해 레티는 환히 웃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내심 안도했는지,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곤 한층 풀어진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야…? 여긴 ‘무기고’잖아."
"그러는 너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나, 나 말이야? 나야…, 당연히 야간 순찰조라서…."
"아하. 순찰을 무기고 안까지 도는 줄은 몰랐는데."

그녀가 조목조목 말을 맞받아치자 녀석은 왜인지 머쓱한 얼굴로,

"아, 그건…. 찾아야 할 게 좀 있어서. '닻 모양이 새겨진 작은 펜던트' 같은 건데…. 낮에 심부름 때문에 잠시 들렀다가 떨어트린 것 같거든."

라며 변명하듯 덧붙이곤 하하 웃었다. 아무래도 완전히 경계를 푼 모양이었다. 바보같이.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입교식이 있던 날, 자신의 등 뒤에서 수군대던 녀석들 사이에 크라디가 있었다. 생도 무리 중 가장 덩치가 컸던 바로 그 애. 그때 그는 난감한 얼굴을 하곤 '미안해.'라 말했었지.
이후로도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레티는 그가 우람한 겉모습과는 달리 어떤 부탁이든 흔쾌히 들어주는 유순한 녀석으로 평판이 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운 좋게도, 크라디가 찾는 건 바로 레티 자신에게 있었다. 아까 무기고에 막 들어섰을 때 바닥에 떨어져 있던 펜던트를 마침 주머니에 넣어뒀던 것이다.

'이 작은 게, 오밤중에 찾으러 다닐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란 말이지.'

이거야말로 눈앞에 닥친 곤란한 상황을 타개할 최고의 패였다.

시커먼 목적을 사랑스러운 미소로 슬쩍 감춘 채 레티는 사뿐사뿐 크라디의 앞으로 다가가 한 손을 내밀었다.

"네가 찾던 거, 이거 맞지?"

작은 몸에 비해선 조금 큰 하얀 손바닥, 그 위에 놓인 자그마한 펜던트를 보자 크라디는 진심으로 안도한 기색이었다.

"그래, 맞아. 한참을 찾았는데! 정말 고맙다, 레티. 나한텐 정말 소중한 거거든."

그 애의 크고 두툼한 손이 펜던트를 향하려는 찰나, 레티는 재빨리 다음 수를 던졌다.

"대신 오늘 일은 못 본 걸로 해줄래?"
"응…?"
"오늘 여기서 봤던 거, 전부 다 못 본 걸로 해줄 수 있냐고 물었어. 애초에 없던 일처럼 말이야."

당황한 크라디를 채근하기 위해 레티가 성큼 한발 앞으로 다가서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갑자기 그는 비적비적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극명한 체격 차 때문인지 나란히 마주선 둘의 모습은 꼭 작고 흰 '토끼'와 우람한 갈색 ‘곰'의 대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습게도 정작 기세를 휘어잡고 상대를 좌지우지하는 맹수는 '곰'이 아닌 '토끼' 쪽이었다.
영악하고 잇속 빠른 ‘토끼’는 ‘곰’의 반응을 통해 온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완벽한 우위에 있으며, 이 애는 절대로 자신의 일탈을 고발하지 않을 거란 걸.

"하, 하하. 그래. 그렇게 하자. 어려운 것도 아닌데 뭐. 어쨌든 네가 펜던트를 찾아줬으니 그 정돈 당연히 할 수 있어. 아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우후후, 잘 됐다. 고마워."

당연히 네가 그렇게 행동할 줄 알았어. 하필 발각된 대상이 이런 순진한 애라니 난 참 운도 좋지. 상냥히 웃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 그리고…."

크라디는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이번엔 사뭇 진지한 투로 덧붙였다.

"그때 일로 늘 미안했거든. 기회가 된다면 꼭 사과하고 싶었어."

…어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 대화는 내 예측엔 없던 건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입교식 날 말이야. 그날 녀석들이 네게 불합리한 말을 내뱉는 걸 제대로 막지 못했어. 내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렸어야 했는데. 그런 말을 듣게 해서 정말 미안해."

아까까지만 해도 식은땀을 흘리며 쭈뼛대던 녀석은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레티에게 또다시 사과를 건네고 있었다. 그날의 사과도 갑작스러워서 어이가 없었는데 또 난데없이 이런 상황에서…? 이미 한참이 지난 일을 대체 자기한테 무슨 이득이 된다고?
이제 역으로 혼란스러운 건 레티였다. 녀석의 돌발 행동이 그녀의 상식과 이해범주를 지극히 벗어난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의 행동을 '마음의 빚'이라 이해했다. 보아하니 이 애는 순진한 것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빚을 지면 꼭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미련한 성격의 소유자인 모양이었다.

"…뭐, 난 괜찮아. 뒤에서 험담하는 거, 한두 번 들어본 것도 아니고."
"아…."

금세 머리를 가득 메운 물음표를 떨쳐낸 레티가 발랄하게 답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지는 건, 사실 꽤 좋은 일이었다. 나중에 이 녀석과 또다시 곤란한 일로 엮이게 된다면 그 빚은 어떤 형태로든 큰 도움으로 돌아올 테니.

"자, 자. 그런 하찮은 거엔 신경 쓰지 말고 각자 돌아가도록 하자."
"하,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거야?"
"응, 물론이지."

흡족하게 웃으며 영악한 토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꿈뻑거리는 곰을 열심히 달랬다. 대체 어디까지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그는 그녀가 이렇게 쉽게 사과를 받아주리라곤 예상치 못한 눈치였다.
그녀는 커다란 등을 무기고 문밖으로 열심히 떠밀며 재촉했다. 강제로 상황을 끝내지 않는다면 저 애는 밤새도록 이런 바보 같은 대화를 반복할지도 몰랐다.

"자, 자. 빨리 돌아가자. 계속 이러고 있다간 또 누구한테 들킬 테니까."
"그,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곤 아쉬운 듯 속삭이며 문턱을 나섰다.

'일찍 가서 미안. 내일 또 올게. 캐넌아.'


-


귀찮은 일은 다 처리했다.
순진하고 다루기 쉬운 한 녀석의 입만 막으면 모든 게 다시 예전 같겠지.
그런데 왜, 저 녀석은….

"오늘도 기운 내자, 레티."

오늘도.

"레티, 괜찮다면 그 책 꺼내는 거 도와줄까?"

다음 날도.

"어라. 너 물이 없구나. 그럼 내 거 마셔. 난 괜찮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내 옆에 나타나는 거지?

그저 순진하고 이용하기 쉬운 상대라 생각했던 그 애는, 어떤 면에선 레티 자신보다 더 독한 녀석이었다. 그는 매일 어디선가 웃는 얼굴로 나타나서는 원치도 않는 호의를 베풀며 멀었던 서로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적당히 대하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거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레티도, 그의 출몰 빈도가 점점 빈번해지자 슬슬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이 거슬려 오기 시작했다.
대체 왜 저러지? 아직도 마음의 빚을 다 못 갚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고작 비밀 하나 생겼다고 해서 뭐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 본성을 들킨 걸 약점 잡아 나를 역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일까?

'아하, 그래. 바로 그거구나! 얕은 트릭이었어!'

