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Tessa

"마지막으로 묻지. 이 사람, 본 적 있어?"

고막을 울리는 나긋한 목소리에, 남자는 간신히 퉁퉁 부은 눈꺼풀을 치켜뜨곤 바닥의 현상수배지를 들여다보았다.
빛바랜 수배지 속, 고급 실크 모자를 푹 눌러 쓴 한 사내의 몽타주.
포승줄에 묶여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남자의 꼴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림 속 사내는 웃음인지 냉소인지 모를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여, 역시 난 모르겠어. 아무리 나라도 이런 거물에게 함부로 손을 댈 만큼 무모하진 않다고...."
"저런. 대답을 할 땐 좀 더 신중해야지. '도살자'."
"저, 정말이라니까…. 젠장, 이젠 좀 믿어줘…."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추는 도시의 깊은 밤.
건물 외벽에 걸터 앉아 조용히 레이피어를 매만지는 여자를 향하여, 그는 애걸하듯 중얼거렸다.
거대한 무쇠 철퇴로 적의 머리통을 가차없이 으깨며 '도살자' 로 군림하던 남자.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도살자'였던 그는, 지금 이 순간 밧줄에 꽁꽁 묶여 일생 최대의 굴욕을 맛보는 중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연이은 거센 타격으로 몽롱해진 정신 탓인지 그는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거들먹대는 마법사 놈들에게 여느 때 처럼 본때를 보여준 거?
철퇴에 녹이 생겨 대장간에 맡겨두고 나왔을때 부터?
아니면, 심야의 골목에서 마주친 끝내주는 미인에게 한 잔 하자며 추파를 던졌을 때부터?

"…그래, 좋아. 믿어주지."

건물 외벽에 걸터 앉아 레이피어를 매만지던 여자는, 가볍고 우아한 몸놀림으로 바닥에 사뿐 착지했다.
그리곤 또각 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남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차가운 밤바람에 살랑이는 분홍빛 머리칼, 거기서 스며나오는 강렬한 꽃향기가 남자의 뭉개진 코끝까지 닿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코를 훌쩍였다.
그녀는 자신의 길고 날카로운 검끝을 남자의 턱에 들이밀곤 경직된 그의 고개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저런, 가엾어라. 다 큰 녀석이 어린애처럼 훌쩍이기나 하곤. 이제 네겐 흥미가 떨어졌으니 곧 보내줄게."
"그, 그 말은…."
"그래, 이제 널 풀어준다는 뜻이지."

마치 우는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여자는 부드럽고 상냥하게 답했다.
남자의 마음엔 커다란 안도감이,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수치심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걸 걸고 밑바닥부터 쌓아올린 '도살자'의 명예였다. 구둣발을 핥고 가랑이를 기어가며 만들어낸 빛나는 영광.
그런데 고작 한 번의 방심으로 가냘픈 여자 앞에 꿇어앉아 선처를 구걸하는 꼴이라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 건방진 여자. 목을 꺾어주겠어.'

턱 끝까지 넘어온 저질스런 욕설을 삼키며 그는 여자를 향해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구속에서 풀려나, 억센 두 손으로 희고 얇은 목을 손아귀에 쥐고 비틀 수 있도록.

"어서 풀어줘. 손목이 쓸려서 아프다고."
"그래, 그래. 보채기는."

여자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검을 거두고는, 서서히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경계심을 푸는 찰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남자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여자의 걸음을 세었다.
또각 또각 또각.
그러나 거리가 좁혀지며 강렬한 꽃 향기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그의 머릿속에 있던 기막힌 계획은 일순간 눈녹듯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시선을 마주하며 웃고 있는,
달빛을 받아 진주처럼 빛나는 여인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자신 같은 시정잡배는 감히 닿을 수 없는, 새하얀 날개를 편 백조같은 여인.
그 고혹적인 자태에 눈을 떼지 못하는 찰나….

"기사는 무대를 가로질러 지쳐 쓰러진 악당을 매섭게 응징한다."
"?!"

찰싹!
미처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날아온 것은 노을빛 섬광에 둘러싸인 여자의 손바닥이었다.

"자, 자. 마지막 과정이란다. 네가 날 오래토록 기억할 수 있게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는 과정. 가만히 있으면 아프지 않을 거야."

찰싹! 찰싹!
연이어 날아드는 강렬한 타격에 그의 얼굴은 사정없이 난타당하고….

찰싹! 찰싹! 찰싹!
결국 양 볼이 퉁퉁 부어오른 남자가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돌바닥 위에 맥없이 나동그라질 때까지 여자는 결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 벌써 쓰러진 거니?

자신이 직접 연출해낸 추한 범죄자의 말로를 지켜보던 여자는, 잠시 후 화려한 동작으로 레이피어를 허리춤에 돌려놓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악당이 쓰러지자, 이를 지켜보던 인간과 요정은 일제히 환호하고…."

그리곤, 허리를 깊게 숙여 관객들의 환호에 화답하듯 달이 비추는 허공을 향하여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오늘 밤 공연을 찾아주신 관객 여러분,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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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미없는 남자, 잘 좀 부탁해요."

여자는 거구를 마룻바닥 위로 가볍게 던지며 말했다.
이미 의식을 잃은 지 오래인 듯, 붙들려 온 사내는 그대로 바닥 위에 엎어져선 가냘프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뭐야, 이거. '도살자'잖아?"
"'도살자'라면, 그 '도살자' 말이야?"
"그래. 이전에 페티르를 불구로 만든 쓰레기 같은 현상범."
"… 패악을 부려 대더니 결국은 철창 신세로군. 이 더러운 자식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골머리를 썩었는지."
"뭐, 결국은 이런 꼴이 됐으니까. 이 정도면 페티르도 속시원해하겠지."

남자의 몸을 이리저리 들춰보던 두 기사는 익숙한 듯 현상범을 처리한 뒤, 팔짱을 낀 채 문가에 기대어 있는 새하얀 '바운티 헌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힘있게 굽이치는 분홍빛 긴 머리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깃털로 장식된 하프 플레이트를 두른 여인은 뇌리에서 쉬이 잊히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어쩌면, 바운티 헌터라는 칭호가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흠…. 어쨌든 골칫거리를 처리해줘서 감사합니다. 현상금은 저 쪽 사무실에서 직접 수령해가시고요."
"그래요. 돈을 받자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꽤 수고스러운 밤이었으니까."

여자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기사 여러분."
"어, 잠깐…."

