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Story vella

여인은 심심해 보였다. 아주.
여관 주인은 불안한 듯 그녀를 틈틈이 곁눈질하며 홀을 청소하고 있었다.
늦은 아침의 햇볕 사이로 먼지가 풀풀 날렸으나 창가 소파에 널브러진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급기야 영문 모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질 않나.
여관 주인은 점점 불안해졌고 그 불안만큼 빗자루질은 격해졌다.
그리하여 여관의 홀에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을꼬?
여관 주인은 몰래 한숨을 쉬며 여인이 여관에 들어오던 때를 떠올렸다.

이런 외진 바닷가 마을에는 여행객이 많지 않았다.
여관보다는 동네 사람들에게 술을 팔아 버는 돈이 훨씬 많았기에 여관 주인은 오랜만의 손님이 꽤 기꺼웠다.

"용병이오?"
"용병?"

눈빛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여관 주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주인장, 잘 들어. 나는 용병을 아주 혐오해."

그때 쫓아냈어야 했다.
엉겁결에 원래 가격보다 높게 부른 방값을 그녀가 선뜻 내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그것이 딱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그 일주일 동안 여관 주인은 평생 경험해온 사건 사고보다 더 많은 걸 경험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첫날은 거대한 마물의 시체를 마구간에 들여야 했다.
둘 곳이 없으니 꼭 좀 부탁하겠다는 여인의 간절한 눈빛과 묵직한 금화 주머니 앞에서 맘 약한 주인은 관대해질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마구간의 주민은 짐수레를 끄는 늙은 노새 한 마리뿐이라 자리는 남아돌았다.
그날 밤 주인은 하늘에서 금비가 내리는 꿈을 꿨고, 마구간의 노새는 마물이 살아나 자신을 물어뜯는 꿈을 꾸었다.

둘째 날 역시 처음 보는 마물의 시체였다.
첫날의 일로 금방 간덩이가 부은 주인은 둘째 날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날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 마물의 시체가 사실은 반시체였고, 하필이면 한밤중에 깨어났다는 것만 빼면.
따지고 보면 마구간의 노새가 꽤 맞는 꿈을 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유명한 예언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노새는 물어뜯긴 꼬리를 대가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그날도 금비가 내리는 꿈을 꾸던 주인은 여관을 뛰쳐나가다가 핏비를 맞았다.
잠을 깨운 것을 웃으며 사과하는 여인 앞에서 주인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을 두들겨 팬 것인지 두들겨 벤 것인지, 그 빛 하나 없는 그믐날 어째서 쌍칼 끝에서 뚝뚝 흐르는 핏방울만은 그렇게도 잘 보인 건지 주인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셋째 날은…….
무슨 짓을 하면 하루 만에 저주에 걸린 유물을 찾아올 수 있는 걸까?
여관 주인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었다.
근처에 그런 유적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니지, 그건가? 옆집 할머니가 간혹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해주던 옛날이야기에 그런 게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닐 땐 늘 세상이 멸망한다고 외치던 할머니였다.
주인은 진저리를 치다 피어오르는 먼지에 재치기를 했다.
시력은 좋아졌지만, 비염은 도지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일주일 전의 평화가 마치 몇 년 전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여인을 쫓아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봤다.
그리고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칼날을 갈고 있거나, 마물의 가죽을 벗기고 있거나, 불길한 기운을 띈 무언가를 열심히 닦고 있었다.
외모는 산도적이나 마음만큼은 여린 여관 주인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행위였다.

바닥은 닦을 만큼 닦았고 테이블도 모두 깨끗하다.
아직 더러운 곳은…….

여관 주인은 여인이 앉아있는 소파를 흘긋 쳐다보고선 한숨을 푹 쉬었다.
저기 가까이 갔다간 재수가 옴 붙을 것 같았다.
속으로만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여관 주인은 숙박부를 열었다.
아무리 봐도 숙박객은 단 한 명. 숙박부의 제일 아래에는 이제 지옥으로 남을 이름이 쓰여 있었다.

