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MIUL

꿈.
꿈을 꾸었다.

끝없는 무한의 공간.
일렁이는 어둠을 밝히는 수십 수백 개의 마법진과, 길게 이어진 마나의 선들.
아주 낯설면서도, 또한 너무도 익숙한 이곳.

문득 아래를 내려다본 소녀는, 자신의 양손에 찬란한 빛이 맺힌 것을 보았다.
손을 앞으로 뻗자 빛은 탄환이 되어 어둠 저편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자신의 앞으로 펼쳐진 빛을 따라, 소녀는 걷고 또 걸었다.
한참을 걸어 길의 끝에 다다르자, 그곳엔 자신과 비슷한 또 다른 소녀가 있었다.

빛나는 금발의 소녀.
무언가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듯 잔뜩 웅크린 뒷모습.
가냘프게 떨고 있는 그 등을 보자, 소녀는 곧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점멸하는 미약한 빛의 덩어리들이 보였다.
일그러진 모습의 빛의 형상들이 하나, 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왔구나, 악마 놈들.'

소녀가 악마라고 부르는 것들은, 엄청난 속도로 분열하며 무수한 분신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사념이 마나를 타고 흘러 전해졌다.
악마들이 노리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금발의 소녀였다.

'너희들은 이 아이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어.'

서둘러 빛의 탄환을 장전한 소녀는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점점 자신을 에워싸는 악마들을 향해, 양손의 총구를 들이밀었다.

잠시 뒤.
무수한 악마의 시체들 위에 소녀가 서있었다.
멋대로 널브러진 악마들의 몸은 탄환이 입힌 상처들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던 소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새, 웅크려 있던 금발의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열린 공간문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무사하구나. 정말, 정말로 다행이야.'

모든 목표를 완수한 소녀는 기쁘게 미소 지었다.
자신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조차,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점점 아득해지는 의식 속.
멀어지는 뒷모습을 향해, 소녀는 전하지 못할 마지막 인사를 속삭였다.

언제나 행복해야 돼. 알았지?

나 같은 건 잊고.

안녕.

인사를 채 마치기도 전, 소녀라는 존재는 공간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고 말았다. - 여자는 조촐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폈다.
머리맡에는 간밤에 읽다 만 마법서가 펼쳐진 채 놓여있었다.
꿈의 여운인지, 아니면 늦게까지 연습에 몰두하다가 잔 탓인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선 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푼 여자는, 서둘러 무장한 후 짐을 챙겼다.
방안 곳곳에 늘어서 있던 아기자기한 조각이나 인형들이, 그녀의 천 가방 안을 가득 채웠다.
떠날 준비를 마친 여자는 여관의 문을 나섰다.

뿌연 하늘에 연기의 매캐한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다.
기와 올린 목조 건물과 불 꺼진 초롱들이 늘어선 거리는 검은 머리칼, 갈색 눈의 사람들로 붐벼, 긴 은발을 늘어트린 여자의 모습은 으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단순히 색목인이기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의미로, 그녀는 이미 ‘불의 도시’ 서란의 유명 인사였다.

"뭐라고? 용병단을 나가겠다고...? 이렇게 갑자기?"

우락부락한 인상의 용병단의 대장은 핏발선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그런 대장의 반응에 전혀 흥미 없다는 듯, 여자는 무심히 말을 이어갔다.

"응, 이제 더 이상 흥미가 없어졌거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대장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자의 태연한 표정이 그의 불편한 심기를 더욱 자극했다.

"... 왜? 서란엔 용병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천지야. 나 하나 없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하지만..., 이제 막 우리 용병단의 위상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고. 당장 오늘도 ‘공간의’...."
"그 용병단의 위상 같은 거에 연연하는 게 우습거든. 남의 명성에 기대서 쌓아 올린 가짜 위상에 목메는 꼴이란."
"...."
"어쨌든, 이만 가볼 게. 안녕."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여자는 망토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며 돌아섰다.
등 뒤에서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대단한 '공간의 마녀' 라길래 선뜻 받아줬는데, 알고 보니 명예도 신의도 없는 계집이구나. 이대로 그 문턱을 넘는다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거다."
"... 어머나, 무서워라."

무미건조하게 협박을 받아치며, 여자는 용병단 사무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나지막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나도 경고 하나 할 게. 다음번에도 날 '공간의 마녀'라고 부르면, 그땐 혀에 총구멍을 내줄 거니까 조심해. 알았지?"

말문이 막힌 대장을 뒤로하고, 여자는 문을 나섰다.

벌써 여섯 번째 용병단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힘을 기르기 위해, 여자는 도시의 용병단들을 이리저리 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날고 긴다는 용병단들은 하나같이 어중이떠중이들의 모임이어서, 모두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어느 곳에도 자신보다 강한 자는 없었다.

문득, 길가 한구석에 서있는 험상궂은 덩치 두 명이 보였다.
온몸으로 힘을 증명하려고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각종 동물들을 조잡하게 새긴 그들의 팔을 보자 그녀는 코웃음이 나왔다.

"거기, 색목인 여자. 뭐가 웃긴데?"
"혼자 웃지 말고 같이 좀 웃자고. 우리 호랑이 협객들이 잘 해 줄게."

옷섶을 걷어 호랑이 문신을 보여준 한 우락부락한 사내는, 건들거리며 다가와서 여자가 머리에 쓰고 있던 천을 거칠게 벗겼다.
하지만 여자의 머리칼을 보자 곧 사색이 된 채 허둥지둥 뒷걸음질 쳤다.

"은... 은발 머리에 분홍색 얼룩. 설마 넌... 그 '공간의’...."
"... 거기까지만 하는게 좋을 걸."
"혀, 형님. 우리 완전 사람을 잘못 건드렸슈. 이 여자..., 그 용병..., '공간의'…."
"뭐? '공간의 마녀'라고...?"

그들의 입에서 기어코 자신의 이명이 나오자, 그녀는 푹 한숨을 쉬었다.

“결국 말해버렸네. 그 이름만 말하지 않았으면 무시하고 넘어가 주려 했는데.”

일순간 여자의 전방에 허공이 일그러지면서 커다란 공간문이 열렸다.
보랏빛을 띈 원형의 문은 그녀가 안쪽으로 뛰어들자 곧장 닫혔다.

"도... 도망친 건가? 휴우, 일진 사납게 될 뻔했네."
"거기, 뭘 쳐다보고 있어. 얼른 할 일들 하러 가라고."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사내들은 어느 새 유명한 용병을 구경하러 모여든 군중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때, 사내들의 머리 위로 공간문이 다시 열렸다.
열린 공간문 사이로 튀어나온 여자는, 손에 들린 한 쌍의 리볼버로 그들의 목뒤를 강하게 내리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습격에, 자칭 '호랑이 협객'들은 커다란 나무토막이 쓰러지듯 맥없이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날파리들."

대자로 뻗은 몸뚱이들을 날카롭게 쏘아본 여자는 다시 망토의 모자를 올려 썼다.