이제 막 돌아선 여자를 다급히 불러 세운 건 두 기사 중 투구를 벗고 있던 자였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선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눈 앞의 바운티 헌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만보니, 당신. 어딘가 낯이 익군요. 전에 본적이 있는 거 같은데…."
"자네, 설마 추파라도 던질 셈인가? 기사 망신 다 시키는군."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로 어디서 본 적이 있단 말이지…."

잠시 기억을 되짚으며 한참을 생각에 골몰하던 기사는, 마침내 '어떤 이름'을 입에 올렸다.

"저기, 혹시 당신은 그… 배우 '테레지아'가 아닙니까? 연극 '백조 기사'에 나왔던…."
"......"

여자가 사무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자 묘한 확신이 든 기사는 황급히 몇 마디를 덧붙였다.
"테레지아 양. 저는 당신의 열렬한 팬입니다. 몇 년전 당신이 여기 로체스트로 순회공연을 오셨을 때 모든 회차를 다 챙겨봤었지요."
"테사…."
"네…?"
"이젠, '테사'라고 불러줘요."

여자는 발길을 돌려 기사단 건물을 나선 후, 또다시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심야의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시시한 하루 일과를 마친 여자는, 여느 때와 같이 거리를 거닐며 시간을 보내다 낮에 눈 여겨 봐 두었던 한 작은 주점으로 향했다.
소음이 적고 주점 안의 손님들이 잘 보이는 자리를 찾아 앉은 그녀는, 차가운 거품 맥주 한 잔을 홀짝이며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자의 지옥에 갇힌 채 주점에 틀어박혀 삶의 무게를 들이키는 군중들.
그들 속에 그 증오스럽고도 그리운 얼굴이 나타나길 기대하며.
여자는 고이 품고 있던 빛바랜 수배지를 꺼내 낡은 테이블 위로 펼치곤 조악한 몽타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명 수배.
괴도 H.
일명 '보석상'으로 알려진 마법사.
생사불명.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쫓으며 살아온 지도 벌써 몇 년째 였다.
오직 이 남자. 괴도의 행적을 뒤쫓기 위해서 배우의 커리어를 뒤로한 채, 바운티 헌터가 되어 온갖 크고 작은 도시를 떠돌고 자신의 레이피어로 흉악범들을 사정없이 응징했다.
그러나 최근 몇 주간 처럼, 오늘 하루도 변함없이 허탕이었다.
몇 주전, 그녀는 '신비한 빛을 내는 보석'이 밀수품 거래 시장에 떠돈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기 로체스트를 찾아왔다.
면밀한 조사를 통해 귀중한 물품만을 다루는 범죄자를 찾아 신중히 정한 타겟이었는데.
정작 그 '도살자'라는 놈은 괴도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 치졸하고 볼품없는 남자였다.
괴도는 매번 이런 식으로 자신을 농락했다.
마치 그녀가 어디서 무얼 하는 지 전부 지켜보고 있다는 것처럼, 추격을 포기하고 싶어지면 일부러 단서를 흘리고 그에게 가까이 맞닿는 듯 싶으면 또다시 모든 행적을 감추었다.

'아름다운 테레지아.'

낮고 중후한 목소리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귓가에 생생히 울리는 그 목소리와, 깊이 눌러쓴 실크 모자 너머로 비추는 깊은 눈빛.
이를 위해서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두고 봐. 절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진 않을 테니."

묘한 표정의 사내, 금방이라도 달싹일 듯한 그 입가를 보며 여자는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여기, 한 잔 부탁하지."

상념에 잠겨있던 그녀를 현실로 불러낸 것은 어떤 목소리였다.
바로 직전까지 상상 속에 떠돌던 목소리와 닮은 낮은 목소리.

'설마, 그 남자인가?'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그리고는 이내, 미간에 깊은 주름이 간 한 남자를 발견해냈다.
이제 막 주점에 들어선 그는 그녀의 근처에 앉아선 둘러메고 있던 활과 화살통을 정돈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

어슴푸레한 촛불의 빛 탓인지, 아니면 밀려오는 과거의 파도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몇 달간의 허탕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져서인지.
이상하게도, 그녀는 남자의 옆얼굴이 수배지 속 사내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동한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잔을 들고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쉽지 않은 하루였어."
"…?"

불쑥 등장해 말을 걸어오는 여자를 향해, 남자는 무심한 눈빛을 보냈다.

"뜻대로 풀리는 일이 없네. 기껏 몰아넣은 녀석에게선 허탕만 치고. 거기다 최악의 기억은 자꾸 나를 들쑤시기만 해."
"……."

여자의 말에 딱히 신경쓰지 않는 듯, 남자는 무심히 맥주를 들이켰다.
가까이서 바라본 그의 얼굴은 그녀의 기억 속 괴도의 말쑥한 얼굴과는 사뭇 달랐다.
헝클어진 금발과 정돈되지 않은 짧은 수염.
그리고 꽉 다문 입매는 그가 사람과 별로 교류하는 편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남자는 오히려 좋은 말상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잠시 뒤 헤어질 사람.
이 사람이라면 오랜만에 되살아난 과거 이야기를 조금은 풀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문득, 그녀의 마음속엔 그런 충동이 일어났다.

"괜찮으면, 잠시 얘기 좀 들어줄래? 오늘따라 옛 일이 자꾸만 떠올라서 조금 풀어놓고 싶어졌거든."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남자는 답했다.

"…좋을대로."
"후후, 고마워. 참. 난 예전에 배우였거든. 그러니, 내 방식대로 설명할 게. 연기하듯이. 괜찮지?"

여자는 남자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밀려드는 기억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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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 '로드루반'에 대해 들어봤나요?

이곳 서방 대륙과 남방 대륙, 섬 마을 모르반을 잇는 거대한 교역의 도시.
그곳이 바로 나, '테레지아'의 고향이예요.
어리고 순진한 '테레지아'는 과거의 영광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진, 로드루반의 한 몰락 귀족 집안의 맞이로 태어났어요.
오래전 관리를 포기해 흉가나 다름없어진 저택에서, 노망이 든 조부모님과 허영 넘치는 부모님, 그리고 그 사이에서 멋모르고 태어나 고통받는 어린 동생들과 부대끼며 살아갔죠.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테레지아의 부모님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부모 였어요.
스스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줄 모르는 주제에, 이미 오래전 떠나간 과거의 영광과 영화를 잊지 못하곤 재산을 펑펑 써 댔죠.
몸을 치장하고, 온갖 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잊지 않았어요. 어린 동생들은 당장 배가 고파 우는데도 말이예요.
덕분에 테레지아의 집안은 늘 빚과 가난에 허덕였어요. 가세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었죠.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나 다름없던 테레지아는 이를 악물며 가족을 위해 아침마다 집을 나섰어요.
자신과 집안에 대해 끊임없이 수군대는 사람들의 소음, 동생들의 칭얼대는 소리.
부모님이 시끄럽게 깔깔거리는 소리를 등에 짊어진 채, 그녀는 푼돈을 벌러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답니다.