벨라.
다시는 이 이름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여관 주인은 자기 자신에게 맹세했다.


벨라는 심심했다.
이상해. 이상할 정도로 재미가 없어.
벨라가 중얼거렸다.
여관 주인이 들었다면 기겁했겠지만, 그는 다행히도 그녀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느낌이 꽤 좋은 마을이었다.
간단하게 말해 대박의 느낌이 왔었다.
그녀의 트레저헌터 인생에서 이 정도로 느낌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별 볼 일 없는 마을치고는 꽤 괜찮았다.
희귀한 마물도 두 마리나 잡았고, 잊힌 던전도 털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녀의 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하다못해 동네 아이들의 장난감과 애완동물 찾기 의뢰까지도 받았다.
장난감이 악령 들린 주술인형이고 애완동물이 그렘린의 새끼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감 대로라면 적어도 잊혀진 신물이나 정체를 숨긴 마수 정도는 되어줘야 했다.

살면서 그녀의 감이 틀렸던 적은 딱 한 번이었고, 그 한 번 탓에 지금까지 트레저헌터 일을 하며 떠돌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틀린다면, 그때처럼 엄청난 실패가 일어날 것인가?
어차피 한 번 밖에 없던 일이라 알 수 없었다.

정말 싫다.
벨라는 소파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멀리서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이 마을이 마음에 드는 점은 그것 딱 한 가지였다.
바닷가.
갈매기의 울음소리.
공기에 섞인 소금기.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평화로움…….
시간을 때우긴 나쁘지 않은 마을이었다.
어쩌면 지금 그녀에게 휴식이 필요해서 이런 곳으로 이끌렸는지 몰랐다.
그래. 때로는 참고 기다리는 것이 미덕일 수도 있다…….

"아, 대체 언제 나타나는 거냐고!"

참고로, 벨라는 참을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우연은 언제나.

"방 있습니까?"

그녀의 편이었다.

카운터 뒤에서 엉망이 된 여관주인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 벨라의 외침에 의자에서 떨어진 참이었다.
저 여인이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았다.
여관 주인은 밝게 웃으며,

"네, 있습니……?"

남자는 전형적인 방랑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흙먼지가 앉은 옷은 세월의 흔적이 약간 있었으나 꽤 좋은 물건인지 낡았다기보다 연륜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여기까진 그냥 기억에서 지나갈 여행자였다.
하지만 여관 주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여인이 나타난 이후로 평범한 것이 없다고.
남자는 여관 주인이 보기에도 놀랍도록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관 주인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잠시 의아해하던 남자는 여관 주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여자가 있었다.
사람을 착각한 건가?
처음에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곧 기시감을 느꼈다.

"어……."

남자는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이름을 내뱉었다.

"벨라?"

스르릉. 대답 대신 들려온 소리에 남자는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쌍칼을 빼 든 여자가 뒤쫓았다.


어째서 저게 여기에.
쫓기는 자와 쫓는 자는 같은 생각을 하며 내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던 남자의 눈 앞에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마음은 급한데 발이 모래에 푹푹 빠졌다.
남자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여자 역시 똑같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여자는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나는 듯 모래 위를 내달린다.
모래를 차오르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피할 곳은 없었다.
아니, 있다.
남자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적어도 저 거추장스러운 쌍칼을 들고서 따라 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예상대로 여자가 따라 들어오지 않고 해변에 서 있자, 곧 그 생각은 환희로 바뀌었다. 아주 잠시.
거센 파도가 그를 밀쳐버리던 순간까지는 그랬다.

다음 순간 남자는 모래사장 위에서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바닷물을 들이킨 코와 목구멍이 미친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 공기가 급했다.
급하게 숨을 들이키자 빠져나가던 바닷물이 다시 콧속으로 역류했다.
죽을 듯한 기침이 나왔다.

벨라는 남자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좀 살만해진 남자가 눈치를 보며 슬슬 기어가려고 하자 가차 없이 옆구리를 차버렸다.
남자가 옆구리를 움켜잡으며 뒹굴었다.
뼈! 뼈가 부러진 것 같아!