냉정하고 무자비한 용병 ‘공간의 마녀’.
차가운 은발, 장미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더 강한 힘을 가진 먹잇감을 찾아 서란의 깡패 소굴과 용병단을 헤집고 다닌다는 괴물. 마법을 이용해 공간을 순식간에 넘나드는 도깨비 같은 여자.

이것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여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간의 마녀’라는 이명이 싫었다.
특히, ‘마녀’라는 단어를 듣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싫었다.
그래서 ‘마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자들은 대부분 예의 ‘호랑이 협객’처럼 본보기를 보여주곤 했다. 누구도 그 이명을 부르지 못하도록.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공간의 마녀’의 무용담은 도시 곳곳에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가볍게 몸을 툭툭 털고, 여자는 온갖 제작소과 공방, 그리고 대장간이 늘어서 있는 '불꽃의 거리' 쪽을 향해 발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보며, 군중들은 낮은 목소리로 연신 수군수군 대고 있었다.

- 늘어서 있는 무기들과 화로를 지나쳐, 여자는 한 화약 제작소 안으로 들어갔다.
솥에서 끓는 붉은 액체와 곱게 갈린 각종 가루들 사이, 검댕이 묻은 얼굴을 한 중년의 장인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나야."
"오, 미울. 간만에 들렸구나."

여자의 목소리를 듣자, 장인은 퍽 반가운 기색이었다. 그는 하던 일을 당장 멈추고 그녀를 안으로 맞이했다.

"그래. 오늘도 사람들을 흠씬 때려줬냐? 아니면 또 용병단을 그만두기라도 한 거냐?"
"...둘 다 했어. 그러니까 더 이상 묻지 말고 총이나 봐줘."

여자는 총집에서 총 두 자루를 꺼내 대뜸 장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 당돌한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그는 자연스럽게 물건을 받아 들고 작업대로 향했다.

"너도 알겠지만, 이 거리엔 뛰어난 총포 장인들이 많이 있다. 총포를 수리받고 싶으면 나 같은 화약쟁이보다는 그치들에게 가는 게 나을 텐데."
"나도 알아. 그냥 아저씨가 섭섭해할까 봐 와주는 거야."

진담인지 농인지 모를 톡 쏘아붙이는 한마디에, 장인은 껄껄 웃으며 나무 의자를 당겨 앉았다.

"거참, 고맙구나. 의리 있는 십오 년 지기 단골손님."

이런저런 점검과 간단한 수리가 이루어지는 동안, 여자는 책상에 걸터앉아 화약 장인의 끊임없는 수다를 듣고 있었다.
우리 딸 ‘미리’가 벌써 다 커서 어른이 되었다느니, 아들 ‘마루’가 이제는 제법 화약쟁이 흉내를 내게 되었다느니.
그다지 흥미 없는 이야기들에 내내 건성으로 대꾸하던 그녀는, 무심코 품 안에서 작은 나무 인형 하나를 꺼냈다.
늑대 같기도 곰 같기도 한 오묘한 모습의 인형은,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손때와 크고 작은 흠집이 가득했다.

"그 인형, 네가 어린 꼬마였을 때부터 들고 있었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고."

인형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장인은 추억에 잠긴 듯 말을 이었다.

"참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길바닥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린 꼬마가, 서란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으로 자라다니."
"다 아저씨가 어린 나를 용병단 같은 곳에 연결해줬기 때문이지. 이게 최선이라며 가혹하고 험난한 구렁텅이로 날 집어넣었으니까, 당연히 이렇게 자라는 거 아냐."

인형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여자는 무심히 대꾸했다.
그 말을 들은 장인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그때는 내 집안 사정도 녹록치 않았고, 신비한 힘을 가진 천애 고아를 받아줄 곳이라고는 오직 용병단 밖에 생각나지 않았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단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그를 보자, 여자는 어쩐지 머쓱해졌다. 결코 그를 비난하거나 비아냥대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십오 년 전, 낯선 동방의 거리에서 굶주리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이곳 서란까지 데려와 의탁할 곳을 마련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화약 장인이었다.
그녀는 장인을 생명의 은인, 그리고 조금은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고생은 좀 했지만 아저씨 덕분에 배곯지 않고 이렇게 대단한 성인이 되었잖아. 늘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

자주 보지 못하는 상냥함에 아저씨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쑥스러워진 여자는 볼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역시 익숙하지 않았다.

"자, 다 되었다. 크게 이상은 없구나. 다만 앞으로는 총으로 사람을 때리는 건 자제하도록 해라."

씩 웃으며, 장인은 어느새 말끔 해진 두 자루의 총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총을 이리저리 훑어본 뒤, 여자는 만족스러운 듯 리볼버를 총집에 집어넣었다.

"그래, 용병단도 때려치웠겠다. 이젠 뭘 할 참이냐?"
"글쎄, 사실 모르겠어. 도장 깨기 하듯 용병단을 전전하는 것도 이젠 별로야. 다 약해 빠진 자들 뿐이라."

푸념 섞인 답을 들은 장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 도시에서 너보다 강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게다. 너는 마음만 먹는다면 단단히 무장한 왕국군의 무리도 단숨에 궤멸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하니까."
"뭐, 내킨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그러니까, 이젠 여기를 떠날 때도 되지 않았니? 서란은 너무 좁고, 네 재능은 너무 뛰어나. 이 도시에서 썩기엔 네가 너무 아까워. 난 네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
"나는 가끔 네가 무언가를 피해, 이 서란의 높은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으로부터 숨고 있는 게냐. 내게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네 '과거'로부터?"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자의 눈빛이, ‘과거’라는 말에 일순간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 날카로움 너머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 그리고 괴로움의 감정이 비치는 걸 장인은 느낄 수 있었다.

".... 이만 갈게."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장인의 시선을 피한 채, 황급히 두건을 뒤집어쓴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제작소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등 뒤로, 장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미울, 명심해라! 피하는 것이 답은 아니다. 마주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 소리에서 도망치기라도 하듯이, 여자는 골목을 뒤덮은 자욱한 연기 속으로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다. - 꿈.
꿈을 꾸었다.

무한히 펼쳐진 공간 속에서 한 소녀를 지키는 꿈.
빛의 탄환을 무수히 쏘아 밀려오는 악마들을 처단하고 그 시체들 위에 서는 꿈.
점점 소멸해가는 몸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꿈.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던 말은...,

언제나 행복해야 돼.

나 같은 건 영영 잊고.

잘 가.

언니.... - 동이 틀 무렵, 여자는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나처럼 머리맡에는 간밤에 읽다가 만 마법서, 그리고 작은 나무 인형이 있었다.
여자는 인형을 양손으로 소중히 감싸 이불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네가 자꾸 이 꿈을 꾸게 만드는 건 아니겠지, 아리."

인형의 이름은 '아리'였다.
소중한 누군가의 이름 앞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
슬프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면 여자는 늘 인형에게 말을 건넸고, 인형은 그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낯선 이방의 땅에서 홀로 자라온 그녀에게, 인형 ‘아리’는 유일한 친구였다.

