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종이봉투 위에 붉은색 밀랍으로 정성스레 봉인해 둔 편지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차갑게 굳은 밀랍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의 스탬프를 본 중년 사내의 안색이 금세 창백해졌다.
"그림자 형제단……."
편지를 쥔 손이 불안에 떨려왔다.
올 것이 왔구나. 어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땅 위의 모든 것을 훔친다는 괴도 집단의 예고 편지를 받은 중년 사내의 발소리가
이내 종종걸음으로 바빠졌다.
-
드넓은 서방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갈로아 백작령.
비록 지리적으로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족과의 오랜 전쟁 탓에
이곳도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주민들이 정성껏 키운 작물들이 전쟁 물자 지원이라는 명목하에 모두 국고로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을 주민들은 미소와 따듯한 온정을 잃지 않았다.
"마르프 아저씨. 새치기한 거 다 봤어. 맨 뒤로 가."
목재 테이블 뒤에서 빵을 나눠주던 소녀의 목소리는 맑고 단호했다.
그녀의 이름은 사냐.
흰 눈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영락없이 서방 사람이었지만, 작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동방인의 그것이었기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마르프라고 불린 중년 남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소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에이, 사냐.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라고. 줄이 있는 줄 몰랐을 뿐이야."
그는 사냐에게 사과한 뒤, 순순히 줄의 맨 뒤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 쏠렸지만, 곧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자, 이거 받아. 로즈 할머니."
사냐가 줄의 맨 앞에 서 있던 노파에게 빵을 건넸다.
노파의 이름은 로즈, 주름진 얼굴에 시간이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소녀가 내민 빵 한 덩이에 노파의 얼굴엔 어느 봄날의 꽃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애서슬론 가문은 이 마을의 축복이에요. 헤임달 나리. 정말 감사합니다."
사냐와 함께 테이블 안쪽에 서 있는 희끗희끗한 백발의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 헤임달은
노파의 찬사에 엷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의 강인한 체격과 부드러운 미소가 대조를 이뤘기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헤임달의 애서슬론 가문은 자선활동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중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기에 마을을 넘어 그 일대의 유명인사였다.
"맞아요, 영주도 못하는 걸 애서슬론 가문이 대신해 주니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헤임달에게 쏟아지는 주민들의 찬사는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광장의 사람들은 저마다 밝은 표정으로 서로의 근황을 전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따뜻한 햇살 아래, 그들의 웃음소리가 마을 전체를 감싸는 듯했다.
"… 아참, 그보다 소식 들었어요?"
"무슨 소식?"
한 여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속삭이듯 말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게오르그 남작이 '예고 편지'를 받았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여인이 말을 잇자 주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소문의 중심인 게오르그 남작은 이웃 마을의 재력가로도 유명한 인사였다.
"예고 편지라면 설마… 그림자 형제단……?"
"네, 호호호. 얼마 전에도 파티를 열고 재력을 자랑하더니……. 그림자 형제단에게 단단히 찍힌
모양이에요."
"자꾸 치안이 나빠져서 도둑이 활개하는 건 문제지만, 한편으로는 통쾌하네. 흐흐."
사람들은 새로운 소식을 흥미롭게 받아들이며 저마다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의 속삭임은 마치 바람을 타고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광장에 퍼져나갔다.
"……."
나무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갈로아 백작은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그날 밤, 광장을 가득 채웠던 인파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고요한 적막이 넓은 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애서슬론 가문의 저택까지 이어졌다.
달빛이 커다란 통창을 통해 내부로 은은하게 스며들며, 방 안의 모든 것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신비로운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동방인 소녀, 사냐는 낮에 입었던 장밋빛 예복을 벗어 침대에
포개 놓았다.
달빛을 반사하는 그녀의 새하얀 피부가 마치 인외의 존재처럼 신비스러움을 자아냈다.
앳된 얼굴 아래로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유려한 곡선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탄력이 넘치게
변화했다.
옷장 앞에 멈춰 선 사냐가 익숙하게 숨겨진 스위치를 누르자 비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팔을 쭉 뻗어 비밀 공간에 포개져 있던 검은 의상을 꺼내어 몸에 둘렀다.
