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녀올게!"
한 레인저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막 소녀 티를 벗은 하프 엘프였다. 긴 금발과 양옆으로 튀어나온 귀까지, 모두의 이목을 끌 것 같은 외모였다.
나이 든 마법사 하나가 큰 사례금을 걸고 콜헨까지의 안내를 부탁했지만, 레인저 중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콜헨에 가는 유일한 길은 힐더 숲의 위험 지역을 가로질렀기 때문이었다.
"뾰족귀 녀석. 사흘 안에 울면서 돌아온다."
"사흘이라니. 난 내일 저녁 전에 건다. 지는 사람이 술 사는 거 어때."
루미엘 뒤편에 있던 레인저들이 키득거렸다.
"얘야…. 지도라도 그려준다면 혼자서 갈 테니 괜히 무리하지 않는 것이…."
늙은 마법사는 활을 손질하고 있는 하프 엘프에게 다가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 무슨 소리야. 나, 힐더 숲은 훤해. 어디에 늪이 있고, 호수가 있고, 어떻게 생긴 나무가 있는지도 다 안다구.
게다가 난 처음 가 본 곳에서도 길을 찾아내는걸! 걱정하지 마. 책임지고 콜헨까지 잘 데려다줄게."
"… 고맙구나."
"뭘, 난 루미엘이야."
"… 한스란다."
밝게 웃는 루미엘을 보고 한스도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레인저들이 비웃으며 쑥덕거리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한스는 그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루미엘이 속삭였다.
"난 쟤들 말은 이쪽 귀로 듣고 저쪽 귀로 흘려. 한 번도 맞는 말을 한 적이 없어!"
"… 놀랍지는 않구나. 신이 좋은 사람에게만 특별한 능력을 주시니, 다들 질투심에 어리석은 말을 하는 거란다…."
루미엘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처음 들어보는 말에 뭐라 답할지 몰라 그냥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빼곡한 나무 사이를 비추는 햇살을 따라 걸었다.
순간, 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루미엘의 팔 주위에서 일렁이는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착시가 일어난 걸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루미엘의 움직임에 맞춰 춤추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흐름.
아름답고 깊은 마나의 기운이었다.
루미엘은 앞장서 걸으면서도 숲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커다란 나무 위에는 수리부엉이 가족이 살아. 밤이 되면 작은 들짐승을 사냥하러 모습을 드러내!
소리 없이 날아다녀서 만나기 엄청 힘들어. 나도 운이 좋을 때만 겨우 만나. 정말 예쁘게 생겼어."
"여기부터는 사과나무가 되게 많은데, 가을이 되면 새빨간 사과들이 열려. 난 활로 맞춰서 떨어뜨린 사과만 먹어.
그리고 달리기도 하고, 연못에서 수영도 하고…. 숲에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
길을 걷는 내내 루미엘은 숲에 대해 조잘거렸다.
그 얼굴에 어린 행복을 통해, 한스는 루미엘 주변을 맴돌던 초록빛 기운을 이해했다.
한스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묵묵히 루미엘의 뒤를 따라갔다.
*
과연 콜헨으로의 여정은 험했다. 점점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루미엘은 새벽 정찰을 하기 시작했다.
"귀찮은 녀석들이 붙었어."
"그게 무슨 말이니?"
"어제 멀리서부터 땅이 울리는 게 느껴졌어. 숲에서 그런 소리를 내는 건 카오누 무리뿐이야."
"카오누?"
"응. 힐더 숲에서 제일 거친 트롤들의 대장이야.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루미엘은 길을 벗어나 높은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곳을 걷기 시작했다.
한스는 루미엘의 눈빛이 반짝이면 정령의 기운이 나타나 주변을 맴돌다 사라지는 걸 알아챘다.
"할아버지. 지금 지팡이에서 나온 파란 건 뭐야? 마법을 쓴 거야?"
한스가 야영지 주위로 푸른빛의 방어 마법진을 만들자, 루미엘이 불을 피우다 말고 물었다.