"아리, 또 그 꿈을 꾸었어. 악마를 처단하는 꿈. 최근 들어 부쩍 자주 꾸는 것 같아. 원래는 드문드문 꾸던 꿈인데...."

여자는 어릴 적 서란에 도착했을 때부터, 종종 꿈을 꾸어 왔다.
내용은 항상 비슷했다.
이공간 안에서 한 소녀를 지켜 내기 위해 악마들과 맞서 싸우고, 소녀가 다른 공간으로 무사히 넘어 갈 수 있도록 돕는 꿈.
한창 마법 공부와 훈련에 매진했을 시절에는,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되길 바라는 소망이 꿈이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나도 악마와 격전을 벌인 느낌이 온몸에 생생하게 잔류해 있었으니까.
꿈이 무얼 뜻하는 건지, 왜 같은 꿈이 반복되는지 이해하려고 드는 건 진작에 포기한 채, 그녀는 꿈을 모의 전투의 연장선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저씨 때문인지도 몰라. 과거니 뭐니.... 잔소리만 하고."

사실, 꿈보다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며칠 전 화약 장인이 한 말이었다.
화약 장인의 말마따나,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과거'였다.
동방의 땅에 당도하기 전까지의 기억.
잠깐이라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마치 아물지 못하고 곪은 상처를 칼로 후벼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파왔다.
그 고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절대 가라앉지 않았다.

한때, 홀로 동방의 거리를 배회하던 어린 소녀는 밀려오는 고통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울곤 했다.
하지만 이내 거칠고 가혹한 용병단 생활을 통해서, 오직 강한 힘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다. 그리고 자신이 타고난 유일무이한 힘, '공간의 힘'을 키워 강해지는 것이야말로, 작고 초라한 자신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소녀는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것을 모두 버리기로 결심했다.
뼈아픈 과오도, 행복했던 추억도 전부 다 마음 깊은 곳에 단단히 묻어둔 채,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절대로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과거의 기억은 그녀의 안에서 더욱 선명해져만 갔다.
‘공간의 마녀’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과거’였다.

"... 아저씨의 말은 틀렸어. 과거는 날 약하게 만들 뿐이야…. 너는 무슨 말인지 알지, 아리."

여자는 인형에게 물었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 귀여운 표정을 바라보자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팔다리를 쭉쭉 피며, 여자는 오늘은 무얼 할지 고민했다. 단신의 용병이니 딱히 임무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문득, 장인이 했던 다른 말이 떠올랐다.

'이 도시에서 썩기엔 네가 너무 아까워. 난 네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니까."

장인의 말처럼 그녀는 서란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서란을 떠날 만한 ‘때’가 있다면,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도 같았다.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여자는 그 충고에 따라 성 밖을 돌아보기로 결심했다. - 행선지도 보지 않은 채, 여자는 아무 마차나 타고 서란의 성곽을 벗어났다.
마차는 성문을 지나, 초록빛과 황금빛의 물결이 일렁이는 논밭의 옆을 몇 시간째 달리는 중이었다.
어느새, 태양은 저물어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풍경을 내다보던 여자의 귓전에, 불현듯 과거의 한 조각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아빠,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에요?'
'우린 곧 배를 타러 갈 거란다. 아리샤, 미울. 저들이 우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하거든.'
'하지만 엄마는...'
'엄마는.... 우리 셋이 함께 있다면 아빠는 그걸로 충분해.'

먼 옛날, 마차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슬픔을 애써 감추고 자신을 달래던 다정한 음성.
그 기억이 너무나 아파서, 그녀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더 이상 마차를 타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여자는 적당한 삯을 치르고 마차에서 내렸다.
어차피 변변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 안에서 내내 괴로운 것보다는 차라리 하염없이 걷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어진 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엄청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돌아보자 말을 탄 한 무리의 사내들이 그녀를 향해 우르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공간의 마녀가 보인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익숙한 굵은 목소리. 우락부락한 덩치.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박차고 나온 용병단 대장의 목소리였다.
빠르게 말을 달려 어느새 자신을 주위를 에워싼 사내들을 보자 여자는 기가 찼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기억 안 나?"
"닥쳐라, 배신자. 넌 우리 용병단과 나를 모욕했어."
"…설마 그때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야? 다 큰 어른인 척하더니,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었네. 유치한 어린애를 상대할 생각은 없으니 이만 돌아가."

자리를 뜨려는 여자의 목에, 용병 대장의 시퍼런 칼날이 들이닥쳤다.
예리한 칼끝에 닿은 은빛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 나갔다.
깊은 한숨을 쉬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 난 분명히 기회를 줬어."

순간, 재빠른 몸놀림으로 그녀는 공간문을 열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말의 등 위로 착지해 자신의 적들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용병 대장은 여자의 전력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자신들이 밀릴 걸 알면서도 미련하게 덤벼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주어지는 임무가 너무도 쉬워 온 힘을 다해 싸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한번도 전력으로 전투에 임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전력을 다해 싸우는 그녀의 모습은 소문처럼 도깨비나 야차와 같았다.
공간문 사이를 빠르게 유영하는 그녀에게 낙엽처럼 쓰러진 부하들을 보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한참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결국, 이판사판으로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두르던 대장은, 뒤통수에 총구가 닿은 걸 느끼자 하던 동작을 모두 멈췄다.

"... 괴물 같은 여자."
"시비를 먼저 걸어온 건 너야. 잊지 마."

여자는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때, 눈앞에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웬 거대한 대검이 날아와 바닥에 꽂혔다.
고개를 돌리자, 저편에서 커다란 몸집의 색목인 사내가 자신이 있는 방향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열심히 달리는 사내의 뒤로는 엄청난 수의 마족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뭐야, 저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그녀가 황당해하는 사이, 용병 대장은 부리나케 도망쳐 서란 방향을 향해 꽁무니가 빠지도록 달아났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의문의 사내는, 여자를 보자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이, 시간 있으면 나 좀 도와줘."
"무슨 소리야."
"보다시피 내가 마족들을 좀 끌고 왔거든.”

사내는 턱 끝으로 뒤쪽을 흘끗 가리켰다.
높게 묶은 부스스한 긴 머리, 제멋대로 자란 수염, 꼬질꼬질한 행색이 그가 방랑 중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근데 생각했던 거보다 이놈들 식구가 많더라고. 둘이면 빨리 해치울 수 있을 거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너 때문에 내 목표물이 도망쳤다고."

사내는 땅에 꽂혀 있던 대검을 가볍게 빼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 거 미안하게 됐다. 이제는 날 도와줄 거지?"

그 넉살 좋은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상황에 휘말려버린 것 같았다.

'아저씨 말대로 하니까 자꾸 마음에 안 드는 일만 일어나잖아.'

마음속으로 애꿎은 장인을 탓하며, 여자는 밀려오는 마족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 별이 총총 뜬 늦은 저녁.
길가에 조촐히 세워진 작은 주점은 각 지역에서 온 여행자들로 북적였다.