그제야 레티는 모든 게 명쾌해지는 느낌이었다.

'감히 내가 그런 거에 걸려들 거라 생각하다니 오산이야. 절대 네 맘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미끼를 던지면 웃는 얼굴로 하나하나 여유롭게 받아쳐 주지.'

상대를 잘못 봤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주기 위해, 천사 같은 미소를 두른 토끼는 불쑥 불쑥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오는 곰에게 포탄을 던졌다. 거절과 회피, 또 거절. 틈틈이 교묘한 상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으며 자리에 기세등등하게 버티고 서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곰은 한결같이 토끼의 발치에서 머물러 있었다. 들러붙거나 질척대며 귀찮게 굴었다면 화를 내며 쫓아냈을 텐데, 그는 꼭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를 잘 아는 것 같았다. 거절을 하면 순순히 물러나고 또다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도와줄까?'라며 의사를 물었다.
심지어 그는 야간 순찰을 돌 때 레티의 편의를 봐주기까지 했다. 딱히 그녀에게 말을 하거나 티를 낸 건 아니었지만, 매번 똑같은 그의 무기고 순찰 경로로 추측해보건데 아마 그녀를 무기고에서 만난 시간대를 기억하곤 최대한 발각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어느 날은, 약이 바짝 오른 레티가 일부러 소동을 내 순찰을 방해하기도 했다. 자신 때문에 곤란에 빠지면 분명히 학을 떼곤 순순히 물러서리라 확신하면서 벌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애는 여전히 레티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다. 자신이 무슨 '친구'라도 되는 양 말이다.
결국, 레티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이상한 대상 앞에 대응 전략을 수정해야만 했다.
교묘하게 해선 말을 못 알아들으니, 분명한 언어로 똑똑히 말하는 수밖에.

그래서, 고된 일과를 마친 어느 밤.

"너,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어…, 뭐라고…?"

기숙사로 복귀하려는 크라디를 교내의 인적 드문 곳으로 불러낸 레티는 단도직입적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뭘 원하냐고. 약속했잖아. 다 비밀로 하기로. 그럼 끝난 거 아냐? 왜 자꾸 주위를 맴도는데?"
"아…?"

날카로운 일갈에 그가 어리둥절한 의성어로 반문했다. 그 애는 또다시 무기고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매우 흡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날 내 모습을 약점 삼아 나를 맘대로 흔들려는 모양인데 네 맘대로…."
"아…! 그건 오해야.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난 그저 너와 좀 더 친해지고 싶었어. 단지 그뿐이야."

레티의 분노를 다급히 양손을 내저어 막아낸 크라디가 이어서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도 그날 무기고에서의 네 모습에 놀라긴 했어. 완전히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건…, 뭐라고 해야할까…. 내가 살면서 봤던 것 중에서 손꼽게 특이한 장면이었거든. 무시무시한 살상 무기를 마치 무슨 인형 다루듯이 꼭 안고 말도 걸고 하고 있었으니까…. 세상엔 참 다양한 기호가 있구나 싶었어."
"……."
"하지만, 그걸 계기로 난 너란 애를 다시보게 됐어, 레티. 그리고 발견했지. 네가 겉으론 웃으며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그래서 이 참에 조금

더 친해져 보면 어떨까 싶었어. 물론 네가 날 내켜 할리 없다는 걸 알긴 했지만, 그래도 의지할 사람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리고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넌 내 소중한 펜던트를 찾아주고 내 실수를 용서해줬어. 그러니까 네 약점을 잡는 일은 절대 없어. 안심해."



쏴아-, 쏴아-.


담장 너머로 잔잔한 파도 소리가 가깝게 들려오자 레티는 길다란 속눈썹이 달린 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녀의 마음 한 켠엔 여전히 화가 남아있었다. 또 한 번 상황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생겨난 심술이었다. 그러나 잔잔한 파도 소리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는 눈앞의 곰을 더 몰아붙이고 싶은 투지가 생겨나지 않았다. 여기서 더 전의를 불태워봐야 저 파도에 작은 횃불을 던지는 거나 다름없다,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고 만 것이다.
어쩐지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어 레티는 말없이 근처에 있던 벤치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자 잠시 놀란 듯 눈치를 보던 그 애도, 조심스레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 후안령 끄트머리에 작은 바닷가 마을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내 고향이야. 넌?"
"…난 '발라'에서 왔어."

레티는 저도 모르게 순순히 그의 물음에 답했다.

"와, 그 대도시 '발라'에서 왔다고? 굉장하다. 난 한 번도 못 가봤는데. 대단한 곳이라 들었어. 엄청나게 번화한 데다 멋진 대광장과 대형 경기장도 있다지?"
"그렇다고 하던데, 난 잘 몰라. 말 그대로 집에만 갇혀 있었어서."
"집에만…? 혹시 어디 아팠어?"
"말하자면 길어."

이미 전의를 상실한 탓인지 아니면 그 애의 '네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어.'하는 눈망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다음 이야기는 좀 더 자연스럽게 술술 흘러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총이나 캐넌 같은 무생물이 아닌 ‘인간’ 앞에 꼬일 대로 꼬이고 삐딱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인생을 풀어놓는 일. 그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고 꽤 나쁘지 일이었다.
'과보호', '따돌림', '별종', 그리고 이야기가 '레티의 대탈주'에 이르자, 여태껏 미간에 힘을 주고 진지하게 경청하던 크라디의 얼굴엔 유쾌한 웃음이 번졌다.

"하하하, 네가 애써서 사관학교까지 온 이유가 순전히 '캐넌'과 '보다 합법적인 폭발' 때문이라고?"

"뭐야, 지금 비웃는 거야?"
"아니, 전혀. 그저 무기고의 미스터리가 풀린 후련함에 웃는 거야. 왜 그렇게나 캐넌을 좋아하는지 이제 이유를 알게 됐잖아."
"…."
"그래서, 정식으로 포병이 되면 폭발시키고 싶은 게 뭐야? 집? 학교? 아니면 싫어하는 사람? 설마 '나'…?"
"뭐야. 재미없게."

제복의 산호색처럼 물든 뺨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주먹으로 그 애의 팔뚝을 가볍게 툭 치곤 말했다.

"대상은 상관없어. 그냥 폭발이기만 하면 난 다 좋으니까.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난 너무 행복해서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싶어져. 그리고 가슴이 마구 벅차올라 죽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 가끔은 그대로 죽어버려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해."
"흠, 그렇구나. 역시 좀 특이한걸. 그래도 폭발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지는 대강 알 것 같아. 불꽃이 시원시원하게 터지면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릴 것 같긴 하거든. 물론 ‘적진’처럼 꼭 쏘아야 할 곳에 쏜다는 가정하에 말이야."

쳇, 자기가 뭘 안다고. 레티가 입술을 비쭉 내밀자 그는 씩 웃었다.

다시 담장너머로 파도소리가 들려오자 둘 사이엔 잠시간 짧은 침묵이 생겼다. 그리고 그 뒤, 조용히 소리에 귀 기울이던 그 애가 입을 열었다.