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바닥 위에 빨간 불꽃을 만든 뒤, 지팡이로 그것을 휘저었다.
빨간 불꽃은 혜성처럼 길게 꼬리를 단 채, 루미엘 주변을 돌다가 장작 위로 떨어졌다.
작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다.
"우와!"
루미엘이 환하게 웃으며 감탄했다.
"얘야. 루미엘…."
"응?"
한스는 불꽃과 마법진에 정신이 팔렸던 루미엘을 불렀다.
"네 몸을 맴도는 초록빛 정령의 기운을 보지 못했니?"
"아. 할아버지 눈에는 이게 보여? 역시 마법사는 다르구나…!"
루미엘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활시위 당기는 데 집중하거나, 엄청나게 빨리 달릴 때…. 이 초록색 기운이 희미하게 보이고 느껴졌어.
하지만 지금까지 이걸 알아본 사람은 없었어. 어렸을 때,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봤더니 날 거짓말쟁이에 미친 애라고 놀리더라고.
사실, 난 좀 이상하잖아? 귀도 이렇고…. 그래서 무시하고 지냈어. 매번 보이는 것도 아니라서."
한스는 어깨를 늘어뜨린 루미엘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한스의 지팡이는 한 번 더 허공에서 작은 원을 그렸다.
그러자 바닥에 남아 있던 나무 조각에서 푸른 불이 타올랐다.
"세상에…. 너무 예뻐!"
"… 우리가 아는 불과 색은 다르다만…. 나름 특별하고 아름답지 않니?"
"……."
한스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 루미엘은 입을 다물었다.
"얘야. 루미엘. 파란 불꽃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려무나. 그런 곳에 빨간 불꽃이 있다면 그 색이 남달라 보이지 않겠니?
보통이라는 건 그런 거란다. 애초에 정해진 게 아니지. 그러니 네가 이상하다고 풀이 죽을 필요가 없단다.
넌 빨간 불꽃 사이의 푸른 불꽃이라 특별해 보이거든."
한스의 말에 루미엘의 눈은 기쁨으로 빛났다. 한동안 파란 불꽃을 쳐다보던 루미엘이 불쑥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그럼 나도 정령의 기운으로 파란 불꽃이랑 마법진 만들 수 있어?"
한스는 루미엘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저녁에도 한스는 루미엘에게 마법을 보여주었다.
루미엘이 파란 불꽃을 만들어보겠다고 졸랐기 때문이었다.
"정령의 기운을 쓰는 너와 달리, 보통 마법사들은 주변의 마나를 쓴단다. 정확히는 사용이 아니라 통로가 된다고 해야겠구나.
마나가 우리 몸을 타고 흐르면 손으로 힘을 방출하거나, 지팡이를 빌려 마나의 능력을 사용하지."
"… 통…로…?"
한스는 루미엘에게 마나가 흐르도록 몸을 여는 방식을 설명했다.
"우리는 마나를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란다. 우리의 몸은 마나가 지나는 길이 되고, 그 힘이 결과를 만들도록 돕는 것뿐이지.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더구나……. 힘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은 이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단다."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기운이 숲과 자연에서 왔다는 것은 루미엘도 느낄 수 있었다.
한스가 말한 겸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숲과 자연이 자신에게 준 많은 것들이 루미엘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달콤한 사과, 시원한 바람,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몸을 숨겨주는 나무들과 깨끗한 연못, 유영하는 물고기들…….
그러자 손끝이 간질거렸다. 귓가에서 속삭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루미엘은 눈을 감은 채, 양팔을 뻗고 손끝에 힘을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한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작은 폭발음에 루미엘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불꽃이 되지 못한 초록빛이 흔들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세상에……. 얘야. 루미엘. 어떻게 한 게냐?"
"나도 잘 모르겠어. 뭔가 간질거리다가…. 그냥 파박! 하고…. 정령의 기운이 내 몸을 통로로 쓴 건가?