여자는 자리에 앉아 곡주가 담긴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아까 만난 색목인 사내가 함께 있었다.
마족과의 싸움에서 서로의 전투 실력을 보고 감탄한 둘은, 통성명을 하고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되었다.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음식 몇 접시를 빠르게 비운 사내는, 이제 곡주를 들이 키는 중이었다.

"하, 살 것 같다."

석 잔을 연거푸 들이마신 그는 만족스러운 듯 탄성을 내뱉었다.
사내의 옆에는 빈 병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그 유명한 용병 '대검의 허크'가 동방엔 왜 돌아온 거야? 소문에는 바다 건너로 떠났다던데."
"그냥 뭐, 이런저런 마음이 들어서. 요즘은 대검 말고 새로운 무기를 찾아보는 겸 돌아다니고 있지."

그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대검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 그나저나 공간의, 흠. 너는 그런 하찮은 놈들 이랑 뭘 하고 있던 거야? 네 발끝에도 못 미치는 놈들 같던데."
"그냥 뭐,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여자는 자신 앞의 잔을 만지작거리며 적당히 대답했다.
자신의 답변을 그대로 되돌려 받은 사내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들 사연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지."

사내와 여자는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동방에서 자란 이방인의 신세, 용병 생활의 고충. 그와 그녀는 썩 통하는 점이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먼 과거로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그래서, 너는 어쩌다 동방까지 오게 된 거야?"

여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차갑게 쏘아붙였다.

"... 요즘 들어 과거 얘기를 못해서 안달인 사람들이 많네."

하지만 곡주가 불러일으킨 들뜬 기분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인지 대화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나는 가족을 찾아다니고 있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가족을. 한마디 말과 내게 보이는 환영만 믿고.... 지금도 가끔 대장장이의 모습이 나타나서 바다 건너에 가족이 있다고 속삭여.”

사내는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뭐, 내가 원래 미친놈이니 온통 미친 것만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

이야기를 마치자 낯간지럽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한 잔을 더 들이켰다.

여자는 잔을 만지작거렸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해본 적 없던 그날의 이야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도 말한 적 없던 이야기.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만나니, 어쩐지 조금은 마음을 털어놓고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혼자 배를 타고 동방에 왔어. 나 때문에 엄마는 돌아가시고, 언니는 사라졌어. 그리고 아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지. 아마도 돌아가셨을 거야. 그때 이미 많이 아프셨거든."

이야기를 들은 사내는, 그녀의 씁쓸한 표정을 보며 말했다.

"그렇군. 네 사연도 나 못지않게 엉망인데."

분위기가 다소 우울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그는 애꿎은 잔만 만지작대고 있는 그녀를 향해 유쾌한 투로 말했다.

"뭐, 여자아이 혼자 살아남기는 어려운 세상이지만 말이야. 사라졌다는 네 자매가 어딘가 두 눈 부릅뜨고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언니를 찾으러 떠나보는 건 어때?"
"... 설령 언니가 살아있다고 해도, 언니한테는 내가 필요 없어."
"엥, 어째서? 이 시궁창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족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다고."
"당연하잖아, 내가 가족을 전부 망친 불행의 씨앗이니까. 무슨 면목으로 그 앞에 나서겠어? 나 때문에 또 불행해질 게 뻔한데. 언니를 위해서도 나 같은 건 언니의 인생에 없는 편이 나아."
"... 너 엄청 복잡하게 사는구나. 진심이냐."

여자의 반응이 놀랍다는 듯 탄식하며 사내는 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만약에 네가 너라면, 형제가 살아있다는 기미만 보여도 당장 찾으러 갈 거야. 아니, 죽었다고 해도 가겠어. 그래서 운 좋게 살아있는 사람과 만나면, 당장 미안하다고 말한 후 그 이후로 행복하게 살 거야. 그렇게 복잡하게 살기엔 일분일초가 아쉽잖아."

거칠게 한 잔을 더 들이마시고 난 그의 눈빛은 사내답지 않게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차갑게 쏘아붙이는 여자의 일갈을 듣자, 그는 이내 원래의 괄괄한 모습으로 돌아와 웃었다.

"... 오늘 처음 본 주제에. 뭘 안다고. 근육덩치바보가." - 후일을 기약하며 사내와 작별한 후, 여자는 주점을 나와 숲길을 따라 걸었다.

푸른 달이 눈부신 밤이었다.
마치 먼 옛날의 '그 밤'처럼....

길가의 한 나무에 기대앉은 그녀는 품에서 나무 인형을 꺼냈다.
한번 새어 나온 기억은 막을 수 없는 파도가 되어, 채 아물지 못한 마음속 상처들을 하나하나 헤집고 훑어 내렸다.
그 쓰라린 고통에, 인형을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아리,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잠시라도 떠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두 눈을 감싼 채로, 그녀는 천천히 무릎에 기대었다.

"있지, 언니가 보고 싶어.... 엄마도... 아빠도...."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방울이 조금씩 조금씩 흘러내렸다.
취기 때문인지 이내 저항하기 힘든 졸음이 몰려왔다.
무릎에 기대어 그녀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미울. 울지 마.'

어쩐지,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미울. 울지 마.'

점차 모든 것이 아득해지며, 오랜 시간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꿈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

"... 미울, 울지 마."
"우리 딸, 무슨 일이야. 아빠가 안아줄까?"

너 댓살 즈음의 나는, 똑하고 반동강이 나버린 새싹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열심히 돌본 씨앗에서 드디어 싹이 나 기뻐하다가, 그만 화분을 그만 떨어트리고만 참이었다.

"엄마, 아빠. 미울이 엄마, 아빠한테 새싹을 보여주려고 했대요. 근데 화분이 망가져서 너무 슬프대요."

옆에 서있던 언니는 침착한 목소리로 나의 마음을 대신 부모님에게 전했다.
서러움으로 목이 메인 나는, 대답 대신 언니의 말을 수긍하기 위해 힘껏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리샤. 그걸 어떻게 안 거니?"
"그냥... 아는 거에요. 미울은 제 동생인걸요."

어떤 이유인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언니와 나는 서로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가끔은 같은 꿈을 꾸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실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늘 단단히 엮여 있었다.

울먹이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언니는 배시시 웃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유일한 이해자.
언니만 있다면, 나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나저나 많이 속상했겠구나. 그 화분, 이리 줄래? 엄마가 도와줄게."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엄마에게 화분을 건네자, 아빠는 엄마만 믿으라고 내게 속삭인 뒤 눈을 찡끗해 보였다.

잠시 뒤, 엄청난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엄마의 손길이 닿자, 부러진 줄기에서 다시 새싹이 돋기 시작한 것이다.
싹은 놀랍도록 빠르게 자라나 이파리가 생기고 꽃대가 생기고, 마침내 꽃까지 피웠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언니와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슬픔이나 서러움 따위는 이미 훨훨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와아... 정말 멋져요!"
"대단해요...!"