"난 말이야. 뱃사람이 되고 싶었어."
"뱃사람?"
"응. 어릴 때 바다의 신 신화나 해적 일화 같은 걸 들으며 자랐거든. 그때부터 쭉 선원이 되어 수평선 너머 떠오르는 해에 눈뜨고 밤의 별을 벗삼고 싶었어. 망망대해를 떠돌고 바다 저편 대륙을 돌며 신나는 모험도 하고 싶었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 난 우리 가족을 돌봐야 했거든. 특히 내 동생을 말이야."
"동생?"
"내 동생은 날 때부터 몸이 불편해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난, 어릴 때부터 줄곧 그 녀석을 돌봐 왔어. 부모님이 일을 나가신 동안 내가 녀석을 전담해 돌보았지. 이래 봬도 내가 한 덩치 하잖아. 다 녀석을 업고 들고 한 덕분에 그런 거라고."

그는 탄탄한 팔을 자랑하듯 오른팔을 굽히더니 으쓱 해 보였다.

"어쨌든 나도 이젠 나이가 찼고 제 몫을 해야 하니 앞으로 무얼 하며 살까 고민했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뱃사람은 될 수가 없겠더라. 입에 겨우 풀칠만 하는 가족과 아픈 동생을 두고 떠날 순 없으니 말이야. 그래서 고민 끝에 떠올린 묘안이 바로 여기 '사관학교'야. 배를 탈 수도 있고, 돈도 벌 수 있고. 자주는 갈 수 없지만, 고향과 멀지 않으니 가족을 보러 갈 수도 있잖아. 원래 공부와 가까운 편이 아니어서 뒤늦게 입교조건을 따라잡느라 많이 애먹었어. 제발 교문의 문턱만 넘게 해달라고 '마나난'에게 엄청나게 기도했지."

"마나난에게 기도를 해?"
"응. 내 고향은 바닷가 마을이다 보니 '바다의 신'을 믿거든. 우리 마을에선 이 닻 모양 펜던트가 바로 마나난을 상징하지. 마나난의 기도, 꽤 효험이 좋아. 너도 나중에 한 번 해봐."

곧 주머니에서 꺼낸 자그마한 닻이 레티의 손바닥 위로 놓였다. 그러나 그녀는 딱히 빌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아 그에게 펜던트를 돌려주었다. 기도나 소원 빌기가 전혀 효험이 없다는 건 이미 아주 어릴 적부터 경험으로 검증한 사실이었다.

"이 펜던트는 집을 떠나던 날 내 동생이 자기 걸 준 거야. 꼭 멋진 해군이 되어서 자기 몫까지 저 넓은 바다를 모험하라는 뜻으로.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건 '동생의 꿈'인 셈이지. 하지만…. 사실 난 이걸 볼 때마다 나한테 묻지 않을 수 없어. '정말 내가 가족을 위해서 여기 있는 걸까?' 하고."

커다랗고 청결히 정돈된 손으로 그는 습관처럼 작은 금속을 만지작거렸다.

"가끔은 동생을 족쇄처럼 느꼈어. 녀석 때문에 너무 많은 걸 포기했다고 생각해 내심 원망한 적도 있었고.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여기에 온 게, 정말 가족을 위해서였는지. 어쩌면 난 가족을 핑계로 정해진 내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

그제야 레티는 그 애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다소 위압적인 체격과 달리 수더분한 인상. 늘상 웃고 있는 탓에 벌써부터 자리 잡아버린 옅은 눈가주름, 상대가 도움이 필요한 게 있는지 습관적으로 살피는 듯한 다정한 눈빛. 그리고 그 이면에 잔잔히 드리워 있는 삶의 무게와 그늘.
이런 때엔 어떤 답을 해야 하는 걸까? 돌아보면 자신은 늘 무생물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감정을 쏟아냈을 뿐, 누군가의 감정을 보듬고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 본 적이 단한번도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할 때는 그렇게 술술 흘러나오던 달콤한 말들이, 왜 지금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걸까.

"이런, 무거운 분위기 만들려고 한 말이 아닌데. 적당히 흘려들어, 레티. 그렇게 심각한 얘기 아니니까."

자기 때문에 분위기가 쳐졌다고 생각했는지 크라디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하하 웃었다. 그러나 채 감추지 못한 당황한 기색으로 보아하니 아마 그도 타인에게 이런 식의 얘기를 털어놓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도 굳이 이걸 말한 이유는 말이지…. '네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서야, 레티. 봐, 동생을 정말 사랑하는 데다 간병이라면 자신 있는 나조차도 종종 이렇게 비뚤어진 생각을 하게 되는 걸. 왜 네가 지금의 네가 됐는지, 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별종'을 이해한다니. 그런 이야긴 거짓말로도 들어본 적 없었는데. 지나가던 갈매기가 웃겠어.
하지만, 그 웃기는 이야기는 꼭 벽 너머 파도소리처럼 잔잔히 밀려들어와 레티의 마음 속 모래사장에 부서졌다. 그리곤 묘한 위로가 되어 보드라운 산호색 거품을 일으켰다.

"있잖아, 레티. 포차엔 포를 고정시켜주고 조준을 돕는 튼튼한 쐐기목이 있지. 네가 올바른 곳에 조준할 수 있도록 내가 네 쐐기목이 되어주면 어떨까? 그럼 분명, 올바른 곳을 향해 쏠 수 있을 거야."

레티는 아까부터 제복의 산호색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던 양 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설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자꾸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캐넌'과 함께 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설렘이 온몸에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래서일까. 그날 밤, 레티는 자기가 그날 캐넌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완벽히 잊고 말았다. 그리고 입교 후 처음으로 무기고를 찾지 않은 채 바로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이후로도 레티와 크라디의 관계는 쭉 이어졌다.
구름처럼 희지만 영악한 토끼와 수더분하고 충직한 곰. 그들 사이엔 차이점이 아주 많았지만, 극명한 대비가 자아낸 희한한 균형이 외려 그들의 관계를 탄탄하게 유지시켜 주었다.
한결같이 사람 좋게 하하 웃는 크라디 만큼이나 레티도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착한 학생을 연기하며, 매일매일 무기고에 찾아가 캐넌을 만나고 일과를 털어놓으며 불꽃을 꿈꾸었다.
다만 약간은 달라진 점도 있었다.
하루의 끝을 캐넌보다 그 애와 함께 보내는 날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애가 보이지 않으면 은근히 그가 나타나길 기다리기도 했다. 물론 그녀 자신은 전혀 깨닫지 못한 채이긴 했지만.

몇 날, 몇 주, 몇 달, 마침내 계절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레티는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곁엔 항상 그 애가 있었다.
마치 자신이 '친구'라도 되는 양, 언제나. 변함없이.

-

여러 계절이 더 흐르고, 어느덧 햇병아리 티를 완전히 벗은 생도들이 다가오는 임관을 앞둘 무렵.

"리온에 영광을! 부르셨습니까, 제독님."
"왔군. 생도 레티."

교장실에 들어서자 블랑코 제독은 레티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래, 듣기로는 제군의 활약이 굉장하다고 하던데. 입교 후 단 한 번도 우등생을 놓친 적이 없다지. 체력, 정신력, 지성 면에서도 탁월한 인재라는 평을 들었네."
"과찬이십니다. 모두 제독님께서 나아갈 목표를 주신 덕분입니다."
"하하하, 겸손 떨 필요 없네. 뭐, 그래도 내가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은 있지."