그녀의 하얀 피부를 가리는 검은 옷이 마치, 밤하늘 달빛을 가리는 구름처럼 느껴졌다.
끈이 풀리지 않게 단단히 조여진 걸 확인한 뒤, 동방식 단검의 칼집을 꺼내어 품속에 고이 간직했다.
오랜 세월에도 변색되지 않은 금빛 칼집은 먼 이국땅으로 건너온 사냐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고향의 물건으로 겉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그녀의 출신을 증명하는 듯했다.
더군다나 어릴적 생이별한 부친의 마지막 선물이었기에 사냐에겐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비록 칼이 없이 칼집만 덩그러니 남아 무기로서의 가치는 없었지만, 사냐는 그 물건을 소중한
부적처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커다란 창문이 소리 없이 조용히 열리고, 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곧, 그녀의 그림자는 달빛의 인도에 따라 은밀하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이웃 마을. 게오르그 남작의 저택.
저택 내부는 고급스러운 가구와 값비싼 장식품들로 가득했다.
사냐의 그림자는 벽을 타고 슬그머니 움직이며, 마치 제 집처럼 능숙하게 저택 내부를 활보했다.
그녀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표물을 향해 다가갔다.
한 눈에 봐도 귀해 보이는 조각상 '검을 든 여신'을 능숙하게 검은 자루에 옮겨 담는 순간….
'쾅-!'
육중한 로비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경비병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기다! 그림자 형제단이 나타났다!"
이미 괴도의 예고편지를 받았기에 침입자가 누군지는 알고 있던 것처럼 병사가 외쳤다.
서너 명이 한 조인 경비병들이 침입자를 에워싸며 포위했다.
병사들의 무기가 번뜩이며 침입자를 제압하려 바삐 움직였지만, 사냐는 마치 춤을 추듯 몸을 움직였다.
회피와 동시에 물 흐르듯 이어진 발차기가 병사의 얼굴에 명중했고, 그 옆의 또 다른 병사의 목뒤를 칼등을 강타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병사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마치 곡예사와 같은 몸놀림으로 병사들의 공격을 피하며 유효타를 집어넣는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빠르고 정확했다.
하나둘 맥없이 쓰러지는 병사들….
그때, 사냐는 불규칙하게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또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팔꿈치와 무릎으로 남은 병사를 제압한 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높이 뛰어올라 천장에 달린 구조물에 매달린 뒤 도약해 균형을 잡았다.
무게추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던 샹들리에를 따라 달빛이 요동치다가 서서히 멈춰 섰다.
그녀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고, 한바탕 소동이 있던 밤은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결국, 뒤늦게 도착한 경비병 무리는 사라진 괴도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음날, 애서슬론 가문의 저택.
사냐의 가벼운 발걸음은 애서슬론 가문의 서재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재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거친 음성이 오가고 있음을 직감하고는 발소리를 죽였다.
고풍스러운 장식 안에 빼곡히 들어찬 책들이 가득했고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졌지만, 두 사내의 언쟁 탓에 서재 안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는 말이다. 헤임달,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다."
그림자 형제단의 실세이자 조직의 이인자인 시갈은 분노와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헤임달을 위협했다.
그의 어두운 낯빛이 한층 더 검붉게 격앙됐고, 미간에서 오른쪽 광대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 위로 땀 방울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시갈, 방금 그 말은 항명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헤임달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강력한 위압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시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대답해 봐. 독단적으로 이 사업을 철회한 이유를 말이다! 대체 얼마가 들어간 사업인지는 알고 있나?"
"살다 보면 돈보다 중한 것이 많이 있다네. 우리가 누구인지 잊었는가?"
시갈이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쉰 뒤, 대답했다.
"… 그림자 형제단이다."
"그래, 그림자 형제단이 자네 말처럼 시정잡배와 같은 짓을 벌인다면 과연 누가 우리를 지지하겠는가?"
"하지만…!"
시갈이 반박하려 했지만, 헤임달은 이미 결정한 듯 손바닥을 내밀며 막았다.
그의 손짓은 단호하고 절대적이었다.
"그만. 이 건에 대해선 마무리 하세. 사냐가 올 시간이니 그만 나가주겠나?"