"무릎 꿇어."

네. 남자는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불쌍하고 잘생기게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쯧."
"살려줘!"

남자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살려줬잖아."

벨라가 바다 쪽을 손짓했다.

"바닷가 출신 앞에서 바다로 도망치다니 멍청이 아냐?"

남자는 반쯤 넋이 나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방금 죽을 뻔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벨라도 이해는 했다. 그녀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을 뿐.

"야. 너 나 기억하지? 날 납치했던 마을, 어딘지 기억해?"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잘못했어! 그때는 나도 어렸고 먹고 살기도 힘들었고 실적이 바닥이라 널 데려오지 않으면 용병단에서 내쫓는다고…….
그, 그래도 내 덕분에 살았잖아!"

벨라는 남자의 변명을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다. 덕분에 살았다니, 누가?

"덕분에 살았다는 거, 무슨 소리야?"

또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인다.

당시의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다.
마을 이름도, 위치도 몰랐다.
십여 년을 떠돌았으나 자신을 납치한 용병단도, 자신이 납치된 마을도 찾을 수 없었다.
재촉하고 싶었으나 하진 않았다.
그게 궁금해서 안달이 났다는 티를 내는 건 약점을 보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벨라는 태연한 척 팔짱을 꼈다.

"죽고 싶은 거면 말해. 언제든지 바다로 던져줄 테니까."
"아, 아니야 그게……. 몰랐어?"
"뭘?"
"그게……. 그 마을……."

남자는 자신이 할 말이 그의 목을 지켜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 불타버렸어. 몰살당했다고."
"뭐?"

벨라는 황망하게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벨라는 열 살이었다.
궁금한 것도 많았고 좋아하는 것도 많았다.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것도 좋아했고, 모래를 파헤쳐 반짝이는 조개와 조약돌을 줍는 것도 좋아했다.
그녀의 방 안 창가에는 가장 예쁜 전리품만을 모아놓은 유리병들이 있었다.
꽉 차면 새 유리병을 가져왔다.
전에 모아놓은 것 중 어느 것도 버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해가 좋은 날 유리병과 안의 산호와 조개와 조약돌이 반짝일 때면 언젠가는 이것을 비싸게 사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공상도 해보곤 했다.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용병과 트레저헌터였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그녀는 고를 수 없었다.
마치 그녀의 유리병에서 한 개를 고를 수 없는 것처럼.

마을에는 아주 가끔이지만, 여행자가 찾아오곤 했다.
그런 날은 온 마을 아이들이 여관으로 쓰이는 촌장 집으로 몰려가곤 했다.
대체로 쫓겨났지만 아주 가끔은 친절한 여행자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바닷가에 피워놓은 모닥불 앞에서 여행자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현자처럼 빛나곤 했다.
그 이야기 안에서 용병이나 트레저헌터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벨라는 귀를 유심히 기울였다.
한마디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세상을 여행하며 떠돈다는 용병과 트레저헌터는 벨라에게 있어 영웅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커서 용병이 될 거야!"
"언젠 트레저헌터가 된다며?"

건넛집 마리가 핀잔을 주었다.

"둘 다 하면 되지!"
"어떻게 둘 다 하니? 너 하나라도 할 수 있어?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으면서."

얄미운 기지배였다.
벨라는 너무 화가 나 숨을 몰아쉬었다.
마리의 할아버지가 근처 도시에서 잡화점을 하는 덕에 그녀는 몇 번인가 그 도시에 가본 적이 있었다.
반면, 벨라는 한 번도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도시로 나가도 친인척 한 명 없으니 묵을 장소를 구할 수도 없었거니와 벨라의 가족은 도시로 향하는 마차 삯을 낼 여력조차 없었다.
가난한 어민 가계에서 바닷가 마을이란 생계를 위한 터전이었다.
쉽게 마을을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분이 상한 벨라는 마리의 머리끄덩이를 잡는 대신 해안가의 작은 오두막을 찾았다.
이때만 해도 벨라는 꽤 참을성이 있는 아이였다.

