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neamhain

그것은 최초의 질문이었으며, 최초의 갈망이었다. 수많은 사념들이 시공을 넘나들며 붉게
물든 바다로 흘러들어갔고, 여신은 그 끝없는 번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오래도록 요람으로 여겨졌던 그 바다처럼 더럽혀졌다. 여신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리며 뺨을 타고 흐르자, 그녀는 그 뜨거운 감정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잊고 있었던 자아와의 만남은 증오와 적개심으로 뒤덮여, 점점 더 깊은 혼란으로 그녀를
몰아넣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신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수면 위에 코끝이 닿을 만큼 고개를 내밀며 몇 번이고
토악질을 내뱉었다. 붉은 바다는 그녀가 쏟아낸 사념들을 조용히 삼켜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여신은 입가를 소매로 닦으며 얼굴에 묻은 감정을 지우려 했다.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마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무의식의 부드러운 품에 몸을 맡겼다.

검은 하늘과 붉은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며, 여신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금속의 소리가 퍼지며 강철 날개가 하늘로 펼쳐졌다.

사념은 파도를 따라 어디론가 흘러간다.
여신이 버린 나약함에게 고요한 바다는 물었다.
‘우리는 어째서 존재하는가?
사념은 바다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거꾸로 흐르기 시작한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어쩌면, 여신은… 우릴 버린 걸지도 몰라.”

네메드 해안가에 파도가 부딪히며, 떠올렸던 소중했던 이의 마지막 모습이 조용히 부서져
갔다. 소년은 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모래에 감춰
두었던 밧줄을 꺼내 손에 힘주어 쥐고, 배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보름달과 별들이 바다를 밝히고 있었고, 소년은 숨죽인 채 그 빛 아래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들키기라도 한다면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물러설 곳은 없었다.

소년은 마신을 섬기는 네메드의 하층민, 네메디안이었다. 그가 받은 대우는 노예와 다를 바 없었고, 그는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죽어가는 누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결심을 굳혔다. 누이는 이 땅을 떠나 인간들 사이에 숨으면 안전하리라 생각했고, 그 기대에 찬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소년은 잊을 수 없었다.

배의 방향을 잡고 묵묵히 걸어갔으나, 몇 발자국을 내딛자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바위처럼 보이던 검은 형체가 서서히 일어나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긴장이 그의 몸을 죄어왔다. 배에 필요한 물품을 다 실은 만큼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검은 형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구야?" 소년은 겨우 질문을 내뱉었다. 물에 젖은 오렌지빛 머리카락의 여성은 흠뻑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은 채, 긴 창을 의지해 간신히 서있는 모습이었다. 여자는 갈라진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 네반.”

그 한마디에 그녀는 백사장 위로 쓰러졌다. 소년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필
‘네반’이라니. 네메드의 여신이라 불리는 그녀가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 생생히 남았다.

소년은 다시 배를 끌어내려 밧줄을 감았다. 그러나 쓰러진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 결국
그녀의 코 가까이에 귀를 대보았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소년의 마음에 묘한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게 옳은가, 아니면 그녀를 도와야 할까.

결국 그는 무릎을 꿇고 여자의 팔을 어깨에 걸쳐 들어 올렸다. 차가운 바닷물이 그의 발을
스치고 모래는 발목을 잡아당겼지만,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를 살려야 한다는 결심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제길… 무거워!”

그는 동굴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마침내 어두운 동굴 입구가 보이자 짧은 숨을
내쉬었다. 여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불을 피운 뒤, 자신의 외투를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이제 더는 모르겠다…”

소년은 그녀 옆에 털썩 누웠다.
피로가 몸을 채우고, 안도의 기운이 그의 숨을 천천히 잠재웠다.




여자는 마치 깊고도 기묘한 꿈 속에서 깨어난 듯 눈을 떴다. 어둠은 여전히 그녀를 감싸고
있었고, 눈앞의 희미한 불빛이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오드아이 눈동자는 각각 다른 빛을 띠며 장작불의 붉고 부드러운 빛을 담아냈다. 심장 아래 어디선가부터 가슴까지 차오르는 압박감이 있었다. 마치 몸 속 깊은 곳까지 조여들어 숨을 앗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어둠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희미하게 그늘에
가려져, 표정은 알 수 없었으나 불안과 경계가 느껴졌다.