물론, 부모님도 나름의 계획은 있었어요.
가세를 일으켜 다시 상류층에 진입하기 위한 그들만의 아주 야심차고 알량한 계획 말이죠.
그건 바로, 자신들이 빚어낸 아름다운 딸 테레지아를 부와 권력, 재력을 가진 자에게 시집 보내는 거였어요.
그때의 로드루반은 대륙 간 교역을 통해 신흥 부자들이 많이 생겨나던 시기였는데, 그들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로드루반의 사교계를 단숨에 평정해갔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성대한 파티를 열며 대내외로 자신들의 입지를 견고히 다졌죠.
그러나 유서깊은 귀족들은 그들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들을 일종의 근본 없는 졸부 취급 하며 무시했죠.
그래서 그들은 몰락한 귀족과 전략적으로 혼약을 맺어 명예와 신분마저 돈으로 사곤 했답니다.
부모님은 이런 흐름을 읽어 자신들의 운명을 반전시켜보고자 한 거예요. 딸의 아름다운 미모와 자신들이 유일하게 가진 자랑스런 핏줄을 팔아서 말이지요.

"… 한심한 인간들이군."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한 마디를 뱉자,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앉아있었지만 그는 분명 그녀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 연기, 아직은 녹슬지 않은 모양이네."

뜻밖의 반응에 힘을 얻은 그녀는 기쁜 듯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온갖 삶의 무게가 사정없이 짓눌러 올때면, 아름다운 테레지아는 눈을 감고 '무대'를 떠올렸어요.
아무도 몰라줬지만, 그녀에겐 '연기'라는 훌륭한 끼와 재능이 있었거든요.
사실 그녀는 어엿한 '배우'였답니다.
아무도 모르게 극단에 찾아가 오디션을 보고, 배역을 따내 몇몇 크고 작은 연극의 단역을 섰죠.
무대는 언제나 그녀가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바로,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흐를 만큼 강렬한 '해방감'을요.
다른 사람을 연기할 때면 그녀는 잠시나마 감옥같은 현실을 떨쳐내고 '해방'될 수 있었어요.
삶에 찌들며 가족을 부양하는 테레지아가 아니라, 아름다운 양치기 소녀, 귀족 도련님의 흠모를 받는 시녀, 엘프 요정이 되어 자유롭게 숨쉴 수 있었죠.
그래서 그녀는 틈만 나면 연기에 매진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답니다.
하루 빨리 무명이라는 꼬리표를 벗어던지고, 주역으로서 당당히 관객앞에 나설 그 날을 꿈꾸었어요.

하지만, 아름다운 테레지아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늘 한정적이었습니다.
그녀의 예쁘장한 외모 탓에 연기력 보다는 미모를 무기삼아야 하는 배역만이 주어지기 일쑤였죠.
아무리 철저히 훈련을 해도, 그 어떤 훌륭한 명연기를 펼쳐도 변하는 건 없었습니다.
결국 의지하던 연극마저 자신을 틀에 옭아매기 시작하자, 재능 넘치고 자유롭던 테레지아는 안으로부터 서서히 시들어가기 시작했어요.
마치 올가미에 발이 걸려 꼼짝 못하는 짐승처럼, 그녀는 점차 생기를 잃고 삶의 의지마저 놓아버리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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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어느 날.
방 한구석에 멍하니 앉아 허공을 응시하던 테레지아는 갑자기 들이닥친 부모로부터 난데없는 고함을 들었어요.

오늘이 바로 사교계 최고의 명사 '루빌리' 씨가 개최하는 성대한 가면 무도회가 열리는 날인데, 어째서 방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거냐.
어서 괜찮은 신랑감 후보를 찾아 좋은 인상을 남겨야지. 게으르고 멍청한 것.

가엾은 테레지아의 양옆에 서서 부모는 집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죠.
결국 그 등쌀에 못이겨, 테레지아는 터벅터벅 옷장 앞으로 걸어갔어요.
다만 부모의 바람과 달리 그녀는 소매가 풍성한 사치스러운 드레스 대신, 자신이 취향껏 개조한 초록 스커트와 가면, 하얀 가발을 착용하곤 집을 나섰죠.
어쩌면 그건 부모를 향한 그녀의 작은 반항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주홍빛 노을이 내릴 무렵 도착한 루빌리 씨의 저택은, 본격적으로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이미 시끌벅적했어요.
화려하게 치장한 각양각색의 귀족들은 알록달록한 잔을 손에 들고 각자 인사와 포옹을 나누며 떠들고 있었죠.
그러나 테레지아는 눈앞의 파티에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몇몇 인사들이 그녀에게 흥미를 보이며 말을 걸어오기도 했지만 대꾸조차 않은 채 차갑게 외면해버렸죠.

그녀는 그대로 쭉 파티장을 가로질러 복도로 나가 넓은 테라스로 향했습니다.
그리곤 답답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저택 인근으로 펼쳐진 풍광을 감상했어요.
대저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숫가엔 특이하게도 소금사막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는 물기어린 대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죠.
본래라면 그 아름다운 광경에 가슴이 벅찼을 테레지아였지만....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하여 지독한 환멸만을 느끼고 있던 그녀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녀가 평생 그녀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면, 이 삶을 이토록 가혹하게 버텨내야하는 이유가 있을까?
삶에 구속당하며 평생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였습니다.

덜컥. 끼이익.

테레지아의 귀에 무언가 수상한 소리가 들려온 거예요.
방의 문을 살금살금 여는 것 같은 그 소리는 테라스 너머 장식용 갑옷이 늘어선 복도 쪽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소리에 천천히 귀를 기울이며, 그녀는 서서히 복도로 진입해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펄럭.