“여! 오늘도 꼬마 아가씨가 왔구먼!”

그녀가 해변의 오두막에 얼굴을 비치자 사람들이 웃으며 그녀를 맞아주었다.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바닷가 모래 사장에 둘러앉아 류트의 현을 퉁기고 있었다.
십 년 가까이 텅 비어있던 오두막에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몰려와 살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여쯤 전이었다.

그 후로 조용했던 오두막에는 낮이고 밤이고 춤과 노래가 가득했다.
그녀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것을 알면 엄마는 크게 혼을 낼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래도 벨라는 이곳이 좋았다.

“그래. 오늘도 우리 용병단의 무용담을 들으러 왔느냐!”
“응!”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남자가 그녀를 반겼다.
남자의 얼굴에서는 어딘지 모를 험상궂음이 느껴졌지만, 신기하게도 그녀에겐 그것이 도리어 편하게 느껴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그녀가 난생 처음으로 보는 ‘용병’이기 때문일 터였다.

흉터가 있는 남자가 벨라를 오두막 가까이 있는 통나무 의자로 데려왔다.
그 모습을 보고 류트 연주자 앞에서 춤을 추던 남자아이 한 명이 춤추기를 멈추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서 와. 벨라.”

남자아이의 얼굴은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곱상한 인상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훤칠함이 드러나는 이목구비였다.
그는 이 용병단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였다.
짧은 금발을 애써 뒤로 넘긴 막내의 얼굴에는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이 적당히 섞인 우아함이 엿보였다.
막내가 벨라에게 다가와 머루 포도로 만든 음료를 건네주었다.
용병단에서는 막내였지만 그녀보다는 몇 살인가 나이가 많았다.

"나도 용병이 되고 싶어!"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는 항상 용병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그들의 자유로운 삶을 볼 때마다 벨라의 마음속에서 용병이 되고자 하는 열의가 한 층 더 들끓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음악과 춤을 즐기는 용병단이라는 이미지는 사실 용병에 대한 잘못된 첫인상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벨라가 그런 사정을 알 리도 만무했다.

용병단 사람들은 벨라의 선언을 들을 때마다 항상 껄껄거리며 웃었다.
조그만 아이가 강단이 넘친다며 비웃는 것이었다.
벨라는 사내들의 그런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언젠가 저들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 되어 혼쭐을 내주겠노라 다짐했다.
유일하게 용병단에서 막내 만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못할 것도 없지. 벨라. 넌 자질이 있어 보이는걸."

그 말에 벨라의 입이 귀에 걸렸다.
항상 자신을 인정해주는 건 막내뿐이었다.
그때, 한 거한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용병이 되고 싶다고? 그렇다면 빨리 결정해야겠는걸? 우린 곧 떠날 테니 말이다!"
"떠난……. 다고?"

거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손에 든 술병을 들고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냄새 나는 입가를 소매로 훔친 그는 막내를 보고 씨익 웃더니 다른 동료들 틈으로 돌아가 버렸다.

"떠난다니? 정말이야?"
"맞아. 우린 곧 떠나. 도시에서 우리 용병단 앞으로 큰 의뢰가 들어왔거든.”

막내가 자못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것이 과장 섞인 너스레에 불과하다는 것이 표정에 굉장히 알기 쉽게 드러났지만 벨라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도시로 가버리는구나. 하는 아쉬움 때문에 이미 기운이 쏙 빠져나간 후였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특별한 친구들만 불러서 비밀 파티를 열 생각이야."

막내가 파티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그 말에 침울해지려던 벨라의 귀가 그렘린의 귀처럼 쫑긋거렸다.
파티라니! 벨라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파티라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나마 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파티는 건넛집 마리가 도시에서 열린 파티를 다녀와서 자랑을 늘어놓을 때 머리를 있는 힘껏 쥐어 박아준 것이 전부였다.
그랬던 그녀가 처음으로 파티를 경험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 비밀 파티니까 아무한테도 이야기하면 안 돼."