그의 정중하면서도 절대적인 요청에 시갈을 할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쫓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거칠게 열고 시갈이 걸어 나오자, 마침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냐와 눈이 마주쳤다.
"… 도둑 고양이처럼 엿듣고 있었나?"
시갈의 말투에는 비아냥과 함께 분노가 섞여 있었다.
"엿들은 건 아니야, 그저 시갈이 멋대로 큰소리로 떠든 것뿐이겠지."
사냐는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눈빛은 헤임달과 마찬가지로 날카롭게 빛났다.
시갈이 언짢은 듯 표정을 찌푸리자 미간에서 오른쪽 광대로 이어진 긴 흉터가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흥."
시갈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사냐를 지나쳐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따라 어두운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사냐 역시 이런 대화가 하루 이틀이 아닌 듯, 아무렇지 않게 헤임달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은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헤임달은 애써 태연한 척 사냐를 맞이했다.
"나왔어, 헤임달. 윽, 아저씨 냄새."
사냐가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독한 말을 쏟아냈지만 헤임달은 그녀의 행동이 귀엽다는 듯 미소 지었다.
"밖에서 기다리느라 늙어 죽는 줄 알았잖아. 무슨 이야길 그리 길게 하는 거야?"
사냐가 책상 앞으로 걸어오며 툴툴거리자, 헤임달은 웃으며 대답했다.
"껄껄, 이미 알고 있지 않니? 시갈이 들고 온 사업 관련으로 마찰을 빚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말이다."
"뭐, 그야 그렇지만……. 왜 저런 인간이 그림자 형제단인지 이해가 안 가."
평소 시갈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사냐는 그간 쌓였던 불만을 토로했다.
"어찌 됐든 그는 우리의 형제란다. 잘 구슬려 봐야겠지. 그나저나……. 간밤에 또 소동이 있었더구나."
헤임달이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며,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확인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눈치인데?"
미소 지으며 대답하는 사냐는 얼굴에는 살짝 자부심이 엿보였다.
"그래, '검을 든 여신'의 처리는 이미 지시해뒀다."
헤임달이 책상 위의 서류 뭉치를 정리하며 말했다.
"역시 아저씨와는 대화가 잘 통한다니까? 그 돈으로 빵을 사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좋을 것 같은데…."
사냐가 기대감에 부풀어 제안하자, 헤임달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사냐, 게오르그가 갈로아 백작의 처남이란 사실을 알고 있나?"
"그건 몰랐어. 근데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해?"
사냐가 의아하단 듯이 묻자, 헤임달은 사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 일대에서 백작의 심기를 건드려서 득 될 건 없지."
"여전히 고리타분하기는……. 이래서 아저씨들이란……."
사냐가 입을 삐쭉거리며 핀잔하자, 헤임달은 여전히 진중한 눈빛으로 사냐를 향해 이야기했다.
"사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너의 후견인이란다. 네 아비가 널 내게 맡긴 것은 딸의 안위를 걱정해서였지."
"……."
"내겐 네 신변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단다. 그러니 더 이상 위험한 짓은 벌이지 말아다오."
헤임달의 진심 어린 훈계에 사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어. 이번 건만 잘 부탁할게. 아저씨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제일 비싼 걸 훔쳤거든."
"흠……."
맹랑한 사냐의 대답에 헤임달은 할 말을 잊은 채 넋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는, 문득 눈앞의 소녀가 어떤 아이인지 돌이켜보았다.
그녀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동방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신비로운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그 소녀는 날 때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 특별함으로 인해 검은 머리카락의 사람들과 섞일 수 없었다.
마치 까마귀 무리 속의 백로와도 같은 외로움이 소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했다.
그런 연유로 동방인 부모는 하나뿐인 딸을 인연이 깊었던 헤임달에게 맡기게 되었다.
과연 사냐의 마음은 치유됐을까? 겉으로 내색조차 하지 않는 눈앞의 소녀에게 헤임달은 차마 그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내 귀여움에 넋이라도 나간 거야?"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보다…. 얼마 전, 내 제안은 생각 좀 해보았니?"
헤임달은 사냐에게 며칠 전 제안했던 내용을 상기시켰다.