엄청 신기해! 할아버지가 하는 말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법 써보는 거 기분도 좋고 재미있어!"
"새로운 것을 하는 데 재미를 느끼는 건 아주 큰 축복이지……."
루미엘은 밤마다 모닥불 곁에 앉아 열심히 마법 불꽃을 만들려 애를 썼다.
하지만 초록색 불꽃은 손바닥 위에 생겨났다가 곧장 사그라들었다.
"아아……. 역시 쉽지 않네. 다음에 해 보고 싶으면 그때 할래. 그래도 이렇게 재미있는 걸 하게 해주다니, 정령들에게 고마운걸?"
"…… 감사한 마음은 참 귀하단다. 또 정령의 기운을 써보고 싶을 땐 오늘 느낀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을 꼭 떠올리렴."
"혹시 할아버지도 마법을 쓸 때, 감사한 마음이 들어?"
한스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엘은 한스의 주름진 미소에서 왠지 모를 아련한 슬픔을 느꼈지만, 어서 자라는 다정한 그의 말에 눈을 감았다.
*
구름 낀 새벽.
따스한 햇살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자, 루미엘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숲은 조용했고 바람은 멈췄다. 힐더 숲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루미엘은 한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한스 역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할아버지도 느꼈지?”
“그래.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구나.”
"끈질기게도 따라왔네. 할아버지. 먼저 저 바위 뒷길로 가. 곧 따라갈게."
루미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쿵,
하고 지면이 울렸다.
루미엘은 다급히 한스를 데리고 근처 커다란 나무뿌리 아래에 몸을 숨겼다.
“… 카오누와 트롤들이야.”
나무들의 틈으로 카오누와 트롤들이 보였다. 루미엘과 한스가 숨은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카오누의 온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상처의 개수를 통해 그가 얼마나 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숲에 울려 퍼졌다. 카오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아직 한스와 루미엘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루미엘은 화살통을 확인했다. 화살은 단 하나뿐이었다. 카오누와 마주치는 건 피해야만 했다.
"할아버지. 이대로 쭉 가면 갈림길이 나올 거야. 두 길 모두 콜헨으로 이어져. 많이 돌아가야 하지만 왼쪽 길이 훨씬 안전해.
만약 저 녀석들에게 들키면 내가 주의를 끌 테니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가. 알았지? 셋을 세면 같이 가는 거야. 하나… 둘…. 얼른 달려!"
루미엘이 속삭였다. 두 사람은 어두운 숲길을 최대한 조용히 달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상대는 수많은 전투에서 적을 추격해온 카오누였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카오누와 트롤들이 울부짖자, 루미엘은 한스를 떠밀었다.
"빨리 가!"
마지못해 달리는 한스를 확인한 뒤, 루미엘은 카오누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마지막 화살을 팽팽한 시위에 걸고 눈을 감았다.
바람이 살랑이며 그녀의 두 뺨을 스쳤다.
'지금이야…!'
루미엘은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정확히 카오누를 향해 날아가며 공기를 갈랐다.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카오누는 화살이 명중한 눈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루미엘의 얼굴에 잠시 안도의 기색이 비쳤지만, 카오누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거칠게 화살을 뽑은 뒤,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고 루미엘을 향해 돌진했다.
남은 화살은 없었다.
루미엘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추격해 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의아해진 루미엘이 뒤를 돌아보자, 바람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루미엘 옆의 나무에 박혔다.
트롤들이 루미엘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피할 곳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루미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주저앉았다.
화살이 몸에 박힐 거라는 루미엘의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화살이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한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스는 루미엘 주변으로 방어벽을 만든 채,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할아버지! 왜 여기 있는 거야?!"
"얘야! 그보다는 저놈들을 따돌릴 방법부터 생각하렴!"
그 말에 루미엘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루미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한스는 온 힘을 끌어내 카오누와 트롤들이 있는 방향으로 거대한 푸른빛을 쏘았다.