막내의 말에 벨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오늘따라 해가 움직이질 않는 걸까?
해 질 무렵이 오기를 이렇게까지 기다린 것은 처음이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엄마도 모르게 마리도 모르게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벨라는 온종일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녀야만 했다.
행여라도 자신도 모르게 파티라는 말이 나올까 걱정이 되었다.
마침내 해가 마을 뒤편의 작은 동산 위에 걸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해 질 녘이었다.
벨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닷가 오두막을 향해 뛰쳐나갔다.

파티는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조촐했다.
언제나 들어왔던 류트의 선율과 노랫소리, 항상 보던 춤에 이어서 가미된 것이라고는 낮의 태양 대신 붉게 빛나는 모닥불이 전부였다.
파티에는 벨라 외에도 평소에 용병이 되고 싶다던 마을 아이들이 더러 보였다.
비밀 파티라더니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아이들을 아무나 불러 모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벨라.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오두막 근처를 서성이던 그녀 앞으로 막내가 나타났다.
그는 모닥불 쪽으로 다가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통나무 의자에 벨라를 앉혔다.
막내가 보여주고 싶다던 것은 허리춤의 쌍검인 모양이었다.
그가 스르릉 하고 쌍검을 꺼내 들었다. 초승달 모양을 본뜬 듯한 두 개의 검이 모닥불의 불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쌍검을 쥔 막내가 모닥불을 맴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이어졌다.
꽤 멋진 동작이었다.
하지만 벨라가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엉성해 보였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벨라는 모닥불을 피우기 위한 목재들 사이에서 마른 나뭇가지 두 개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막내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물 흐르는 듯한 동작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은 막내가 아닌 벨라에게로 옮겨갔다.
그녀의 몸동작은 마치 온몸으로 자유를 표현하는 듯했다.
물 흐르듯 불규칙하게 움직이면서도 반복되어 느껴지는 운율과 리듬이 보는 사람을 빠져들게 했다.
파티장의 모든 사람들(심지어 막내조차)이 점차 벨라의 춤에 빠져들었다.

한순간, 벨라가 모닥불을 향해 도약해 공중제비를 넘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모두의 숨이 턱하고 막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두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길을 코앞에 두고 정확한 자세로 착지했다.
그 모습에 터질 듯한 박수갈채가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하하. 한 방 먹었는걸?”

막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평생을 연습해 익힌 춤동작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따라 잡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우리는 오늘 밤 떠날 거야."

막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역시 네게는 재능이 있어. 벨라. 우리와 함께 용병이 되지 않을래?"

벨라는 당황했다.
막내의 손. 그것은 용병이 될 수 있는 편도 티켓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용병이란 꿈은 막내의 손만 잡으면 이뤄질 터였다.

하지만 벨라는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엄마를 두고 떠날 순 없어."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막내가 안타깝다는 듯이 웃었다.
모닥불 사이로 비친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웠다.

모닥불이 꺼질 무렵, 마을의 아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던 벨라 앞으로 막내가 찾아와 주먹밥 한 덩이를 내밀었다.

"자. 이거 먹어."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았다.

"난 괜찮아."
"그러지 말고 받아줘. 마지막 작별인사라고 생각하고."

그 말과 함께 막내는 막무가내로 벨라의 손에 주먹밥을 들려주었다.
돌이켜보면 그 말에 속아서는 안 되었다.

“그래. 알았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막내가 보는 앞에서 딱 한입만 먹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깨달았어야만 했다.
자신에게만 비밀스레 건네진 호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제 아쉽지만 작별 인사를 나눠야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후로도 단 한 번도 용병단과 작별인사를 나눌 수는 없었다.

데구루루.
그녀의 손안에서 작은 잇자국이 남은 주먹밥이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벨라의 의식도…….
어디론가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다음 순간, 그녀가 눈을 뜬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맞춰 바닥이 위아래로 진동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바닥에 가로 누인 그녀의 머리가 좌우로 격하게 흔들렸다.
머리가 두통으로 지끈거렸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온몸이 모래 속에 잠긴 것처럼 무거웠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데에도 온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가까스로 눈을 뜨자 그녀의 눈앞에는 바닥에 놓인 가스등 하나와 가스등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한 무리의 사내들이 들어왔다.