사탕발림이 딱 적당했던 모양인지 제독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군도 슬슬 '실전' 경험을 쌓을 때가 되지 않았나?"
"…!"
"제군은 그동안 훌륭한 자질을 보여주었네.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냈지. 그래서 나는 자네를 이번 ‘로드루반 무역 원정’에 정식으로 차출하고자 하네. 내 직속부대인 '에스트레야 부대'의 일원으로 말일세. 일개 생도로선 그야말로 파격적인 특혜지."

제독의 설명에 따르면 왕국은 갤리온 무역선을 보내 바다 건너 서역의 땅, 무역 도시 '로드루반'으로 향하여 리온의 선진 화포 기술을 시연하고 본격적인 군수품 무역의 물꼬를 틀 계획이었다. 특히, 성공적인 무역 성사를 위해 이번 시연에서는 특별히 헤비캐넌 시제품 몇 대를 선보이기로 했는데, 어디든 나서길 좋아하는 제독이 직접 바다건너까지 행차하여 시연을 지휘할 예정이었다.
다만 서역까지 향하는 항로에는 해적의 약탈부터 바다를 터전 삼아 해역 곳곳에 포진한 악명높은 '바다 마족'까지 각종 위협이 도사리고 있어 범선의 호위가 필수였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제독의 직속부대 병사 자격으로 갤리온에 올라 무역선을 안전히 지켜내고 시연을 보조하여 해군 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것. 이 모든 게 생도 레티에게 주어진 막중한 임무였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어쩌면 레티에게 포를 난사할, 만일 아주아주 운이 좋다면 ‘헤비캐넌’을 난사할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없는 영광입니다, 제독님. 아직 생도일 뿐인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인지! 갑작스럽지만 달콤한 제안에 레티의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첫 실전. 그것도 학수고대하던 ‘헤비캐넌'과의 출전이라니.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온갖 사탕발림으로 비위를 맞춰 댄 보람이 있었다. 문득 우등생으로 가장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악착같이 버텨왔던 여러 순간과 무기고에서 보냈던 수많은 밤의 이미지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매번 자신을 다독여주었던 그 애의 바다 같은 웃음도.

'… 언제나 배를 타고 싶어 했던 건, 그 애였는데.'

잠시 침묵하던 레티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독님. 주제넘은 얘기인 줄 알지만, 긴히 청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 생도 레티?"
"… 이 임무에 적임자인 생도 한 명을 더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는 절대 제독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
.
.

고대하던 날이 오자, 레티와 그녀가 애써 만든 기회로 얼떨결에 함께 차출된 크라디는 갤리온 위에 올랐다.
갑판 위에서의 일과는 육지보다 더욱 엄격한 데다 지켜야 할 규칙도 많았다. 그간 거쳐온 수 번의 훈련과 축적된 지식에도 불구하고 실전이 안겨주는 변수들로 인하여 매일 같이 배워야 할 것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아침이면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붉은 여명, 함께 수면을 가르는 바다생물들, 그리고 밤하늘에 베일처럼 깔리는 크고 작은 별들은 피로를 상쇄하고 혈기로운 젊은 가슴에 활력과 모험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돛을 높이 올리고 각종 교역품을 실은 갤리온은 순풍을 타고 며칠째 대해 위에서 파도를 갈랐다.

정말이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있잖아, 나 더는 못 참겠어."
"음, 메뉴가 마음에 안 들어? 내 거랑 바꿔줄까?"

접시를 뒤적이던 레티가 들고 있던 포크로 빵을 푹 찌르자 크라디는 익숙하다는 듯 접시를 내밀었다.

"어차피 똑같은 빵에 말린 고기, 비스킷이잖아, 크라디. 그리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라, 왜 여태까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냐는 거야. 그렇게 기대하던 항해인데 정작 하는 거라곤 포 갑판 안을 돌아다니거나 층을 넘나들며 전령 일을 하는 것뿐이잖아? 이러다가 캐넌 한번 쏘지도 못하고 로드루반에 도착하면 어떡해?"
"너에겐 아쉬운 일이겠지만, 사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는 게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가장 좋은 일이잖아. 진정해, 레티. 무사히 항해를 마치고 복귀하면 네 앞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거야. 제독님께서도 널 아끼시잖아. 다 괜찮을 거야. 잘 풀릴 거라고."

그러나 크라디가 건네는 위로의 말을 바닷물처럼 술술 흘려들으며 그녀는 그가 해줬던 다른 말을 떠올렸다.

'마나난의 기도, 꽤 효험이 좋아. 너도 한 번 해봐.'

기도의 효험 따위를 믿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확실히 지금은 기도가 필요한 때이긴 했다. 이대로 기회를 날려 먹으면 다음 기회까지 얼마나 더 많은 인고의 세월을 거쳐야 할까. 막막한 심정을 가다듬고 레티는 두 손을 모아 식당 작은 창 너머에 넘실거리는 바다를 향해 간절히 외쳤다.

'아, 바다에 잠든 위대한 마나난이시여. 듣고 계신가요? 이렇게 간곡히 빕니다. 제발, 제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게 해주세요…!'


…그런데 정말로 기도가 마나난에게 닿았던 걸까?
뉘엿뉘엿 저녁 해가 지고 별이 어둠 속에서 총총 빛을 낼 무렵, 선미 갑판 쪽에선 이상한 조짐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갑자기 나침반이 먹통이야. 왜 이러지?"
"잠깐, 키가 제멋대로…. 이리 와서 이것 좀 잡아줘! 그리고 거기 병사. 어서 제독님께 여기 상황을 보고해. 어서!"

그러나 조타실의 소란에도, 병사는 그저 눈을 껌뻑이며 무언가에 홀린 듯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들어보십시오. 저쪽에서 '여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뭐라고…? 노랫소리?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 그들은 분명히 전설 속의 존재일 텐데…."

항해사는 주위 선원들을 향해 다급히 외치려 했다.

"다들 귀를 막아! 어서!"

그러나 미처 대비할 새도 없이 어린 수병의 말을 신호탄으로 노랫소리는 갤리온을 점점 더 빠르게 감싸 들었다. 배 안 구석구석 아름다운 노래가 스며들자 각 층의 선원들은 하나둘 자리에 풀썩 고꾸라져 거부할 수 없는 잠에 들고, 어느덧 범선 안에 무거운 정적만이 남았을 즈음 이미 항로를 크게 벗어난 배는 깊이 잠에 든 인간들을 태우고 음산한 달빛 아래 거친 조류를 따라 유유히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레티, 일어나. 정신 차려…!!!"

거세게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레티는 번쩍 눈을 떴다.
흐린 시야로 주위를 둘러보자, 침침한 불빛에 비친 상부 포 갑판의 천장과 바닥을 나뒹구는 헤비캐넌, 그리고 걱정과 안도가 뒤섞인 크라디의 얼굴이 보였다.