"그 동방 여행 말하는 거야? 글쎄……. 별로 내키지 않아."
사냐는 무심한 듯 대답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어째서지?"
"그야 기억조차 나지 않으니까. 이곳 애서슬론 저택이 내 집이고, 그림자 형제단이 내 가족이야. 굳이 날 생각해서 계획한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사냐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 속엔 이곳에서의 삶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
헤임달은 충분히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방인 소녀가 이곳에 온 지 십수 년이 흘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궁금하긴 해. 그들의 눈에 난 서방인으로 보일까? 이곳 사람들이 날 동방인 취급하는 것처럼 말이야."
창문 너머로 멀리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이는 사냐의 눈을 호기심과 우려가 뒤섞여 있었다.
그 마음을 다 헤아린다는 듯 헤임달이 대답했다.
"그런 건 아무 의미 없단다. 너의 특별함은 단순히 외모나 출신 따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니까."
"……."
뜻밖의 우문현답에 사냐의 표정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봄날의 햇살처럼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은 늘 그래왔듯 사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느긋한 오후를 만끽했다.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가 저택의 고요함을 깨우며, 시간은 영원할 것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며칠 뒤, 캄캄한 밤. 사냐는 평소처럼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헤임달의 충고를 기억 못 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악화된 마을의 기근 때문에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문이 얼리자, 사냐 또래의 서방인 메이드 소녀 '엘가'가 조용히 들어왔다.
"사냐 아가씨, 단장님께서 찾아요."
"이 시간에? 갑자기 왜?"
"… 급한 일이라고 하실 뿐, 별다른 이야기는 없으셨습니다."
"알았어. 고마워, 엘가."
사냐는 엘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뒤,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엘가는 멀어지는 사냐의 그림자를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 지옥에나 떨어져. 이방인."
-
서재의 문에 노크를 한 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두운 서재 책상 위에 오일 램프가 외로이 켜져 있었고, 헤임달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음? 사냐, 이 시간엔 무슨 일로 온 게냐…?"
뜻밖의 인삿말에 사냐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야. 아저씨가 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엘가가."
사냐의 대답에 헤임달은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엘가라면…. 얼마 전 시갈이 들인 메이드를 말하는 거냐?"
"응."
그때, 저택 내부가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졌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곧이어 계단을 울리는 요란한 발소리가 예삿일이 아니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혹시 시갈이 꾸민 함정은 아닐까?"
사냐는 엘가의 거짓말이 아래층의 소동과 관련이 있다면, 그 배후에는 시갈이 있을 거로 추측했다.
"시갈이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다고는 하나, 함부로 의리를 저버릴 사내는 아니란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헤임달은 여전히 시갈을 믿는 듯한 눈치였다.
그때, 서재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리고는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헤임달. 당신을 체포하겠다."
차가운 날붙이들이 두 사람을 겨누자, 사냐의 붉은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헤임달은 태연한 척 대답했다.
"갑자기 나를? 대체 죄명이 무엇인가?"
"당신이 그림자 형제단의 우두머리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병사의 말에 서재의 공기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헤임달은 마치 이런 상황을 준비라도 한 것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의연하게 대처했다.
"껄껄, 사람을 잘못 봤네. 난 애서슬론 가문의 헤임달일 뿐이야.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이리 겁박하면 곤란하다네."
"증거라면 있지."
헤임달의 말을 반박하며 갈로아 백작이 병사들의 뒤에서 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눈에 익은 검은 자루가 들려져 있었다.
자루의 매듭을 잡아당겨 풀자, 그 안에서 사냐가 훔쳤던 조각상, '검을 든 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각상의 매끄러운 표면은 오일 램프의 불꽃이 은은하게 반사하며 스산한 서재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자, 그림자 형제단에게 도둑맞은 '검을 든 여신'이 어째서 자네의 저택에 있을까? 한번 말해 보겠나? 헤임달."
갈로아 백작이 내민 명백한 증거 앞에서 헤임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냐 역시 짐짓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훔친 물건 때문에 이런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아수라장이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치 모든 것이 악몽 같았다.
"헤임달, 당장 투항해라. 이건 마지막 경고다."
"……."