"새로 들여온 저 약초. 약발이 너무 잘 듣는 거 아닙니까?"
"저런 어린 애한테 쓰라고 만든 건 아닐 테니까....... 다음부터는 반 뿌리만 사용해도 되겠는걸."

가스 등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내들의 목소리였다.
아직 시야가 흐릿해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용병단원 중 얼굴에 상처가 있던 남자와 거한의 목소리였다.

"그나저나 저 정도 계집이면 비싸게 팔리겠어. 그때, 저 애가 칼춤을 추는 거 봤나?"
"이번에야말로 막내가 크게 한 건 했지! "
"하하. 별말씀을요. 원래 애들은 비밀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요."

막내의 목소리였다. 이야기를 듣자니 이들은 그녀를 어딘가 팔아넘길 생각인 듯했다.
용병단이라는 건 다 거짓말이었어!
그 무렵 대륙에서는 용병단을 사칭하고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인신매매하는 조직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어린 벨라의 가슴 속에 분노와 배신감이 차올랐다.
용병단이 되고 싶다는 꿈만 꾸지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무리를 향해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상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이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벨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억누르고 가능한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사내들의 목소리 뒤로 멀리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예상컨대 그녀는 짐마차에 실려 있었다.
벨라는 눈을 감고 반드시 기회는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때를 기다렸다.
감긴 눈꺼풀 위로도 가스 불빛이 아른거렸다.
사내들이 언급한 약초의 효과 탓인지 피로한 탓인지 이 불빛이 아른거릴 때마다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지금 잠이 들면 도망칠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될지도 몰랐다.
벨라는 잠과 싸우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힘껏 쥐었다.

잠들면 안 돼.
주먹 쥔 손바닥으로 그녀의 작은 손톱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고통이 그녀를 잠에서 깨웠다.

이윽고 짐마차가 목적지에 당도했다.
마차가 멈추자 단원들이 먼저 짐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막내. 우린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까. 들키지 않게 조심히 들고 와라.”
“들고 오다가 떨어뜨리지 말라고. 소중한 상품이니까. 크하하하."

사내들이 막내를 향해 명령만 남기고 발소리와 함께 점차 멀어져 갔다.

"하아. 언제까지 이런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는 건지."

막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혼자 남게 되자 아직 바닥에 누워있는 벨라를 안아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것이 벨라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응?”

한순간 눈을 뜬 벨라가 막내의 얼굴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막내의 턱에 망치로 가격한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그가 쓰러진 사이 마차에서 냉큼 뛰어내린 벨라는 사내들이 사라진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기절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막내가 욕지기와 함께 일어나 벨라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의 힘겨운 추격이 시작되었다.
벨라는 길도 모르면서 어두운 밤의 숲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약초의 독이 온몸에 퍼진 상태에서도 벨라는 놀랍게도 잘 뛰었다.
선천적으로 신체 능력이 남달랐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뒤따르는 막내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 또한 그녀를 놓치면 선배 단원들에게 죽는다는 생각으로 기를 쓰고 거리를 좁혀왔다.

달빛 아래 숲길을 얼마나 오래 달렸을까?
어느 순간 벨라는 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이 길 끝에는 결국 막다른 길이 나오리라는 막연한 느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숲길 옆으로 난 능선과도 같은 비탈로 가야 한다는 충동이 솟았다.
행여나 발을 잘못 디디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비탈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는 이미 이곳으로 가야만 막내를 따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벨라는 그 마음의 소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단과 함께 그녀는 방향을 꺾어 달빛이 비치는 비탈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막내가 헉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없었으리라.
비탈로 들어서자 달빛이 비치는 면적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내리막의 가속도까지 붙은 탓에 한 발 한 발을 신중하게 내딛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벨라는 정확하게 원하는 곳으로 발을 뻗어 나갔다. 성큼성큼.
더는 멈춘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내리막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쉬지 않고 달렸다.