잠시 뒤, 어느 방에서 실크 모자를 푹 눌러쓴 길다란 망토를 두른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하마터면 헉 하고 숨소리를 낼 뻔했어요.
그 남자의 옆구리에 값비싸보이는 보석이 박힌 도자기가 들려있었기 때문이었죠.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그녀는 우연찮게 '괴이한 도적'이 벌이는 범행의 목격자가 된 거지요.
아직까지 테레지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그는 담담히 현장의 뒤처리에 임했습니다.
침착하고 능숙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일개 좀도둑이 아닌 숙련된 프로 같았어요.
이 장면을 지켜보던 테레지아의 심장은 마구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누구와 제대로 겨뤄본 적도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에 눈앞의 남자를 막아야 겠다는 충동이 불현듯 들끓기 시작했던 겁니다.

'어느 정도의 흉악범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어차피 잃을 것도 없잖아?'

어차피 잃을 게 없다면, 옳은 일이라도 해보자.
그렇게 결심한 테레지아는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도둑을 제압하기 위해선 무기가 필요했으니까요.
그러다 마침 근처에 있던 장식용 갑옷의 레이피어를 발견하자, 그녀는 조심스레 이를 뺏어 들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괴도'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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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당장 멈춰! 어서, 어서 물건을 돌려줘!"

그녀는 괴도를 향해 외쳤습니다.

과감하고 집요하게 테레지아는 '괴도'의 뒤를 바짝 추격했습니다.
마치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감정을 풀어내기라도 하듯, 조악한 장식용 레이피어를 든 그녀는 맹렬하게 달리고 또 달렸어요.
자신 뒤에 따라붙은 추격자를 눈치챈 괴도 또한 도주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괴도의 손 끝에서 신비한 빛이 번쩍일 때마다 그녀와 그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졌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괴도는 그녀가 '어설픈 추격자'라는 걸 눈치챈 것 같았어요.
시간이 경과할 수록, 그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속력을 미묘하게 조절하는 듯한 낌새가 보였기 때문이죠.
그의 모습에 오기가 생긴 테레지아는 이를 악물고 더욱 달려들었습니다.
꾸준한 연기 훈련으로 다져진 신체 덕분일까요. 아니면 온몸을 자극하는 긴장감 때문일까요.
한참을 달렸는데도 이상하게 그녀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흐렸던 정신이 점차 또렷하고 맑아지는 걸 느꼈죠.
돌아보면, 애초부터 그녀는 눈앞의 괴도나 도둑맞은 도자기 따위는 안중에 없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전신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피가 가져다 주는 생동감,
무대 위에서 느꼈던 것 보다도 훨씬 강력한 '해방감'.
테레지아는 그 감각의 뒤를 쫓고 있었던 거죠.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발을 멈춘 곳은 대저택 근처 호숫가의 '소금사막'이었어요.

살구빛 연보랏빛으로 아름답게 물든 하늘 아래로 펼쳐진 지상의 우주.
그 몽환적인 풍경 위에 자신이 서있다는 걸 깨닫자 테레지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어요.
어쩌면 괴도가 자신을 일부러 여기에 이끌었는 지 몰라, 그런 생각마저 들었죠.
진정되지 않는 가파른 호흡, 긴장감으로 터질듯한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테레지아는 맑은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어요.

하늘과 땅이 뒤집힌 이곳엔, 오직 테레지아 혼자 뿐.
부모도, 동생도, 자신을 평가절하하던 사람들도, 수군거림과 모진 삶도 없었어요.
실로 오랜만에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기묘하고도 강렬한 '해방감'.
무대 위에서 느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그녀는 눈을 감고, 그 모든 감각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에는 한 '신사'가 서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짐짓 놀라면서도, 테레지아는 마음을 가다듬고 태연한 척 입을 뗐습니다.

"당신은…, 내가 뒤쫓던 도둑이야. 그렇지?"
"그래, 맞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
굳이 자신의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그는 재빨리 정체를 시인했습니다.
내심 떨고 있던 테레지아와 달리, 신사는 무척 태연하고 안정된 모습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무척이나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죠.

"이제 그만 포기해. 순순히 보물을 돌려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어."
"…."

테레지아는 용감히 외쳤습니다.
사실 눈앞의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앞선 추격전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는 능숙한 도둑이자 신비한 마법을 쓰는 마법사였지요.
하지만 테레지아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먼저 꼬리를 내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죠.
그래서, 그녀는 한 걸음 더 전진해 신사 앞에 무딘 검끝을 들이밀었습니다.

"…넌… 내가 두렵지 않은가 보군."

낮은 목소리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리곤 손으로 검끝을 밀어, 그녀의 곁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이 오지 마! 더 이상 다가오면 널 반드시 벨 거야."

하지만 그는 날 선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거리를 좁혀왔습니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야 할 까 고민하던 찰나, 신사는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습니다.
바로, 대저택에서 보았던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도자기였죠.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과 도자기는 발 아래 소금사막만큼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자, 받아라. 이제 이건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어."

그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이건 분명히 함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신사의 눈은 너무도 태연해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정말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걸 보는 듯 무미건조한 눈빛이었죠.
그래서, 테레지아는 얼떨결에 도둑맞은 물건을 돌려받았습니다.

"왜 이걸 내게 돌려주지? 넌 이걸 위해 대저택에 잠입한 게 아니었던가?"
"그랬었지. 그 도자기에 박힌 동방의 귀중한 보석, '옥'을 원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필요 없어. 그러니 돌려주는 것 뿐이야."

감정은 절제되었지만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씨에, 테레지아의 경계심은 조금씩 허물어졌습니다.
적어도 그가 그녀를 공격하진 않을 거라 믿게 되었죠.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좀 생기자, 그녀는 신사의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곧 검을 거두고 그의 곁으로 좀 더 다가가, 그의 얼굴과 행색을 관찰해보았죠.
신사는 말쑥하고 단정한 사내였습니다.
깊은 눈을 가진 그는 날카로우면서도 지적인 인상이었어요.
다듬어진 수염으로 인해 나이를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고급 실크 모자와 단정한 옷 매무새로 보아 그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 일부러 도둑질을 할 확률은 낮지만, 정말로 '신사' 처럼 보였죠.
깊은 내면마저 읽어낼 것처럼, 그와 나는 한참을 마주보았어요.
그리고 그 또한 나의 눈동자를 천천히 들여다보았죠.
알 수 없는 기묘한 친밀감이 우리 둘 사이에 생겨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우습게도 나는, 그에게 개인사를 털어놓고 있었답니다.
그는 나의 지리하고 서글픈 이야기를 곁에서 묵묵히 들어주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어, 낮은 목소리로 내게 소중한 한 마디를 남겨 주었죠.