화분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하는 나와 언니가 귀여운 듯, 엄마와 아빠는 연신 흐뭇한 얼굴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이런 힘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사실 엄마는 너희처럼 아주 어린 소녀일 때, 날씨를 맞추고 식물을 싹트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한동안은 혼란스러웠지만, 이젠 이게 멋진 힘이란 걸 알게 되었단다."

엄마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수줍게 말했다.
나와 똑같은 엄마의 은빛과 분홍빛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너희도 엄마의 딸이니까, 곧 신비한 힘을 깨우치는 날이 올지도 몰라. 그때가 온다면 엄마랑 아빠한테 꼭 말해 줘야 한다."

아빠는 두 팔을 쭉 벌려 우리를 꼬옥 안아 주었다.

"아빠!"
"아빠, 숨 막혀요!"

빠져나오려고 연신 버둥거리는 나와 언니의 볼에, 아빠와 엄마의 뽀뽀 세례가 쏟아졌다.
언니와 나는 깔깔거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 다음 장면은, 나의 생일날이었다.
언니와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의 양손에는 늑대인지 곰인지 모를 오묘한 모습의 인형이 들려 있었다.
모양은 같았지만 특이하게도 하나는 헝겊, 다른 하나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인형이었다.

"어... 아빠, 왜 둘이 다른 인형이 에요? 나는 언니랑 같은 게 더 좋은데...."
"음..., 그건 말이지..."

당황한 듯 잠시 생각에 빠진 아빠는, 곧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신기하게도 어느새 인형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 되어있었다.

"미울, 사실 이 두 녀석들은 아주 친한 자매 사이야. 바로 언니와 너처럼 말이야. 이 인형들에겐 아주 특별한 힘이 있어. 헝겊으로 된 녀석은 늘 사랑하는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주고, 나무로 된 녀석은 언제나 소중한 사람을 지켜준 단다.
하지만 둘은 떨어져서는 힘을 낼 수 없기 때문에 늘 함께 있어야만 해. 그래서 아빠가 두 녀석을 모두 데려온 거야."

나는 둘 중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을 선택했다.
언제나 소중한 사람을 지켜준다는 이 나무 인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아이와 나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헝겊 인형을 집은 언니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언니가 인형의 한쪽 팔을 잡고 흔들자, 마치 인형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 듯이 보였다.

"안녕? 네 이름은 뭐니?"

언니의 헝겊 인형이 내게 물었다.
나는 나무 인형을 좌우로 흔들며 답했다.

"안녕, 나는 '아리'야. 만나서 반가워." - '아리'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갑작스럽게 공간문을 여는 힘에 눈뜨게 되었다.
힘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깨어났다.
공간문 너머의 광경이 맑은 밤하늘처럼 아름다워, 나는 모두에게 이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당분간 모두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조금 더 연습해서 문을 능숙하게 열 수 있게 된다면, 가장 멋진 순간에 근사한 모습으로 엄마, 아빠, 언니를 깜짝 놀래켜 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인형 '아리'와 단둘이 몰래 집을 빠져나와 연습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 시간이 많이 흘러 언니와 나의 키가 한 뼘 정도 자라고, 공간문을 여는 힘이 더욱 강해졌을 무렵.
나는 촛불을 켠 작은방 끝에 서서, 가족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병으로 쇠약해진 아빠는 밤새도록 거칠게 기침을 했고, 엄마는 최근 들어 깊은 잠에 빠지거나, 의식을 잃고 발견되는 날이 많아졌다.

창백한 아빠의 얼굴.
슬픔 가득한 엄마의 표정.
그리고 둘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 흘리는 언니.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영원히 함께 웃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때,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며칠이 지나면, 돌아오는 엄마의 생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혼자만 간직하던 작은 비밀을 가족 앞에 밝히기로 결심했다.
내 근사한 힘을 보면, 엄마가 새싹에서 꽃을 피워냈던 그날처럼 분명 모두 기쁘게 웃어줄 테니까.
조금 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계획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작은 선물로 가족들이 다시 웃음을 되찾을 수만 있기를, 그래서 다시 이전처럼 행복한 가족이 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어떤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새 나의 힘이 눈에 띄게 강해지고 있었다.
공간문을 열자, 문 너머의 별들이 평소보다도 더 크고 더 힘차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처럼 보여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날은 모든 게 완벽했다.
아빠도 모처럼 기운을 차렸고, 엄마도 쓰러지거나 잠들지 않았다.
한층 밝아진 분위기에, 언니의 얼굴에서는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나는 오늘 밤 깜짝 선물이 있다는 걸 공표했다.
대견하다는 듯 웃으며 즐거워하는 가족들을 보자, 나는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마치 예전의 아무 일도 없던, 그저 행복한 날들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맺힌 눈물을 쓱쓱 닦고, 나는 인형 ‘아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최고의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조심스레 집 밖을 빠져나왔다.

푸른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마당의 잔디가 달빛을 받아 은은히 반짝이고 있었다.
주위에 누가 없는지 살짝 둘러본 뒤, 나는 연습 삼아 잔디 위에 공간문을 열어보았다.
힘을 더욱 집중하자, 자그맣던 문의 크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문 너머로 비치는 별의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은 마치 은하수 같았다.
가족 모두와 다 함께 아름다운 광경을 볼 생각을 하니 무척 행복했다.
나는 이제 열린 문을 닫고 가족들을 불러오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열린 문이 닫히지 않았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문은 닫힐 줄을 몰랐다.

"미울,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는 거니?"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엄마가 집에서 나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은, 아직은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아.
아무 일도 없는 척, 나는 애써 몸으로 바닥을 가렸다.
하지만 나의 작은 몸으로 거대하고 빛나는 공간문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거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괜찮은 거야? 뒤에 뭐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걸까, 엄마는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문 안의 별들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빠르게 요동쳐, 엄청난 양의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지자, 선채로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그 어느 것도 뜻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나의 머릿속은 온통 새하얘지고 말았다....

"미울, 위험해. 이리 와!"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다급히 뛰어오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나를 향해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나와 엄마의 손이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말았다.
강한 폭발의 반동으로 인해, 나는 공간문 근처에서 멀리 튕겨져 나갔다…. - 의식을 간신히 되찾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의 폭발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서 엄마를 구출해야 해.
나는 엄마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때,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아빠였다.
아빠의 그토록 엄하고 슬픈 얼굴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울, 가면 안 돼."
"하지만, 엄마가...!"

아빠는 천천히 고개를 저은 후, 떨리는 손을 들어 엄마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나는 그제서야 엄마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열려 있던 공간 문이 닫히고, 그 자리에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껍질만 남은 것처럼, 그저 텅 비어 버린 공허한 눈.
폭발의 잔상처럼 남아있는 푸른 빛만이, 그 몸을 차지하려는 듯 탐욕스럽게 신체를 휘감고 있었다.

마당에 흐르던 끔찍한 정적을 깬 것은, 차가운 금속의 마찰 소리였다.