"…크라디."
"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로."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으며 레티는 잠들기 전의 상황을 애써 떠올렸다. 포 갑판에 있는 헤비캐넌을 보러 와선 한참 볼을 부비적대고 있던 중, 갑자기 묘한 노랫소리가 들리더니 거센 졸음이 몰려와 그대로 잠에 든 것 같았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애가 말했다.

"잘 들어, 레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아. 널 찾으러 다니는 동안 벌써 몇 명이나 자리에 쓰러져서 깊은 잠에 빠진 걸 목격했어. 방금 너처럼 말이야."
"…나 노랫소릴 들었어. 여인의 노랫소리를. 그 후로 삽시간에 졸음이 밀려오더니 그대로 잠들었어."
"뭐라고…? 정말이야?"

그녀의 말에 크라디가 한층 심각해진 표정으로 뭐라 말하려는 그 순간,

쿵-!!!

육중한 굉음과 함께 배가 좌우로 거세게 흔들려 둘은 중심을 잃고 벽면으로 튕겨 나갔다.

"윽…!"

강하게 부딪친 충격으로 인해 되려 졸음이 전부 깨고 정신이 번쩍 들자, 레티는 없이 재빨리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가 바깥 상황을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거라곤 어떤 구조물로 인해 넓게 드리운 짙은 그림자뿐이었다.

"이럴 게 아니라 바깥으로 직접 가서 상황을 제대로 살펴야겠어. 잠깐 있어 봐. 크라디."

여전히 충격에서 회복 중인 크라디를 두고서, 레티는 위층 갑판으로 이어진 통로로 가 사다리를 탔다. 그리곤 믿기지 않을 만큼 음산한 광경을 목도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총총히 박혀 있던 작은 별을 깡그리 집어삼킨 검푸른 하늘과 둥그런 달, 청록빛 어둠이 불길하게 일렁이는 물결 위론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의 검게 삭아 뒤엉킨 난파선이, 오랜 세월 버려진 묘지에서 우는 풀벌레처럼 무거운 정적 사이로 끼릭 끼릭 소리를 내며 떠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실로 '배의 무덤'이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곧 갑판 위를 떠도는 그림자들이 눈에 보였다. 바로 근처에서부터 선수, 선미 부근까지 끈적끈적하고 무게감 있는 개체가 미끄러지듯 나무와 마찰하며 갑판 곳곳을 떼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놈들은 인간보다는 '연체동물'에 가까운 외형을 가진 듯 보였다. 그들은 분명 바다의 ‘마족’이었다.

"…레티, 일단 아래로 내려가 대책을 세우자."

어느새 따라 올라와 함께 광경을 지켜보던 크라디는 레티 만큼이나 바깥의 상황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배 아래층을 향해 내려갔다.

포 갑판으로 무사히 돌아오자 갑자기 크라디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레티. '세이렌'에 대해 들어봤어?"
"세이렌이라면…, 전설에나 나오는 바다 마족이잖아.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을 홀린다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레티는 불현듯 위에서 보았던 괴기스러운 형상들과 자신이 들었던 노랫소리의 상관 관계를 금세 깨달았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를 향해 크라디는 긍정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아저씨들에게 들은 적이 있어. 이 바다 어딘가에는 표류하던 배가 모여드는 종착지, '배의 무덤'이라는 곳이 있다고.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만나 고전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리면 자기도 모르게 도착하게 된다고 했어. 그리고 아까 그 풍경은…. 아저씨들이 묘사하던 것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
"그렇지만 우린 폭풍우에 휘말리지 않았어. 봐, 지금도 비 한 방울 안 오잖아? 이상 기후의 징조도 없어."
"알아. 하지만 주위를 봐, 레티. 여긴 이상할 정도로 '고요'해. 바다생물도, 무역로를 오가는 다른 배의 등불 같은 것도 없어. 그저 물과 배의 잔해만이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추측해보건데, 우리 배는 세이렌의 표적이 되어 무덤으로 가는 '도중'인 것 같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 말로 인해, 문득 레티의 뇌리로 낯에 식당에서 간곡히 빌었던 어느 소원이 스쳤다.

"…네 말대로야."
"엥…?"
"마나난의 기도, 효험이 좋네. 나 열심히 기도했거든. 무슨 일이라도 좀 생기게 해달라고."

급격히 긴장의 끈이 탁 풀려버린 듯 얼빠진 그 애의 표정을 보며 그녀는 헤헤 웃었다.

"그나저나, 저 연체동물들이 정말로 세이렌이면, 넌 어떻게 무사할 수 있던 거야?"
"아, 그건…. 아마도 이것 때문인 거 같아."

그는 돌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머쓱한 듯 말했다.

"눈 좀 붙이는 동안 몰래 챙겨뒀던 장약 심지를 말아 귀마개로 썼거든."
“뭐…?”

돌돌 말린 심지를 보자 레티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이런 거로 전설 속 마족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긴장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자,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우아한 황동빛 헤비캐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교내 무기고에서부터 운 좋게 로드루반까지 동행하게 된 그녀의 ‘친구’였다.

'지금이야, 레티. 네가 바라던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캐넌이 속삭이자 그녀가 마음속으로 답했다.

‘그래, 알고 있어. 지금이야말로 마나난이 내려준 절호의 기회야. 긴 기다림 끝에 어렵게 찾아온 '합법적인 폭발'의 기회.’

레티는 강하게 이끌리듯이 캐넌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잡이에 양손을 얹었다. 그리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온몸에 힘을 주어 캐넌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그리고 묵직한 무게감이 일시에 손바닥 안으로 꽉 차자 양팔로 뜨거운 피가 몰리고 온몸의 근육이 팽팽해지며 정신이 한껏 고양되었다. 거대한 경량 금속 덩이인 헤비캐넌은 보기보다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언젠가 들었던 제독의 말처럼 단련된 병사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무게, 늘 상상해오던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크라디. 내가 위로 갈 테니, 넌 여기 숨어 있어."
"설마, 너 혼자 세이렌들과 맞서겠다는 거야…? 너무 위험해."

그러나 그녀는 어깨 위에 얹힌 투박한 손을 뿌리치며 캐넌을 단단히 등에 메곤 말했다.

“어차피 여기 숨어 있어 봐야 득 될 거 하나 없어. 누군가 위에서 놈들을 처리해야만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난…, 기회를 잡아야 돼. 오늘이 지나면 이런 기횐 다시 오지 않을 거야.”

“….”

한참을 망설이던 크라디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 들어있던 여분의 장약 심지를 반으로 찢어 작은 귀마개를 만들어 그녀의 양쪽 귀에 가져다 댔다.

"대신 최소한의 대비는 하고 가. 레티."
"……."

잠시 뒤 그의 세심한 정비까지 모두 끝나자 레티는 산호색으로 붉어진 뺨을 가라앉히곤 통로를 나서 갑판 위에 올랐다.
그리고 뾰족한 이를 드러내고 주위에 모여드는 마족들 한복판으로 몸을 내던졌다.

.
.
.

콰앙!

거대한 불꽃이 태양처럼 검은 하늘을 밝히고 흩날리는 불똥이 구름 위를 수놓자 레티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웃음을 터트렸다.