"넌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보석보다 가치 있어. 무모하지만 대담하고 용기 있으며 꿈과 재능이 넘치지. 비록 지금은 원석에 불과하지만 곧 아름다운 광채를 낼 수 있을 거다. 아주 조금만 더 연마를 거친다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에서, 단 한번도 테레지아를 그렇게 봐준 사람은 없었어요.
그녀는 언제나 꿈을 포기하고 삶에 찌든 아가씨. 천덕꾸러기 딸. 얼굴만 반반한 무명 배우였을 뿐인데.
오직 신사 하나만이 그녀 안의 화려한 보석을 알아봐 준 거예요.
그 말로 인해, 순간 나는 새롭게 피어났어요.

잠시 후, 그가 떠날 준비를 하자 나는 그에게 이름을 말해주었어요.
어디선가 꼭 다시 만나길 기원하며.

"테레지아. 내 이름은 테레지아에요."
"…테레지아."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이름을 되뇌이던 그는 작별의 말을 남기곤 종적을 감췄어요.

"다음에 다시 만나지."

그가 사라지자, 테레지아는 다시 대저택으로 돌아갔고, 괴도에게서 돌려받은 도자기를 루빌리 씨에게 돌려주었답니다.
뒤늦게 현장을 발견하고 낙심하던 그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도자기와 용감무쌍한 그녀를 보자 몹시도 기뻐했죠.
당연하게도 그날 무도회의 주인공은 테레지아가 되었습니다.
귀중한 보물을 되찾아온 그녀를 칭송하기 위해 각계의 인사들이 물밀 듯 몰려들었죠.
자연스럽게 그녀는 자신의 연기를 뽐낼 기회를 얻었습니다.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연기를 훌륭히 펼쳤죠.
그렇게, 테레지아는.
아니, 테사는 난생 처음 잊지못할 마법같은 밤을 보냈답니다.
모든 사람의 주목과 갈채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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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혹무도하구나. 그러나 흑조여. 나의 흰 깃털이 새빨갛게 물들 때까지 절대 이 검을 놓지 않을 것이다."

연극의 클라이막스가 한창인 극장.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한껏 숨을 죽인 채, 조명 아래서 레이피어를 휘두르는 여배우를 주목했습니다.
힘있는 발성과 호흡, 그리고 몰입을 부르는 열정적인 연기에 푹 빠져든 이들은, 잠시 뒤 커튼콜이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날아드는 꽃다발,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화답하듯 무대에 나선 테레지아는 환한 미소를 띠고 허리를 더욱 깊게 숙이며 인사했습니다.
만족스러운 연기를 해낸 자신을 대견해하면서요.
동료 배우들의 격려, 팬들이 보낸 갖가지 선물을 품에 안고 분장실로 돌아온 그녀는 문을 닫고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그리고는 분장실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낮고 중후한 목소리에 이내 함박 웃음을 지었습니다.

"오늘도 굉장하더군. 테레지아."
"…당신, 역시 와줬군요."

마법 같았던 무도회 날 이후, 테레지아의 삶은 완벽한 반전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을 알린 그녀는 더 나은 무대에 설 기회를 가지게 되었지요.
뛰어난 연기력과 타고난 영리함, 그리고 매혹적인 매력으로 그녀는 관객들을 단숨에 사로 잡았고, 마침내 더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배우로서 탄탄한 커리어를 만들어 갔습니다.
늘상 그녀를 따라다니던 몰락 귀족의 딸이라는 오명은, 어느새 '로드루반의 전도유망한 신예'라는 호칭으로 대체되고 도시에서의 유명세는 점점 커져갔죠.
이제는 부모님도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고, 동생들도 더는 배고파 울지 않았어요. 그녀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도 사라졌죠.
모든 것이 순풍을 타고 항해하는 배처럼 순조롭게 흘러갔습니다.
테레지아는 그 모든 성공을 괴도, '신사'의 공으로 돌렸어요.
그 날 '신사'의 따뜻한 말은 자신을 포기하려던 그녀를 단단히 붙잡아주고 고난을 헤쳐나갈 의지를 북돋아 주었죠.
신사를 남몰래 가슴 속에 품은 테레지아는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단독 주연을 맡은 연극의 첫 공연이 끝나던 날, 신사는 그녀의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허나 '괴도'가 아닌 '부유하나 은거 중인 괴짜 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말이죠.

스스로의 재능으로 운과 기회를 쟁취한 테레지아를, 신사는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했습니다.
그는 테레지아의 후견인을 자처하곤 암막 뒤에서 본격적으로 그녀를 지원하기 시작했죠.
신사와 테레지아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교류했습니다.
자연히 그녀도 신사의 비밀스러운 정체에 대해 조금씩 윤곽을 잡아갈 수 있었지요.

'신사'.
'괴도'.
그는 일명 '보석상'으로 알려진 유명한 도둑이자 마법사였어요.
보석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보석만을 탈취해가기에 '보석상'이란 별명이 붙었던 거죠.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힐지 언정 가해를 하진 않았어요. 보석을 훔친 후 홀연히 달아날 뿐이었죠.
'어째서 보석을 훔치는 거죠?"
테레지아가 목적을 물을 때면, 그는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어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오로지 '보석 마법'의 연구를 위해서다' 라고요.

신사는 자신이 고안한 독특한 마법을 발전시키는 데에 온 열정을 쏟고 있었어요.
'보석'에 마나를 담아 '마나의 원천'으로 만드는, 일명 '보석 마법'.
그 마나가 담긴 보석이 있으면, 마법적 재능이 적은 사람도 일정 수준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어요.
신체를 순간적으로 강화하고 잠깐 환영을 만들어내는 등, 유지 시간은 짧지만 활용도가 뛰어난 마법을 부릴 수 있었죠.
물론 마법의 장점만큼이나 치명적인 제약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모든 보석에 마나를 담을 수 없다.'는 점이었어요.
눈앞의 보석에 마나를 담아낼 수 있는지 여부는 직접 마나를 담아보기 전까진 알 수 없었거니와, 마나를 담는데 실패하면 멀쩡하던 보석마저 그 빛을 한순간에 잃은 채 바스러지고 말았죠.
오직 극소수의 잠재력을 가진 보석만이 보석 마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신사는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이 마법을 위해 괴도가 되어, 그나마 마법이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보석을 애타게 찾아다닌 거였지요.
참, 그는 훌륭한 마법사이기도 했지만, 검술 실력 또한 출중했어요.
체포망을 피해 오랜 세월 괴도로서 암약할 수 있던 것도, 모두 그의 탄탄한 검술과 보석 마법의 조화 덕분이었죠.