“정신이 들어?” 그가 조용히 물었다. 네반은 창을 겨눈 채로 물었다. "넌 누구지?"

"… 난 네트야. 넌 바닷가에서 쓰러져 있었어."

소년의 이름은 네트였다. 이름만으론 충분하지 않았지만 소년은 더 설명을 하지 않았고,
네반 역시 한 발 물러서 창을 내려놓았다.

바닷가. 그녀의 눈이 깜빡였다. 언제, 어떻게 바다에 빠졌단 말인가. 기억은 물결처럼 사라졌고, 흔들리며 멀어졌다. 머릿속에서 어딘가 감춰진 기억의 조각을 애써 붙잡으려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나는 네반이야.”

네트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멈춰 있었다. 그 이름, 어디서 들었을까. 그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방인의 이름이 네메드의 여신과 같다고 한들, 불신이 쉽게 거두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그녀가 인간일 뿐이라 생각하며, 이 불안한 생각을 마음 속 깊이 묻어두었다.

“여긴 네메드의 해변 동굴이야. 내 은신처지. 여기선 안전해.”

네메드. 네반은 생소한 이름을 중얼거리며 마음 속에 스쳐가는 두려움을 억누르려 했다.
어딘가 멀고 고독한 이름. 그것이 현실인지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오르카에서 왔어.” 그녀가 숨을 골랐다. “영광의 오르카.”

소년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그런 나라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자,
네반은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음…. 그래, 성기사단이란 걸 들어봤을까?”

네트는 고개를 저었다. 성기사라는 말이 그에게는 너무나 낯설게 들렸다. 신의 성전을 수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 리가 없었다. 네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멀리, 더 멀리 생각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문득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것을 느꼈다. 왜 자신이 이곳에 왔는지, 누구의 이름을 위해 창을 들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흐릿한 안개 속에 감춰진 기억들은 잡힐 듯 말 듯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스치며 사라졌다.

네트의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들려왔다.

“무리하지 마. 인간들이 믿는 신이라면, 어차피 모리안말고는 없으니까.”

모리안. 네반은 그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네트가 말한 모리안이라는 이름의 여신은 분명 네반이 섬기던 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을 멈췄다. 이국에서의 고독이 어딘지 생경하게 다가왔다.

네트는 불 속에서 검은 덩어리를 집어내어 장작을 추가했다. 구수한 냄새가 동굴에 퍼졌다. 네트가 다가가면서 그녀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이거, 감자야. 뜨거우니까 조심해."

그녀는 손 안에 담긴 이 낯선 것을 바라보았다. 검게 탄 껍질 속에서 희미한 흰색이 비쳐
나왔고, 네트가 천천히 껍질을 벗겨 보여주었다. 속살은 따뜻해 보였고, 알 수 없는 향기로
가득했다. 네반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천천히 한 입을 물었다.

그 맛은 놀라웠다. 입안 가득 따뜻한 풍미가 퍼지며, 마치 오래 전 고향의 기억처럼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이건 꼭 오르카로 가져가고 싶어.”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자를 계속 껍질을 벗겨주었고, 네반은 먹고 또 먹었다.

네반은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서 잿빛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불길이 피어오르며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사방을 둘러싼 어둠이 일렁였다. 감자 냄새가 매캐한
공기 속에 스며들었고, 네반은 세 번째 감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감자란, 이 새로운 세계에서의 고된 여정 속에서 찾아낸 위로였다. 신의 뜻에 따라 떠도는 불쌍한 성기사였던 자신에게 이 조용한 순간은, 어쩌면 처음으로 찾아온 평온이었는지도 모른다.

네반은 감자를 먹으며 고향 오르카와 성창 기사단 시절의 이야기를 나지막이 꺼냈다. 네트는 그 곁에서 조용히 경청하며, 소년의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던 신비로운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에게 오르카는 곧 꿈과 같았다.