"저 집이다!"
"서둘러라! 이계의 힘이 점점 강해진다!"
"마녀를 죽여라!"
"마녀를 죽여 강림을 막아라!"

난생처음으로 보는 무장한 병사들이, 집을 향해 횃불을 들고 몰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창끝이 불빛을 받아 벌겋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미울, 어서 가자. 여긴 위험해."
"아빠..., 하지만 엄마가...."

나는 다급하게 아빠의 옷섶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아빠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재빨리 나를 안아들고 집 안으로 향해, 잠들어 있던 언니를 데리고 나왔다.
언니의 손에는 헝겊 인형이 들려 있었다.

"아리샤, 미안하구나. 어서 가자."

한 손으로 나를 안고, 한 손으로 언니를 붙잡은 채, 아빠는 병사들 몰래 집의 뒷문으로 향했다.
병사들은 마당에 몰려와, 엄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내 웅성거림이 멎고, 누군가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여신의 이름으로, 이단을 섬멸하노라."

바람을 가르는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들고 있던 기다란 창이 엄마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잠시 뒤,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린 후, 엄마를 감싼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엄마의 몸이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엄마의 모습이었다.

"마녀에게 가족이 있다. 이단을 옹호하거나 동조하는 것 또한 마녀와 다름없는 중죄. 이단의 씨를 찾아서, 섬멸하라."

명령을 들은 추격대가, 우리를 찾고 있었다.
아빠와 언니, 나는 추격대를 피해 황급히 마차를 타고 길을 내달렸다. - 사흘에 걸쳐 달린 마차는, 마침내 한 항구에 멈춰 섰다.
수많은 인파들로 정신없이 북적이는 항구 곳곳에서는 바다의 비릿한 내음이 풍겨왔다.
아빠는 나와 언니를 차례로 마차에서 내려주었다.
처음으로 보는 풍경에 언니도 나도 완전히 압도되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한 번도 이렇게 복잡한 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아빠가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안색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진 아빠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연신 기침을 해댔다.

"아빠!"
"아빠! 괜찮아요?"

우리를 보자 아빠는 주머니에 무언가를 황급히 넣고, 다시 일어나 자매의 손을 잡았다.

"응, 아빠는 괜찮아. 시간이 없단다. 어서 가자 꾸나."

자신을 다잡는 듯 아빠는 목소리에 유달리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보고 말았다.
아빠의 호주머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붉게 물든 손수건을….

아빠는 우리들을 어떤 가게의 처마 밑으로 데려갔다.

"아빠가 배편을 알아보고 올 게. 그러니까 잠시만 여기 있으렴. 절대로 여기서 벗어나면 안 돼. 아빠가 찾으러 올 수 있도록. 알았지?"

나는 조금이라도 아빠와 떨어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아빠에게 더 이상 응석을 부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아빠가 돌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한참 동안 바닥을 긁어 집 모양을 그리던 언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는, 이제 볼 수 없겠지?"

언니의 물음에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상황을 이해하면 할수록,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말을 잇지 못한 채 바닥만 보고 있는 나를, 언니는 살포시 안아주었다.

"그래도 괜찮아. 미울이 있으니까."

언니의 품에서는 집의 포근한 내음이 느껴졌다.
전해지는 온기에 나의 눈이 자꾸만 감겨왔다.

“졸려…, 언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점 흐릿하게 보였다.
그렇게, 나는 언니의 몸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 나는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분명 옆에 있어야 할 언니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덜컥 겁이 나자,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앞쪽, 길 한가운데에 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언니는 하늘을 응시한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언니의 손을 잡았다.

"언니, 아빠가 저기에 있으라고 하셨잖아. 어서 가자."

하지만, 이내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텅 빈 눈. 생기 없는 몸짓. 오로지 껍데기만 남은 듯한 위화감.
언니는 그 밤의 엄마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눈앞에 있는 건 ‘나의 언니’, 아리샤가 아니었다.

엄청난 충격에,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꼭 잡았던 언니의 손은, 내 손을 스르르 빠져나가 툭 떨어졌다.

언니.
아니, 언니 안에 깃든 누군가가 손을 들어 부드럽게 자신의 두 팔을 어루만졌다.

"... 나의 새 육체...."

낯선 목소리는 기쁜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은 연약해.... 네게 새겨진 기억들은 잊고, 이제 나를 맞이할 준비를 하거라.... 때가 되면... 다시...."

문득 언니 너머의 누군가가 시선을 돌려, 떨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반쪽짜리로구나...."

우리 둘의 눈이 마주치자, 그 존재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 잘 가거라. 반쪽짜리 육체야...."

짧은 작별 인사가 끝나자,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서있던 우리들의 사이로, 갑자기 배에서 내린 한 무더기의 군중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나와 언니의 거리는 빠른 속도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던 나의 귓가에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울, 미울!"

황급히 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자, 인파들 사이로 울먹이는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언니가 나를 향해 있는 힘껏 손을 뻗고 있었다.
멀어지는 언니를 따라가기 위해,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언니가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
나는 떠밀려 가는 언니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언니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휩쓸려, 나의 눈앞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 다급하게 돌아온 아빠를 보며, 나는 울었다.

"제 잘못이에요. 언니의 손을 놓치는 바람에.... 언니가...."
"아냐, 아빠의 잘못이야.... 너희를 홀로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저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있을 시간이 없구나..., 좀 있으면 배가 출발할 거야. 미울, 너라도 먼저 가야 해."

아빠는 나를 안아들고 서둘러 배가 정박된 부두를 향해 달려갔다.

부둣가는 낯선 복식의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승선판을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배에 올라타고 있었다.
선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승객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동쪽으로 가는 배요. 좀 있으면 출항할 테니 빨리들 타시오."

아빠는 승선판 앞에 도착하자, 내게 말했다.

"자, 이제 이 배를 타고 동쪽의 땅으로 가는 거야. 미울이 배를 타는 건 처음이니까, 무척 신날 거야."
"응, 아빠..., 그런데 아빠는요? 아빠는 안 가요?"

쓸쓸하게 웃으며, 아빠는 나를 조심스레 품에서 내려주었다.

"아빠도 갈 거야. 하지만 언니를, 아리샤를 여기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잖니. 아직 이 근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야."
"하지만...."

아빠는 무릎을 굽혀 내게 눈을 맞추었다.

"언니를 찾아서 곧 돌아올 게. 약속이야."

자상한 미소, 굳은 의지에 찬 창백한 얼굴.
어쩐지, 나는 이것이 아빠의 마지막 모습 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떠한 답도 하지 못한 채, 나는 그저 아빠를 있는 힘껏 안았다.
이 순간이 마치 기나긴 영원처럼 느껴졌다.

"이제 시간이 되었구나. 어서 가렴."
"...응. 아빠. 약속 꼭 지켜야 해요."
"그래. 있다가 보자꾸나. 우리 예쁜 딸."

인사를 마치고 나는 품에서 빠져나와, 사람들 무리에 섞여 승선판으로 향했다.