내리막이 끝나고 평지에 발이 닿았을 때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숲길 사이에 숨겨진 작은 토굴이었다. 왜 이런 곳에 토굴이?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떠올랐지만 지친 그녀에게는 더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토굴 안으로 숨어들었다. 더는 자신을 쫓아오는 자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그녀의 의식을 따뜻하게 감쌌다. 토굴 벽면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에이 젠장맞을. 분명히 이 즈음인데."
"이것 참. 벌써 며칠째 허탕이람. 이제 슬슬 뭐라도 찾아야 한다고! 늦으면 위약금을 물어야 할 판이란 말일세."

토굴에도 태양 빛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벨라는 토굴 바깥에서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혹시 용병단이 벌써 여기까지.

"아니 이 사람아. 누가 그걸 모르나!"

꼬르륵.
상황이 이런 데도 배는 어김없이 고프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벨라는 춥고 졸리고 배가 고팠다.
배는 며칠을 곯은 것처럼 아우성이었고 밤새 내린 이슬로 온몸이 흠뻑 젖어 감기에 걸릴 지경이었다.
용병단이고 뭐고 한시라도 빨리 토굴의 한기를 벗어나 태양 볕을 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아무튼 오늘만큼은 수확 없이는 돌아갈 수 없네! 알겠지?”

토굴 밖의 두 사람이 용병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벨라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제 같은 일도 겪었는데 또 무슨 일이야 있겠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벨라는 토굴 밖으로 나섰다.

"먹을 것 좀 주시겠어요?"

숲속에서 난데없이 벨라의 얼굴을 떠오르자 토굴 밖의 두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벨라의 손에는 버터를 잔뜩 바른 빵이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의 여행자가 그녀에게 건네준 식량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한 나머지 하늘에 대고 기도를 하던 두 사람은 그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혹시 이 주변에 바닷가 마을이…….”

하지만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두 사람은 그녀보다 그녀가 어젯밤 묵은 토굴에 더 큰 흥미를 보였다.

"이보게. 혹시 여기가......."

토굴의 입구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 지더니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벨라를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토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곤 한참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벨라는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이 나눠준 식량을 먹으면서 오후의 햇볕을 만끽하기로 했다.
이미 얻고자 하는 것은 얻어낸 터라 두 사람이 언제 돌아오든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토굴 안에서 두 사람의 환호성이 들렸다.
토굴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의 손에는 자그마한 유물 그릇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여, 여기가 맞네. 이곳이 우리가 찾던 흔적일세!"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벨라를 복덩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왜 환호를 하는지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나쁜 일은 아닌 듯했다.

"바닷가 마을? 글쎄다……. 이 주변에는 산뿐이 없는데.”
“마을 이름도 모른다고? 그래선 알 수가 없을 거야. 바닷가 마을이란 것만으로는 대륙에만 마을이 수백 개 이상은 있을 테니까."

두 사람의 반응으로 보아 이미 바닷가 마을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버린 듯했다.

"어쩔 수 없지. 어찌 보면 우리도 네게 도움을 받은 셈이니 우리와 함께 가자꾸나."

벨라는 하는 수 없이 두 사람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두 사람은 고대 왕국의 유물을 발굴하기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트레저헌터였다.
자신이 꿈꾸던 용병에 환멸을 느낀 탓인지 두 사람이 트레저헌터라는 사실에도 벨라는 크게 기대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 벨라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새로운 능력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엔 여기로 가보면 어때요?"

그것은 이를테면 강력한 직감이었다.
벨라가 제안하는 길 끝에는 언제나 두 사람이 탄성을 지를만한 유물과 보물의 흔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거 꼬마 아가씨 덕분에 부자가 되겠는걸!"
"벨라 넌 아주 감이 좋아! 너라면 훌륭한 트레저헌터가 될 수 있겠어!"