"이건 성기사의 무기야. 성창이라고 불러. 고향 사람들은 우릴 성창 기사단이라고 했지." 네반은 어느새 과거에 빠져 중얼거렸다.

"성창 기사단…." 네트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곱씹으며 응답했다.

"이 창 손잡이가 너무 길어서 말야, 접어두지 않으면 문에 걸려서 곤란해지곤 했어. 물론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야." 네반은 애써 웃어보였다. 하지만 한참을 지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너무도 그리운 이야기에 빠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차리고 보니 내가 혼자 떠들고 있었네. 미안…." 네반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재밌었어." 네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 올게. 누가 감자를 다 먹어 치워서."

"이 밤중에 어디 가는 거지?" 네반이 놀라 물었다.

"감자 캐러 가는 거지 뭐." 네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네반은 눈을 반짝이며 일어섰다. "그럼 나도 같이 가지. 감자란 녀석이 땅속에서 어떻게 자라는지 보고 싶거든."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네반은 기운이 빠져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의식하지 못했던 피로가 그녀를 덮친 것이다.

"여기서 기다려." 네트는 걱정스럽게 눈을 흘기며 동굴 밖으로 나섰다.

네반은 동굴 안에 홀로 남아, 장작이 불꽃을 내며 타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신의 이름조차 희미하게 떠오르지 않는 기억과 홀로 맞서야 했다. 과거의 신념과 혼란스러운 현재가 뒤엉켜 머릿속은 흐트러졌다.




날이 밝아올 무렵, 네트는 감자를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피부에는 새로이 생긴 긁힌 상처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감자란 녀석, 굉장히 강적인 모양이구나…." 네반이 그 상처를 보고 걱정스레 묻자, 네트는 빙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땅도 파고, 생각보다 멀리 가야 해서 생긴 상처야."

네반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에게 말했다. "육체란 신께서 하사하신 거야. 함부로 다치게 해선 안 돼." 그녀의 말 속에는 오래도록 품어온 성기사의 절제와 경건이 배어 있었다.

그날 오후, 네트는 네반이 회복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돌보았다. 까칠하고 무뚝뚝했던 소년이 예상외로 세심하고 따뜻한 면모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장작불에 감자를 굽던 네트는 잠시 생각에 잠겨, 무심한 듯 말했다. "… 난 신은 없다고 생각해. 이렇게 시련만 주는 신이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소년의 목소리에는 피할 수 없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네반은 그 표정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신념과는 다른 삶의 고통이 네트의 눈에 담겨 있었다.

"… 네트. 너만 괜찮다면 나와 함께 오르카로 가지 않겠어? 내가 섬기던 신은 분명 다를 거야…."

네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정말 신이 있는 곳이라면, 너처럼 그를 믿는 자를 돌봐주겠지. 하지만 나에겐 그런 신은 없어."

네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어딘가 서글픈 빛을 띠었다. 네반은 네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그런 표정을 보았다. 낯선 슬픔이 담긴 그 웃음은 그녀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남겼다.

네트의 눈에 비친 네반은 마치 깨지지 않는 강철 같았고, 그의 마음 속에는 그 감정과 맞닿은 새로운 신뢰의 싹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녀가 네트의 목걸이를 바라보며 사소한 질문을 던지자, 네트는 고개를 내려 목걸이를 꼭 쥔 채 대답했다.

"이 목걸이의 원래 주인은 내 누나였어."

"정말? 그럼 누나는 지금 어디 있어?"

네반의 물음에 네트는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

"죽었어."

네반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침묵했다. 네트의 태도에는 무던한 듯한 단호함이 있었다. 그랬기에 그가 느꼈을 고통은 오히려 네반에게도 스며들었다. 네트는 말없이 자신의 고향과 가족, 그리고 떠나지 못한 아련한 꿈을 한 줄기 한 줄기 삼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누나는 이 지긋지긋한 네메드를 떠나고 싶어 했어. 나와 누나는 오래도록 탈출을 계획했어."