배에 오른 후, 나는 갑판 위에서 재빨리 아빠의 모습을 찾았다.
저 아래, 손을 흔드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 아빠는 왔던 길을 되돌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곧 언니와 함께 오실 거야. 나랑 약속했으니까.'

멀어지는 아빠의 등을 보며 나는 소망했다.
하지만 그 바람과 달리,
배가 출항하는 그 순간까지도 아빠와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인형 ‘아리’와 둘만이 남겨진 채,
바다 건너 머나먼 동방을 향해 실려갔다.

지독한 후회,
그리고 죄책감에 휩싸인 채…. - 모든 기억의 재현이 끝나자,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한 낯선 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봉인의 룬이 깃든 검날을 내리꽂는 것으로, 이계신의 봉인 의식을 시작한다."

동그란 안경을 쓴 백발의 남자는, 깊은 잠에 든 누군가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곧이어 들려오는 새된 비명소리와 함께 방 안에 거대한 돌풍이 일어나며,
이계신의 봉인 의식이 시작되었다. - "...!"

여자는 눈을 떴다.
아주 기나긴 꿈을 꾼 것 같았다.

... 봉인의 룬, ... 이계신의 봉인 의식?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장면과 단어들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었다.

"이게 무슨...."

엄청난 위화감을 느낀 여자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숲과는 너무도 달랐다.

끝없는 어둠으로 일렁이는 무한한 공간.
푸른 빛을 머금은 마법진과, 커다란 힘의 흐름을 나타내듯 길게 이어진 마나의 선들.
너무도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한 이 곳.
현실의 차원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

'난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지만 꿈과는 조금 달랐다.
자신은 여전히 성인의 모습이었고, 무기도 복장도 잠들기 전 그대로였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는 자신의 앞으로부터 길게 이어진 빛나는 길 위를 걸었다.
생물의 맥박처럼 느리지만 일정하게 점멸하는 마법진들을 보자, 이곳이 마치 무언가의 뱃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전방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여자는 재빨리 달려, 길고 긴 길의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이제껏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존재와 조우했다.

눈앞에 있는 존재는 여자의 몇 배가 되는 거대한 크기였다.
강력한 마나가 응집된 것처럼 보이는 형체는, 푸른 빛에 휩싸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느껴지는 힘의 정도나 위압감은 차이가 있었지만, 꿈에서 늘 보아왔던 이공간의 존재들과도 어딘가 흡사했다.

'악마...!'

여자는 재빨리 리볼버를 꺼내, 거대한 형체를 겨누어 쏘았다.
하지만 연기나 물에 대고 총을 쏜 것처럼, 발사된 탄환은 아무런 상흔을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푸른 몸을 관통해버렸다.

그때, 여자의 귓가에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성 기관이 아닌 사념을 통해 전해지는 소리.
그 소리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낯선 음성, 그리고 너무나도 그리웠던 어떤 음성이 뒤섞여있었다.

목소리가, 오랜 친구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반쪽짜리야...."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여자는 흠칫 놀랐다.
그녀가 놀라는 것이 우스운 듯, 목소리는 낮게 웃었다.

"기억하고 있느냐. 우린 만난 적이 있었는데...."

푸른 형체가 손을 움직이자, 여자의 앞에 거대한 두 개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잠시 뒤, 문의 안쪽으로 ‘빛에 휘감긴 채 무릎을 꿇은 한 여자의 모습’과 ‘겁에 질린 은발의 소녀와 텅 빈 눈을 한 금발의 소녀가 거리에 서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내 그것들이 무얼 뜻하는지 알아채자, 그녀는 강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영원히 잊고 싶었던, 자신이 그토록 외면하던 기억이 문 너머로 생생히 펼쳐지고 있었다.

"그날, 네가 나의 강림을 도왔지. 육체가 죽지만 않았으면 완벽히 성공할 수 있었는데.... 참으로 화가 났어.... 하지만 나의 자질을 이어받은 육체가 두 체나 더 있다는 걸 느끼자 곧 기뻐졌단다...."
"...."

이계신은 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황망히 서있는 여자를 보며 즐겁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위대한 힘들 중, 오로지 '공간의 힘'만 간신히 깃든 쪽은 가치가 없었어. 그래서 고귀한 '시간의 힘'이 깃든 육체가 성숙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리기로 결심했지....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나는 마침내 이 육체에 강림하였다."

이계신의 말이 끝나자, 여자는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큰 충격을 느꼈다.
그 이야기는 언니가 이계신이 강림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미 그 몸을 이계신이 차지해 이미 언니가 사라져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뜻하고 있었다.

"... 네 맘대로 하게 둘 것 같아?"

분노로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는 이계신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엄마가 소멸해가는 걸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던 밤처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무력하고 약한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신과 대적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는 강한 힘이 있었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곧 수십 개의 공간문이 그녀의 뒤로 동시에 펼쳐졌다.
열린 문의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보랏빛 마나가, 마치 은하수처럼 모여 이공간 속에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본 이계신은 조소했다.

"불완전하고 여린 아이야. 내게서 비롯된 힘으로 나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다니 우습구나. 게다가 그 탄환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미 보았을 텐데."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후회하는 편이 나아."

철컥.
탄창을 장전하는 소리와 동시에, 여자의 뒤로 열린 공간문에서 무수한 총알이 뿜어져 나와 이계신의 몸을 꿰뚫었다.
곧이어 공간문을 이용해 빠르게 도약한 여자는, 이계신의 머리 근처로 올라가 리볼버를 난사했다.

‘됐나?’

하지만 총탄의 흔적으로 너덜너덜해진 이계신의 머리는, 이내 흐르는 마나로 채워져 제 형체를 되찾았다. 아무래도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심하다는 투로, 이계신은 여자를 비웃었다.

"그나마 자기한테 주어진 힘마저도 제대로 사용조차 못 하는구나, 미련하고 하찮은 것. 이미 강림은 끝났으니 더 이상 발악하지 말거라."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백 개의 문들이 열려 여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발아래에서 솟아난 거대한 푸른 손이 여자의 다리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푸른 손을 향해 총탄을 쏘아도,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이계신의 손아귀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젠장, 젠장!’

순간, 열려 있는 문 너머로 일시에 수많은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녀가 태어나던 날 부모님의 기뻐하는 얼굴,
소녀가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던 날의 모습,
소녀가 엄마의 마법을 보며 환하게 웃던 얼굴,
소녀와 아빠가 함께 흙장난을 하며 놀던 모습,
소녀와 언니가 소중한 인형을 선물 받던 날,
소녀와 언니가 들판 위에 누워 구름을 세던 모습,
소녀와 언니가 똑같은 우스운 꿈을 꾸고 킬킬대던 모습,
소녀와 언니가 힘주어 맞잡은 두 손,
언니의 따스한 미소...
...

"엄마..., 아빠..., 언니...."