울부짖는 캐넌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불꽃.
습한 공기에 뒤섞여 떠다니는 잿가루와 인공적인 것을 불태워야만 피어오르는 지독하리만치 매캐한 검은 연기.
손을 타고 올라와 온 혈관과 심장을 세차게 펌프질하며 뼈 마디마디를 저리게 만드는 강렬한 진동.
고삐 찬 야생마처럼 제힘에 못 이겨 제멋대로 통제를 벗어나려는 금속의 야성.
그리고 그 야성을 제압하고 제어하며 얻어지는 더없는 쾌감과 전율이, 강력한 '희열'로 돌아와 온몸의 세포 사이를 바삐 오갔다.

투콰쾅-! 콰쾅!!!

귀를 단단히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연이어 하늘에 울려퍼지는 캐넌의 포효만은 크고 맑고 분명했다.
헤비캐넌의 화력은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었다. 포탄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뜨거운 화염이 번지고 조악한 것들이 시원시원하게 박살 났으며, '불붙은 문어 다리들'이 밤하늘 위로 붕 떠올라 폭죽처럼 펑 펑 터지며 검은 연기와 함께 재가 되었다.
한참을 날뛰던 그녀는 이제 갑판 위의 적이 보이지 않자 과감히 갤리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근처의 무덤의 잔해로 이동해 문어 다리들의 잔당에게 닥치는 대로 포탄을 날렸다. 폭발로 촉발된 또 다른 폭발이 다시 새로운 폭발을 낳는 끝없는 연쇄 작용. 그 맹렬한 포화 속에서 레티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충동과 욕망을 차례로 태워 나갔다.

해군사관학교에서 기대했던 '합법적인 폭발'.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는, 정당한 대상을 향한 정당한 불꽃.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마침내 열린 포문은 오래도록 닫힐 줄을 몰랐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밀려오는 문어 다리들의 수가 크게 줄어들자 신나게 뛰어다니던 레티는 잠시 자리에 멈춰서 숨을 돌렸다.
어느덧 별 하나 없던 검은 하늘엔 '불꽃 꼬리를 가진 유성우'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캐넌과 자신이 만들어낸 진풍경. 이는 어릴 적 보았던 그 축젯날 밤의 불꽃놀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했다. 어쩐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완벽한 순간. 이 순간이야말로, 어릴 적 축제의 불꽃이후로 줄곧 꿈꿔오던 바로 그 때였다.

'레티. 불꽃이 정말 멋지다.'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캐넌'의 속삭임이 들려오자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행복하게 웃었다.

"정말 그렇지? 크라디."

좋아. 이제 슬슬 갤리온으로 돌아가 제독을 구해낸 다음, 그가 깨어나면 자신과 크라디가 모두를 구했다고 말해야지. 그래서 공로를 인정받고 그걸 토대로 제독의 헤비캐넌 부대에 정식 소속되어, 너와 함께….

'…어라? '크라디'라고…?'

퍼뜩 이성이 돌아오자 레티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흐릿한 연기 속에서 자신의 또 다른 친구를 찾았다.
어딨는 거야, 크라디. 빨리 이 멋진 광경을 같이 봐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그 애는 하하 웃어줄 것이다. 항상 그랬듯이.


그때, 저 멀리 호위선 쪽에서 포성이 들려왔다.
분명, '헤비캐넌'의 소리였다.

"…크라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자 레티는 재빨리 삭은 잔해들을 뛰어넘어 갤리온 쪽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 애는 어엿한 군인이었다.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훈련받았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마음 한 곳에 자리 잡은 조바심이 도저히 떨쳐지지가 않았다.
갤리온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듬성듬성 보이던 문어 다리들의 수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포탄 세례 속에서 살아남은 몇몇 놈들이 길길이 날뛰는 자신을 피해 다시 표적을 바꾼 모양이었다.

"…귀를 막고 싸워서 허점이 생긴 거야. 이런 거 없어도 잘 할 수 있는데."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애꿎은 심지를 귀에서 뽑아 바다로 휙 던져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그걸 전해주었던 애의 얼굴을 떠올리며 빠르게 목적지를 향하여 달렸다.

마침내 익숙한 갑판에 올라서자, 아수라장일 것으로 생각했던 갑판은 의외로 멀끔한 모습이었다. 불탄 세이렌의 잔해는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갑판을 나설 때까지도 쓰러져 있던 선원들은 어느새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힘 좋은 '누군가'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하나하나 들어서 피신시킨 모양이었다.

"…분명히 포 갑판에 있으라고 했는데…."

마저 푹 한숨을 내쉬고, 이어서 레티는 아직 잔연이 남아있는 선미 쪽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저 멀리 함장실 인근에서 자신이 간절히 찾던 바로 그 애를 발견했다.

몰려든 세이렌들에 의해 사방으로 포위된 크라디는 완전히 열세에 몰려 있었다.

그는 포 갑판에 있던 또다른 캐넌, ‘날이 달린 헤비캐넌’을 격렬히 휘두르며 적들의 접근을 간신히 방어하고 있었는데, 포구 쪽에서 심상치 않은 회색 연기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아까의 포격 이후로는 캐넌이 불발된 듯했다.
그런데 이 한시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크라디는 세이렌과 대치하며 함장실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애써 선원들을 최대한 구해낸 후, 이제는 함장실 바닥에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제독을 보호하고자 미끼를 자처하려는 것이었다.

"크라디…!!! 크라디…!!!"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그가 반응이 없자 레티는 아까 바다로 던져버렸던 심지 한 쌍을 떠올렸다. 하, 당연히 그 애의 양쪽 귀도 바보같은 귀마개로 꽉꽉 틀어 막혀 있을 게 뻔했다.

“으으…!”

부아가 치미는 마음을 다잡고 레티는 지원사격을 위해 서둘러 함장실이 잘 보이는 위치를 점했다. 그리고 캐넌을 정교히 움직여 세이렌 무리를 겨누었다. 하지만 아무리 조준을 해도 적절한 각이 나오질 않았다. 지켜야 할 대상과 처리해야 할 표적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초조함에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담할 자신이 있었는데 이제는 자기 마음 하나조차 뜻대로 통제가 되질 않다니.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고 있던 자신이 왜 갑자기 괴로운 고민을 떠안아야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이건 전부 크라디 때문이었다. 그 애가 무모하게 군 탓이었다. 안전하게 숨어있지 않고 괜히 밖으로 나돈 탓이었다.
…….

그러나, 사실 레티는 잘 알고 있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욕구를 위해 무모하게 뛰쳐나간 건 그녀이고,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알고도 용기 있게 나선 건 그 애라는 것을.

'… 이래서 '인간 친구'가 싫은 거야. 캐넌이었다면, 이런 생각 따윈 하지 않아도 되는데…."

“윽…!”

망설이는 사이, 세이렌 여러 마리가 크라디를 우악스럽게 잡아들었다. 이제 그 애의 굵은 목에선 날카로운 손톱이 파고든 자국을 따라 붉은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더는 주저할 수 없었다.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일단 레티는 재빨리 장전 후 바다를 향해 포탄을 날렸다. 그러자 세이렌 무리와 크라디의 시선이 물기둥이 일어난 바다를 거쳐 곧 그녀에게로 쏠렸다.