곧 나무와 바위가 부서지고 트롤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미엘은 한스를 이끌고 달렸다. 다리는 점점 무거워졌고, 폐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루미엘은 콜헨으로 가는 빠른 길을 알았다.
위험해서 사람들이 꺼리는 길이었지만, 그곳을 안전히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어느새 조용해진 숲속. 발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화살도 날아오지 않았다. 루미엘은 안심하며 한스에게 숨으라고 말해 둔 나무로 향했다.
"할아버지. 안심해. 이제 괜찮…."
도망치느라 보지 못했던 것이 그제야 루미엘의 눈에 띄었다.
한스의 가슴에 박힌 화살. 그의 로브는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루미엘은 한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지. 콜헨에 거의 다 왔어. 거기에 분명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
“얘야…. 그럴 필요 없단다….”
“아니, 아니야. 이거 지혈하면서 가면 된다구!"
루미엘의 목소리와 손이 심하게 떨렸다. 한스는 화살을 빼려는 루미엘의 손을 막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루미엘. 시간이 없으니 들어다오. 내가 아무것도 모르던 마법사였을 때,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며 나를 살려 준 용병이 있었단다."
한스가 콜록대자,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품에서 낡은 칼브람의 견장을 꺼냈다.
“콜헨의 묘지에 그 친구…. 군터, 군터가 잠들어 있단다. 훌륭한 마법사가 되면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했었지….
이것을 나 대신 그의 묘지에 가져다주겠니? 이제 옛 친구를 마음 편히 볼 수 있겠구나….”
"안 돼. 할아버지. 그러면 직접 군터에게 가야지! 나약한 소리 하지 마!"
한스는 힘없이 웃으며 지팡이에 달려 있던 두 개의 보석을 뜯어냈다.
루미엘의 두 손 위에, 한스는 피 묻은 견장과 두 개의 작은 보석을 올려두었다.
"울지 말려무나. 마지막으로 떠나온 여정이 너와 함께라서 나는 즐거웠단다. 이건 네게 주는 선물이란다.
… 얘야. 너는 앞으로도 무엇이든 잘 해낼 거란다. 넌 … 미지에서도 길을 찾아내는 특별한 아이잖니…."
한스는 눈물범벅이 된 루미엘의 얼굴을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 할아버지?”
대답은 없었다.
루미엘은 피 묻은 견장과 보석을 움켜쥔 두 손을 가슴에 얹었다.
평온히 잠든 한스의 겉옷 위로 루미엘의 슬픔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람이 또 방향을 바꿨다. 숲의 흐름도 멈췄다.
다시 카오누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스의 핏자국을 따라온 것 같았다.
남은 화살은 하나도 없었건만….
그 순간, 한스의 몸에 박힌 화살이 루미엘의 눈에 띄었다. 루미엘은 견장을 품속에 넣고는 손바닥으로 양 뺨을 토닥였다.
크게 한숨을 내쉰 루미엘은 한스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고마워. 할아버지의 마음, 꼭 군터한테 전달할게. 날 믿어 줘.”
*
루미엘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한스와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아니, 지켜야 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앞뒤 분간조차 어려운 어두운 숲을 달리고 있었지만, 루미엘은 콜헨으로 가는 방향을 정확히 알았다.
그러나 카오누 역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루미엘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아앗!"
빠르게 달리던 루미엘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순간 루미엘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나무와 수풀이 모습을 감췄다. 회갈색 진흙 위, 죽은 나무들이 가득한 풍경이 펼쳐졌다.
늪지대였다.
루미엘은 진흙 속에서 바위를 찾아 밟으며 늪의 정중앙으로 향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늪에 빠지게 될 터였다.
카오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루미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오누의 양발이 늪에 잠겼다. 육중한 몸은 늪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발을 빼기 위해 몸부림치던 카오누는 썩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자 루미엘의 얼굴에 희망이 보였다.