이렇듯 문무와 마법에 정통한 신사는, 테레지아의 곁에 머물며 괴도로서 마법사로서 쌓아왔던 수많은 지식과 경험을 알려주었습니다.
첫 만남에서 그녀가 레이피어를 들고 있던 걸 기념해 '레이피어 검술'을 알려주고, 또 자신의 전매특허인 '보석 마법'을 차근 전수해주었죠.
보통은 감정의 동요가 별로 없고 속내를 잘 말하지 않는 그였지만, 테레지아를 가르치는 순간만은 순수하게 기쁨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영리하고 재능 넘치는 테레지아는 언제나 열정적으로 가르침에 응해 지식을 빠르게 흡수했어요.
순진하게도 그의 웃는 얼굴을 좀 더 많이 보고 싶다, 오직 그 바람 하나만으로요.
그렇게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자, 그녀는 괴도로서의 신사를 완벽히 모사할 수 있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특별한 마나가 담긴 보석을 레이피어 손잡이에 장착해, 검술과 마법을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신사의 방식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게 되었죠.

테레지아는 모두의 찬사를 받는 여배우, 자신이 동경하는 이의 제자로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속에 살아갔고, 때로는 스승이자 때로는 연인 같은 신사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에게 더욱 깊게 얽혀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 자신에게 살아갈 힘을 준 은인.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가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순진한 테레지아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답니다.
그 무엇이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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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신사는 테레지아에게 넌지시 말했습니다.

"이제, 이 로드루반을 떠날 때가 됐어."
"뭐라고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테레지아는 그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항상 함께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토록 잔혹한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말해줘요, 이유가 뭐죠?"
"얼마 전, 마침내 그토록 찾아 헤메던 '완벽한 보석'을 발견했거든."
"…!"

신사는 특유의 묘한 표정으로 담담히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얼마 전, 보석 마법의 정수를 담아낼 만한 아주 완벽한 보석이 곧 로드루반의 시립 박물관에 전시될 거란 소식을 들었다고 했어요. 테레지아와 지내며 괴도 활동을 잠시 쉬고 있던 그는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활동을 재개하기로 결심했으며, 그렇게 보석을 손에 넣고 나면 이 로드루반을 떠나 보석 마법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 매진할 것이라고요.

"하지만…, 시립 박물관에는 로드루반 기사단이 상주하고 있어요. 그런 귀중한 보석은 밤낮으로 삼엄한 경비 아래에 놓일 거고요. 만일 잡히기라도 하면 당신은…."
"아무래도, 자비를 구하긴 어렵겠지."
"……."

테레지아는 신사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습니다.
자신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데, 어떻게 그가 저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죠.
그러나….

"그래서, 내게는 네가 필요해. 테레지아."
"내가…, 필요하다고요?"

이어지는 다음 말에 그녀의 가슴은 겉잡을 수 없이 두근대기 시작했습니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테레지아. 넌, 이 지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나와 닮은 존재야. 그래서 너와 헤어지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지. 이 일이 끝나면, 내 남은 삶을 너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신사는 그녀에게 작은 보석함을 내밀었습니다.
보석함을 받아 열자, 그 안엔 영롱하고도 오묘한 빛을 뿜어 내는 커다란 '옐로우 오팔'이 있었어요.

"내가 주는 선물이야. 가장 깨끗하게 정제된 마나가 담겨있지."
"… 내 레이피어에 딱 들어맞겠어요."

테레지아는 오팔을 레이피어에 장착하곤 가볍게 휘둘러 보았어요.
정말로 신사의 말처럼,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마나가 온몸에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죠.

"그 보석으로 '내 대역'이 되어줘. 내 계획의 일부가 되어 그 보석을 손에 넣고, 우리 함께 도시를 떠나 전 대륙을 여행하며 살아가자. 테레지아."

처음 만났던 바로 그 날처럼, 그는 나의 두 눈을 직시하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확신에 찬,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호수같은 깊은 두 눈.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쭉 흠모해왔던 신비로운 남자.
그를 따르면 어렵게 쌓아올린 커리어를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악의 경우엔 더는 무대에 설 수 없게 될지도 몰랐죠.
하지만, 자신의 짧은 커리어 따위는, 그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와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테레지아는 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테레지아가 될 수 없었을 테였죠.

"좋아요, 헥터. 당신이 되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줄게요."

테레지아는 그렇게 말하며 신사의 품에 안겼습니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그리고, 그와 함께 꾸미는 화려한 은퇴 무대, 앞으로 펼쳐질 아름다운 결말을 상상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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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기사들의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는 로드루반 시립 박물관.
만반의 준비를 마친 테레지아와 괴도는 근처의 어둠에 몸을 숨겼습니다.
괴도처럼 보이도록 실크 햇을 쓰고 길다란 망토를 두른 그녀는 자신의 레이피어를 정비하곤 괴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죠.

그가 원하는 '귀중한 보석'은 박물관의 특별 전시실에 있었습니다. 중앙 전시실보다 깊은 곳에 위치하는 데다 전시 물품이 물품이니 만큼 경비 또한 삼엄했죠.
괴도가 그녀에게 주문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자신이 특별 전시실로 접근하는 동안, 박물관의 중앙 홀에서 기사들의 이목을 끌어 발을 묶을 것.
그리고 신호를 받으면 자신이 미리 확보해둔 탈출구로 와 탈출을 도울 것.

탈출에 성공하고 나면, 괴도와 그녀는 미리 준비해둔 배를 타고 멀리 서방 대륙으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그림자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괴도는 나지막이 물었어요.

"두려운가? 테레지아."

허세 따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녀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익숙하게만 느껴질 뿐이었죠.
막이 오르기 직전의 암전. 관객의 긴장된 숨소리를 들으며 큐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두근거리는 마음.
공연이 시작되는 무대와 지금의 이곳은 전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전혀요."

그녀는 가볍게 답했습니다.
오늘 공연, 완벽하게 해내보이겠어. 그래서 그와 행복한 삶을 살겠어.

"스탠바이, 큐."

오랜 습관처럼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린 테레지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곤 어둠에 몸을 숨긴 뒤 괴도의 뒤를 따랐습니다.