그의 말에서 묻어 나오는 고통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담고 있는지 네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고향이란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땅이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벗어나고픈 감옥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확신했다. 네트와 그의 누나가 꿈꾸던 그 자유로움을 위해서라도, 네반은 소년을 오르카로 데려가야 한다. 네메드를 떠나, 하늘의 자비로운 신이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는 곳으로.

"아직은 안 돼. 네가 회복되지 않았잖아."

네트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떠나고 싶은 그의 마음은 잠시 접은 듯했고, 대신 네반의 회복을 걱정했다. 그날 밤부터 네트는 여느 때처럼 동굴을 나갔다가 해가 뜨면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했다. 그런 날이 거듭될수록 네반은 점차 몸이 회복되는 걸 느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네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네반의 마음 속엔 불안함이 점점 커졌다.

'어째서…'

그녀는 네트의 부상을 걱정하며 초조했다. 네트의 작은 몸에 늘어가는 상처들이 신경 쓰였다. 동굴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만약 그와 엇갈린다면, 혹은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할지 모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러나 해가 지고도 네트가 돌아오지 않자, 네반은 결심했다. 성창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동굴을 나섰다.

울창한 수풀을 헤치고 네트를 찾는 길은 거센 바람 속에서 험난했지만, 네반은 오르카의 성기사로서 몸에 배어있는 경험과 본능을 따라 작은 단서를 찾아냈다. 결국, 인간의 것이 아닌 거대한 족적을 발견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바람 속에서 모닥불의 냄새가 코를 스치자 나무로 엮어 만든 방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방벽 뒤에는 고블린 감독관이 채찍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명령에 따라 네메디안 노예들이 순서대로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었다. 네반의 눈에는 그들이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지만, 그들이 묵묵히 마족의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그때, 감독관의 채찍 끝이 묶여 있던 한 소년을 향해 내려쳤다. 붉은 자국이 피부에 번질 때마다 그 소년은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한 채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네트…?!"

네반은 망설임 없이 창을 쥐고 고블린 감독관에게 돌진했다. 네반의 창이 고블린의 가슴을 관통하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주변의 고블린들은 기괴한 울음 소리를 내며 네반을 포위했다. 그리고 짐을 나르던 네메디안 노예들 또한 겁에 질려 자리를 떠났고, 네반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은 오직 네트를 구하는 데만 집중했다.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 순간, 네트의 눈빛은 묘한 핀잔을 담은 듯 보였다.

‘바보같이… 왜 동굴을 나온 거야?’

그러나 상황은 급박했다. 고블린들은 네반을 포위하며 위협적으로 접근해 왔고, 네반의 성창은 끊임없이 그들의 목을 꿰뚫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고블린들은 더 많이 몰려들었다.

몸이 지쳐갈수록 네반의 시야는 흐려졌지만, 그녀는 본능에 따라 창을 휘두르며 공격을 피하고 반격했다. 그녀의 결단은 굳건했지만, 무수한 적들 앞에 점차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 제발….'

네트는 묶인 채로 절박하게 기도했다. 그 순간, 네반의 등 뒤에서 찬란한 빛이 날개 형상으로 펼쳐졌다. 고블린들의 무기는 빛의 날개에 막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소년은 헛것을 보고 있는 듯 그 장면을 바라봤다.

네반의 몸에서 나온 빛은 창으로 모여들어 이계의 문을 열었고, 그 안에서 창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네반을 둘러싼 고블린들을 순식간에 휩쓸며 전열을 무너뜨렸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녀는 땅에 널린 고블린 시체들 속에 홀로 서 있었다.

"……."

네반은 잠시 그 모든 걸 잊고 네트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그의 속박을 풀고 무력해진 소년을 품에 안았다.

"네반… 멋졌어. 마치… 여신처럼…."