루미엘은 한스의 피에 젖은 화살을 시위에 걸고 카오누의 목을 향해 화살 끝을 조준했다.
단 한 번의 기회.
루미엘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는 호흡을 멈췄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시위를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둔탁하고 짧은 파열음이 들렸다.
믿기지 않는 소리에 루미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위가… 끊어졌다.
그 반동에 튕겨 나간 루미엘은 넘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시위에 걸었던 마지막 화살마저 처참히 부러졌다.
루미엘은 늪에서 벗어난 카오누와 눈이 마주쳤다. 거대한 곤봉을 쥔 채 다가오는 카오누의 포효가 온 숲을 뒤흔들었다.
루미엘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말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느리고 다정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미지에서도 길을 찾아내는 특별한 아이잖니…."
힐더 숲에서의 여정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지나갔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자, 가야 할 길이 눈앞에 그려졌다.
루미엘은 천천히 일어섰고, 침착하게 활을 집어 들었다.
눈을 감았다.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 베어 물었던 붉은 과실의 달콤함,
숨 가쁘게 달리던 순간, 응원하듯 귓가를 스치던 바람의 시원함,
슬픈 날, 온몸을 감싸주던 햇살의 따뜻함,
맑은 연못에서 헤엄치고 나오면 코끝에서 느껴지던 풋풋한 풀내음,
어두운 숲길을 비추며 밤의 친구가 되어주던 달빛의 아름다움.

시간이 멈췄다.
루미엘은 정령들이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을 채워오는 거대한 힘.
팔을 감싸고 있던 정령의 기운은 루미엘의 손끝과 활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새로이 생겨난 초록빛의 화살과 시위는 루미엘의 활 위에서 아름답게 빛났다.
루미엘은 가녀린 손가락으로 빛나는 화살깃과 시위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
루미엘이 시위를 놓자마자 화살은 카오누를 향해 날았다.
마법 화살의 빛은 눈부신 궤적을 그리며 늪지대의 어둠을 모두 집어삼켰다.
어마어마한 빛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숲에는 정령들의 잔상만이 남아 있었다.
카오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루미엘만이 작게 숨을 몰아쉬며 서 있을 뿐이었다.
"고마워."
바람결에 실어 보내듯 루미엘이 속삭였다.
*
콜헨까지의 길은 예상보다 더 짧았다.
나무의 밀도가 낮아지고 그림자가 사라진, 눈부신 햇빛이 내리쬐는 곳.
힐더 숲의 끝에 도달한 루미엘은 숨을 골랐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마법사 노인을 떠올렸다.
루미엘은 힐더 숲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
콜헨 외곽.
오래된 묘역의 한 묘비 앞.
루미엘은 피 묻은 칼브람의 견장을 꺼내 이름마저 희미해진 묘비 위에 걸었다.
“한스 할아버지가 이곳에 꼭 오고 싶어 했어. 이건, 할아버지가 전하랬어. … 할아버지는 날 구해주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떠났어….”
루미엘은 바닥에 활을 내려놓고 돌에 새겨진 이름을 몇 번이고 손으로 쓸어보았다.
군터.
음각으로 새겨진 이름을 쓰다듬을 때마다 손끝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루미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결국 무덤 앞에 주저앉았다. 묘비 위로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슬픔으로 가득 찬 울음소리가 묘지 안에 울려 퍼졌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피투성이인 칼브람 견장조차 황금빛 태양 아래에서는 아름답게 반짝였다.
루미엘은 부은 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바람에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 모두 고마워……."
루미엘은 칼브람의 견장과 군터의 이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가슴에서 피를 흘리던 한스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루미엘은 한스가 준 보석을 꺼내 꼭 쥐었다.
"내가 가야 할 길……."
루미엘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묘지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
콜헨은 처음이었지만, 루미엘은 가야 할 장소를 단번에 찾아냈다.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꾹 다물고 있던 루미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세 차례 맑은 노크 소리가 울렸다.
잠시 뒤, 칼브람 용병단의 오래된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