"…무사했구나…!"

비로소 지원군의 존재를 인지한 크라디가 어렵게 귀에서 심지를 빼내자 레티가 외쳤다.

"내 말 들려, 크라디? 내가, 내가 놈들을 쏠 거야…! 그런데…, 네가 너무 가까워…!"

라고. 어떤 대답이 돌아오길 바라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외쳤다.
그런데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그 애가 답했다.

"괜찮아! 난 무시하고 어서 쏴!"
"정말이야? 하지만 네가 다칠지도 몰라…!"
"어차피 내가 이 자리에서 죽고 나면 놈들은 즉시 너나 제독님, 다른 사람들을 노릴 거야."

시시각각 숨통이 조여오는데도, 그 애는 여전히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잖아, 레티. 지금이 바로 그 기회야! 더 늦으면 다음은 없어!"

사력을 다한 외침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로 이상하지만, 문득 과거의 어떤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네가 올바른 곳에 조준할 수 있도록 내가 네 쐐기목이 되어주면 어떨까? 그럼 분명, 올바른 곳을 향해 쏠 수 있을 거야.'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도 그 애는 그녀가 올바른 곳을 향해 쏠 수 있도록 제 역할을 하며 강하게 포신을 붙들고 있었다.

“…알겠어.”

레티가 답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자세를 잡은 뒤 최대한 신중히 그 애를 피해서 세이렌을 조준했다.
이어서 커다란 심호흡 후,

"…해보자. 레티."

과감히 캐넌에 불을 당겼다.

.
.
.

쓰러진 세이렌 더미 옆, 레티는 운 좋게 부서지지 않고 멀쩡한 어느 상자에 앉아 하늘에 떠오른 '불꽃 꼬리를 가진 유성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그랬듯, 그녀의 양옆엔 그녀의 우람하고 충직한 인간 친구와 차가운 황동빛의 무생물 친구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크라디. 괜찮아…?"

커다란 손으로 왼쪽 얼굴을 감싸 쥔 그 애는 레티의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반쯤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평소와 같이 씩 웃어 보였다.

"응, 괜찮아, 레티. 보기보다 별로 안 아파."

하지만 상냥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손은 보기 딱할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
"레티, 왜 그래? 네가 나와 제독님, 모두를 구한 거야. 울상은 그만 짓고 승전의 기쁨을 만끽해야지."

불꽃에 녹아내린 한 쪽 볼이 아플 텐데도, 그 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하하 웃었다.
언제나 레티를 배려해 주는 충직하고 다정한, 그러나 이제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미소. 그게 얼마나 이상하고 서글프게 보이는지 그 자신은 알고 있을까?
레티는 가슴 한 켠이 쿡쿡대는 걸 참지 못하고, 그만 하늘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검은 하늘 위론 여전히 불씨가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마치 축하연에서 흩뿌리는 '알록달록 색종이 조각'처럼 어느덧 잔잔해진 바닷바람을 타고 우아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갑판 위의 사람들은 아직 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바닥에서 움찔대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깨어날 때까지는 계속 난파선 잔해 저편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감상할 생각이다.
소중한 '무생물 친구', 그리고 '인간 친구'와 함께.

"저것 좀 봐, 정말 멋지다. 그렇지?"

그가 투박한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진짜 ‘유성’이 있었다.
아주 높고 먼 곳부터 날아온, 아름다운 불의 꼬리를 가진, 자연이 쏘아 올린 강력한 탄환.
그것은 타오르는 잔해가 내뿜는 불꽃과는 이질적인 또 다른 세계의 빛을 품고 해수면을 향해 맹렬히 날아가고 있었다.

"…응, 정말 멋져."

레티는 감탄 섞인 목소리로 나직이 답했다. 그리곤 생각했다.

'친구'.
'그'와 함께 보는 지금 이 불꽃이,
이제껏 자신이 보았던 불꽃 중 최고로 아름답다고.


-


더없이 평온한 날이었다.
힘찬 파도가 모래를 부수는 상쾌한 소리가 은은히 깔린 가운데 갈매기가 햇빛이 쨍한 푸른 하늘을 맴돌며 먹이를 찾아 힘껏 우는 오늘은, 바로 고대하던 '임관식' 날이었다.

기숙사 창틀 너머, 근사한 예복을 차려입고 들뜬 걸음을 감추지 못하는 동기 생도들을 한참 지켜보던 레티는 다시 자신의 침대 쪽으로 돌아가 마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입교할 때 가져왔던 여행 가방에 든 물건은 예상보다도 더 단출했다. 포와 관련된 책 몇 권, 교내에서 구할 수 있는 소소한 간식, 옷 몇 벌이 전부였다. 돌아보면 낮엔 성실한 우등생 노릇을 하고 밤에는 무기고를 들락거리느라 바빠 달리 취미를 만들 시간은 없었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힘썼던 나날이 떠오르자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뭐…, 앞으로 긴 항해를 하게 될 테니 짐은 간소할수록 좋지.'

그리고 빠진 게 없나 몇 가지 더 체크한 뒤, 가방을 닫는 경쾌한 타탁 소리와 함께 짐을 챙기고 텅 빈 방을 나섰다.

이미 사람들이 다 빠지고 텅 빈 복도를 거닐며, 그녀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거리 때문에 잘 들리진 않지만 충분히 내용이 짐작가는 긴 훈화 말씀이 끝나고, 곧이어 수 초간 이어지는 혈기 넘치는 함성이 텅 빈 복도를 가득 메우자 레티의 발걸음은 한층 들떴다. 동기나 이 학교에 특별한 애정이 있지는 않았다. 아쉬움이나 미련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강압하고 옭아매는 곳을 떠나는 후련함이 훨씬 컸다.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자신답지 않게 동기 생도들의 미래를 응원하고픈 마음이 들어, 레티는 함성이 들리는 쪽을 향해 경례하며 나직이 인사했다.

"위대한 리온에 무궁한 영광을."


한창 진행중인 임관식으로 한산한 교정을 걸으며 레티는 지나온 날들을 되짚었다.
부모님을 거스르고 집에서 나와 처음 이 교정에 들어서던 순간. 번듯한 경험이랄 게 없어 모든 게 낯설기만 한데도 능숙한 척, 매끄러운 척하려 발악하던 나날들. 감당 못할 일인 줄 알면서도 과감히 쌓아간 은밀한 추억들. 그리고, 바다의 신 마나난이 안겨준 아름답던 '그날 밤'.

세이렌의 노래로 잠들었던 이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가장 늦게 깨어난 블랑코 제독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로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응급처치를 하는 크라디의 일그러진 옆얼굴이었다.
제독은 그 충직한 젊은 생도가 홀로 마족과 대항해 필사적으로 모든 이를 구했다는 것과, 자신의 야심작이 마족과의 일 대 다수 전에서 얼마나 훌륭하게 화력을 발휘하는지 몸소 증명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큰 호감과 무한한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무역선이 '후안 항구'에 무사히 귀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라디는 제독의 직속부대 소속 병사가 되었다. 그리고 제독이 가장 믿는 병사가 되어 앞으로의 탄탄대로를 보장받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레티의 계획대로였다.