그렇게 벨라는 별 기대 없이 트레저헌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향인 바닷가 마을이 대체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트레저헌터는 원체 돌아다니는 직업이니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여전히 고향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감이 이끄는 대로 바닷가 마을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그녀의 몸에서는 항상 바다의 향기가 날 정도였다.
그런데도 고향 마을은 당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감이 이끄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는 항상 그녀의 기대보다 더 큰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는 고대 왕국의 비밀이, 때로는 마법사들이 만든 사악한 던전이 있었다.
이제 그녀는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유독 태어나고 자란 해안가 마을만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일까?
오늘만큼은 그 이유를 들어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더 자세히 말해."
"네, 네가 그렇게 된 후에....... 그 마을에는 산적이 내려왔어."
"산적?"
"그래. 마을을 지켜주던 용병단이 사라졌다는 소문을 듣고....... 한몫 챙기려는 녀석들이."
"......그런 바보 같은 말을 믿을 것 같아?"

벨라가 다시 한번 쌍칼을 꺼내려고 하자 한때 용병단의 막내였던 남자는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며 비명을 질렀다.

“저, 정말이야! 제발 믿어줘! 우리가 점 찍어 놨던 아이들도....... 마을 사람들도....... 다 죽었어. 그러니까 난 네 목숨을 구한 셈이라고! 제발 살려줘!"

벨라는 뻔뻔한 소리를 지껄이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살려주는 대신 그 마을로 나를 데려가 줘야겠어."



여관 주인은 이 악몽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카운터를 지켰다.
한쪽 손에는 두 사람이 외출한 사이, 신전에서 받아온 작은 여신상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 아침에 여관을 뛰쳐나갔던 여인과 남자가 나란히 돌아와서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 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여인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눈치가 가득해 보였지만 그런 낌새가 보일 때마다 여인은 칼을 빼 들고 남자의 등을 쿡쿡 찔렀다.

“도망갈 생각 마!”

여인이 소리칠 때마다 여관 주인은 며칠간 심약해진 마음을 가다듬고 여신상을 마법의 램프처럼 비비며 마음속으로 여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지금이라도 마을 경비대로 달려가서 여인을 신고해야 할까.
여관 주인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여인의 남은 한쪽 칼날이 자신을 겨누게 될 것을 생각하니 오금이 굳은 것처럼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의 소동이 끝나고 여인과 남자는 마을 입구에서 마차를 잡아타고는 마을을 떠났다.
여관 밖으로 배웅 아닌 배웅을 나와 광경을 지켜보던 여관 주인은 마구간의 노새와 함께 마차가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마침내 마차의 그림자가 능선 너머로 사라지자 모든 것이 끝난 것을 감사하며 두 사람(정확히는 한 사람과 노새 한 마리)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남자가 데려다준 곳.
그곳은 벨라의 고향 마을이 있던 '터'였다.

마을의 모든 것은 폐허가 되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목재로 된 건물과 시설들은 모두 풍화되어 사라지고 석재로 된 건물의 터와 몇몇 기둥이 남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단지 해안선만이 어린 시절과 다름없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난....... 가봐도 되지?"

남자의 물음에 벨라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남자는 한참 동안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이번에는 남자를 뒤쫓을 이유가 없었다.


한평생 고향 마을을 찾아 떠돌아다녀 도착한 곳이 이곳 폐허였다.
어쩐지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자. 바라던 목적은 충분히 이뤘고. 이제 뭘 할까?

벨라의 머릿속에 떠오른 고민은 그것뿐이었다.
트레저헌터는 이제 질릴 만큼 해 봤고. 어디 보자. 용병?
고민 끝에 떠오른 대답은 어째선지 용병이었다.
그렇게 증오하던 용병을? 왜 이제 와서?

‘난 커서 용병이 될 거야!’
‘언젠 트레저헌터가 된다며?’

언젠가 나눴던 어린 시절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뭐라고 했더라?

“……그럼 둘 다 하면 되지.”

그래. 한 번 마음 먹었던 걸 해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세상에는 자신을 납치했던 용병단처럼 쓰레기 같은 용병단도 있겠지만 그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처음부터 최고의 용병단을 찾아서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감만큼은 좋으니까.

글 : 흐양, 칼미슈 / 그림 : kingseo, jin