온몸에 힘이 빠진 여자는, 그만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를 포박하고 있던 거대한 손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와, 그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나만 아니었다면....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깊은 후회와 죄책감이, 볼을 타고 흘러 이공간의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번에도 자신은 실패한 것이다.
그때처럼 무력하게....
강한 힘을 가지고자 그토록 애를 썼는데, 결국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

"...지 마. 미울, 울지 마."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눈앞에 누군가 있었다.
'빛나는 금발의 소녀'가....

하지만 꿈에서 늘 보던 웅크린 뒷모습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보는 소녀의 얼굴.
그건...,

너무나, 너무나 소중한 사람의 얼굴.

"...언니...."

나의 부름을 듣자, 언니는 배시시 웃었다.

내게 한걸음 다가온 언니는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이 그리워, 나는 언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내 마음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 언니는 반대편 손을 들어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있지, 미울. 저 밖의 푸른 '악마', 엄청 겁에 질려 있어."
"...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언니는 손을 뻗어 나를 감싸고 있는 기억의 문들을 닫고, 바깥을 가리켰다.
빛나는 그 손가락 끝을 따라가자, 저 멀리 복잡한 문자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마법진이 보였다.
마법진은 이계신의 수족을 구속하고, 강력한 힘을 내뿜어 퍼트리고 있었다.
푸른 마나의 흐름을 따라 힘이 퍼지자, 이계신은 괴로워 견딜 수 없는 듯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듯이 버둥대고 있었다.

"사실, 악마는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대. 아직 내 몸을 다 차지하지도 못했는데, 또 누가 방해해서 실패할 까봐."
"강림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

놀란 내 표정을 보자, 언니는 기쁜 듯 폴짝 뛴 후 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기억해? 나를 지켜주던 꿈.
그건, 꿈이 아니야."

...!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계신으로부터 언니를 지켜내고 있었음을.
빛으로 가득했던 모든 것들을 불행으로 끌어내린 나지만, 한편으로 어둠 속에서 떨고 있던 언니를 구해내고 있었음을....

"그러니까, 아직 포기하지 마."
언니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살포시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망설이던 찰나에,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빛나는 소녀가 만들어준 틈 사이로 여자는 문의 요새를 빠져나왔다.
여전히 이계신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마법진을 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계신은 아직 강림하지 못했고, 이제는 어떤 마법에 의해 서서히 봉인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발악하는 거대한 형체 앞으로 다가가 힘을 모았다.
곧, 이계신의 머리 위로 거대한 공간문들이 하나둘씩 열렸다.

잠시 후 공간문 너머에서 마나로 구현된 기다란 ‘창’이 나타났다.
그것은 먼 옛날 엄마의 가슴에 박혔던 창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짓에, 창끝이 일제히 이계신을 겨냥했다.

다급하게 버둥대는 푸른 형체를 향해 그녀는 읊조렸다.

"사라져라. 이계의 악마. 그날처럼 창에 찔려 죽어.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수히 쏟아지는 창의 비를 맞은 이계신은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소멸해 돌풍이 되어,
이공간 너머로 영원히 사라졌다. - 밝은 대낮에도, 작은 주점은 허기를 달래려는 여행자들로 북적였다.
길게 대나무발을 들어 주점 안에 들어서자, 구석에 유달리 이목을 끄는 커다란 몸집의 사내가 있었다.
벌써 몇 그릇째 먹은 건지, 사내의 양옆으로는 음식 접시가 가득히 쌓여 있었다.

여자는 쓰고 있던 천을 벗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조명 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은빛, 분홍빛 머리카락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일제히 주목되었다.
그런 시선 따윈 익숙하다는 듯, 여자의 날카로운 눈빛은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러다 체하겠어. 적당히 먹지그래."

차가운 목소리를 듣자, 접시에 코를 박고 있던 사내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흠, 옷이 좀 바뀐 거 같은데. 착각인가?"

사내의 말을 듣자 여자는 피식 웃었다.
이전처럼 사내와 여자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무기를 써봤는데 몸에 통 맞지를 않더라구. 역시 잘난 용병 '대검의 허크'답게 대검이나 쓰는 게 나으려나."

벽에 정갈히 기대어 놓은 대검 쪽을 보며 사내는 한숨을 푹 쉬었다.

"... 너, 혹시 총은 써봤어?"
"총?"
"그래, 너한테 어울릴 거 같은데."

여자는 리볼버를 꺼내 사내의 손 앞에 올려놓았다. 총의 손잡이 끝엔 나무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글쎄, 써보고 싶어도 크기가 다 내 손바닥만 하잖아. 네 쬐그만 총을 봐."
"바보 같긴, 총이 이 리볼버만 있는 건 아니잖아. 서란에 가면 네 덩치에 맞는 총포를 만들어 줄 장인들이 많이 있어."
"흐음...."

사내는 고민하는 듯 턱수염을 문질렀다.

"그래. 그 유명한 공간의... 흠. 네가 추천해주는 거니 마다할 이유는 없지. 그럼 내 다음 목적지는 서란이다."
"응, 내가 아는 장인을 소개해 줄게. 가서 내 안부나 좀 전해줘."

몇 마디 짧은 대화가 더 오간 후,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된 것 같네."
"어디로 가는 거야?"
"바다 건너. 언니 찾으러."

그녀의 답변에 사내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허, 지난번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딴판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 가라. 다음에 또 보자구."
"안녕."

"아, 잠깐."
그는 잠시 여자를 불러 세웠다.

"바다 건너로 가면 '콜헨'이라는 시골 마을이 있거든? 그곳에 용병단 하나가 있는데, 거기가 내가 소속된 용병단이야.
참 희한하게도 깡촌 주제에 실력있는 자들이 많이 모여드니까, 가까이 가게 되면 한번 들러보라구."
"그래, 고마워. 다음에 만나."

가볍게 감사를 전한 그녀는 주점의 문을 나섰다.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이, 와르르 눈에 쏟아져 들어왔다. -

항구에 도착한 여자는 부두 근처에서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서있는 자리는, 바로 오래전 자신이 처음 동방에 도착했을 때 하염없이 아빠와 언니를 기다리던 그 자리였다.
일주일도 넘게 한자리에서 소녀는, 오지 않는 아빠와 언니를 기다렸었다.

'이제서야 돌아가게 됐어....'

새삼 감회가 새로워진 그녀는 수평선 너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미울, 명심해라! 피하는 것이 답은 아니다. 마주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에 네가 너라면, 형제가 살아있다는 기미만 보여도 당장 찾으러 갈 거야. 아니, 죽었다고 해도 가겠어. 그래서 운좋게 살아있는 사람과 만나면, 당장 미안하다고 말한 후 그 이후로 행복하게 살 거야. 그렇게 복잡하게 살기엔 일분일초가 아쉽잖아.'
‘그러니까, 아직 포기하지 마.’

문득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오르자, 여자는 활짝 웃었다.
모처럼 냉소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웃음이었다.

어느새 뱃고동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자, 그녀는 승선판으로 향했다.
자신이 서있던 자리에, 작은 속삭임을 남긴 채로.

'아리샤, 곧 돌아갈게.
언니의 곁으로.'

글 : 시트롬 / 그림 : kingseo,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