"도둑이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급습에 당황한 경비와 기사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중앙의 홀로 모여들었습니다.
달빛이 내리는 거대한 유리창을 등지고 선 '괴도'는 과장되게 망토자락을 펄럭이며 사뿐히 계단 위에 섰어요.
그리곤 구름 떼 처럼 자신을 에워싸기 시작한 기사들을 향해 모자를 들어 인사했습니다.
신사가 늘 그러했듯이요.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여길 봉쇄해!"

전방에서 들려온 고함소리를 신호삼아 '괴도'는 허리 춤의 레이피어를 뽑아들었습니다.
손잡이를 쥔 손에 가볍게 힘을 주자, 영롱한 옐로우 오팔에선 노을 빛을 닮은 마나가 어른대기 시작했어요.

"저, 저 자는…, 설마…."
"'보석상'이다…! 지명수배범 '보석상'…!"
"보석을 노리고 온 게 틀림없어!"

정체를 알아본 몇몇 기사들의 웅성임이 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녀는 무리의 뒤편으로 재빨리 사라지는 익숙한 실루엣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자신이 행동을 개시해야 할 때라는 걸 직감한 '괴도'는,
잠시 후 망토를 휘날리며 허공으로 높이 도약했습니다.

삽시간에 혼란에 휩싸인 중앙 홀, 그 안에서 '괴도'는 마치 활강하듯 이곳저곳을 누볐습니다.
보석 마법의 힘을 빌어 날렵해진 몸놀림와 흐트러짐 없는 레이피어의 움직임에 적들은 우왕좌왕하며 드넓은 홀 안을 뛰어다닐 뿐이었죠.
마치 무대 위에서 홀로 모노드라마를 상연하듯, '괴도'를 연기하는 테레지아는 자신의 모든 기량을 뽐내 모든 이의 시선을 충실히 사로잡았습니다.
몰입과 절정이 안겨준 강렬한 카타르시스는 그녀를 소금사막에 도착했던 그 날의 기묘하고도 강렬한 해방감으로 이끌었죠.

그렇게 자신을 덮쳐오는 기사들을 하나 둘 따돌리며 순간을 즐기고 있는 그 때, 그녀에게 괴도의 신호가 도착했습니다.
보석의 마법진이 특이한 형태로 빛나기 시작했죠.

'때가 되었군.'

신호를 받은 그녀는 모자와 망토를 벗어 허공에 집어던져 여러 개의 환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곤,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 마법진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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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으로 갔다! 추격하라!"

등 뒤의 철신이 절그럭 대는 소리를 느끼며, 테레지아는 괴도가 기다릴 탈출구를 찾아헤멨습니다.
마법진은 그녀를 박물관의 깊은 곳으로 인도했죠.
그녀의 가슴은 사뭇 벅차올랐습니다.
오늘의 공연은, 그야말로 그녀의 연기 커리어중 최고였기 때문이죠.
마지막 은퇴 공연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모든 걸 쏟아부은 자신에게 그녀는 만족했습니다.
거기다 이제 곧 자신은, 마음에 품은 이와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 새 인생을 펼치게 될 예정이었어요.
지명수배자가 벌인 대담한 범죄의 공범자가 되었다는 사실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려요. 내가 갈게요. 헥터.'

가파른 숨을 삼키며, 그녀는 소중한 이의 이름을 되뇌였습니다.

마법진을 따라 그녀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천장 한 구석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가 작게 난 어느 미술품 전시관이었죠.
괴도가 침입한 지금, 이미 정상적인 출입구는 모두 봉쇄되어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장에 난 작은 출입구는 경비로부터 비교적 안전했어요.
이런 곳을 찾아내다니 역시 원조 괴도는 대단하구나. 생각하며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허나 괴도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호를 착각한 걸까? 아니면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걸까?
그녀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추격자들이 도착하기까진 아직 어느 정도의 시간이 있었고, 그의 탈출을 돕는 게 예정된 계획이었기에 그녀는 쉽사리 자리를 뜨기보다는 그가 도착하길 기다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방이 막힌 공간이 만들어내는 정적 속에서, 아까운 시간이 서서히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이제 조금씩 포위망이 좁혀오는 걸 느낀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우선은 안전을 위해 먼저 탈출 후 천장 쪽에 대기하고 있다가, 그가 도착하면 위에서 돕기로 마음먹었죠.
그녀는 레이피어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주변의 사물을 발판 삼아 도약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분명히 몸에 흐르는 마나가 느껴지는데도 도약은 커녕 발을 움직일 수 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더 강력한 마나가 지면에서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발이 묶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어, 어째서지? 대체 이 마나는….'

그때였습니다. 그녀가 당황한 찰나를 틈타 추격대가 전시관 안에 일시에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전열을 이루어 서서히 그녀를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안돼, 여기서 잡히면 그가…."

패닉에 빠진 그녀는 재빨리 마법을 시전해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시간이 갈 수록 발을 묶어둔 마나는 오히려 견고해졌습니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테레지아는 기사들을 향해 레이피어를 겨누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들을 벨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살고자 무고한 사람의 피를 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마지막 희망은 이제 괴도, 신사 뿐이었습니다.
구세주처럼 그가 나타나 그녀를 이 구렁텅이에서 꺼내주길, 테레지아는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테레지아의 희망은, 정면에 있는 창 너머를 보는 순간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테레지아가 사랑하던 남자.
신사는 이미 탈출에 성공해 창밖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평소처럼 아주 담담하고 묘한 표정으로 안의 상황을 지켜보았죠.
그의 손끝은 테레지아의 발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녀의 움직임을 억누르는 듯한 동작으로요.
그러다 문득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깨닫자,
괴도는 손가락을 접어 올려 서서히 입술에 가져다댔습니다.

쉿.

그 순간 테레지아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허상이었다는 사실과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요.