네트는 기진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다. 우연의 일치로 여신과 같은 이름을 지녔기 때문일까? 그의 눈에 네반은 신성한 존재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그저 소년을 구할 수 있길 기도하는 한낱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네트… 대체 왜 이런 일이…"

품 안의 소년은 고통스러운 숨을 헐떡이며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그게… 말하자면 길어. 감…자를… 훔쳤거든…." 네트는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여긴 안전하지 않아……. 마족의 땅이니까……. 한시라도 빨리 떠나……. 인간의 땅으로……. 당신의 고향으로……. "

네반은 묻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였지만 애써 질문을 삼켰다. 품 안의 소년에겐 작별인사를 고할 시간조차 남아있지 않았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 아쉽다. 꼭…… 가보고 싶…었는데. 분명…… 당신 말대로라면 낙원같이…… 근사하겠…지?"

네트는 힘이 빠져가는 손을 겨우 들어 자신의 목걸이를 잡더니, 네반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 투박한 목걸이에는 네트와 누나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네반은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말할 수 없는 의미를 헤아리듯 목걸이를 꼭 쥐었다. 네트의 손은 천천히 힘을 잃더니 땅에 떨어졌다.

"네, 네트… 네트…!"

네반의 절규가 메아리쳐 해안선을 따라 퍼졌다.





그녀는 네트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고 네메드를 떠났다. 고향으로 돌아가 그가 남긴 목걸이에 신의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 네트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떠돌기 시작했다. 그 여정은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네반은 그 고통을 견딘 만큼 강해질 것이라 믿었다.

계절이 몇 번이고 지나, 드디어 인간의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네반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말을 들었다. "오르카? 아가씨, 내가 다녀본 대륙 중에 그런 곳은 없어." 그 대답은 그녀의 마음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했다. 누구도 오르카를 알지 못했다. 네반은 이곳에서 '모리안'이라는 이름의 여신이 숭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마족을 멸하기 위해 긴 전쟁을 벌여왔고, 그들의 신은 오르카와는 분명히 달랐다. 잃어버린 기억 속 어딘가에 있을 신조차 떠오르지 않았지만, 네반은 네트의 목걸이를 쥐고 다짐했다.

비록 인간의 땅이라 해도 위험과 역경은 그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녀는 오르카를 찾기 위해 살아남아야 했다. 용병 생활로 돈을 모으며 끈질기게 고향을 찾아 나섰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네트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네트,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 속에서 그녀는 강해졌다.

"배… 고파…"

또다시 돌아온 방랑길. 이름 모를 시골의 여관 앞에서 네반은 무기력하게 주저앉았다. 이번 여정도 허탕이었다. 그녀가 얻은 것이라고는 배고픔과 지친 몸뿐이었다. 네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애꿎은 동전 주머니를 흔들어보지만 비어있는 걸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허기가 온 몸에 퍼질수록, 문득 네트가 줬던 감자의 맛과 향이 떠올랐다. 그 고소한 향을 떠올리고 있자니 마치 눈 앞에 당장이라도 감자가 있을 것만 같았다.

상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사실적인 향이 후각을 지배하자 네반은 조용히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노인의 바구니에서 피어나는 향이었다. "허허, 이곳 분이 아니신가 보군요." 노인은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쓰며 감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 감자는 마치 따스한 기억처럼 느껴졌다. 네반은 그 감자를 경건히 두 손으로 받았다. 따뜻한 감자의 온기가 마치 자신이 잊고 있던 신의 은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혹시 일할 곳을 찾고 계시면, 칼브람 용병단을 찾아가보세요." 노인의 음성이 네반의 마음에 조용히 메아리쳤다.

“… 칼브람 용병단…”

네반은 그 이름을 되뇌며 눈을 감았다. 고작 주먹 크기의 감자 하나가 멈춘 발걸음을 다시 움직이게 하다니. 감자의 따스함이 손 끝에서부터 전해져, 그녀의 가슴속에 작은 불꽃을 일으키는 듯했다.

터벅터벅, 사무실의 계단을 올라 나무 문을 열었다.

운명은 다시 한번 그녀를 어디론가 인도하고 있었다. 그 길이 무엇이든, 네반은 앞으로 나아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고향을 찾겠다는 결심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려는 희망이 그 안에서 움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