헤임달과 사냐는 점점 다가오는 병사들과 거리를 유지하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병사들의 무거운 갑주 소리와 날카로운 날붙이의 소리가 서재의 차가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이윽고 번뜩이는 창과 검이 저마다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어지럽혔다.
사냐와 헤임달은 곡예를 부리듯 날렵하게 병사들의 공격을 피해냈다.
날붙이 닿은 커튼이 찢어지고, 다리를 잃은 책상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램프가 바닥을 횡단하며 길게 기름 자국을 남겼고, 바닥의 깔린 천에 옮겨붙은 불이 순식간에 서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수적으로는 분명 병사들이 우세했지만, 사냐와 헤임달의 실력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닥에 쓰러지는 병사들이 늘어갔다.
"……."
이내 결심을 굳힌 갈로아 백작이 수신호를 보내자, 활을 떠난 화살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화살을 도저히 피해낼 재간이 없었던 사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왠지 통각이 고장 난 것처럼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 나, 죽은 걸까? 이상하네. 왜 아저씨 냄새가 나는 걸까?'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건장한 체구의 헤임달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마치 과녁처럼 많은 화살이 그의 몸에 박혀있었다.
"아, 아저씨……."
"… 난 괜찮다…. 사냐. 어서 빠져나가라."
헤임달이 사냐의 떨리는 눈을 바라보고 나지막이 말했다.
"… 그건 싫어. 아저씨를 두고 비겁하게 도망가라는 거야?"
"곧 뒤따라가겠다. 어서…!"
헤임달의 단호한 외침에 사냐는 마지못해 창문을 열고 난간에 발을 디뎠다.
사냐는 거칠게 숨을 내쉬는 헤임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은 늘 그렇듯 강인했지만, 왠지 모르게 아련했다.
마치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약속, 꼭 지켜……."
창문 너머 어둠으로 사냐의 모습이 사라지자, 헤임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쓰라린 고통을 억누르며 허리를 세웠다.
그의 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불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로, 그는 마지막까지 사냐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반드시 살아남거라.'
헤임달은 마지막 힘을 다해 병사들을 막아섰다.
그의 마음속엔 사냐에 대한 애정과 의무감이 뒤섞여 있었다.
병사들이 몰려들었지만, 그의 사투는 끝을 모르게 이어졌다.
날이 밝아 서재의 화재가 잠잠해질 때까지…….
며칠 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소녀는 어두운 골목을 배회하고 있었다.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구석진 길을 택해 조용히 움직였다.
조용히 골목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했다.
마을 주민들을 돕던 애서슬론 가문의 정체가 그림자 형제단이었다는 소식이 퍼지며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다.
"… 애서슬론 가문의 헤임달 나리가 그림자 형제단의 단장었다니…. "
"혹시 백작이 증거를 조작한 건 아닐까?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이건 말도 안 돼."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너도 헤임달 나리처럼 죽고 싶은 거야?"
사람들의 숨죽인 대화를 통해, 절대로 듣고 싶지 않던 헤임달의 죽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냐는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려 무릎 사이로로 고개를 파묻었다.
헤임달의 마지막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마음 속으로 약속을 저버린 그를 마음껏 비난하고 싶었지만, 모든 비극이 자신이 훔친 '검을 든 여신' 때문에 시작됐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런데 수십 년동안 정체를 숨겨왔던 그림자 형제단이 어쩌다가 발각된 걸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보니 사냐 역시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 대화를 나누던 사내들의 뒤에서 술에 취한 노인이 비틀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건…, 배신 때문이지! 인간은 더럽고…. 추악한 존재거든…! 딸꾹."
대화를 나누던 사내들은 불편한 듯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홀로 남겨진 노인은 품 속에서 작은 술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사냐는 노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잠깐, 할아버지. 그 이야기. 나한테 들려줄 수 있어? 배신자라니…?"
"히끅. 아무것도 묻지 마. 나도 모르니까. 낄낄."
"……."
인사불성처럼 보이는 노인에게 제대로 된 정보가 있을 턱이 있겠나 싶어서 돌아서려던 찰나,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 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이 근처에서 백작과 수상한 사내의 거래를 말이다. 히끅."
"… 수상한 사내?"