절망에 빠진 테레지아는 일말의 저항 의지마저 모두 잃고, 기사들에게 자신을 맡겼습니다.
포승줄에 묶인 그녀의 얼굴 위론 배신과 증오의 눈물이 흘러내렸죠.
가엾은 그녀가 연행되는 과정 전부를, 창 너머의 실루엣은 그 자리에 서서 오래토록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를 태운 호송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며칠 뒤, 조사를 마친 테레지아는 다시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마저 조사가 필요한 부분은 있으나, 대부분의 혐의는 무죄라는 결론이 내려졌어요.
약간의 기물파손을 빼곤 누구에게도 상해를 입히지 않았고, 박물관에서 사라진 물건도 그녀에게선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애초에 그녀가 범죄에 가담할 만한 명확한 동기도 없었고요.
유명 여배우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는 그녀가 커리어를 포기하면서까지 범죄에 가담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무엇보다 보석상은 마법사였습니다.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고 세뇌하는 것쯤은 마법사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지요.
그녀 또한 그날 우연한 마법의 희생양이 되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계하게 괴도로부터 조종당한 것이었습니다.
라고, 테레지아는 '가련한 여인'을 연기해 커다란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이전과는 또 한번 달라졌습니다.
인기 여배우가 악독한 지명수배범의 공범자였다는 사실은 이미 세간의 화젯거리였습니다.
자극적인 소문과 스캔들. 어딜가나 온통 테레지아와 괴도 '보석상'의 이야기 뿐이었어요.
한동안 쏟아지는 시선과 몰려드는 인파로 거리를 걷기 힘들 지경이었죠.
거기다 그녀에게만 의지하던 가족들, 특히 부모님 또한 그녀가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괄괄 날뛰었어요. 처음부터 지킬 명예가 있었다는 것처럼요. 그들은 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긴 커녕, 사람들 편에서서 그녀를 손가락질 했습니다.
호기심과 동정심, 비난과 찬사가 뒤섞인 나날들이 연속되는 가운데, 홀로 남겨진 그녀는 신사를 대신해 묵묵히 죄를 감당했습니다.

다만 완전히 나쁜 상황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괴도의 연인' 이라는 매혹적인 호칭은 테레지아의 인기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렸고, 그녀를 찾는 사람들은 오히려 전보다 늘게 되었거든요.
어느덧 그녀를 옹호하는 여론이 훨씬 우세해지고 곧 스캔들과 뜬소문도 서서히 잊혀졌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보석상은 이미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고 하더군요. 그가 박물관에서 훔쳐낸 '귀중한 보석'과 함께.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물었어요.
보석상의 행방, 소문의 진위 여부 등 소위 '진실'을요.
하지만 누구보다 진실이 알고 싶은 건 바로 그녀, 테레지아였어요.
쉽사리 아물지 않는 지독한 배신의 상처, 머릿 속을 헤집고 다니는 수많은 '왜?'는 매순간 그녀를 갈기 갈기 찢기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어요. 순진해빠진 자신을 탓하고 떠나간 신사를 원망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의 바닥을 오갔죠.
밝고 상냥했던 그녀는 점차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성격으로 변해갔습니다.
매일 밤 그녀는 신사의 꿈을 꾸었어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감정 없는 눈빛에 시달리며 반복되는 악몽을요.
아무리 연기에 매진해도, 술로 기억을 덮어보려 애를 써도 늘 신사의 기억은 슬그머니 나타나 그녀를 괴롭혔어요.
싫든 좋든 그녀 안에는 '신사', '괴도'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거에요.
여러 추억과 그가 전해준 신비한 '마법'의 힘이요.
어차피 이용하고 버릴 심산이었으면서, 왜 그는 내게 애써 보석 마법을 가르친 걸까요?
왜 자신의 대역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마나가 담긴 보석을 준 걸까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녀는 배우의 길을 접고 '바운티 헌터'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답 없는 의문을 되풀이하며 무력하게 눈물 흘리고만 싶지 않았죠.
신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에게 남겨진 힘을 그 같은 범죄자와 협잡꾼을 처단하는 데 쓰기로 했습니다.
범죄자들을 뒤쫓다 보면, 언제 어디선가 다시 그와 조우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순진했던 아가씨, 배우 '테레지아'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바운티 헌터 '테사'가 되어, 괴도를 벌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신사를 만나길 고대하며.
마음 속 수많은 의문을 묻고, 그의 보석 마법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길 기대하면서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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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이야기를 끝내고, 여자는 곁에 있던 남자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는, 지루한 내색없이 지금껏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때? 내 이야기. 재미있었어?"
"…흥미롭더군."
"그거 다행이네. 사정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관객을 즐겁게 하는 건 여전히 기쁘거든."

남은 맥주를 들이키는 남자를 보며,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 로체스트에 떠돈다는 신비한 보석. 너는 그걸 보석 마법의 산물인 '마나가 담긴 보석'이라고 추측하는 거군."
"그래, 맞아. 여러 정황을 봤을 때 가능성은 충분하지. 아직까지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더 조사를 하면 알게 될 거야."

어느새 비어버린 잔을 보며 여자는 넌지시 물었다.

"넌 그의 의도가 뭐라고 생각해?"
"…글쎄. 범죄자의 속을 알 길은 없지. 다만, 그자가 널 여전히 지켜보고 싶어하는 건 확실해 보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 결국 그자는 네게 남긴 보석을 끝까지 회수하지 않았으니까."
"범죄자의 심리에 대해 좀 아시나 봐?"
"…그저, 직감일 뿐이다."

그녀와 남자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괴도, 마나가 담긴 보석에 대한 추측, 그리고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들을.
남자는 경계심 많고 말수가 적은 자였지만 어떤 마음에서 인지 자신의 사연 일부를 여자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전직 해결사로, 마족에게 연인을 잃고 난 이후 복수를 위해 로체스트 인근의 '콜헨'이라는 마을에서 용병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핵심을 꿰뚫어보는 눈과 뛰어난 직감을 가진 듯 했다.
괴도에 대해 이런 저런 추리를 내놓는 그의 옆얼굴을, 여자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와 괴도는 전혀 다른 인물이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만일 이 남자가 괴도의 또다른 페르소나라면 어떨까.
또 한번 나를 기만하기 위해 전혀 다른 인물로서 위장한 거라면.
아니면, 이 남자를 내 동료로 만들면 어떨까.
뛰어난 직감은 신기루를 쫓는 내게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어찌됐든, 그와 함께 있다면 앞으로의 일이 잘 풀릴 것 같군.
여자는 그렇게 직감했다.

남자와 헤어진 후, 그녀는 도시가 잘 들여다보이는 높은 곳에 올랐다.

비록 지금은 잠잠하지만, 괴도의 흔적은 분명 이 도시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자신를 도울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그녀의 삶에 등장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격한다면 괴도는 분명히 그녀의 눈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오래 전, 마법 같던 그 날처럼. 묘한 표정을 하고선.

"콜헨의 용병단이라 했던가…."
애정인지 증오인지 모를 감정을 가슴에 품은 채,
자신의 다음 행보를 생각하며, 그녀는 한동안 자리에 서서 도시의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글: 시트롬 / 그림: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