반대로, 레티는 한동안 권태에 빠져 무기력한 나날을 보냈다.
한번 강렬한 자극에 노출되고 나면 다시는 이전만큼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게 된다 했던가. 이제는 모든 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 무엇도 만족할 만큼의 재미와 스릴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미 강렬한 순간을 경험해버린 이상, 그녀는 영원히 자잘한 장난에 만족하며 헤헤 웃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운좋게 비슷한 순간이 다시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 폐쇄적인 집단 속에 숨죽이고 있을 수도 없었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 하나, 레티가 마음을 다잡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바로 '크라디'였다.
그가 얼굴에 입은 화상은 꽤나 깊은 것이었다. 그러나 적절한 처치를 받고 꾸준히 치료한 끝에 그는 별다른 이상 없이 건강을 회복했다. 후유증이라고 해봤자, 왼쪽 얼굴 위 살이 녹은 자리에 남은 깊고 일그러진 흉터와 그 흉터로 인해 인상이 이전보다 좀 험악해 보이고 말할 때나 웃을 때 입꼬리가 이상하게 비틀어지는 정도 랄까.
오히려 아물지 못한 것은 레티의 마음이었다. 그날 밤부터 레티는 크라디의 뺨을 보면 마음 한 켠이 참을 수 없이 쿡쿡거렸다.

"흉터가 생기니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보이지 않아? 이제야 덩치에 걸맞은 인상을 갖추게 됐네. 물론 날 무서워하는 사람도 생겼다는 게 문제지만…. 하하, 이거 얼굴을 죄다 가리는 투구라도 쓰고 다녀야 하나."

외모를 제외하곤 그 애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늘 그랬듯이 충직하고 다정했다. 그러나 그 애의 볼에 남은 끔찍한 흉터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빌어 레티를 향해 매일같이 속삭였다.

'이거 봐, 레티. 네 불꽃이 만든 거야. 어때? 참 예쁘지?'

그래서 레티는 임관식을 불과 며칠 앞둔 어느 날 '전역'을 요청했다.
이곳에서 얻어야 할 건 전부 얻었으니 미련이나 망설임 따윈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저히 사라지지 않고 마음을 쿡쿡 찔러대는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무생물 친구'인 캐넌은 불꽃을 버티지만, '인간 친구'인 그 애는 자신의 불꽃을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애와 함께 하는 미래는 매 순간이 고통의 연속일 테지. 견딜 수 없을 만큼 걱정되고 슬프고 가슴 철렁한 일들이 가득할 거야. 그 애가 또다시 내 불꽃에 다치기라도 하면….
…더는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돼.

대신 레티는 연약한 '인간 친구'를 멀리하고, 새로운 길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발라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저 멀리 바다 건너 서역 땅 배에 몸을 싣기로 한 것이다.
사실 레티는 재주 좋게도 그날 자신과 전장을 누볐던 헤비캐넌 한 대를 몰래 밖으로 빼돌려 놓았었다. 자신의 불꽃을 견디는 '무생물 친구와 함께, 마족과의 전쟁 일선에 있는 머나먼 곳으로 간다면 분명 그날의 쾌감과 희열을 되찾을 수 있을 지 몰랐다. 뭐, 불완전하더라도 적어도 여기보단 나을 테지.

이제 교문을 벗어나 거리로 나온 레티는, 자신이 알아둔 비밀 장소로 가 고이 잠들어 있던 자신의 '진짜 친구', 캐넌을 찾았다. 미리 떠날 채비를 마친 헤비캐넌은 천에 둘둘 싸여 정체를 감추곤 레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손엔 가방, 그리고 다른 한 손엔 묵직한 포를 걸치고 레티는 항구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 '후안 영지'의 흙을 다시 밟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뒤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자, 잠깐만 기다려. 레티!!!"

익숙한 목소리에 입술을 앙 물고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 그 애가 있었다.
근사한 장교복을 입었지만, 여전히 수더분한 티가 나는 그 애가.
다시 마주치면 또 마음이 쿡쿡 아플 것 같아 그냥 떠나려고 했었다. 그러나 크라디는 기어이 레티의 뒤를 따라왔다. 그 애 답게, 언제나처럼.

"말도 없이 그냥 떠나면 어떡해.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너, 장교복이 잘 어울리네."

레티는 다정하게 빛나는 두 눈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 괜히 딴 소리를 했다. 멋들어지고 속 빈 강정같은 작별의 말이라면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지만, 오늘도 텅빈 문장들은 쉬이 나와주지 않았다.

"설마… 캐넌을 빼돌린 거야…?"

어깨에 멘 길다란 무언가를 본 크라디가 깜짝 놀라며 묻자, 레티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답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날 미리 준비해뒀어. 보급관 눈 속이는 건 일도 아니던걸."
"역시 레티는 레티구나. 너무 대담해서 깜짝 놀랐어."

크라디는 크게 하하하 웃다가 문득 입을 다물고 대신 미소를 지었다. 화상 때문에 볼이 불편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웃으면 남들에게 무서워 보일 수 있다는 걸 의식한 탓인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생겨난 습관이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이내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레티. 꼭, 떠나야 하는 거지?"
"……."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떤지 잘 아니까 정말로 붙잡긴 싫었어. 하지만 나는 네가…."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는 말을 멈췄지만, 레티는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것 같았다.
담담한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아무래도 난 '인간 친구'와는 안 맞아.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는데 잠시 잊었던 뿐이었어. 그러니 난, 인간들투성이인 이곳을 떠나야만 해. 여기,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친구'랑 함께."
"...레티."

최대한 자신의 본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레티는 크라디의 두 눈을, 그리고 그의 흉터를 빤히 응시했다. 곰처럼 눈동자가 큰 그의 선한 눈망울이, 떠나는 그녀를 위해 ‘남는 이의 슬픔과 고통’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대신…."

레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이제부터 내 캐넌의 이름은 '크라디'야."
"…!"
"나는 다치지도 위험에 처하지도 않는 강하고 멋진 '크라디'와 바다를 건너고 전장을 누빌 거야. 어디든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을 거야. 그럼 우린 계속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어."
“레티…”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레티는 눈이 휘둥그레진 그에게 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말했다.

"안녕, 잘 지내. 전장에서 죽으면 안 돼."

그러자 작별의 말을 고심하던 그 애가 커다란 손으로 희고 야무진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응. 몸 건강해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끼니는 꼭 챙기고.”

그리고 힘주어 덧붙였다.

“네가 항상 행복하기를, 마나난에게 기도할게."

-

높게 올라간 돛, 거세게 파도를 가르는 서역 행 배 위.
한때 생도였던 레티는 '자신의 유일한 친구'와 함께 바다 건너 미지의 땅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 불꽃과 폭발, 전율과 희열이 가득한 삶을.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알 수 없지만 레티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굴하지 않고 맞설 생각이었다. 자신의 곁에는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친구가 있으니까.

마족과의 전쟁 최전선에 놓인 그 곳, '서쪽 대륙'.
그 미지의 땅에서 둘은 어느 때보다도 큰 불꽃을 만들 것이다.
더 크고, 화려한 불꽃을.




글: 시트롬 / 그림: kingseo,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