"이마에서 뺨까지 이어지는 긴 흉터를 가진 험상 궂은 녀석이었지. 딱 봐도 수상하게 생긴 놈이었어."
"……."
사냐는 노인이 설명하는 수상한 사내가 누구인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 그 녀석이 백작에게 문제의 '여신상'을 건넸고……. 얼마 후 헤임달 나리께서 체포 현장에서 저항하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지. 그 빌어먹을 배신자 놈 때문에…!"
노인이 표정에서 헤임달에 대한 존경심과 현실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남자……. 어디로 간지 알아?"
"히끅, 내가 그걸 어찌 알겠느냐? 보나 마나 백작에게 받은 뒷돈을 들고 어디론가 도망갔겠지. 에이, 천벌받을 놈."
"……."
노인은 한바탕 욕지거리를 쏟아낸 뒤, 비틀거리며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사냐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노인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표가 정해진 이상 더 고민할 필요도,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아도 됐다.
아직 어렸던 소녀에게 복수심이라는 감정은 아주 강렬한 것이었다.
사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것이 기나긴 여정의 시작일 것이라고는….
-
다시 몇 년이 세월이 흘렀다.
서방 대륙의 동쪽, 이름 모을 마을의 풍경은 목가적 분위기를 물씬 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여지는 푸른 들판 위로는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
창밖을 보던 사냐는 이내 테이블 위의 꾸깃꾸깃한 낡은 지도에 표시를 남긴다.
지도 위에 덧그린 어지러운 낙서들은 오랜 추적의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지도를 가방에 고이 접어 넣고 주점을 나서려던 찰나, 멀찍이서 소녀를 지켜보던 주점 주인이 사냐에게 말을 걸어왔다.
"음? 떠나는 건가?"
"아…. 응, 맞아."
사냐는 화들짝 놀란 듯 커진 눈으로 빤히 바라보자, 여관 주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아이고, 의도치 않게 방해를 한 모양이구나. 미안하다."
"방해는 아니야. 그저 이 마을에서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이 처음이라 살짝 놀랐을 뿐."
연신 이어지는 의외의 대답에 여관 주인은 살짝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그것참 의외구나. 이토록 어여쁜 소녀에게 왜들 그랬을꼬……."
여관 주인이 말을 하면서 사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새삼 사람들이 꺼린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에 동방인의 이목구비,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묘한 색깔의 파란 눈과 그에 대비되는 붉은 동공.
그 낯선 조화에 위화감을 느낀 여관 주인은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기특하네. 아저씨는 장사 수완이 좋으니 이 여관은 앞으로도 번창할 거야."
"크흠……."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동방인 소녀의 화법에 할 말을 잃었던 여관 주인은 그간 장사 경험을 살려 노련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다음 목적지는 정했니?"
"응, 서쪽으로 가보려고."
"허어, 서쪽이라면 로체스트 지방을 말하는 거니? 말리고 싶구나. 그곳은 마족과의 접경 지역인지라 아주 위험하단다. 힘깨나 쓴다는 서방인 사내들도 꺼리는 편인데, 하물며 동방인 소녀라면……. "
그는 말하던 중 실수를 깨닫고는 또다시 말끝을 흐렸다.
사냐는 그런 반응이 익숙하단 듯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응 괜찮아. 난 동방인, 서방인. 그 무엇도 아니니까."
-
석양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무렵임에도 마을 광장은 몰려든 인파들로 활기가 넘쳤다.
사냐는 해가 지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삐 움직였다.
장사를 마친 듯 커다란 짐 보따리를 둘러메는 행상인, 삼삼오오 각자의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들, 오후 내내 팔리지 않은 눅눅해진 빵을 산 여인,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옷을 입은 이국 출신으로 보이는 방랑자까지…….
한참을 앞만 보고 걷던 사냐는 코끝을 스치는 아련한 느낌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뭔가에 홀린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둘러본들, 자신이 찾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추억을 자극하는 그립고 아련한 향기 때문에 괜스레 심술이 났다.
"후, 어디서 아저씨 냄새가 나……."
그렇게 각자의 길을 걸었다.
비록 지금은 서로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대면할 소중한 인연을 뒤로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